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서 25년째 방송중인 드라마 ‘이스트엔더스’는 노동계층 사람들의 진솔한 삶을 다룬다.
판타지는 ‘실제 상황’
우리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큰돈을 시청료로 꼬박꼬박 낼까 싶지만, 놀랍게도 영국 사람들은 아무 불평 없이 시청료를 낸다. 나는 이 점이 너무 궁금하고 의아해서 우리 과 레이먼드 교수에게 “영국 사람들은 어째서 그 비싼 시청료를 불만 없이 내느냐”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영국인들은 BBC를 영국의 중요한 전통이자 문화유산의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광고 대신 비싼 시청료를 감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광고를 시작하면 방송의 공정성은 필연적으로 훼손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BBC의 공정성이 훼손된다면 정치, 사회, 경제 등 여러 면에서 국민 모두가 손해를 보는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얘기를 말로 하기는 쉽다. 그러나 전 국민이 ‘BBC의 전통과 공정성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에 합의하고 매달 2만2000원쯤 하는 시청료를 기꺼이 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안 그래도 갖가지 세금에 허리가 휘는 영국 사람들이 말이다.
영국에서 TV를 보기 위해 들이는 돈은 시청료가 전부가 아니다. 웬만한 집에서는 공중파 채널이 잡히지 않아 케이블 방송을 수신해야 하고, 케이블 방송 수신료가 한 달에 6파운드, 즉 1만원쯤 들어간다. TV를 적극적으로 보지 않으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기껏 마음먹고 보려고 한 3대 장수 드라마가 하나같이 재미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아무튼 같은 드라마 왕국이라고 해도 영국 사람들이 TV에서 기대하는 바는 한국과 조금 다르다. 한국 사람들이 화려한 상류층이나 멋진 전문직, 잘생긴 선남선녀들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영국 사람들은 그런 판타지보다는 드라마를 통해 일상생활의 평온함을 다시금 확인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영국은 한국과 달리 왕실과 귀족계급이 실재하는 계급사회다. 이 점도 인기 드라마들의 성격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연회나 기숙학교, 고성(古城)에서의 생활, 승마와 요트 등 왕족이나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은 영국에서는 판타지가 아닌 실제 상황이다. 이런 왕실 소식이 뉴스와 신문에서 실시간으로 보도되기에 굳이 드라마에서까지 그런 화려한 생활을 목도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 사실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은 드라마가 아니라 여러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올겨울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귀족 아가씨들의 무도회 준비 과정 같은 이야기가 그런 예다. 이런 스토리들이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
“영국에는 왜 이렇게 재미있는 드라마가 없냐?”고 툴툴대는 내게 영국 친구들은 ‘멀린’(아서왕 이야기를 드라마화한 작품)이나 ‘닥터스’ 등 젊은 층을 겨냥한 드라마들을 추천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들은 방송 시간대가 대개 6시쯤이라 아이들 저녁을 차려야 하는 내 처지에선 보기가 어렵다. 결국 나는 늘 하던 대로 10시 뉴스만 보고 ‘섹스 앤 더 시티’나 ‘프렌즈’ 같은 철지난 미국 시트콤들을 좀 보다가 본전 생각에 입맛을 다시면서 TV를 끄곤 한다. ‘과연 재미있는 영국 드라마는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하고 궁금해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