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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일본을 따라잡는다”는 호암의 예언 [+영상]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㊲] 포스코에 울려 퍼진 韓日 기술자들의 애국가 합창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3-09-0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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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년 한일 기술협력 생생한 단면

    • “죽기 살기로 기술 흡수한 한국인에 놀라”

    • ‘제철보국’ 정신으로 투신한 포항제철 초기 멤버들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Gettyimage]

    [Gettyimage]

    6월 7일자 일본 니혼게이자이에 이색적인 장문의 기사 하나가 실렸다. ‘포스코 포항제철소, 한일 협력의 출발… 한국 수출입국의 초석으로’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서울특파원 호소카와 기자가 쓴 것이었다.

    호소카와 기자는 올해로 만 50년을 맞는 포스코 창립을 계기로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포항에서 있었던 제1고로 시운전에 참여한 한국인 기술자들과 일본인 기술자들을 한국과 일본에서 직접 만나 당시 증언을 들었다. 광복 이후 산업사에서 한일 기술협력의 생생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기사였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3년 6월 8일 포항시에서 한국 최초의 일관 제철소가 가동됐다. 훗날 포스코가 된 국영 포항종합제철 1호 고로의 ‘시운전’이었다. 그날, 신일본제강(현재 일본제철) 포항제철 협력부 기술자 고니시(87) 씨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100m가 넘는 고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이 들어가고 24시간 후 녹아내린 새빨간 쇳물이 불꽃을 튀기며 흘러나오자 300여 명의 남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더러운 작업복을 입은 채 서로 껴안고 만세를 불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일본인 기술자들도 함께 불렀다. 50년 전 일을 떠올리던 고니시 씨는 ‘그 광경은 정말 각별했다.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고 했다.”

    포항제철을 만들 때 일본의 기술과 인력이 투입됐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50년 전 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기술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전해 들으니 새삼 한일 기술협력의 현장감이 느껴졌다. 더구나 애국가를 한국과 일본 기술자들이 같이 불렀다는 증언은 놀라웠다.

    철은 지금의 반도체나 마찬가지다. 철을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만들 수 없다면 공업화로 넘어갈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제철소는 산업혁명의 출발이다.

    무엇보다 쇳물에서 불순물을 뽑아내고 철판을 생산하고 제품까지 한 공장에서 만드는 일관 제철소가 있어야 했다. 1950년대 북한에는 일관 제철소가 두 곳이나 있었지만 한국에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정부가 일관 제철소 건설에 매진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대한민국 산업혁명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 [동아DB]

    대한민국 산업혁명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 [동아DB]

    다섯 번이나 좌절된 포항제철 건설

    기술도 기술이거니와 돈이 없으니 외자를 들여와야 했는데 ‘한국처럼 가난한 나라가 어떻게 제철소를 만드느냐, 한마디로 꿈도 야무지다’는 선진국들의 의심과 비아냥에 선뜻 돈을 대겠다는 나라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1958년 자유당 정권 말기에 20만t 규모 철강 공장을 강원도 양양에 짓겠다고 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가 1차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울산공업단지에 32만t 규모의 일관 제철소를 만들겠다면서 상공부에 철강자문위원회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외자 조달에 실패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이듬해 1962년에는 서독의 DKG 그룹과 용역 계약을 체결해 ‘한국종합제철주식회사’를 세우기로 하지만 역시 차관 조달에 실패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다섯 번의 좌절 끝에 포항제철이 세워졌다. 1고로에서 첫 쇳물을 뽑아내면서 한국 공업화의 시동이 걸린 것은 ‘박태준’이라는 위대한 리더와 함께 목숨 바쳐 일한 근로자들 덕이다. 이에 더해 제철 선진국이던 일본으로부터 얻은 돈과 기술이 결정적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1973년 포철 1고로에서 첫 쇳물을 뽑아내고 만세를 부르는 박태준 회장과 직원들. [동아DB]

    1973년 포철 1고로에서 첫 쇳물을 뽑아내고 만세를 부르는 박태준 회장과 직원들. [동아DB]

    대한민국 철강 역사의 산실이자 경제발전의 초석이 된 포항 1고로는 2021년 수명이 다해 불을 껐다. [동아DB]

    대한민국 철강 역사의 산실이자 경제발전의 초석이 된 포항 1고로는 2021년 수명이 다해 불을 껐다. [동아DB]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얻은 경제협력자금 5억 달러 중 1억2000만 달러를 제철소 건설에 투입했고 기술 지원도 받았다. 일본의 후지제강·야하타제강(현 일본제철), 일본강관(현 JFE스틸) 등 3사와 기술지원 계약을 맺은 것이다.

