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구학서 前 신세계 회장이 본 일본과 일본인

‘잃어버린 30년’ 버텨낸 나라의 빛과 그늘

  • 구학서 前 신세계 회장

    입력2023-10-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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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경제, 회복세 접어든 숨은 이유

    • 엔고 상황에도 생존한 수출경쟁력

    • 공무원과의 식사 그리고 ‘국화와 칼’

    • 잘 정돈된 사회주의 국가의 느낌

    • NHK 뉴스에 등장하는 BTS

    • 美·中에 NO라고 말하기 위하여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바라본 일본 도쿄 도심 전경. 왼쪽 앞의 쌍둥이 빌딩은 도쿄도청이며 뒤로 보이는 오피스 빌딩이 밀집한 곳은 도쿄역이 있는 시내 중심가다. [동아DB]

    헬기를 타고 상공에서 바라본 일본 도쿄 도심 전경. 왼쪽 앞의 쌍둥이 빌딩은 도쿄도청이며 뒤로 보이는 오피스 빌딩이 밀집한 곳은 도쿄역이 있는 시내 중심가다. [동아DB]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 경험을 하는 시기가 있다. 나에게는 1980년대 중반 4년간 일본 도쿄에서 상사의 주재원으로 지낸 것이 그러했다. 내 삶을 크게 나눈다면 일본 주재 전과 후가 될 만큼 일본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중요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1980년대는 일본의 최전성기였다. 도요타 자동차의 당기순이익이 한국의 상장기업 전체 이익보다 많았다. 소니는 소프트웨어 부문을 보강한다고 컬럼비아 영화사를 사들였고, 자동차·가전·반도체 등 모든 산업 부문에서 일본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선점해 독주했으며, VTR·LD 등 첨단산업의 기술표준도 일본 기업들이 선도했다. 일본 기업들은 미국 맨해튼이나 로스앤젤레스(LA)의 주요 건물을 사들였고, 소니 창업주인 모리타 아키오와 극우파 작가이며 도쿄 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공저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일본은 1973년과 1979년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산업구조를 기존의 중공업 중심에서 자동차, 가전, 반도체 등 새로운 산업으로 변화시켰다. 내 눈에 비친 모든 것이 새롭고 부러울 뿐이었다. 아키하바라의 전자상가를 들러 새로 출시된 전자제품을 살펴보는 것은 주말마다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됐다.

    전자제품만큼 나를 매료한 건 다양한 문헌 자료였다. 가스미카세키의 정부간행물 센터에는 본사에서 원하는 자료가 다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던 중국과 관련한 방대한 자료가 있다는 점이었다. 일본은 중국에 이토록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면서도 왜 중국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는 것일까 의아했다.

    당시 일본 기업에는 사내 유보금이 많았다. 베스트셀러 도서 ‘도요타 재무부’는 도요타 재무부서가 매년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지 강조하면서 도요타가 10년 동안 운동회만 해도 먹고살 것이 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이처럼 일본 기업에는 투자 여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왜 거대한 중국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일까. 히타치, NEC 등 몇몇 전자회사와 야오한 등 유통 기업들이 간보기식으로 중국에 진출했지만 모두 조기에 철수했다.



    日이 中 투자에 신중했던 이유

    중국에는 당시 ‘외환형평법’이 있어 기업별로 외환형평(foreign exchange balance)을 맞춰야 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 돈을 벌어도 외환이 없으면 부품을 수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투자 원금이나 과실 송금조차 불가능했다.

