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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미술관

맥주재벌 父子의 예술사랑 결실

칼스버그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맥주재벌 父子의 예술사랑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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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스버그는 1847년 J. C. 야콥슨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시작한 맥주회사다.
  • 아들 카를 야콥슨은 기업 경영에서 아버지와 극심한 대립 끝에 다른 회사를 차렸다.
  • 하지만 부자(父子)는 예술 사랑에선 궁합이 잘 맞았다.
  • 아버지는 재단을 만들어 미술품 수집에 많은 돈을 썼고, 아들의 예술품 수집 열정은 아버지를 넘어섰다.
유럽의 도시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도 도시 중앙에 철도역이 있다. 그 옆에 170년 역사의 티볼리 공원이 있고, 맞은편에 궁궐 같은 칼스버그 미술관(뉴 칼스버그 글립토테크 미술관, Ny Carlsberg Glyptotek)이 있다. 모두 중앙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칼스버그 미술관은 칼스버그 맥주 가문에서 만들었다. 창업자 J. C. 야콥슨(1811~1887)과 아들 카를 야콥슨(1842~1914)이 미술관 설립의 주역이다. 칼 야콥슨은 당대 최고의 미술품 수집광이었다. 고대 조각과 골동품에 관심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회화 작품 수집에도 열성적이었다.

칼스버그 미술관은 1만 점 이상의 훌륭한 작품을 소장한 덴마크 최고의 미술관이고 코펜하겐의 자존심이다. 덴마크도 예술을 사랑하고 지킬 줄 아는 문화 선진국임을 입증하는 곳으로, 1년에 관람객 40여만 명이 다녀간다.

이 미술관은 ‘글립토테크(Glyptotek)’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각 미술관으로 시작했다. 글립토테크는 독일 뮌헨에 있는 조각미술관의 이름이다.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1세(1786~1868)가 그리스, 로마 시대 조각품을 전시하기 위해 1816년부터 15년간 지은 곳으로 웅장하고 아름답다.





사과를 든 다비드?

칼스버그 미술관도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과 18세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유럽 조각 작품으로 가득하다. 로댕의 조각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했을 뿐 아니라 드가의 청동 조각도 갖고 있다. 수많은 전시실은 조각 미술관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많은 조각 작품을 전시한다.

조각뿐만이 아니다. 회화 소장품도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작품 등을 대량 소장하고 있다. 고갱의 작품만 해도 40점이 넘는다. 1800년대 초부터 50여 년간을 ‘덴마크 예술의 황금기’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작품도 이곳에 가장 많다.

 칼스버그 미술관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각 작품 하나하나를 다 감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지루할 수도 있다. 너무 많고, 서로 비슷비슷하다. 미술관은 본래 그런 곳이다. 공부하고 가면 재미있지만 모르고 가면 그보다 더 지루할 수 없다. 고대 조각 전시장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도 아주 예쁜 조각상을 보면 눈길이 간다. 인파로 넘치는 길거리에서도 빼어난 미인이 지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듯이. ‘사과를 들고 있는 파리스 왕자(Prince Paris with Apple)’는 그런 작품이다. 19세기 덴마크 조각가 비센(Herman Wilhelm Bissen·1798~1868)의 작품인데 너무나 예쁘다. 피렌체의 다비드 조각상을 보는 것 같다. 다비드 상처럼 완전 누드이지만 오른손에 사과를 들고 있다. 몸매는 완벽한 균형미를 갖췄다.

조각과 달리 그림으로는 남자 누드를 찾아보기 어렵다. 여자 누드화는 오래전부터 많았지만 남자 누드화는 드물다. 더구나 정면 누드는 거의 없다. 남자의 누드도 참 아름다운데 왜 그리지 않을까. 그런데 조각상은 남자 누드가 부지기수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만들어진 정면 누드상이 많다. 비센의 남자 조각상도 그런 조각이다.

‘파리스 왕자’는 전설 속의 인물로 ‘알렉산더’로도 알려져 있다. 비센은 덴마크의 전설적 예술가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1768~1844)의 제자다. 토르발센의 영향으로 비센은 낭만주의에서 신고전주의로 바뀌었다가 나중에는 사실주의 작가가 됐다. 1834년부터 코펜하겐의 왕립예술학교 교수가 됐으며 그의 작품은 덴마크 곳곳에 설치돼 있다.



토르발센에 매혹

미술관 설립의 주역 카를 야콥슨은 조각에 빠진사람이다. 덴마크의 전설적인 조각가 토르발센에 매료되면서부터다. 아버지의 저택에 있는 토르발센의 작품을 보며 카를 야콥슨은 그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토르발센은 고국을 50여 년간 떠나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지만 덴마크인들에게 영웅으로 칭송받는 작가다. 그의 작품은 지금 유럽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고, 코펜하겐시 한복판에는 그의 개인 미술관이 정성스럽게 조성돼 있다.

