2016년 10월호

긴급특집 | 김정은, 공포를 쏘아 올리다

“한·미 어떤 대비책도 무용지물”

北 핵·미사일 전략, ‘전쟁억제’에서 ‘실전승리’로

  • 황일도 | 화정평화재단 연구위원, 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6-09-22 16: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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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사일 퍼레이드’ 8개월…핵실험으로 마무리
    • 부산항 등 미군 증원 루트 핵타격 노린다
    • ICBM에 민감한 美, SLBM 위협엔 한국과 온도차
    • 北, ‘공포의 균형 속에 체제 영속’ 선언한 셈
    화룡점정(畵龍點睛). 9월 9일 북한이 단행한 5차 핵실험의 성격을 이보다 더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1월 6일 4차 핵실험부터 이날의 5차 핵실험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올해 들어 감행한 핵·미사일·로켓 실험 횟수는 21회에 달한다.

    반복되는 소식에 둔감해지기 쉬운 사실 하나는 이 숫자가 명실공히 북한 정권 수립 이래 최대치라는 점. 그 8개월 남짓한 짧은 시간에 북한은 그간 베일에 가려 있던 ‘모든 실력’을 서슴없이 드러냈고, 5차 핵실험을 통해 마지막 연결고리마저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미국을 두려워했고, 핵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며, 이미 완성해둔 기술도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을 계산해가며 세상에 꺼내놓을 만큼 조심스러웠다.

    아들은 다르다. 핵 능력 보유를 확신하는 그는 겁이 없다. 모든 판돈을 한꺼번에 ‘올인’해 최종 목표를 향해 치닫는다. ‘미국의 개입을 막겠다’는 예전 전략 대신 ‘전쟁이 벌어져도 패배하지 않겠다’는 진화한 형태의 전략을 염두에 둔 채 베팅을 이어간다.

    2016년, 이렇게 달라진 평양의 계산은 어디서 왔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한꺼번에 꺼내 든 ‘비장의 카드’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시기 많아야 한 해 2~3회에 그친 탄도미사일 발사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권력을 물려받으면서 이내 상승곡선을 그렸다. 2011년 2회, 2012년 4회이던 실험이 2013년 6회로 늘었고, 2014년에는 무려 19회를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상반기에만 2회에 그쳐 상대적으로 소강상태였지만, 올 들어선 2월 7일 광명성 4호 발사부터 9월 5일 노동으로 추정되는 사거리 1000km 안팎의 미사일 3발 발사까지만 따져도 지난해 기록과 같다.

    여기에 두 차례 핵실험, 고체연료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엔진의 지상 연소실험, 핵탄두 모형과 대기권 재진입 장비 공개 등을 합하면, 2016년이 북한의 미사일 전략에서 ‘매우 특별한 한 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횟수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르다. 2014년의 발사 중 상당수는 구형 프로그(FROG)와 스커드 등 배치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미사일이 차지했다. 그나마 한동안 발사하지 않던 노동을 사거리 650㎞ 수준으로 날려 보낸 정도가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반면 올해의 경우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미사일 퍼레이드’의 시작인 2월 7일 광명성 4호 발사를 성공시켰고, 2000년대 중반 실전배치 후 한 차례도 발사하지 않은 무수단을 쏘아 올리는가 하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도 보란 듯이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더욱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올해 등장한 핵과 미사일 기술이 최근 완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앞서 설명했듯 무수단은 10여 년 전 만들어져 이동식 발사대차량(TEL)에 탑재돼 운용에 들어갔다는 게 그간 한국군 당국의 공식 설명이다. 8월 24일 날아 오른 SLBM 북극성은 북한이 최초로 공개한 최장사거리 1000㎞ 이상의 고체연료 미사일이지만, 이제까지는 그런 종류의 미사일이 개발되고 있다는 징후조차 파악된 바 없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만들기 위한 필수 과제지만 아직 평양이 보유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던 대기권 재진입 기술이나 탄두 소형화 기술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상당 수준 완성된 형태로 온 세계 앞에 선을 보였다. 그간의 예상보다 훨씬 앞선 북한의 핵·미사일 기술 수준에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형국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최근 평양은 그간 어둠 속에서 은밀히 개발과 생산을 진행해온 ‘비장의 카드’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분명 김정일 시대부터 준비돼온 기술과 능력임에 틀림없지만, 아버지는 이를 내놓고 드러내는 대신 지하 기지 깊숙한 곳에 묻어뒀다가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에 ‘정치적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을 때 하나씩 꺼내 들곤 했다. 워싱턴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수준을 ‘명백히 당면한 위협(clear and present danger)’이라고 판단할 경우 군사적 대응을 택할지 모른다는 조심성이 묻어나는 행보였다. 대화와 타협의 공간을 만들어 더 많은 시간을 벌기 위해 한 장, 한 장 카드를 내려놓는 방식이었다.

