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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마지막회〉

격렬한 당쟁과 불안 친자살해로 귀결

아버지 영조의 비극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격렬한 당쟁과 불안 친자살해로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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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대신 武

사춘기에 이르러 세자는 부왕의 기대에서 멀어져갔다. 세자는 문(文)이 아니라 무(武)를 숭상했다. 성리학을 통해서만 군주의 덕이 길러진다고 확신한 영조로선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문인 가문에서 성장한 세자빈 혜경궁 홍씨에게도 뜻밖의 상황이 전개된 셈이었다. 혜경궁은 ‘한중록(閑中錄)’에서 세자의 출중한 무예 솜씨를 단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다.

반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아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예를 큰 자랑으로 여겼다. ‘현륭원지’에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대 최고의 군사전문가라는 사실을 누누이 설명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펴내기도 했다.

영조는 세자의 취향을 무시하고 성리학 공부에 집착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영조는 줄곧 출생의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모 숙빈은 무수리, 곧 궁녀의 하인이었다고 전한다. 숙종의 여러 후궁 중에서도 숙빈은 신분이 가장 미천했다.

설상가상으로 영조의 친부는 숙종이 아니라 노론의 책략가 김춘택이라는 풍문이 파다했다. 김춘택은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로 인경왕후(1661~1680)의 친정 조카다. 그는 궁중과의 인연을 이용해 1694년 폐비 민씨(인현왕후·1667~1701)를 복위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궁중에 뇌물을 썼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일로 김춘택은 관헌에 체포돼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갑술환국(1694)이 일어나는 바람에 반대파인 남인이 축출되고 노론이 재집권했다. 김춘택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됐다. 그와 당파가 같은 노론들은 김춘택을 재집권의 공로자로 칭송했다. 반대파인 소론과 남인들은 그를 음모와 술수의 장본인이라며 성토했다. 그런 가운데 김춘택이 궁중을 드나들며 몰래 궁녀와 관계를 맺어 영조를 낳았다는 악성 루머가 퍼졌다. 김춘택이 영조의 친부라는 소문은 영조에게 큰 짐이 됐다.





집착과 불안

영조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도 억측이 무성했다. 1724년, 그의 이복형 경종은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그 바람에 ‘세제(世弟)’인 영조가 즉위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영조가 간장게장을 들여보내 경종을 독살했다고들 했다. 경종은 평소 간장게장을 좋아했다는데, 하필 이복동생(영조)이 선물한 게장을 먹고 급사했다는 것이다. 역사 기록으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다. 사망 당시 경종은 37세에 불과했다. 왕은 본래 몸이 약했으나 워낙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했기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억측이 생겨났다.    

경종 독살설과 김춘택 친부설을 18세기의 소론과 남인들은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했다. 그로 말미암아 1728년(영조 4) 남부지방에서 이른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이 진압되자 영조는 탕평책을 펼쳐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영조는 왕자 시절부터 노론의 신세를 많이 졌다. 즉위 후엔 더욱 노론에 기대어 정권을 유지했다. 그 때문에 그의 탕평책은 사실상 노론 중심의 권력 재분배를 의미했다.

영조는 심리적으로도 불안했다. 매사에 의심이 많았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다. 피해의식에 시달린 걸까. 왕은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과시하며 신하들에게 존경과 굴복을 강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도 자신처럼 탁월한 학자 군주가 되길 바랐다.

더 큰 문제는 영조가 자신의 심적 불안을 세자에게 투사(投射)했다는 사실이다. 세자의 약점을 사사건건 들춰내 사정없이 매도했다. 과거에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괴롭힌 것보다 더욱 심했다. 심약한 선조도 그랬지만, 영조는 거듭된 선위(禪位,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줌) 소동을 일으켜 세자와 대신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영조는 10년도 넘게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강요했지만, 세자에게 아무런 실권도 주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의 무능을 줄곧 나무랐고, 혹시나 세자와 대신들이 반역을 꾀하지나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탈과 정신병

격렬한 당쟁과 불안 친자살해로 귀결

경기 화성시 태안읍 화산 자락에 터 잡은 사도세자 묘(융릉).

일찍이 맹자는 아무리 가까운 부자간이라도 ‘책선(責善)’, 즉 좋은 일로 상대를 권면하는 것을 삼가라고 말했다. “부자간의 책선은 가장 큰 은혜, 곧 부자간의 사랑을 망가뜨린다(父子責善 賊恩之大者).” 김장생·김집 부자의 예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버지는 웬만한 일엔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편이 좋다.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사도세자는 1752년경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태 뒤엔 심적 고통이 육체적 질환으로 전이될 정도였다. 홍봉한은 사위의 요청에 따라 약을 지어 보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훗날 정조는 아버지의 정신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현륭원지’에서 “양궁(兩宮,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에 금이 간 것은 과거 경종의 측근이던 (…) 궁녀들의 이간질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정조는 궁정 내부의 암투를 강조하며 역사적 진실을 외면했다.

사실은 그와 달랐다.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은 점점 악화됐다. 일단 발작하면 통제 불가능 상태에 빠지곤 했다. ‘한중록’엔 그런 사실이 역력히 기록돼 있다. 영조도 세자를 폐위하면서 생모 영빈의 말을 빌려, 세자가 100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세자는 1761년(영조 37) 1월, 자신이 사랑하던 후궁 경빈 박씨도 살해했다. 혜경궁 홍씨나 생모 영빈의 목숨도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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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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