조각에 빠져들면 고대 조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카를 야콥슨이 엄청난 양의 고대 조각품을 수집하면서 칼스버그 미술관은 고대 조각의 성지가 됐다. 대리석 조각, 테라코타 조각 등 그리스 로마 조각품뿐만 아니라 에트루리아(에트루리아인이 거주해 나라를 세운 고대 이탈리아의 지명) 조각품도 소장했다. 기원전 6500년에서 기원후 650년까지 무려 7150년에 걸친 중동 작품도 있다.

고대 이집트 작품도 1900점 이상 소장했는데,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후 1세기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카를 야콥슨은 1882년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카이로 박물관에서 작품을 구입한 것을 시작으로 이집트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칼스버그 맥주그룹은 세계 4위의 다국적 맥주회사다. 전 세계에 수많은 다국적 기업을 거느리면서 다양한 브랜드의 맥주를 생산한다. 러시아에서는 칼스버그 맥주가 시장점유율 40%에 달하며 한국도 칼스버그 맥주를 수입한다.



칼스버그는 1847년 J. C. 야콥슨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시작한 맥주회사다. 아들 카를도 아버지 회사에서 일했지만 1882년 독립해 맥주회사를 따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창업자, 아들은 승계자지만 둘은 경영을 두고 의견 대립이 잦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Carl)을 따 회사 이름(Carlsberg)을 지었을 정도로 아들을 사랑했지만 사업가적으로 충돌했다. 이들의 갈등은 1997년 덴마크에서 TV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아들이 만든 회사는 Ny(New) Carlsberg, 아버지 회사는 Gammel(Old) Carlsberg로 불렀다. 아버지는 죽기 직전 아들과 화해했지만 회사는 아버지가 만든 칼스버그 재단으로 넘겨졌다. 따로 운영되던 두 회사는 나중에 합해졌고 이후 다른 맥주회사들과 인수·합병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의 칼스버그 맥주그룹으로 발전했다. 아버지가 처음 운영한 코펜하겐 공장은 맥주 박물관으로 만들어져 인기 있는 관광코스가 됐다.



‘수집 중독’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지만 사업 수완이 탁월했다. 그때까지 맥주는 우리의 막걸리처럼 가정에서 소량으로 만들어 먹는 술이었는데, 그는 맥주가 과학적인 방법으로 산업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1847년 맥주회사를 차려 대성공을 거뒀다. 나중에 정치에도 진출해 국회의원을 지냈다. 1876년 칼스버그 재단을 만들어 과학 연구에도 많은 지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과 미술품 수집에도 큰돈을 썼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예술품 수집 열정은 아버지를 능가했다. 특히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은 ‘수집 중독’으로 불릴 만큼 많이 모았다. 20세기 초 이집트의 고대 유적 발굴을 뉴칼스버그 재단이 후원하면서 많은 발굴품이 칼스버그 미술관으로 오게 됐다. 미술계에서는 카를 야콥슨의 아내도 남편만큼이나 유명했다. 부부가 모두 미술품에 조예가 깊고 미술 시장의 큰손이었다.

야콥슨의 고대 조각 수집은 독일인 고고학자 볼프강 헬비그의 도움을 받아 이뤄졌다. 헬비그는 본 대학에서 고고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이면서 미술품 딜러였다. 1887년부터 로마에 거주하면서 25년 이상 칼스버그 미술관을 위해 미술품 브로커 노릇을 했는데 그의 손을 거쳐 들어온 작품은 950여 점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와 아들의 수집품은 칼스버그 미술관의 중요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아들은 “접근성이 좋은 장소에 미술관을 만들라”는 조건을 내걸면서 1888년 수집품을 모두 국가와 코펜하겐 시에 기증했다. 시 정부가 현재의 위치를 제안했을 때 카를 야콥슨은 처음에는 반대했다지만 우여곡절 끝에 타협이 이뤄져 1897년 새 미술관이 개관했다.

이후 카를 야콥슨은 자선사업에도 많은 돈을 썼다. 교회 복원과 공공건물의 건립에 돈을 댔는데 1913년에 만들어진 코펜하겐의 인어상에도 야콥슨의 돈이 들어갔다. 바닷가의 조그마한 인어상은 이제 코펜하겐의 상징적인 조형물이 됐다.

칼스버그 미술관은 두 채의 건물로 이뤄졌다. 처음 지어진 입구 건물과 10년 후에 지어진 뒤쪽 건물이 그것이다. 1897년에 완공된 첫 건물은 당대 덴마크 최고의 건축가 달레럽(Vilhelm Dahlerup·1826~1907)이 설계했다. 코페하겐 시의 유명 건물은 거의 모두 달레럽의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뛰어난 건축가였다.



