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호

[단독] “‘5·18 광주’ 최초 보도한 기자는 故 유영길 감독이었다”

당시 美 CBS 방송기자…착검한 계엄군 최초 촬영 보도 밝혀져

  • 김승재 언론인

    phantom386@daum.net

    입력2021-09-01 09: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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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감독, CBS 기자로 광주 누벼

    • 5월 19일, 언론인 최초 계엄군 폭력 진압 취재

    • CBS 뉴스 통해 유 감독 영상 방송…광주 참상 알린 첫 보도

    • 아내 “남편은 ‘광주 충격’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해”

    • 가족한테 피해 갈까 “광주 취재” 알리지 않아

    • ‘목숨 걸고’ 취재‧촬영현장 뛰어든 인간 유영길

    영화 ‘꽃잎’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감독으로 각종 영화제를 석권한 유영길 촬영감독. 고인은 1980년 5월 미국 CBS 방송 영상 기자로서 광주항쟁 현장을 취재해 세상에 알린 것으로 확인됐다. [김명자 제공]

    영화 ‘꽃잎’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감독으로 각종 영화제를 석권한 유영길 촬영감독. 고인은 1980년 5월 미국 CBS 방송 영상 기자로서 광주항쟁 현장을 취재해 세상에 알린 것으로 확인됐다. [김명자 제공]

    5·18 광주민주화운동(광주항쟁) 현장을 최초로 촬영해 세상에 알린 언론인은 고(故) 유영길(1935~1998) 촬영감독으로 확인됐다. 유 감독은 영화 ‘꽃잎’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8월의 크리스마스’ 등의 촬영감독으로, 한국 리얼리즘 영상 미학의 대부로 평가받는다. 그가 ‘5월 광주’ 항쟁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계엄군의 과격진압이 시작되는 순간을 포착한 언론인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올해 설립된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조직위원회’(조직위)가 항쟁 41년여 만인 올 8월, 유 감독의 활동을 뒤늦게 파악했다. 광주항쟁 초기 긴박한 상황이 유 감독의 카메라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점을 확인한 조직위는 이 공로를 인정해 유 감독에게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오월의 광주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시상식은 10월 27일 서울에서 열린다.

    美 CBS 기자로 ‘광주 현장’ 뛰어든 유영길

    그동안 국내외 여러 매체는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가 광주항쟁을 세계 최초로 촬영한 언론인이라고 소개해왔다. ‘힌츠페터 국제보도상’은 힌츠페터처럼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 현장에서 분투하는 영상 기자들을 치하하고자 제정한 상이다. 매년 본상과 더불어 공로상 격인 ‘오월의 광주상’을 수여한다. 조직위는 올해 첫 ‘오월의 광주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유 감독의 활약상을 알게 됐다고 한다. 나준영 조직위 위원(한국영상기자협회장)의 설명이다.

    “언론계에서는 전부터 힌츠페터 기자에 앞서 광주항쟁 현장을 촬영한 기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 인물을 확인하고자 여러 사람을 접촉하고 자료를 찾다가 그 주인공이 바로 유 감독이라는 걸 파악하게 됐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의 활동을 소개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 광주항쟁 현장에 처음 뛰어들어 참상을 세계에 알린 기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뒤늦게나마 드러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필자 역시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이 조사에 동참했다. 이를 바탕으로 광주항쟁 당시 미국 CBS 방송사 소속 영상 기자로 일한 유 감독의 활동상을 소개하려 한다.

    그에 앞서 힌츠페터 기자의 광주 취재 과정부터 살펴보자. 힌츠페터가 광주에 가게 된 것은 독일 동아시아 선교회 소속 파울 슈나이스 목사 부부 덕분이다. 슈나이스 목사가 광주트라우마센터 소식지에 기고한 ‘힌츠페터와 1980년 5월’이라는 제목의 글에 따르면, 슈나이스 목사는 1980년 5월 중순 일본 도쿄에 있었다. 그의 일본인 아내는 다른 선교사 아내와 함께 서울 조선호텔에 묵고 있었다. 이곳에서 슈나이스 목사 아내가 한국인 친구로부터 광주 상황을 처음 접했다. 광주와 전라도는 야권 지도자 김대중(DJ)을 지지하는 지역인데, 현재 휴전선을 지키던 군이 급히 광주로 이동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내는 슈나이스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알렸다. 슈나이스 목사는 곧바로 도쿄에 있는 독일 공영방송 기자 등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 이로써 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ARD-NDR) 일본 주재 영상 기자이던 힌츠페터가 광주로 향하게 된 것이다.



