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2009년 다보스 포럼 참관기

가라앉은 다보스, 오래된 자본주의의 미래를 묻다

  • 문정인│연세대 교수·정치학 cimoon@yonsei.ac.kr│

    입력2009-03-10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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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러다임의 전환 : 새로운 자본주의 등장하나
    • “중국이 자본주의를 구한다”
    • 검약하는 미국과 이 세계는 공존할 수 있는가?
    매년 1월 말이면 내로라하는 정치지도자, 기업가, 금융계 최고경영자(CEO), 언론인, 학계 인사가 스위스의 겨울 휴양지 다보스에 모여 지난 한 해 동안의 세계경제를 평가하고 새해 경제를 전망하는 세계경제포럼(일명 다보스 포럼)이 열린다. 다보스 포럼은 힘 있고, 돈 있는 자본주의 명망가들이 벌이는 ‘사치스러운 세계화 축제’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신년 벽두에 세계경제의 희망적 메시지를 전하는 행사로 인식돼왔다.

    독일계 스위스인 클라우스 슈밥 교수의 주도로 1971년 시작된 다보스 포럼이 1월28일부터 2월1일까지 2600명의 세계지도자가 모인 가운데 ‘위기 후의 세계질서 만들기(Shaping the Post-crisis World)’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올해 다보스 포럼에는 여섯 개의 주요 의제를 중심으로 221개의 세션이 마련됐다.

    첫째 의제는 세계 금융 시스템의 안정화 및 세계경제 회복.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확산된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 파악과 그 해법의 모색, 새로운 국제 금융질서의 구축, 그리고 경기 침체 극복 방안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특히 강조된 부분은 경기 진작을 위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들의 재정, 통화정책의 확대였다.

    위기 후 세계질서

    둘째 의제는 거버넌스 문제였다. 다보스 포럼 참가자 대부분은 금융위기의 가장 큰 원인을 국가, 지역, 세계 수준에 있어서‘거버넌스’시스템의 실패에서 찾았다. 따라서 국가 수준, 지역 수준, 세계 수준의 금융규제와 협력에 대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주요 관심사로 등장했다. 이와 관련해 이번 다보스 포럼은 4월 런던에서 열리는 G-20의 예비회의적 성격이 강했다. 주최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가 국내 사정이 어려운데도 4일 동안 다보스에 체류하면서 주요국 대표들과 광범위한 협의를 가진 것도 그래서다.



    새로운 국제 금융 거버넌스 체제와 관련해 네 가지 가능성이 모색됐다. 미국과 영국은 기존 금융질서를 부분적으로 손질한 서구 중심적(re-engineered western centric) 거버넌스를 선호했으나, 중국 러시아 등은 본질적으로 재조정된 다자주의(rebalanced multilateralism)를 주장했다. 그러나 전문가 대부분은 국제금융체제가 분절화한 금융보호주의(fragmented protectionism)나 배타적인 금융지역주의(financial regionalism)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4월 G-20회의가 실패했을 때 분절화된 금융보호주의나 배타적 금융 지역주의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셋째 의제는 지속가능성과 개발 문제. 다보스 포럼은 전통적으로 세계화, 경제성장, 시장 우선주의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과 후진국의 개발(development) 문제가 새로운 의제로 채택되기 시작했다. 지난해와 같은 맥락에서 올해에도 기후 변화, 식량 안보, 빈곤 퇴치, 수자원 확보, 전염병, 그리고 이주민 문제 등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다. 특히 이번 포럼에서는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아프리카의 저개발, 빈곤, 안보 문제들을 주요 쟁점으로 부각해 참석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케냐 출신인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넷째 의제는 가치와 리더십에 관한 것이었다. 금융위기가 금융자본가의 탐욕에서 비롯했다는 세간의 인식 때문인지 기존 자본주의 가치 정향의 적실성, 최고경영자의 정직성과 리더십, 금융기관 CEO에 대한 과도한 보수, 그리고 이들의 적절하지 못한 행태가 도마에 올랐다. 뉴욕 월가 CEO들의 2008년 보너스 총액이 184억달러였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들에 대한 비판은 최고조에 달했다. 자신들 회사는 물론 세계 금융계를 파탄으로 몰아넣고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보너스를 받았느냐는 힐난이 터져 나온 것이다. 158년 역사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를 파산시킨 장본인 리처드 펄드가 1400만달러에 달하는 플로리다의 대저택을 자신의 부인에게 단돈 100달러에 넘긴 사실, 그리고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기사회생한 월가 금융사 CEO들의 사치스러운 행태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이들 CEO들이 얼굴조차 들고 다니기 힘든 분위기가 이번 다보스 포럼의 정서였다.

