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호

환자에게 공격당하는 의사들의 호소

“진료거부권을 許하라”

  • 황병우 메디칼타임즈 기자

    tuai@nate.com

    입력2019-11-20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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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병원 의사 환자 진료 중 흉기 피습

    • 공격당한 교수 “피할 틈도 없었다”

    • 故 임세원 교수 사건 떠올린 동료 의사들 “남 일 같지 않다”

    • 의료계, 진료거부 등 강력 대처 방안 모색

    [GettyImage]

    [GettyImage]

    10월 24일 서울 노원구 한 대학병원에서 정형외과 교수 A씨가 외래진료 도중 환자가 휘두른 칼에 손가락이 절단될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환자는 칼을 신문지로 감싼 채 들어와 A 교수는 물론 진료를 보조하던 직원까지 공격했다. A 교수는 범인이 가슴 쪽으로 휘두른 칼을 잡으려다 엄지손가락이 90%이상 잘리는 부상을 당했다. 

    환자가 칼을 꺼내 든 이유는 돈 문제. 가족 없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던 가해자는 손에 부상을 입고 해당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장애 판정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부상 정도가 경미해 장애 판정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보험회사 보상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그러자 가해자는 자신을 치료한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고, 1심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이후 가해자가 제기한 항소와 재심청구 또한 번번이 기각했다. 가해자가 칼을 들고 A 교수 진료실을 찾아간 날은 재심청구가 기각되고 이틀 뒤였다. 

    사건 발생 직후 기자와 만난 A 교수가 전한 첫 심경은 ‘당혹’이었다. 그는 진료를 보던 중 갑작스레 공격당해 본인이 움켜잡은 게 칼인지도 몰랐다고 밝혔다. 

    “가해자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뒤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바로 신문지로 감싼 무언가를 휘둘렀다. 뭘 생각하고 대응할 겨를조차 없었다.” 

    A 교수 설명이다. 그는 당시 칼날이 가슴을 살짝 스쳤다고 밝히기도 했다. 만약 A교수가 손으로 칼을 막지 않았다면 가슴을 노린 가해자에 의해 더 큰 피해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A 교수는 의사로서 환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줬는데 이런 일을 당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 보였다. 그는 “치료 과정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후 후유장애진단서를 써드리고 기초장애수급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도움도 다 드렸다. 그런데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칼을 휘두른 것”이라며 괴로움을 토로했다. 



    아울러 A 교수는 사건 재발 가능성을 우려했다. “가해자가 처벌받는다 해도 3년에서 5년 정도 지나면 다시 사회에 복귀한다고 들었다. 해당 환자의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뿐”이라고 밝혔다.

    공격당한 교수, 완전 회복은 불가

    A 교수는 사고 직후 손가락 수술을 받은 뒤 일주일가량 입원했다 퇴원해 지금은 휴식과 재활을 병행하는 상태다. 손가락을 크게 다쳤기 때문에 당장 수술 칼을 잡기는 어렵지만 기다리는 환자들을 위해 12월 중에는 외래진료를 시작할 예정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A 교수는 정형외과 안에서도 팔, 손, 손목, 손가락 쪽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수부외과 의사다. 그에게 엄지손가락은 곧 생명과 같다. 손 기능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부위가 잘 회복되지 않으면 A 교수가 다시 수술을 집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사건 직후 의료계 일각에선 이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A 교수 수술을 집도한 한양대병원 이광현 교수(전 한양대학교병원장)는 불행 중 다행으로 A 교수가 다시 수술대에 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 교수는 “손가락 기능이 완벽하게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아주 좋으면 80%, 나빠도 60%까지는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향후 A 교수가 엄지손가락으로 뜨겁고 찬 것은 구별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다만 “손에 닿는 종이가 한 장인지 두 장인지, 또 인쇄된 면인지 아닌지 등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의 예민함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관절이 잘렸기 때문에 손가락 운동 범위가 다소 줄어들 수 있다. 그래도 다친 부위가 왼손이라 다행이다. 수부외과 수술은 매우 섬세한 처치가 필요한 분야지만 A 교수가 다시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남 일 같지 않다” 의료계 충격

    1월 2일 서울 종로구 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빈소. [뉴스1]

    1월 2일 서울 종로구 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빈소. [뉴스1]

    이번 사고 소식을 접한 의료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올해 새해벽두 전해진 고(故) 임세원 교수 사건이 재현될 뻔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임 교수는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해 12월 31일 자신이 진료하던 환자에게 가슴 부위를 수차례 찔려 숨졌다. 당시 임 교수는 환자가 흉기를 꺼내 휘두르자 진료실 밖으로 도망쳤지만 가해자가 복도 끝까지 쫒아가며 공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에는 전북 익산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폭행당해 안면 부상을 입는 등 의료계에서는 최근 크고 작은 의사 피습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상당수 의료진이 불안감에 떨고 있는 상황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의사들은 “나에게도 내일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솔직히 무섭다” “의사가 가장 보호받아야 될 곳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 같은 우려를 토해냈다. 

    이와 관련해 대한정형외과의사회는 공식 성명을 내고 “병원에서 보건의료인에 대한 폭력 사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폭력 사태에 대한 대책 마련을 수없이 호소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정부 “대책 고민하겠다”

    최근 의료계는 사태의 심각성을 지적하며 법률에 진료거부권을 명시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고 임세원 교수 사건 이후 보건복지부와 의료계는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안전한 진료 환경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이른바 ‘임세원법’도 제정했다. 진료 현장에서 폭행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를 가중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이 조항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 의사들 주장이다. 

    이에 대한의사협회(의협)는 11월 6일부터 10일까지 ‘의료인 폭력문제에 대한 회원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실질적인 보완책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설문조사는 총 24개 항목으로 △최근 3년간 진료실 내 폭력 경험 △폭력 사태 발생 이유 △폭력을 당했을 때 대처법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의료법의 반의사불벌조항 삭제 △진료거부권 신설 △진단서 허위작성을 요구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 법규 신설 필요성 등에 대한 의견도 묻고 있다. 설문조사 문항을 보면 의협이 사태 해결책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종협 의협 대변인은 이번 설문조사에 대해 “의료 현장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 문제를 근절하고자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 실효적이고 종합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의료계가 주장하는 가해자 처벌 강화나 진료거부권 신설 등이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고 임세원 교수 사건 이후 관련 내용이 법률에 포함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의협이 이번 의견 수렴 결과를 바탕으로 보건복지부와 어떤 논의를 진행할지는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 

    일단 정부도 관련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정부가 의료진 안전 대책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해 당혹스럽다”며 “어떤 대책을 마련할지 고민하고 있으며, 이 문제에 대해 의료계와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동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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