    힌츠페터가 광주에 도착한 것은 1980년 5월 20일 오후였다. 광주항쟁 발생 사흘째다. 힌츠페터는 즉시 현장 상황을 촬영하고, 다음날인 21일 오전 촬영 테이프를 챙겨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당시 외신은 국내에서 해외로 영상을 전송할 수 없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촬영 테이프를 들고 일본 도쿄에 가는 것이었다. 힌츠페터는 도쿄공항에 내려 현지 관계자에게 촬영 테이프를 전달한 뒤 곧 다시 광주로 향해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취재를 계속했다.

    1980년 5월 19일 ‘폭력적 시위 진압’ 카메라에 담아

    유영길 촬영감독 움직임은 이보다 빨랐다. 유 감독은 1980년 5월 당시 미국 CBS 서울지국 영상 기자였다. 그해 5월 19일 광주 동구청이 작성한 상황 일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10시 25분 미국 CBS 기자 3명이 촬영기와 마이크를 휴대하고 상공회의소 옥상으로 올라갔음.”(상황 일지 참조)

    1980년 5월 19일 광주 동구청이 작성한 상황 일지 일부. 유영길 감독 등 CBS 취재진이 광주항쟁 현장을 취재했음을 보여준다.  [5‧18 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19일 광주 동구청이 작성한 상황 일지 일부. 유영길 감독 등 CBS 취재진이 광주항쟁 현장을 취재했음을 보여준다. [5‧18 기념재단 제공]

    이 세 명 중 한 명이 바로 유 감독이다. 당시 CBS에서 광주항쟁 기사를 보도한 기자는 서울에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유 감독을 제외한 2명은 운전기사 등 현지 조력자일 것으로 보인다. 동구청 상황일지의 이 내용은, 광주항쟁 당시 공식 행정문서에 기록된 최초의 현장 취재진 동향이라는 점에서도 눈에 띈다.

    유 감독이 현지 조력자와 함께 5월 19일 오전 10시 25분 상공회의소 옥상에 올라간 것을 보면, 그는 늦어도 5월 18일 오후엔 광주에 도착해 현지 조력자를 구하는 등 취재 준비 작업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 감독 아내 김명자(82) 씨는 필자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남편이 일본에서 휴가를 보내다 갑자기 광주로 급파됐다”고 말했다. 김 씨에 따르면 유 감독은 일주일 일정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영화 관련 일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유 감독에게 평생 가장 큰 관심사여서, 그는 CBS 기자로 일하면서도 틈틈이 휴가를 내고 영화 촬영 관련 일을 했다고 한다.

    김 씨는 1980년 5월 그때 일본에 있는 줄 알았던 남편이 “광주에 와 있다”고 전화를 걸어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유 감독은 아내에게 “여기는 많이 위험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도 몸조심해라. 이상한 사람이 찾으면 절대 나가지 마라. 당분간 날 찾지도 마라.”

    유 감독은 며칠 뒤 다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지금 신문이나 방송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보도가 나오느냐”고 물었다. 김 씨가 “아무 뉴스도 없다”고 하자 크게 실망하면서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광주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후 유 감독은 아내에게 자신이 겪은 충격적인 일을 털어놓았다. 평소 집에서 일에 대해 좀체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그때만은 달랐다는 게 김 씨 전언이다. 그에 따르면, 유 감독은 광주항쟁 기간 중 어느 날 밤 사방이 깜깜해진 뒤 현지 대학생 도움으로 어느 산 중턱에 올랐다. 그곳에서 대학생 10~20명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유 감독은 이들과 함께 늦게까지 대화를 나눈 뒤 “내일 아침 6시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약속 시간에 다시 현장에 가보니 대학생 모두가 총에 맞아 숨을 거둔 상태였다.

    광주항쟁 취재 이후 유 감독은 현지에서의 기억 때문에 자주 괴로워했다고 한다. 술에 취한 채 부인에게 “더는 기자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무섭다. 괴롭다”고 하소연한 일도 있다. “너무도 끔찍한 일이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졌는데, 국내 어느 언론도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며 울분을 토하고 “왜 대학생들이 총에 맞아 죽고, 무고한 시민이 그토록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이던 김 씨도 유 감독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착검한 채 시위 진압하는 계엄군 모습 생생히 포착