    1986년 삼성전자로 복귀해 중국사업 태스크(task) 팀장으로 중국에 출장을 갔다. 이미 중국 회사와 베이징 근교에 냉장고 합작 공장을 짓기로 양해각서(MOU)가 체결돼 있었다. 한 달 이상 베이징에 머물면서 공장만 짓는다고 투자가 끝나는 게 아님을 알게 됐다. 냉장고의 핵심 부품인 컴프레서를 중국 내에서 조달할 수 없었다. 컴프레서를 수입하기 위한 달러가 별도로 필요했다. 중국에서 냉장고를 많이 판다 해도 달러는 들어오지 않는 구조다 보니 판매량과 비례해 더 많은 달러를 한국에서 가져와야 했다. 공장을 돌리려면 중국에 부품 공장을 추가로 지어야만 하고, 달러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투자 원금을 증액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 당시 중국 돈은 두 종류로 구분됐다. 하나는 달러로 바꿀 수 있지만, 다른 하나는 중국 내에서만 쓸 수 있었다. 출장을 연기하면서까지 계약 성사를 위해 애썼지만 결국 MOU를 파기하고 귀국해야 했다. 냉장고 합작 공장을 기대한 경영진에게는 질책을 들었다. (다행히(?) 곧이어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외려 선견지명이 있다는 애기도 들었다.) 초기에 중국에 진출했던 일본 기업들도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철수했다. 그 후 진출한 한국 기업들도 투자 원금은 물론 손실금과 위약금까지 감수하며 철수해야 했다.

    돌이켜 보면 일본은 이때부터 중국을 장기적으로 등장할 강력한 경쟁상대로 경계한 셈이었다. 폴크스바겐이 중국 시장에 뛰어들 때도 도요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국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중국 시장에 뛰어들었다. 중국에 텔레비전,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뿐 아니라 CRT, 컴프레서 같은 핵심 부품에서 메모리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장을 지었다. 이들 핵심 부품은 공장의 설비 자체가 첨단기술을 동반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기술 유출은 시간문제였다.

    이로 인해 한국은 산업구조상으로도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중국에 엮이게 됐다. 중국 산업 근대화의 일등 공신이 된 것이다. 일본이 우려한 대로 중국은 전자제품뿐 아니라 자동차 시장에서도 일본과 1~2위를 다투는 경쟁국이 됐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일본이 가교 구실을 했다면, 중국의 산업화 과정에는 한국이 가교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눈치만 살피는 신세로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처지다. 중국 의존도가 낮은 일본은 미·중이 어떤 결정을 해도 상관없다는 태연한 입장이다. 마침 일본 경제가 30년 만에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닛케이지수가 33년 만에 3만3000을 돌파했고, 무역수지도 호전되고 있으며 엔저로 외국인 투자도 몰리고 있다. 미·중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중국 경제가 위기에 처한 와중에도 일본 경제가 살아나는 건 일본이 중국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 엔저 호황 때는 1달러당 270엔을 넘기도 했으나, 1980년대 중반에는 엔고가 되면서 1달러당 90엔까지 엔화 가치가 높아진 적도 있다. ‘잃어버린 30년’의 배후에는 환율이라는 변수가 있다. 급격한 엔고에 가장 득을 본 나라는 한국이다. 그중에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처럼 일본 기업과 경쟁한 수출 기업들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력 없이 매년 두 자릿수로 임금을 인상하고 성과급 잔치를 해도 엔화 가치 급등으로 일본이 수출경쟁력을 잃은 덕에 한국의 수출 기업이 호황을 누렸다. 지금은 1달러당 130~150엔 수준으로 엔화 가치가 하락한 정도지만, 일본은 1달러당 90엔대의 엔고에도 살아남는 경쟁력을 갖춘 나라다.

    반도체 위탁생산 1위인 대만 TSMC가 일본에 진출했고, 삼성전자도 반도체 후공정 공장을 일본에 짓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이 미·중 반도체 전쟁에서 자유롭다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놀랍게도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도 일본에 공장을 짓는 이유가 된다는 점이다. 반면 롯데마트나 이마트는 중국에서 철수했다. 유통 기업은 철수하면 그만이다. 이와 달리 반도체 같은 장치산업은 쉽게 철수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공장을 계속 가동할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나 자신도 중국 투자에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지난해 12월 28일 저녁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菊陽)정의 TSMC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에서 대낮처럼 조명을 환하게 밝힌 채 야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구마모토=이상훈 동아일보 기자]