    아들은 달랐다. 단번에 승부를 보기 원한다. 이를테면 ‘올인’이다. 이제 핵이나 미사일과 관련해 평양이 공개하지 않은 유일한 ‘능력’은 미국 본토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ICBM KN-14 비행 실험 정도다.


    ‘핵무력 완성’의 길

    이것도 각 부분의 완성도는 이미 충분히 검증했다. 무수단 엔진을 여러 개 묶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1단과 2단 추진체, 북극성에서 확인된 단 분리와 자세제어 기술, 수차례의 고각 사격으로 신뢰도를 확보한 대기권 재진입 기술 등 핵심 과제는 모두 일정 수준에 올랐음을 과시했다. 이를 하나로 조립해 ‘실제로 날리기만 하면 되는 상태’다. 9월 9일 “새로 제작한 핵탄두의 위력 판정을 위한” 것이었다며 5차 핵실험을 성공시킴으로써 사실상 모든 연결고리를 마무리 지었다. 2016년의 남은 석 달 동안 평양의 사거리 1만㎞급 장거리 미사일이 남태평양 갈라파고스 섬 앞바다에 꽂힌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전개다.

    왜 하필 지금, 2016년인가. 미국 측 전문가들은 주로 한국과 미국의 국내 정치 캘린더에 주목한다. 워싱턴의 안보 전문 정보회사 스트랫포(STRATFOR)가 6월 초 발간한 보고서는 평양이 올해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와 2017년 한국 대통령선거라는 스케줄을 명확히 꿰뚫어보고 있으며, 이를 전후한 2년가량의 기간엔 두 나라 모두 북핵 문제에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것 같다고 분석한다. 핵·미사일 능력을 빠른 속도로 고도화해도 정권 교체기의 두 나라 정부가 근본적 대응을 택할 순 없으리라는 계산이 깔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반복되는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둘러싸고 국내 언론과 전문가들이 쏟아내는 분석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8월 24일 SLBM 발사 당시에는 한국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에 반발한 무력 도발이라는 분석이 줄을 이었다. 9월 5일 노동 미사일 발사 후에는 중국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겨냥한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2016년 한 해, 나아가 김정은 집권 이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해보면 평양은 이러한 외부 흐름과는 상관없이 ‘핵무력 완성’을 위해 제 갈 길을 가고 있을 따름이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사드 배치나 G20 정상회의 같은 주변 상황을 핑곗거리로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한층 설득력 있어 보인다.



    더 정교해진 ‘평양 방정식’

    일련의 미사일 능력 과시가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핵실험과 은하·광명성 장거리 로켓 발사를 앞뒤로 배치하는 이전 시기 행보는 ‘미국 본토 타격 능력’이라는 최종 목표에만 초점을 맞추고 기획된 움직임이다. 오로지 미국만을 노려보며 ‘워싱턴 불바다’를 외치는 도발적인 태도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최종 목표의 달성이 목전에 이른 지금, 평양의 방정식이 한층 정교해졌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단순히 미국을 위협해 핵공격을 억제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전쟁이 벌어져도 ‘패배하지 않는’ 방식으로 핵·미사일 전력을 활용하겠다는 태도가 강하게 묻어나는 것이다. 언뜻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러한 변화에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함의가 숨었다.

    개념 몇 가지를 정리해보자. 워싱턴 불바다를 외치며 위협함으로써 유사시 미국이 한반도 상황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시도는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응징 억제(deterrence by punishment)’에 해당한다.

    그러나 최근 눈에 띄는 시도는 그에 못지않게, 실제로 전쟁이 벌어진 후에도 한미연합군 전력이 의도한 효과를 못 내게 만들려는 ‘거부 억제(deterrence by denial)’에 가깝다. 궁극적으로는 미 본토를 노리지만 이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는 유사시 한반도 내 전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용도를 끊임없이 과시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계산하는 평양의 로드맵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가 SLBM이다.