    유 감독이 촬영한 영상은 5월 19일 미국 CBS 이브닝뉴스를 통해 처음 방송됐다. 세계 최초로 광주의 참상이 공개된 순간이었다.(CBS 보도 캡처) 당시 기사를 쓰고 보도한 기자는 CBS 도쿄지국 특파원이던 브루스 더닝이다. 그는 연세대 등 서울지역 시위 상황을 취재하러 광주항쟁 이전부터 서울에 와 있었다. 5월 19일 보도 당시 더닝은 서울에 머물며 유 감독이 촬영한 영상을 이용해 기사를 작성했다. 당시 영상에는 군이 탱크를 몰고 광주시내에 들어오는 모습, 총과 곤봉을 든 군인이 시민을 폭행하는 모습, 시민이 처절하게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진 모습, 젊은 남성 여러 명이 비참한 모습으로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강제 연행되는 광경 등이 생생하게 담겼다. 모두 유 감독이 현장에서 촬영해 보낸 것이다.

    1980년 5월 미국 CBS 뉴스에 보도된 광주항쟁 당시 모습. 한 시민이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진 이 모습은 유영길 감독이 촬영한 것이다. [한국영상기자협회 제공]

    1980년 5월 미국 CBS 뉴스에 보도된 광주항쟁 당시 모습. 한 시민이 피를 흘리며 길가에 쓰러진 이 모습은 유영길 감독이 촬영한 것이다. [한국영상기자협회 제공]

    1980년 5월 미국 CBS 뉴스에 보도된 광주항쟁 당시 모습. 젊은 남성 여러 명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강제 연행되는 광경은 유영길 감독이 촬영한 것이다. [한국영상기자협회 제공]

    1980년 5월 미국 CBS 뉴스에 보도된 광주항쟁 당시 모습. 젊은 남성 여러 명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강제 연행되는 광경은 유영길 감독이 촬영한 것이다. [한국영상기자협회 제공]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은 광주 동구청 상황일지와 미국 CBS 5월 19일 리포트 영상 및 아카이브 영상(유 감독이 5월 19일 촬영한 영상 전체)을 비교한 뒤 이렇게 분석했다.

    “CBS 영상은 동구청 3층 옥상에서 5월 19일 오전 10시 30분부터 12시 사이에 촬영한 것이 확실하다. 동구청 상황일지를 보면 당일 오전 11시 계엄군(11공수여단 61대대 소속) 소위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다는 묘사가 나온다. 유 감독 영상 가운데 이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 장면이 보인다. 또 군 자료에 따르면 5월 19일 오전 동구청이 있는 금남로 일대에 군중이 운집하자 11공수여단 61대대가 진압작전을 벌였다. 그 결과 점심시간 이후부터는 시위대가 금남로 아래쪽으로 밀려났다. 유 감독 영상은 아직 시위대가 금남로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위대와 계엄군의 충돌 초기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계엄군의 일방적 과격진압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위원이 꼽은 이 영상의 사료적 가치는 또 있다. 계엄군이 대검을 총구 쪽에 꽂고 있는 이른바 ‘착검(着劍)’ 모습이 선명히 포착된 점이다. 군은 1988년 광주항쟁 국회청문회 당시 착검 사실을 줄곧 부인했다. 당시 시위대 진압에 나섰던 11공수여단 61대대장 안모 중령은 1995년 12월 31일 검찰수사에서조차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저희 대대는 대검을 사용한 적이 없고 시위자를 체포한 사실도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 감독 영상으로 인해 이 진술은 거짓임이 확인됐다. 계엄군이 광주항쟁 초기부터 이미 착검을 할 정도로 시위대를 과격 진압했음도 드러났다.

    30년 영화 인생 속 15년 기자로서의 삶

    기자 시절 유영길 감독의 모습. [김명자 제공]

    기자 시절 유영길 감독의 모습. [김명자 제공]

    유 감독은 CBS 서울지국 영상 기자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15년 정도 일했다. 유 감독 아내 김 씨가 들려준 유 감독의 CBS 입사 배경은 매우 흥미롭다. 유 감독은 6·25 전쟁 당시 15세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미국인 종군기자 눈에 띄었다. 이 종군기자는 촬영 재능이 엿보이는 유 감독을 특별히 챙겨줬고, 전쟁 후 유 감독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도 해줬다고 한다.