    지난해 12월 28일 저녁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菊陽)정의 TSMC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에서 대낮처럼 조명을 환하게 밝힌 채 야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구마모토=이상훈 동아일보 기자]

    수치의 문화

    1982년 4월 도쿄에 도착해 집을 구할 때 일이다. 적당한 집이 있어 계약하려 했는데, 부동산에서는 집주인이 계약할 마음이 없으니 직접 가서 설득해 보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임차인이 원하면 계약 기간을 연장해 줘야 하고 임차인 동의 없이 임대료를 올릴 수도 없어 집주인이 임차인을 선정할 때 무척 까다롭게 군다는 것이다.

    나는 집주인을 만나 한국에서 가장 큰 삼성이라는 회사의 주재원이고, 재입국 비자 발급도 4년 이상 해주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 4년 이상은 거주할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명함과 회사의 브로셔를 보여주고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일본에서도 유명한 가스미카세키 빌딩에 있다고 설명하자 그제야 집주인이 긍정적 태도로 돌아서 계약이 성사됐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일본 사람은 삼성이나 현대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 도쿄사무소에 출근하던 날, 주재전무가 자기 방으로 불러 일본 생활의 주의 사항을 알려줬다. ‘아침에 절대 김치는 먹지 마라’ ‘엘리베이터에서 마늘 냄새가 나면 일본 사람들이 싫어한다’ ‘아침에 김치를 안 먹었어도 양치질은 꼭 하고 나와라’ ‘목욕도 자주 해라’ ‘한국 사람 몸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싫어하는 마늘 냄새가 난다’ 등 듣기 불편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는데 아파트 관리인이 나를 불렀다. “구 상이 이사 오고 난 뒤부터 분리수거가 되지 않아 재분류를 하느라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는 유리, 깡통, 종이 등을 재활용품으로 분리해 정해진 장소에 버리고 음식물은 따로 모아 버리라는 둥 한참을 교육하고 아내에게도 반드시 교육하라고 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분리수거가 생활화됐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쓰레기를 한꺼번에 버렸다. 아파트 관리인에게 주의를 받아야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일본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교육받는다. 유치원에 입학하면 줄서기와 지진 대피 요령부터 배운다. 버스를 타도 아이들은 자리에 앉지 않는다. 빈자리가 있으면 재빨리 자기 아이를 앉히려 하는 우리 부모들과 많이 다르다. 우리는 한낮에 교통을 차단하고 각종 공사를 하지만 일본에서는 한낮에 도심에서 교통을 차단하고 공사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의 공사는 한밤중에 한다. 심야수당을 주는 것이 교통을 차단하고 낮에 공사하는 것보다 사회적 비용이 적게 든다고 보는 경제적 이유도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있다.

    한번은 내 계좌에 2만 엔 정도의 돈이 입금된 일이 있다. 은행에 알아보니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아파트를 지었는데 공사소음에 대한 보상으로 메이와쿠료(迷惑料)를 산정해 보냈다고 했다. 심야에 공사해서 아파트를 짓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보상을 해준 것이다. 당사자는 거의 느끼지 못한 소음 피해에도 보상하는 문화에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첫 번째가 ‘메이와쿠’ 문화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부러웠던 것 중 하나가 공무원들의 자존감과 위상이었다. 주재 2년차에 일본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나왔다. 3명이 나왔는데 정기 세무조사라 했다. 이들은 점심으로 도시락을 싸오고 보온병에 음료까지 담아 왔다. 쉬는 시간에 다과를 권해도 모두 거절했다. 식사 한번 하자고 해도 상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조사를 받으면서 놀라웠던 점은 피조사자에 대한 공무원들의 기본 자세였다. 우리나라에서 세무조사를 받을 때는 피조사자가 모든 자료를 준비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조사자에게 설명하는 일이 많았다. 일본에서는 조사자가 많은 자료를 준비해 납세자를 설득하는 일이 많았다. 회사의 회계 처리에 잘못이 있으면 자료를 구해 와 피조사자가 납득할 때까지 설명하고 확인을 요구했다.