    제2격(second strike) 능력. 북극성 발사 성공 이후 대부분의 언론 지면을 장식한 이 용어는 기존 강대국들이 SLBM을 활용해온 고전적인 방식을 가리킨다.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역시나 원자력추진 엔진으로 움직이는 잠수함에 장착해 추적이 불가능한 바닷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흘러 다니도록 만든다. 단 한 척의 잠수함에 적국의 영토 전체를 초토화할 핵전력을 실을 수 있다.

    내가 한꺼번에 핵을 퍼부어 지상에 있는 상대의 모든 핵무기를 박살낸다 해도, 바닷속에 머물던 상대의 잠수함은 격파할 수 없다. 미국과 소련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취약한 상태, 핵전쟁이 나면 모두가 죽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절대로 핵전쟁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역설을 명확하게 이해했다.


    ‘은밀성’으로 戰時 증원 억제

    북한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바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미국 본토를 ‘응징’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해 유사시 한반도 상황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길을 노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최종 목표에 비해 북한의 SLBM은 아직 한계가 뚜렷하다. 지금껏 미사일을 쏘아 올려온 2000t 안팎의 신포급 잠수함은 그 크기로 미뤄볼 때 장착 가능한 미사일이 단 한 발뿐이며, 그것도 잠수함 가운데 솟아오른 함교탑 부위에 억지로 끼워 넣은 형태에 가깝다. 더욱이 원자력추진 잠수함의 경우 핵폭탄과는 기술개발 경로가 완전히 다르고, 중간중간 부상해 산소를 공급받아야 하는 재래식 잠수함으로 미국 본토 인근 진출은 언감생심이다. 최소한 앞으로 10년은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라는 게 미국 측 판단이다.

    그러나 평양은 물러서지 않는다. 제2격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유사시 한반도 내 전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용도를 끊임없이 과시한다. 7월 22일 영국의 군사전문매체 ‘IHS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는 위성사진 분석 결과를 근거로 북한이 신포항에서 남쪽으로 2.25㎞ 떨어진 곳에 3000t급 중형 잠수함이 머무를 수 있는 새 기지를 건설 중이라고 밝혔다.

    SLBM이 무기체계로서 위력을 지니기 위한 최소 수준의 잠수함 규모가 통상 3000t급으로, 장착 가능한 미사일 수는 4발 안팎이다. 한미 양국이 동원 가능한 모든 위성 자산이 이 지역을 샅샅이 훑고 있음에도 북한이 건조 중인 3000t급 잠수함 실물이 확인된 바는 없지만,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이러한 흐름은 평양이 SLBM에 소형 핵탄두나 재래식 탄두를 탑재해 디젤 잠수함에 장착하는 전략을 현실화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한 후방 공격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전시(戰時) 증원을 어렵게 만들어 한미연합군 전력의 개입을 ‘거부’하겠다는 게 기본적인 목표다. 탑재 가능한 미사일의 수량이나 위력만 놓고 보면 기존 지대지 탄도미사일 체계보다 위력적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역시나 ‘은밀성’이라는 장점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김정일 시대의 북한은 응징 억제에 사활을 건 나라였다. 핵개발을 본격화하기 전에도, 인구 밀집 지역을 공격할 수 있는 최전방에 장사정포를 극단적으로 전진 배치함으로써 ‘서울 불바다’로 위협하는 것이 기본적인 패턴이었다. 소중한 장사정포 전력이 남측의 대응공격에 더 쉽게 노출된다는 점은 신경 쓰지 않았다. 민간 피해를 우려해 한미 양국이 전쟁을 결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만큼 생각이 단순했고, 군사력 구조는 기형적이었으며, 실제로는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사담 후세인의 선례