    유 감독은 이후 인하대 공대 1학년 시절 영화 촬영 현장에 놀러가 일을 도와주다 영화와 인연을 맺고, 대학 중퇴 후 본격적으로 촬영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고 유현목 감독 영화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러던 어느 날, 6·25 때 만난 그 종군기자가 유명 언론인이 돼 한국에 왔다. 그는 수소문 끝에 유 감독을 찾아 CBS 서울지국 영상 기자 자리를 제안했다. 당시 영화 일은 배고픈 직업이어서 촬영감독만 하면서는 먹고 살기 힘들었다. 유 감독은 기자직 제안을 받아들이며 조건을 하나 걸었다. “영화를 1년에 한 편은 촬영하게 해 달라”였다. 유 감독은 이후 50대 중반까지 CBS 영상 기자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영화도 촬영했다. 촬영감독으로서 그가 한국 영화계에 남긴 족적은 굵고 화려하다. 반면 기자로서의 삶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유 감독은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장선우 감독 영화 ‘꽃잎’ 촬영감독 시절,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1995년 10월의 일이다. 당시 ‘꽃잎’ 촬영팀은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처음 발포한 5월 21일 상황을 촬영하고 있었다. 유 감독은 ‘한겨레’ 기자에게 5월 21일 광주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나는 미국 CBS 촬영기자로 광주에서 취재했다. ENG 방송 카메라는 꽤 무겁다. 이런 장비를 지고 전남대병원으로, 또 금남로로 공수부대가 남긴 참혹한 흔적을 찍으러 다녔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한 시민이 배터리를 대신 들어주겠다고 해서 고맙다며 건네줬다. 그런데 혼란 속에 그만 배터리를 든 시민과 헤어지고 말았다. 결국 배터리를 구하러 전남 장성으로 가게 됐다. 당시 장성에는 외신기자가 많이 모여 있었다. 광주시내 통신이 모두 끊기고, 장성우체국에만 회선 단 하나가 살아남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외신기자들이 송고를 위해 다 그곳에 모여 있었다. 거기 간 사이, 계엄군이 광주에서 시민을 향해 발포했다. 당시 장면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이 계속 한(恨)으로 남아 있다.”

    5월 21일 계엄군 발포 장면은 어느 언론도 포착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이 인터뷰에는 유 감독이 5월 19일 언론인 최초로 광주항쟁을 촬영했다는 내용은 없다.

    ‘힌츠페터 신화화’를 넘어

    이처럼 국내에서 ‘광주 속 유영길’의 중요성은 아무도 몰랐다. 반면 힌츠페터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는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언론인으로 통했다. 힌츠페터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대표적인 것으로 2003년 KBS 다큐멘터리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2017년 장훈 감독 영화 ‘택시 운전사’, 2018년 장영주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 등을 꼽을 수 있다. 힌츠페터는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힌츠페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신화화, 우상화 경향까지 나타났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광주의 참상을 세계 최초로 촬영해 알린 기자”라는 타이틀이다. 앤드류 잭슨 호주 모나쉬대 한국학과 교수는 지난해 1월 이런 현상의 문제점을 꼬집은 논문 ‘1980년 광주항쟁의 위르겐 힌츠페터와 외신 특파원’을 발표했다. 그는 힌츠페터가 세계 최초로 광주항쟁을 알린 기자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밝힌 여러 기자 가운데 한 명이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직 힌츠페터만 기억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잭슨 교수는 한국에서 제작한 여러 다큐멘터리와 영화, 뉴스 보도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당시 광주항쟁 상황을 최초로 보도한 언론사는 미국 CBS인데, 상당수 문헌이 힌츠페터를 최초 보도자로 소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도 비판했다.

    미국 CBS가 광주항쟁을 세계 최초로 보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제임스 라슨 한국뉴욕주립주대 교수가 1990년 발표한 논문 ‘텔레비전 시대의 조용한 외교: 한국에 대한 언론과 미국의 정책’에도 광주항쟁 소식이 5월 19일 미국 CBS 이브닝뉴스에 처음 보도됐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그럼에도 힌츠페터 영상이 널리 알려지고 주목받게 된 배경에는 영상저작권 문제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원상 조직위원장의 설명이다.

    “독일 언론계는 창작자(촬영자)가 영상물의 저작자 지위를 갖는 것을 인정한다. 창작자는 소속 언론사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도에서 일정한 수준의 이용권을 갖는다. 반면 미국은 창작자 권리를 제한한다. 창작자라 해도 개인이 직접 영상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양국의 차이 때문에 힌츠페터 촬영물이 세계적으로 확산한 반면 CBS 자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고 본다.”

    광주항쟁 이후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국내 시민사회단체는 세계 곳곳에 당시의 참상을 알리고자 애썼다. 힌츠페터 영상을 중심으로 여러 외신 보도 내용을 편집해 만든 비디오테이프가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이 영상에는 CBS를 비롯한 여러 방송사 뉴스가 포함돼 있지만, 힌츠페터 영상이 주를 이루다 보니 시청자는 모든 영상을 힌츠페터가 촬영한 것으로 오해하기 쉬웠다.