    앞서 소개한 니혼게이자이 기사에 따르면 50년 전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을 배운 포스코 기술자는 500여 명에 달했다. 한국으로 건너와 우리에게 기술을 가르쳐준 일본인 기술자도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기사를 쓴 호소카와 기자를 직접 만나 취재 후기를 들어보았다.

    그는 “일본과 한국인 기술자들이 단합해 이뤄낸 포스코 초기 역사는 한일 산업 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라는 생각에 50주년을 맞아 기획한 기사”라며 “당시 한국에서 일한 일본인 기술자들의 명단을 어렵게 입수해 일일이 확인한 결과 다섯 명과 겨우 연락이 닿았다. 대부분 고령자들이라 돌아가신 분도 많았고 요양병원 등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분들도 많았다”고 전했다.

    호소카와 기자는 한국인 기술자들과도 인터뷰했다. 기사에 소개된 포스코 직원들 말에 따르면 “일본 제철소 경영진과 기술자들은 한국에 기술을 전수하는 것에 대해 진심이었다”고 했다.

    일본강관 가와사키 제철소에서 기술 연수를 했다는 정용희(78)씨는 “단지 기술만 가르쳐준 게 아니라 제철 사업이란 게 뭐고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철학까지 가르쳐줬다”며 “연수 막바지에는 공장 운영까지 경험해 보는 기회를 줬다”고 했다. 기사에 소개된 그의 말이다.

    “연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일본 제철소장이 어느 날 갑자기 ‘자, 이제 여러분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보라’며 공장 운영을 맡겼습니다. 아무리 연수라지만 공장 운영까지 한국인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우리는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당시 한일 철강 근로자들 사이에는 깊은 신뢰와 의리가 있었습니다.”

    열연 공장 건설을 도와주기 위해 포항에서 3년간 살기도 했다는 와시타(80) 씨도 “한국 기술자들을 우리 회사 신입 사원처럼 생각했다”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제대로 키워 돌려보내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국적 뛰어넘어 합심한 한일 기술자들

    일본인 기술자들이 한국인들을 열심히 가르친 배경에는 무엇보다 포스코 직원들의 배우겠다는 열정이 큰 동력이 됐다는 게 일본인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앞서 기사에 소개한 고니시 씨는 “가난한 한국에 발전의 초석이 되는, 제대로 된 제철소를 만드는 걸 돕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건 한국인들의 엄청난 열정 때문이었다”고 했다.

    나카가와(88) 씨도 “연수 온 포스코 직원들 모두가 일본어까지 공부한 뒤 건너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한국 최초의 제철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기술자였던 이나사키(80) 씨도 “한국인들의 능력은 정말 뛰어났다. 죽기 살기로 기술을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자세에 감동했고 그들을 가르치는 데 강한 보람을 느꼈다”며 “우리는 연수가 끝난 뒤에도 개인적 교류를 계속했다. 담당 계장이던 이선종 씨와는 10년 후 서울에서 만나 소주도 한잔했다. 포스코 직원들과의 교류는 내 인생의 큰 보물이 됐다. 포스코가 이렇게 빠른 발전을 이룰 줄은 몰랐다. 언젠가 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 옛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에 등장하는 이선종 씨도 기사에 소개되는 데 그에 따르면 “당시 포스코 직원들 마음속 밑바닥에는 과거 조선인들의 목숨 값으로 받아낸 돈으로 제철소를 짓는 것이니만큼 반드시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고 한다. 이 씨의 말이다.

    “포항제철소 설립 초기 멤버들은 모두 ‘제철보국’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건설에 투입된 일본의 경제협력 자금은 민족의 피 값으로 얻은 것 아닌가. 우리는 일본 기술자들로부터 제철소 건설, 설비, 운영 기술까지 배웠다. 일본 기술자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토론을 함께 했다. 열연 설비 컴퓨터 제어 기술을 가르쳐준 이나사키 씨는 진정한 스승이었다. 50년 전 한일 철강인들은 국경과 반일, 반한 감정을 뛰어넘어 동지애 정신으로 똘똘 뭉쳤었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한국에 제철 기술을 전수하는 것에 “경쟁자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비판적 목소리도 많았다고 한다. 여기에 독재정권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했던 히다카 미키오(88) 씨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을 돕는 일에 대해 당시만 해도 일본 사회는 부정적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연일 보도되던 시기였고,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에 기술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언론의 비판도 있었다. ‘한국에 일관 제철소는 불가능하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우리는 그야말로 칭찬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밖에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워낙 높다 보니 일한(日韓) 기술자들이 제대로 일을 완수해 이런 분위기에 반격을 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것이 동지애로 이어졌다.”