    그러나 핵을 가진 평양은 이제 계산이 다르다. 실제로 전쟁이 벌어진 뒤에도 핵심 군사시설에 치명타를 날려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다. 이제까지의 전략이 ‘최대한 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최근의 전략은 ‘전쟁이 벌어져도 패배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1차 걸프전에서 패배한 뒤에도 오랜 기간 권력을 유지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그런 선례를 남겼다. 막상 전쟁이 벌어져도 ‘김정은 체제’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미국의 개입을 억제하는 일 못지않게 실전능력(war-fighting capability)을 눈여겨보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핵과 미사일에 대한 북한의 사고방식이 이렇듯 변화하고 있음은 그 밖에도 여러 경로로 확인된다. 3월 10일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훈련을 보도하며 조선중앙TV는 이 훈련이 ‘해외침략무력이 투입되는 적 지역의 항구들을 타격하는 것으로 가상하여 목표지역의 설정된 고도에서 핵 전투부(탄두)를 폭발시키는 사격 방법’으로 실시됐다고 밝힌 바 있다. 응징억제 개념에 입각한 언급은 부지기수로 쏟아냈지만, 핵무기를 전시 증원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부 억제 용도로 사용할 것이라는 언급은 이 때가 처음이다. 핵의 실전 능력을 시사한 첫 번째 발언인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전쟁이 벌어져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대규모 핵타격을 가한다면 평양 역시 미국의 강력한 전략핵 보복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위력이 작은 전술핵으로 남측 후방 군사기지나 미군 전시 증원전력 통로를 타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미국이 평양에 대한 대규모 핵공격으로 응징할 경우 북한도 서울, 나아가 미 본토에 대한 핵 보복에 나설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를 감수하기 어려운 한미 양국은 공격당한 군사시설에 상응하는 북측 후방 군사기지에 전술핵 보복을 가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공산이 크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상정한 ‘제한 핵전쟁’의 기본 전개 방식이기도 하다.



    北이 부산항을 때리는 날

    이 때문에 대부분의 핵개발 국가는 초기에는 상대의 수도 등 민간 피해를 극대화할 수 있는 타깃을 주로 노리지만, 핵과 미사일 능력이 일정 궤도에 오른 뒤에는 군사시설 등을 타깃으로 하는 거부 억제로 초점을 옮기는 패턴을 보여왔다. 고위력 핵탄두와 ICBM에 집중하던 나라들이 10kt 내외 전술핵 개발에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다. 올해 봄 북한이 과시하느라 바빴던 무기체계 중 상당수가 이러한 거부 억제용 전력이라는 점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3월 2일과 21일, 29일 3차례 실시한 300㎜ 방사포 발사와 4월 1일 발사한 KN-06 지대공 요격미사일이 대표적이다.



    확전의 방아쇠를 손에 쥠으로써 전쟁이 터진 후에도 참혹한 패전은 피하겠다는 이러한 전략은 냉전 시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국가들이 채택한 유연 반응전략(flexible response strategy)을 흉내 낸 것에 가깝다. 주인공이 옛 소련에서 미국으로, 무대가 중부 유럽 평원지대에서 부산과 포항 등 남한의 항구로 바뀌었을 뿐 개념 자체는 동일하다. 미 본토를 타격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남한 항구는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는 ‘현재 수준의 북한 SLBM’은 이를 위해 가장 적합한 위협이다.

    가장 곤란한 대목은 핵과 미사일에 대한 최근 북한의 운용전략이 고스란히 한미 두 나라의 인식 차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아무리 500㎞를 날았다 해도 미국에는 여전히 ‘본토가 위협받으려면 상당한 관문이 남아 있는 미래의 일’일 뿐이다. 한 차례 시험발사도 진행된 적 없는 ICBM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SLBM을 ‘당면한 위협’으로 보는 관점은 워싱턴 조야를 막론하고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8월 24일 북극성 발사와 관련해 두 나라 전문가들의 분석에서 온도차가 느껴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위협 인식의 차이는 대응 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당장 국군은 해상감시용 조기경보레이더를 추가 배치하거나 이지스함에 탄도미사일 요격용 SM(스탠더드미사일)-3 미사일을 장착하는 방안을 거론했고, 이와 함께 원자력추진 잠수함 문제도 핫이슈로 떠올랐다.



    핵잠수함의 결정적 함정

    물 밖에서는 탐지가 어려운 잠수함의 특성상 북측 잠수함이 기지를 출항하는 바로 그 시점부터 우리 측 잠수함이 추격을 시작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오랜 기간 북측 기지 밖에서 은밀히 대기할 수 있는 원자력추진 잠수함이 필수라는 논리다.