    다섯째 의제는 차세대 과학기술(next wave). 기술혁명이 어떻게 경제위기 극복에 공헌할 수 있는지가 논의의 핵심이었다. 나노기술(NT),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에서의 기술 혁신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이러한 기술의 상업화 가능성과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특히 기술혁신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 그리고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술지원 등이 심도 있게 다뤄졌다.

    2009년 다보스 포럼 참관기

    한승수 국무총리가 1월29일 스위스 다보스 제호프 호텔에서 ‘워싱턴 컨센서스의 종언’을 주제로 열린 오찬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변화가 산업과 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논의도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산업과 기업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금융 경색, 불황 국면의 중장기화, 국제 협력체제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시장에 대한 신뢰 상실 등이 어려운 기업 환경을 조성할 것이고, 이러한 도전의 극복 없이 세계경제 회복은 어려울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가라앉은 다보스

    지난해 1월 열린 다보스 포럼 때는 축제 분위기가 넘쳤다.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손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올해에는 달랐다. 철저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기업과 금융기관의 줄도산도 문제였지만, 포럼 개최에 즈음해 발표된 세계 주요 경제 관련 기관들의 비관적인 2009년 경제 전망 때문이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포럼 기간 중 2009년 전세계 실업자 수가 5000만명 더 늘어나리라고 전망했는데, 이는 올해 전세계 실업 인구가 2억3000만명으로 늘어나고, 전세계 노동인구의 7.1%가 실업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통화 기금(IMF) 역시 올해 경제 성장률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보스의 추운 겨울 날씨처럼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헤지펀드계의 대부 조지 소로스가 금융위기가 바닥을 치지 않았고 더 큰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고 전망하면서 다보스의 분위기는 더욱 암울해졌다. 확실성, 낙관주의, 희망이라는 다보스 특유의 분위기가 불확실성, 공포, 비관주의로 전화됨을 피부로 느꼈다.

    포럼의 쟁점도 지난해와 크게 대조를 이뤘다. 지난해 포럼에서는 미국 경제와 세계경제의 비연계(de-coupling)가 크게 부각됐다. 미국 경제가 어려워도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국가가 미국과 유럽 경제의 성장 동력 상실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허망한 주장이 되고 말았다. 중국을 제외한 세 나라가 미국발 금융위기의 처참한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엔 비서구권 국가를 중심으로 한 국부 펀드(sovereign fund)의 등장이 주요 의제 중 하나였다. 싱가포르, UAE, 쿠웨이트를 필두로 한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등이 국가의 부를 새로운 형태의 투자 기금으로 운용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부각됐다. 당시 서브프라임 사태로 어려움을 겪던 메릴린치, 시티은행이 이들 자금을 수혈받아 덕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금융위기로 이들 국부 펀드가 타격을 입으면서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는 관련 논의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포럼 참가자들의 프로파일도 크게 변했다. 과거에는 주로 월가 중심의 금융 자본가들이 다보스 포럼의 얼굴 마담 구실을 했다. 그러나 올해엔 크게 달라졌다. 시티은행, 메릴린치, 골드만삭스, 리먼브러더스 CEO 등 과거 다보스 포럼 주역이 모두 불참했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만이 유일하게 참석했다. 파산과 구제금융 수순을 밟는 CEO가 포럼에 참여하는 것은 부적절하기도 했다.

    지난해와 비교해 도드라진 현상은 금융자본가의 퇴조와는 대조적으로 국가수반이 많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포럼에는 27개국 정상이 참가했는데 올해엔 45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세계 경제의 축이 시장 중심에서 국가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경제위기 극복이 각국의 경기 진작 조치에 달렸기 때문에 국가수반들의 경제정책 기조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 원자바오 중국 총리,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의 주도적 역할을 눈여겨볼 만하다. 한국에서는 한승수 총리, 일본에서는 아소 다로 총리가 참석했다.