    재외 주재원은 급여 외에도 주택 임차료를 실비로 지급받게 돼 있다. 이는 당연히 근로소득에 합산해 소득세를 원천징수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완벽히 회계 처리를 하면 조사원들이 세무조사에서 추징할 것이 없어 다른 문제를 지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택 임차료를 근로소득에서 고의로 누락하기도 했다.

    예상대로 조사원은 그 사항을 지적하면서 세법 조항을 설명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일부러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우겼다. 세법에 광산이나 오지에서는 사택을 제공해도 근로소득에 합산하지 않는다고 돼 있는데, 우리 같은 외국인에게는 도쿄가 오지이기 때문에 사택 제공은 근로소득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나중에는 판례까지 보여주며 설득해 왔다. 속으로는 미안했지만 못이기는 척하고 수긍해 줬다.

    세무조사가 끝나고 몇 주 뒤 엽서가 한 장 날아왔다. 저녁식사를 하자면서 1인당 5000엔 내에서 하도록 상사의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자신들은 일본 국내 기업과는 식사하는 일이 없지만, 외국인인 내가 여러 번 식사를 요청했는데 거절만 하는 것이 예의도 아니고, 또 그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 예외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라 했다.

    그 자리에서 조사원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일본의 세무 공무원은 아무도 뇌물을 한 푼도 받지 않는가.”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답변했다. 문제가 생기면 연금도 받을 수 없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텐데 누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답변을 들으며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 생각났다.

    ‘국화와 칼’은 1944년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 국무성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의 행동과 가치관을 연구하기 위해 베네딕트에게 의뢰해 나온 책이다. 베네딕트는 서구의 문화가 죄의식의 문화라면 일본 문화는 수치의 문화라고 했다. 죄의식의 문화에서는 악한 행동을 했을 때 내면에서 발생하는 죄의식에 저해되지 않도록 행동한다. 수치의 문화에서는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못했을 때 초래될 수치심과 명예의 훼손을 피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 공무원의 말마따나 일본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이유는 더 양심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규정을 지키는 쪽이 사회적 매장이라는 수치스러운 일을 피하고 명예를 지킬 수 있기에 훨씬 안전하고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진풍경

    1960~70년대에는 일본도 극심한 노사분규를 겪었다. 내가 일본에 도착한 1982년에도 후유증은 남아 있었다. 직원들의 책상 아래에는 이불 보따리가 한 무더기씩 놓여 있었다. 현지 사원에게 물어보니 지하철이 파업하면 사무실에서 잠을 자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후 어떠한 노사분규 사례도 본 적이 없다. 춘투라고 하여 매년 봄 임금협상을 하지만 분규로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도요타가 10년 동안 운동회만 해도 끄떡없다고 할 만큼 일본 기업이 최고의 실적을 내고 많은 유보금을 쌓아두는데도 노조의 요구 사항은 매년 몇천 엔 수준의 연봉 인상이었다. 일본 노조의 태도가 나에겐 외려 이상하게 보였다.

    출퇴근 시 자가용을 이용하는 근로자는 드물었고 대부분 지하철을 이용했다. 대부분 직원은 도쿄에서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 거리 근교의 장기 임대주택에 살았다. 결혼하면 한 사람 월급은 몽땅 주택 임차료로 나간다고 했다. 하지만 젊은 직장인이 내 집 마련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장기 임대주택의 원리금을 20년 정도 상환하면 자기 집이 되기 때문에 젊은 시절 임차료 부담으로 어렵게 살아야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 집 마련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는 듯했다. 주위의 모두가 동일한 조건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불만이 없는 것도 같다. 우리처럼 부모 잘 만나 신혼부터 내 집을 갖고 출발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일본은 자본주의 사회라기보다는 잘 정돈된 사회주의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은 좁은 집에서 살지만 시내 한가운데에 근린공원이 많고 야외에는 더 넓은 공공시설이 있다.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기에 넓은 집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의 생활 습관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2021년 10월 일본 중의원 선거를 다룬 뉴스에는 전국 동사무소 직원이 총동원돼 수만 자루씩 연필을 깎는 광경이 보도됐다. 중의원 선거 기표는 지지 후보의 이름(full name)을 연필로 적게 돼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한 번 쓴 연필을 다시 쓸 수 없어 몽당연필을 만들어 한 번씩만 쓰다 보니 지방공무원이 총동원돼 몽당연필을 깎는 우스꽝스러운 진풍경이 연출됐다.