    한국을 돕고 싶다는 일본인들의 마음에는 속죄 의식도 있었다고 한다. 이나사키(80) 씨의 말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재일(在日) 한국인이 많았는데 이들이 학대받고 차별받는 걸 보면서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느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식이 그때부터 싹텄던 것 같다.”

    이 기사의 또 다른 미덕은 포스코 건설에 참여한 일본 제철 기업들이 나중에 수혜를 보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포스코 건설 지원이 훗날 미쓰비시중공업 등의 해외 진출을 도운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호소카와 기자는 “이번에 취재하면서 한일 기술협력 역사에 대해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 역시 많이 알게 됐다”면서 “포스코와 신일본제철의 역사는 한일관계처럼 때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갈등도 빚으며 성장해 왔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접하면 일본과 한국이 지나온 예사롭지 않은 시간에 주목하게 된다. 한일관계의 무거움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창업 1세대의 ‘사업보국’ 정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일관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노 재팬’을 외친 것이 언제인지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한국인들은 일본 맥주를 사 먹고 일본 차(車)를 사고 일본 여행을 하고 있다. 한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로 야당에서는 연일 일본에 대해 맹비난을 하고 있다. 지난 정권에 비해 한일관계는 좋아졌지만 또 무엇이 뇌관이 돼 관계가 급랭할지 알 수 없는 게 한일관계다.

    기자는 이번에 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 취재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한국과 일본은 경제 안보적으로 협업할 것이 많다. 여기에 요즘 ‘K-기업가 정신’이 화두인데 기업을 통해 나라에 기여한다는 ‘사업보국’이 한국 기업인들의 독특한 정신이라는 데에도 주목하게 됐다.

    ‘경제사상가 이건희’를 연구하면서 삼성의 창업주인 호암 때부터 내려온 기업을 통해 애국한다는 ‘사업보국’ 정신에 주목했다. 이는 외국에는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기업가 정신으로 보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창업 1세대는 대부분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인 눈치 보랴 한국인 눈치 보랴 그야말로 규제가 겹겹인 상황에서 기업을 시작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 합병한 후 회사령을 공포해 한국인의 회사 설립을 통제했다. 이들이 기업을 일구고 번창시킨 동력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잘사는 것만이 최고의 복수라는 의지가 있었다.

    보부상으로 시작해 우리나라 최장수 기업 두산을 만든 박승직의 장남 박두병도 부친이 상업에 집착한 이유를 “부를 축적해서 일본인이 식민지 백성인 조선인을 얕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집념 때문이었다”고 했다.(책 ‘한국 역사 속의 기업가들’ 중)

    우리의 경우 일제 식민지 지배 경험은 고도성장과 K-기업가 정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국영기업에서 출발한 포스코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재벌 기업들은 과거 정부의 정책적 지원뿐 아니라 국외적으로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매우 크다.

    상생을 기반으로 한 한일관계는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이고, 지금 일고 있는 관계 개선의 훈풍을 이어가려면 더욱 깊이 있는 시선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연재를 다시 시작하면서 우선 일본을 화두로 한 한일 산업 교류사에 주목하게 된 이유다.

    1970~8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기에 마침 이웃 나라 일본은 미국을 위협할 정도의 경제대국으로 크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의 정보와 지식이 모이는 센터이자 중심이었다. 이곳을 활용한 대표적 기업인이 바로 호암이다. 반도체 분야도 그랬지만 삼성은 전자 사업을 시작할 때 일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국내 많은 기업이 일본을 자본과 기술, 경영 방식 도입의 거점으로 활용했지만 호암은 이 정도가 아니라 일본을 기술정보와 시장 정보의 수집 창구로 활용했다.

    1960년부터 매년 정초가 되면 도쿄를 방문해 일본 기업인, 언론인들과 교류하면서 기술과 시장 정보를 입수했다. 전자 사업과 반도체, 항공산업 진출 등이 모두 ‘도쿄 구상’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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