    언론이 보도한 내용이지만 오바마 행정부의 주요 인사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래리 서머스 경제자문관,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보좌관, 티모시 가이스너 재무부 장관이 참석하는 것으로 계획됐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취소됐다.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경제정책이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경기진작 예산 확보를 위해 의회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의 참석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대신 오바마 대통령의 절친한 동지이자 보좌관인 발레리 재럿이 참가해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어젠다를 브리핑했다. 또빌 클린턴 전 대통령, 앨 고어 전 부통령이 오바마 행정부의 대변인 구실을 해주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올해 포럼에서 다보스의 전통이 깨졌다는 사실이다. 다보스포럼의 전통은 관용, 절충주의, 합의를 특징으로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 목청을 돋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올해는 이런 전통이 깨졌다.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의 대립도 있었다. 참석자들이 CEO 전체를 이번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일괄적으로 몰아세우자 펩시콜라 인드라 누이 회장 등 제조업 부분의 CEO들은 우리 탓이 아니라고 반론하며 월가의 CEO들 때문에 우리까지 도매금으로 매도된다고 불평했다. 러시아 푸틴 총리의 미국 비판과 이에 대한 미국 측의 반론 제기도 다보스의 전통을 깬 에피소드다.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가자사태 관련 세션에서 레젭 타입 에르도한 터키 총리의 돌발 퇴장이 아닐까 싶다. 다보스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에르도한 총리는 자신이 세션 중 퇴장한 이유로 사회자인 데이비드 이그네셔스의 부당한 시간 할애를 거론했다. 사회자가 시몬 페레즈 이스라엘 대통령에게는 20분 넘게 발언 시간을 허용하고 자신에게는 10분밖에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자사태에 대해 반성하지 않은 페레즈 대통령의 태도에 대한 항의가 진짜 이유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가자지구에 대한 무자비한 전방위 공격으로 1300명 넘는 사망자를 내고도 국가원수가 사과 표시 없이 침공의 정당화에만 급급하는 모습을 보고 에르도한 총리가 돌발 행동을 취한 것이다. 그 결과 에르도한 총리는 터키와 아랍, 이슬람권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세상이 어려워지면서 다보스의 축제, 화해 무드도 위축되는 느낌이다. 클라우스 슈밥 교수는 이번 해프닝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으나 앞으로 있을 다보스 포럼이 과거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새로운 자본주의,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paradigm)이란 용어를 일반화한 사람은 토마스 쿤이라는 과학사가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저술에 따르면 과학 발전은 자의적 또는 우발적 발견, 발명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해당 시기마다 과학계에 존재하던 지배적인 신념, 규범, 가치, 이론, 방법론의 총합으로서의 패러다임에 의해 좌우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다임은 고정돼 있지 않고 변화한다. 쿤은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때 과학혁명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천동설에서 지동설, 고전역학에서 상대성 이론으로의 변화가 그 대표적 사례다. 설명할 수 없는 변칙적 현상(anomalies)이 축적된 상황에서 기존 패러다임이 이에 대한 설명과 해법을 제시하지 못할 때, 기존 패러다임에 위기가 오고 과학혁명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모색된다고 본 것이다.