1899년 수집품 모두 기증

카를 야콥슨은 처음에는 프랑스 및 덴마크의 18세기 이후 작품만 내놓았다. 1899년에 와서야 그동안 수집한 그리스, 로마 조각상까지 모두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러자 전시장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미술관은 서유럽 유학파 건축가인 하크 캄프만(1856~1920)에게 의뢰해 1906년 새 건물을 짓고 이를 앞 건물과 연결했다. 앞 건물과 뒷 건물 사이에는 달레럽의 설계로 실내 정원인 ‘겨울정원’을 만들었다. 작품 감상 중간에 잠시 쉬기에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이곳에서 물소리를 듣노라면 도심의 번잡함도 여행의 긴장감도 잊게 된다.

미술관은 1996년, 2006년에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진행했다. 1996년의 확장 작업은 덴마크의 유명 건축가 헤닝 라센(1925~2013)이 맡았는데 현대식으로 내부를 장식했고, 내부에서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까지 만들었다. 옥상은 그리 높지 않지만 코펜하겐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이다.

미술관의 수많은 프랑스 현대 작품 중 마네(Edouard Manet·1832~1883)의 작품 2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마네의 대표작에 속할 뿐만 아니라 세계 미술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마네는 19세기 프랑스의 미술혁명을 잉태한 인물이다. 인상파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인상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했다. 전통적 아카데미즘 회화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화풍을 제창한 화가로 프랑스 회화를 사실주의에서 인상파로 옮겨놓았다. 그의 회화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관람자나 평론가로부터 혹평을 받았지만 세계 미술사에 우뚝 섰고, 수많은 작품이 미술사의 명품으로 남아 있다.



칼스버그 미술관의 위상을 드러내는 두 명품은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과 ‘압생트 애주가(The Absinthe Drinker)’다. 책에서만 보던 그림들을 직접 접하고 나는 일순 흥분했다. 덴마크의 미술관에서 이런 그림들을 보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마네가 1867년부터 1869년까지 여러 점(유화 대작 3점, 유화 소작 1점, 석판화 1점)을 시리즈로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소장자가 각기 달라 한꺼번에 전시하는 경우가 드물다. 1992~1993년 영국 런던과 독일 만하임, 2006년에는 뉴욕 MoMA에서만 5점 모두를 전시했다. 칼스버그 미술관은 그중 유화 소작(만하임 미술관이 소장한 대작의 습작)을 소장했다.

마네는 공화주의자이고 공화정 옹호자였다. 그럼에도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왕정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전쟁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스페인 화가 고야는 ‘1808년 5월 3일(The Third of May 1808)’이라는 작품에서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과 양민학살을 고발했다. 마네는 고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그렸다고 한다.



마네의 첫 그림

‘압생트 애주가’는 1859년 작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진 마네의 첫 작품이다. 마네는 18세 되는 1850년부터 토마스 쿠튀르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스타일의 그림이 싫어 화실을 뛰쳐나온 뒤에는 1856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홀로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이때의 작품은 대부분 마네 스스로 폐기해 아주 적은 작품만 현존하는데 이 작품이 그중 하나다.

이 그림은 칼라뎃(Collardet)이라고 불리는, 루브르 박물관 근방의 넝마주이를 그린 전신 초상화다. 넝마주이는 술에 취한 듯하고, 압생트 술병이 발밑에 나뒹군다. 압생트는 알코올 농도가 45도에서 74도에까지 이르는 아주 독한 술로 당시 프랑스인들이 즐겨 마셨다. 아프리카에 주둔하던 프랑스 군대가 말라리아 예방용으로 마시던 술인데, 그들이 귀국할 때 가져와 마시기 시작하면서 1840년대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부터 부르주아까지 마시는 국민주(酒)가 됐다. 그러나 너무 독한 이 술 때문에 사회문제가 불거져 1914년에는 생산이 금지됐다. 21세기에 와서야 이 술은 다시 제조돼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마네는 ‘압생트 애주가’를 1859년 파리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심사위원 중 들라크루아만 찬성하고 모두 거절했다. 당시 윤리 기준으로는 모티프나 화법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마네는 1867년 자비로 기획한 회고전에 다른 작품 56점과 함께 이 작품을 전시했는데 당시 유명한 미술상 뒤랑 뤼엘이 1872년 다른 작품 23점과 함께 이 작품을 구입했다. 이후 이 작품은 1906년 오페라 가수가 구입했고 1914년 덴마크 국립미술관 전시회에 출품됐다. 칼스버그 미술관은 이때 구입했는데 이는 칼스버그 미술관이 구입한 첫 현대작이다. 이 작품을 구입할 정도의 안목이라면 칼스버그 미술관의 미래는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최 정 표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 재벌사 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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