    기표 방법을 바꾸려면 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기존 의원에게 유리한 방식이어서 아무도 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하지 않는다. 일본 중의원이나 참의원 중에는 대를 이어하거나, 7선 이상의 다선 의원이 많다. 일본인의 이름은 한자로 어려운 자도 많아 읽고 쓰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이 새 인물에게 불리한 투표 제도가 지속되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근검절약이 생활화된 일본 사람들이 파친코에 빠지는 것도 신기했다. 파친코나 야키니쿠는 재일교포들이 운영하는 업소에 많고, 이를 통해 부를 쌓아 한국에 투자하거나 고향에 학교를 세우는 분도 많다. 도쿄 최고급 호텔인 오쿠라 호텔에서는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는 결혼식을 할 수가 없지만 가끔 한국의 일류 가수들이 연회장에서 한국 가요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주차장과 도로변에 검은색 캐딜락이 줄 서 있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한다. 대부분 주인은 파친코 사장들이고 축의금으로 200만~300만 엔씩 들고 온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현금 사용 문화다. 아직도 소규모 상점이나 식당에서는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다. 현금 결제를 할 때는 부가세를 따로 붙여 1엔 단위까지 계산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 여행을 며칠 하면 주머니에 동전이 수북이 쌓인다. 최근에는 선불카드를 통해 교통 요금이나 편의점 결제 등에 활용할 수 있어 그나마 불편이 줄었지만, 휴대전화에 신용카드 기능을 탑재한 한국과 비교하면 일본의 국가적 위상에 걸맞지 않은 궁색한 모습이다.

    일본인들은 선진 문물을 쉽게 받아들여 소화하는 능력이 있는 동시에 자기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생각도 매우 강한 이중성이 있다. 일본에서 50년 이상 된 가게를 노포(老鋪·시니세)라 하는데, 200년 이상 된 가게도 30여 곳이나 된다. 야마나시현에는 1300년 이상 된 료칸(旅館)이 아직도 운영되고 있고, 비록 2006년에 파산했지만 전 세계 최장수 기업으로 알려진 곤고구미(金剛組)라는 건설사는 1428년간 사찰 건축 전문회사로 운영됐다. 곤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 열도가 흔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놀랍게도 이 위대한 기업의 창업주는 서기 578년 백제 부여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기업에 근무하다 전업해 자영업자가 된 경우가 많다. 이에 전문성도 부족하고 경쟁에도 취약하다. 일본의 자영업자들은 대부분 대를 이어 사업하기 때문에 장인 정신을 중요시 해 자부심도 강하고 전문성도 뛰어나다. 경쟁자가 등장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자영업이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다. 승계할 가업이 있다는 건 경제가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도전 정신을 부족하게 만들어 경제발전의 장애가 되기도 한다.