    이번 다보스 포럼에서 목격한 것은 앵글로-아메리칸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위기였다. 1980년대 초반 이후 미국과 영국의 경제계를 지배한 것은 시장 중심적 패러다임이었다.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영국의 대처리즘 모두 케인스주의에 따른 국가의 과도한 시장 개입, 과다한 재정지출, 지나친 정부규제를 비판하면서 시장 중심의 경제체제 구축을 표방했다. 그리고 이들의 연대기에는 앨런 그린스펀 같은 하이에크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뤘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기규제가 실제로 존재하며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기능을 극대화할 때 모두가 윈-윈의 결과를 누린다고 본 것이다. 위험스럽다고 여겨지던 파생상품에 대해 정부규제가 가해지지 않은 것도 이러한 시장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포럼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철학에 대한 회의가 가시화됐다. 금융위기를 예측한 뉴욕대의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올해 다보스 포럼의 스타였다. 포럼에서 루비니 교수는 ‘앵글로 아메리칸 자본주의의 종언’을 선언했다. 시장 실패를 국가의 개입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주류를 이루면서 과거 경제 실패의 원인으로 질타받던 케인스주의가 구원투수로 부활하는 현실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로버트 배로 교수가 우려하는 ‘수요부문의 부두 경제학(demand-side voodoo economics)’과 관련한 위험성을 경고했으나 이내 무시됐다. 이미 대세는 기운 것처럼 보였다. 시장의 실패와 시장에 대한 신뢰상실을 국가 개입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수리경제학의 방법론적 적실성에 대한 논란도 거셌다. ‘당신의 모델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세션에서 ‘검은 백조(Black Swan)’라는 저서로 유명한 나심 니콜라스 탈리브 교수는 “수리모델들이 월가를 죽였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최근 경제학 모델들은 경제 현실의 복잡성을 소화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비선형(non-linear) 데이터를 설명하는 데 선형(linear) 모델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현상을 서술, 설명, 예측할 수 있다는 실증경제학은 더는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장에 대한 신뢰상실 못지않게 경제학자, 경제학 모델에 대한 불신이 심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경제지표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국내총생산(GDP), 즉 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재화의 시장가치 지표로는 경제 행위, 나아가서 사회적 진보를 적절히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2000년대 미국 경제를 GDP의 잣대로 측정하면 성장 추세를 보였지만 실제로 이 기간 중 대부분 미국인의 생활은 악화했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평등을 보장하는 성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통계학자 장-필립 코티스의 주장이 인상적이었다. 경제 생산의 객관적 측정과 행복(well-being)의 주관적 인식 간의 괴리를 좁혀야 경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GDP는 행복, 소득분배, 광의의 사회적 진보(social progress)를 측정하는 데 부적합한 지표라는 것이다. ‘행복 지수(happiness index)’와 같은 주관적 측면을 다루는 지표가 개발돼야 현대 경제학이 더욱 정확해지리라고 그는 보았다. 이제는 방법론뿐 아니라 경제지표 면에서도 변칙적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칼라일(Carlyle) 경이 경제학을 ‘암울한 학문(dismal science)’으로 깎아내린 이유를 알 것 같다. 실증주의 경제학으로는 경제적 삶의 참 모습을 설명하기도, 예측하기도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성격과 가치 문제에 대해서도 열띤 토론이 이뤄졌다. 맹목적인 이윤 극대화의 앵글로 아메리칸 자본주의로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왔다. 현행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를 책임 공유형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전환해야 한다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제안도 이목을 끌었다. 시장경제가 누구나 혜택을 누리고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파레토 적정선을 자동으로 보장해주지 않음이 입증됐다고 할 수 있다. 몇 명만 대박을 터뜨리고 다수가 희생되는 기존의 자본주의로는 세계경제를 되살릴 수 없기 때문에 책임, 윤리에 기초한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다보스 포럼의 중론이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시장만능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시장의 자기규제 기능이 신뢰를 잃고 있다는 데 있다. 포럼 주최 측이 가장 영향력 있는 참석자 1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과반수(50.8%)의 참석자가 세계경제에 치명적 손실을 입힌 변수로 시장의 자기규제 실패를 꼽았다. 현재 만연한 공황 심리가 바로 시장에 대한 신뢰 상실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와 시장 경제학이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위기에 봉착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전받는 세계화

    다보스 포럼은 ‘세계화의 복음’을 만들고 개량하며, 그 복음을 언론매체를 통해 전세계에 전파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세계화란 상품, 재화,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통해 국가 간 장벽을 무너뜨리고 하나의 통합된 세계경제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계화는 자유무역과 투자, 그리고 개방된 금융, 노동시장을 전제로 한다.

    물론 이번 다보스 포럼에서도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강조됐다. 1930년대의 ‘이웃국가를 가난하게 만드는 보호주의 정책(beggar-thy-neighbor)’이 재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1930년대 보호주의 무역이 관세전쟁을 촉발했고 그에 따른 경제 침체가 나치와 파시즘 같은 파괴적 사회세력을 배양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하며 세계화와 자유주의 경제 질서 유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브라운 영국 총리가 다보스에서 보호주의 무역 관행을 비판하고 금융보호주의의 폐해를 강조하는 순간, 영국의 국내 정서는 보호주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다른 OECD 국가들도 정부의 구제금융을 자국 기업에 우선 배분해야 한다는 보호주의 정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사한 논리가 무역 부문에도 적용됐다. 미국 의회의 ‘바이 아메리카’ 정책이 대표적 사례다. 구제 금융으로 어렵게 살린 미국의 자동차산업을 정상화하려면 보호주의 무역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보스에서는 세계화, 열린 무역, 자본 자유화를 표방하면서 자국에서는 보호주의 무역과 금융보호주의 쪽으로 움직이는 현실은 올해 다보스 포럼의 역설적 구조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번 다보스 포럼에서 나타난 긍정적 현상은 세계화의 뒤안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경제가 어려울수록 빈곤층, 신(新)빈곤층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국제사회가 아프리카를 포함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여기에 화답하듯 아소 일본 총리는 아시아 개발도상국가를 상대로 공적개발원조(ODA) 1조5000억엔(170억달러)을 할당했다고 발표했다. 이외에도 빈곤층에 대한 신용창출, 사회적 기업의 확산을 통한 고용창출,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빈곤퇴치를 위한 노력 등이 논의됐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처신은 감동적이었다. 지난해 다보스 포럼 기간 중 아프리카 빈곤 퇴치를 위해 써달라며 3억달러를 쾌척한 그는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위기는 빈곤층에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아이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업생산에 필수적인 비료도 못 사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부유한 국가들이 개발도상국 지원을 늘려야 합니다. 대외 원조를 삭감한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전망이 그리 나쁘지는 않네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도전도 거셌다. 한승수 총리가 패널로 참석한 ‘워싱턴 컨센서스는 죽었는가?’라는 세션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아직 부고(訃告)를 낼 정도는 아니지만 최근 금융위기를 계기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워싱턴 컨센서스란 미국 워싱턴의 재무부, 국무부, 의회,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간에 이뤄지는 개도국 경제발전 처방과 관련된 일련의 합의를 의미한다. 통상 워싱턴 컨센서스는 ‘작은 정부, 재정건전성, 무역·통상·투자 자유화, 공기업 민영화’를 강조했다.