    건조에 필요한 기술력과 우라늄 원료 확보 가능 여부 등 다양한 쟁점이 거론되고 있지만, 최근의 논의에는 한 가지 빠진 부분이 있다. 이 잠수함의 원자로가 기술적으로는 핵물질 추출·농축시설과 별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은 모든 협정 당사국들이 핵분열 물질의 출처와 최종 처리에 대해 신고하고 그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를 받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마다 감시카메라와 검측 장비를 설치해 IAEA에 데이터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반면 잠수함에 장착되는 원자로는 이러한 감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무인도에 은밀히 정박해 핵연료를 반출한다 해도 IAEA가 실시간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핵 비확산 리뷰(The Nonproliferation Review)’ 2001년 봄호에 실린 한 논문은 잠수함의 사용후연료가 어디로 가는지 추적할 감시 시스템이 없다고 지적하며 ‘NPT 체제의 틈새(NPT loophole)’라고 표현한 바 있다(‘신동아’ 2004년 3월호 ‘한국 핵잠수함 보유, 무엇이 문제인가’ 기사 참조).

    다시 미국의 눈으로 상황을 보자. 한국이 원자력추진 잠수함을 보유하면 핵연료는 국제사회의 감시망을 벗어나게 되고, 언제든 핵무기로 만들 수 있는 안정적인 핵물질 확보 루트가 생긴다는 게 기존 핵 보유국들의 ‘의심’이다. 그 어느 때보다 ‘독자 핵무장’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2016년의 한국이 원자력추진 잠수함을 갖겠다면 이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기가 더 어려워 보인다. 한국 국방부가 선뜻 ‘핵잠수함 추진’을 입에 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북한 SLBM 위협을 다급한 현안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와,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그에 못지않게 우려하는 미국은 상당한 인식의 간극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서로 위험한 상황 받아들여라”

    ‘실제 전쟁에서 써먹을 수 있는 핵전력’을 향한 평양의 욕망이 부과하는 난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조선중앙TV의 3월 언급대로 북한이 대한민국 상공에서 핵폭발을 일으킨다면 이는 한미연합군의 전자장비를 무력화하는 EMP(전자기펄스) 현상을 만들어낼 공산이 작지 않다.

    북한의 미사일 전력이 고도화함에 따라 한미 양국군은 요격체계를 통해 이를 저지하는 개념을 발달시키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들 체계엔 날아오는 미사일의 궤도를 추적, C4ISR(전술지휘통제체계) 시스템을 통해 실시간으로 요격미사일에 전달하는, 고도로 네트워크화한 방식이 채택됐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막기 위한 핵심 수단이 강화될수록 거꾸로 EMP 위협에 취약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한미 양국군의 주요 시스템은 이를 막을 수 있는 차폐 설비를 장착하고 있지만, 실제 전장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렇게 놓고 보면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이 꺼내 든 새로운 군사전략 사고방식은 이전에 비해 훨씬 위협적이며 또한 곤혹스럽다. 한미 양국군이 대응책을 내놓을 때마다 이를 우회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을 선보이는 패턴 역시 교묘하기 짝이 없다. 이미 보유한 미사일의 발사 각도를 조정하는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한국군은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추가로 요격체계를 구매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공격자산을 준비하는 일보다 방어자산을 구비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돈을 잡아먹는, 비대칭전력의 레버리지(leverage) 효과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협정(ABM)을 체결해 미사일 방어체계 개발을 포기해야 했던 이유가 다름 아닌 이 딜레마였다. 창과 방패의 끝없는 경쟁에 막대한 재원을 쏟아 붓느니, 차라리 맨몸으로 서로가 상대 핵무기에 취약한 채로 남는 편이 더 경제적이라고 결론을 낸 것이다.

    결국 2016년 가을의 평양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딱 한 줄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험한 상황을 받아들여라.’ 한미 양국군이 어떤 대비책을 내놓든 자신들의 핵과 미사일을 막아낼 방법은 없다고, 두 나라 전력이 북측을 일거에 박살낼 수 있던 시대는 끝났다고, 이제는 서로가 두려워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세리머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의 균형’ 위에서 김정은 체제는 영속을 구가하겠노라는 선언이다.

    심지어는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핵무장한 북한과의 불안한 동거’를 피할 수 없으리라는 묵시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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