    도쿄올림픽을 사흘 앞둔 2021년 7월 20일 도쿄의 상징 시부야 스크램블을 BTS(방탄소년단) 앨범 홍보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동아DB]

    도쿄올림픽을 사흘 앞둔 2021년 7월 20일 도쿄의 상징 시부야 스크램블을 BTS(방탄소년단) 앨범 홍보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동아DB]

    삼성의 반도체 진출 당시 뒷얘기

    재벌이라는 용어의 탄생지는 일본이다. 맥아더는 전후에 재벌을 전범으로 규정해 해체시켰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재벌 기업 이름과 회사는 남아 있지만 대주주로서의 재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기업에는 지배 주주가 따로 없지만 경영진 승계가 원활하게 이뤄진다. 객관적인 평가와 여론에 따라 경영진 존속 여부가 결정된다. 정부 개입 없이 경영진 선임이 어려운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일본 기업의 지배구조는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주식회사 제도의 이상적 표본으로 보여 부럽기도 하다. 다만 성과에 대한 평가와 여론이 인사를 좌우하는 탓에 일본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단기 성과에 집착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 기업의 장점이자 단점이 사업부제다. 사업부제는 사업부별로 성과를 분명히 평가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장점이 있다. 반면 단기 성과 위주의 경영을 더욱 심화시키기는 단점도 있다. 한때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일본의 사업부제를 참고해 그룹 경영의 핵심지표로 개사제(個事制·개인별 사업부제)를 도입한 적이 있다. 물론 삼성전자도 사업부제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장기 성장을 위한 투자는 전사적 관점에서 이뤄진다. 가전 부문이 크게 이익을 내지 못해도 휴대폰이나 반도체 부문에서 많은 이익을 창출하면 이것을 다른 부문에 재투자하는 식이다.

    2000년대 초반 대형 TV를 생산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독일제 이중사출기는 대당 20억 원이 넘었다. 삼성전자는 이 제품을 대량 구매해서 협력업체에 무상으로 대여했다. 이러한 투자를 통해 소니 등 일본 기업을 추월하면서 대형TV 시장을 선점했고, 시장을 석권할 전기를 마련했다. 사업부제 운영을 고수하며 가전 부문을 반도체와 별도로 운영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도체 사업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던 일본은 연구개발비 투자에 따르는 부담을 줄이려 했다. NEC, 도시바, 히타치 등은 연구비 효율화를 명분으로 개발 부문을 합쳐 별도의 회사를 세워 운영했다. 덕분에 비용은 줄였겠지만 경쟁력의 핵심인 개발 속도를 삼성에 추월당하고 만다. 사실 삼성이 반도체 투자를 결정할 때 경영진 대부분은 반대했다. 일본이 5년 이상 개발에서 앞서가고 있는 메모리 사업에 후발주자는 손실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4배씩 용량이 증가하는 메모리 제품은 차세대 제품이 나오면 가격이 폭락한다. 삼성이 한 세대 늦은 제품을 뒤늦게 출시하면 투자비 회수는커녕 막대한 손실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가 일본에 근무할 당시 반도체 투자가 이뤄졌기 때문에 도쿄 지사에는 이병철 회장의 자문역을 해주는 반도체 관련 전문가들이 자주 방문했다. 자문한 일본인 대학교수에게 “우리 회장님이 반도체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라고 물어봤다. 그분은 웃으면서 “초등학생 수준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왜 주위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 투자를 밀어붙이실까요?”하고 다시 물으니 그분은 “회장님의 사업에 대한 감각은 동물적 본능입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라고 답해 함께 웃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전자산업이 일본을 추월할 수 있던 건 오너 위주의 지배구조에서 신속하고 장기적인 의사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과거 이건희 회장은 주재원이 귀국할 때 반드시 일본의 전자제품을 하나씩 사와서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나처럼 기술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삼성전자가 VTR 개발에 나선 초기에는 불량률이 너무 높아 운동장에 제품을 쌓아서 불을 지르기도 했다. 도시바의 협조를 얻어 라인의 조장들을 도시바 공장에 보내 실습을 시키기로 한 적이 있다. 한데 실습이 진행되던 중 도시바에서 더는 한국의 연수생을 받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도시바 간부로부터 전해 들은 사유는 어이가 없었다. 3차 실습생들이나 1·2차 실습생들이 하는 질문이 동일하다고 했다. 같은 질문이 나오는데 비싼 경비를 들여 해외 연수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였다. 조금 모욕적으로도 들렸지만 틀린 지적이 아니었다.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새로운 지식은 공유하는 일본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우리 연수생들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 아키하바라 매장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 LG TV를 보면 40년 전에 창피했던 그때의 일이 떠오르곤 한다.