    역설적 현상은 미국과 영국이 워싱턴 컨센서스를 스스로 와해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 영국이 채택하고 있는 구제금융, 경기 진작을 위한 재정지출 확대, 주요 은행 및 기업의 국유화, 보호주의 무역 등 일련의 정책은 워싱턴 컨센서스에 역행하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온 일부 참석자들은 ‘베이징 컨센서스’를 대안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국가의 규율, 거시정책의 탄력적 운용, 맹목적 민영화의 거부 등이 개도국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과 베이징. 어느 컨센서스가 21세기 경제 개발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자유주의 개혁만으로는 현재와 미래의 경제를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대안 모색이 2009년 다보스 포럼이 남긴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자본주의를 구한다”

    비난의 화살은 미국으로 향했다. 낮은 저축률, 과도한 소비, 탐욕스러운 월가 자본가와 이들에 대한 정부의 감독 실패가 이번 위기를 가져왔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세계 소비의 1/4이 미국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국의 소비 없이 세계 경제 회복이 가능하겠느냐는 점이다.

    ‘검약하는 미국과 이 세계는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세션에서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두 가지 시각이 충돌했는데, 하나는 미국이 앞으로 20~30년 동안 검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계는 검약하는 미국과 살아가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검약하는 미국은 세계 수출시장에 적신호를 가져오기 때문에 수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처럼 미국의 처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이는 없을 것이다. 클린턴은 경제위기엔 미국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클린턴은 “미국의 경기 회복 없이 세계 경기가 회복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미국이 살아야 세계가 산다는 것이다. 중국, 일본과 일부 여유 있는 유럽 국가들이 미국 국채를 계속 구입해야 한다는 그의 논리가 얄미운 주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바마에 거는 기대는 컸다.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경제력, 군사력, 소프트 파워에서 미국에 필적할 상대는 없었다. 그러나 우려되는 대목이 있다. 필자가 패널리스트로 참석한 국제 안보 세션에서 미국 측 발표자 주장이 이채로웠다. 오바마 행정부에도 깊게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미 참모대학의 크로닌 교수는 미국이 현재 하마스, 헤즈볼라, 탈레반 등과 같은 비(非)정부 테러리스트들과의 비대칭 전쟁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미국의 동맹과 우방은 이들을 척결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했다. 그러자 한 아랍 측 패널리스트가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하마스, 헤즈볼라, 탈레반이 현지 주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합법적 정당이라는 사실을 압니까?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정통성 없는 반대세력을 부추기는 전략으론 미국이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핵 문제는 이란에 집중됐고 북한 핵 문제는 필자의 발표 외엔 주목을 받지 못했다. 국제사회에서 한반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번 포럼에서 돋보인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의 입김이 세진 것을 피부로 느꼈다. 원자바오 총리만이 8% 성장을 자신 있게 피력했는데, 1조달러가 넘는 중국의 외환보유고를 부러워하는 분위기도 감지할 수 있었다. 한 중국인 참석자의 촌철살인적 표현이 장내를 압도했다.