    물론 광주항쟁을 취재한 언론인으로서 힌츠페터의 노력과 업적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당시 광주에 있던 기자 가운데 그만큼 많이 움직이며 현장을 취재하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이는 없다. 힌츠페터는 50분짜리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을 통해 광주항쟁을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다만 국내 어느 언론이나 학자도 광주에서 활동한 영상 기자 유영길의 존재를 조명하지 못한 점은 아쉬운 일이다. 아내 김 씨는 “유 감독은 자신이 광주항쟁을 최초로 촬영한 기자인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심지어 자녀들에게조차 광주에서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혹시라도 가족이 안 좋은 일을 당하게 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 이후 유 감독이 작고한 1998년까지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 상황을 보면 그가 걱정한 이유를 짐작할 만도 하다.

    “무엇이든 한 번 빠지면 깊이 몰두했던 사람”

    아내 김 씨에게 유 감독은 무슨 일이든 한 번 빠지면 매우 깊이 몰두하는 사람, 자기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 가족보다 영화를 더 사랑한 사람이었다. 김 씨는 영상 기자 유영길에 대해 크게 두 가지를 기억하고 있다. 첫 번째가 광주항쟁 취재 후 괴로워하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1988년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를 촬영하고 돌아왔을 때의 모습이다. 그때도 어느 날 훌쩍 출장을 갔던 유 감독이 며칠 만에 집에 들어왔는데 손발과 얼굴 여기저기가 얼어붙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유 감독은 집에 들어서면서 부인에게 딱 한 마디를 했다.

    “특종했다.”

    유 감독 입에서 특종이란 말이 나온 건 이때가 유일했다고 한다. 당시 유 감독은 백담사 부근에서 빵과 우유만 먹으며 오랜 시간을 버틴 끝에, 언론사 최초로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의 ‘유배’ 모습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촬영감독으로서의 남편은 김씨 기억에 어떻게 남아 있을까. 김씨는 “늘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촬영할 때는 하이라이트인 분신 장면 촬영을 앞두고 일주일가량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전태일 분신 당시의 상황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촬영 도중 행여 배우나 스태프가 다치는 것은 아닐까?” 등이 고민의 주제였다. 그렇게 힘들던 촬영을 마치고 귀가해서는 이틀을 앓아누웠다. 영화 ‘꽃잎’ 촬영 때도 마찬가지였다. 촬영을 마무리하고 며칠을 끙끙 앓았다. 한 가지에 몰두하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붓고 결국 탈진해 쓰러지는 것이 ‘인간 유영길’의 특징이었던 셈이다.

    영화 위해 폭포에 몸을 내던진 촬영감독

    ‘동아일보’ 2006년 2월 15일자에 실린 ‘백형찬의 문화칼럼’에는 ‘촬영감독 유영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담겼다. 하길종 감독 영화 ‘한네의 승천’ 촬영 당시 일이다. 이 영화는 한국적 샤머니즘을 주제로 ‘한네’라는 여성의 비극적 사랑을 다루고 있다. 당시 칼럼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폭포에서 여인이 떨어지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인형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신해 봤지만 아무래도 생동감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일이어서 연기자는 물론 스턴트맨까지도 벌벌 떨며 무서워했다.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이때 카메라를 잡고 있던 촬영감독이 여자 한복으로 갈아입고 폭포 위로 올라가 몸을 던졌다. 그 한 장면을 찍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 촬영감독은 한 작품 한 작품에 혼을 담아 찍었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가 촬영한 영화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작품들은 한국영화 가운데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초록물고기’ ‘하얀 전쟁’ 등이다. 그 촬영감독이 바로 고 유영길 씨다.”

    유 감독은 1998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촬영하다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촬영감독으로서 그의 족적은 풍부하다. 유 감독과 함께 한 영화인들은 하나같이 그의 영화 사랑과 열정에 탄복하고 경의를 표한다. 광주항쟁 41년이 지난 시점에 이제는 ‘영상 기자 유영길’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할 때다. 유 감독의 평소 지론은 영화인으로서든 기자로서든 삶을 대하던 그의 철학을 잘 담고 있다.

    “좋은 구도는 없다. 하지만 나쁜 구도는 있다. 작위적인 것은 나쁜 구도다.”

    #광주항쟁첫보도 #유영길촬영감독 #광주민주화운동 #힌츠페터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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