    이제 당당한 나라 됐거늘…

    귀국 후에도 여러 차례 일본을 드나들면서 그들의 인식이 조금씩 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과거에는 한국인에 대한 차별 정서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러한 정서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유명 관광지에는 영어 다음으로 한국어 안내 표지가 가장 많다. 1980년대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일본 문화를 개방하면 국내에 왜색 문화가 판을 치게 된다며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케이팝(K-Pop)을 비롯해 되레 우리 문화가 일본인들에게 깊숙이 파고들었다. 많은 젊은이는 한국 문화를 동경한다. NHK 뉴스에는 한국 소식이 거의 매일 등장하고 때로는 부러운 시선으로 보도한다. BTS의 멤버 진이 왜 군대에 가야 하는지에 관해 토론하기도 한다. 신오쿠보의 한국 음식점 거리에 가면 떡볶이, 치킨, 닭갈비 등 한국의 웬만한 먹자골목보다 더 다양한 한국 음식이 있다. 우리가 못살고 약할 때는 차별받았지만 잘살게 되니 그만큼 대접받는구나 싶기도 했다.

    20년 전쯤 중국 톈진에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중국 국영기업의 동사장(董事長) 일행과 만찬을 했다. 군에서 사단장까지 지냈다는 동사장이 내게 술을 따라주며 건네는 말은 당황스러웠다. 조선은 옛적에 기자라는 은나라 사람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남이 아니고 한식구이니 친근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말이어서 반론을 폈다.

    “선사시대의 일은 언어와 문화를 비교해 추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우리 문자가 없어 한자를 빌려 적을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다르다. 중국어는 영어와 같이 주어-동사-목적어 순이지만 한국어는 주어-목적어-동사 순이다. 중국의 기자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같은 말을 사용했다면 단어는 달라도 어순은 같았을 것이다. 한국어는 일본어와 단어는 많이 다르지만 어순은 같다. 그렇게 때문에 기자조선 이야기는 중국과 한국의 언어만 놓고 봐도 중국이 조작한 고조선의 잘못된 역사다. 기자가 세운 나라가 있었다면 그것은 중국 내의 동부 지역 어느 곳이었을 것이고, 중국 역사의 일부분일 것이다.”

    동사장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때 동북공정이라는 것이 중국 내에서 깊숙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일본도 역사를 왜곡하기는 마찬가지다. 4세기 후반 야마토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이 대표적이다. 중앙집권적 국가의 형태도 갖추지 못했던 야마토왜(倭)가 한반도 남쪽을 정벌해 다스렸다는 얘기는 바닷물이 흘러 강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다.

    근대사에서 일본은 항상 가해자였고 한국은 피해자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경술국치 때 피해자였던 조선은 너무도 무력한 나라였다. 가해자는 사과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 피해자를 달래기 위해 피해자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사과해도 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삼가는 문화를 가진 일본이 국가 간의 일에는 미혹함이 있어도 되는 것일까.

    한편 우리는 인접국에서 받은 피해를 다른 저울로 재고 있지 않은가. 중국은 한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한반도를 침공했다. 수만 명의 아녀자를 인질로 잡아갔고, 조공을 수탈했다. 6·25전쟁 때는 중공군 참전으로 수많은 국군이 전사했고 분단이 고착화됐다. 우리는 한 번도 그들의 사과를 요구한 적이 없다. 최고지도자가 중국에 고개를 숙여도 친중이라 비난하지 않지만, 일본에는 조금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도 친일파라고 비난한다.

    이제는 우리도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그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한국과 일본이 가까운 이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힘을 합하면 중국에도 미국에도 노(NO)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구학서
    ● 1946년 출생
    ●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 삼성전자 경리과 입사·관리담당 이사
    ● 신세계백화점 대표이사 사장
    ● 신세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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