    “1949년에는 사회주의가 중국을 구했고, 1979년에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으며, 1989년에는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 이제 2009년에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날개 없이 추락하는 비행체와 같았다. 푸틴 총리는 미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분노와 적개심을 나타냈다. 푸틴은 개회식 기조연설에서 이번 위기를 ‘완전한 폭풍(perfect storm)’으로 규정하고 그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미국의 자부심이라는 투자은행이 파산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따져 물으며 이들이 부추긴 ‘과장되고 빌려온 기대감’이 세계경제의 거품을 키웠고 그 거품이 꺼지면서 러시아 경제도 추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즈프롬 주식의 평가절하 문제 때문인지 미국과 영국의 신용평가 회사들에 대해서도 포문을 열었다. 그는 회사의 평가는 실질가치에 기초해야지 평가기관의 레이팅에 의해 좌우돼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또 미국 달러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 금융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유와 가스에 의존한 러시아 경제의 한계가 보이는 대목이다.

    다보스와 한국

    다보스 포럼에서 한국을 주제로 다룬 세션은 전무했다. 한승수 총리,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회장, 김신배 SK텔레콤 부회장, 조현상 효성 전무, 그리고 필자 등이 패널리스트로 참석했지만 주로 기능적 주제의 세션에서 한국 사례를 발표하는 성격을 띠었다. 한 총리는 1997년 한국의 경제위기 극복 사례와 현재의 대응을, 김 본부장은 보호주의 무역에 대한 한국의 의견을 발표했다. 필자는 ‘Asia Update’라는 세션에서 한국의 정치 및 경제 동향을 발표했고, ‘세계안보 동향’이라는 세션에선 남북한 관계에 대해 발표했다.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다보스 참가자들이 한국의 경제 문제보다는 안보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포럼 기간 중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도발적 발언이 CNN 등에 크게 보도되면서 많은 참가자가 남북 간 군사 충돌 가능성, 그리고 이것이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 등을 집중적으로 문의해왔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의 근황과 후계체제, 그리고 핵 문제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남북 관계의 원만한 관리가 경제위기 관리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1월29일엔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석래 회장 주최로 ‘코리안 나이트’가 열렸다.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일본과 인도를 포함해 11개 국가에서 같은 행사를 개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 오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행사 장소가 회의장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산 중턱의 호텔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350명 넘게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명박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를 보냈고 한 총리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참석했다. 두바이 버즈 알 아랍 호텔의 수석 요리사 에드워드 권이 행사 음식을 준비했다.

    사실 이 행사는 SK 최태원 회장의 작품이었다. 다보스 포럼에 거의 매년 참가해온 최 회장은 그동안 포럼 기간 중 한국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코리아 나이트’ 행사를 3년 전부터 구상하고 준비했다고 한다. 필자는 최 회장에게 왜 거금을 들여 매년 다보스 포럼을 후원하고 이런 행사까지 꾸렸느냐고 물었다. 최 회장은 다보스 포럼의 가치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는 브랜드 네임 파워이며, 다른 하나는 네트워크 파워라는 것이다. 다보스 포럼에서 한국과 한국 회사의 이미지를 크게 고양할 수 있으면 그 자체가 브랜드 네임 파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보스 포럼처럼 각국의 국가수반, 재계 지도자, 언론계 인사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이벤트는 없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한국이 다보스 포럼의 어젠다를 설정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이는 금상첨화라 하겠다. 브랜드 네임, 네트워크, 어젠다 설정은 한 국가의 소프트 파워와 스마트 파워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다.

    2009년 다보스 포럼 참관기
    文正仁

    연세대 철학과 졸업

    미국 메릴랜드대 정치학 박사

    現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저서 :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Ending the Cold War in Korea(Theoretical and Historical Perspectives)’ ‘Understanding Regime Dynamics in North Korea’


    다보스 포럼에서 필자는 한국의 미래와 관련해 네 가지 큰 교훈을 얻었다. 첫째는 수출 주도 경제성장 전략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수를 진작하고 성장의 개념을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둘째, 양극화 문제와 사회 통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귀결로서 생겨난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는 어둡다. 셋째, 시장과 국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공황 심리가 나타나면서 절망과 패배주의의 악순환에 빠진다. 따라서 ‘우리는 할 수 있다’ 는 희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신뢰를 회복하면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비즈니스 위크’가 다보스 포럼 판에 내건 “Some Lean Left. Some Lean Right. We Lean Forward”라는 슬로건에서 얻은 교훈이다. 경제 위기 극복에 좌우가 있을 수 없다. 좌건, 우건 이념의 덫에서 벗어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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