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고담기담] 해금재비가 세상을 켜는 방법

  • 윤채근 단국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2024-03-0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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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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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에서 은퇴한 유득공의 집은 북촌과 운종가 중간인 한양 경행방에 있었다. 득공은 돌아가신 정조 임금으로부터 총애받던 규장각 검서 출신이었다. 유심연은 그런 사람의 집치곤 참 단출하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달이 밝았다.

    “야심한 시각에 어린 처자가 어인 일이냐? 넌 누구냐?”

    심연을 서재로 맞아들인 득공은 몹시 아파 보였다. 말도 자주 끊겼다.

    “소녀 성명은 유심연이라 합니다. 어르신과는 같은 문화 유씨로 멀게나마 일가이지요. 남대문에서 망건 파는 유해춘이란 자의 여식입니다.”

    심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득공이 잔기침했다. 환갑을 앞둔 나이라지만 그의 몸은 이미 활력을 잃은 듯했다. 그가 힘겹게 다시 물었다.



    “난 그런 자를 모른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니냐? 내 비록 서자 출신이라 온전한 양반은 못 되지만, 설마 망건 파는 시정잡배를 벗으로 뒀겠느냐?”

    싱긋 미소를 띤 심연이 허리를 곧게 세우며 말했다.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유우춘이라 하면 혹 기억하실는지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생각에 잠겼던 득공이 무릎을 ‘탁’ 쳤다.

    “옳지! 유우춘은 내 잘 안다. 대궐을 지키는 용호영 소속의 하급 무관 아니었느냐? 해금 실력으로는 조선 최고라고 했었지!”

    “소녀가 그 유우춘의 조카입니다.”

    “그랬구나! 한데 유우춘은 오래전 용호영을 떠난 뒤로 한양에서 자취를 감췄다. 한때 내 해금 스승이었는데, 그리 훌쩍 사라져버리더구나. 무슨 소식이라도 있어 날 찾은 게냐?”

    잠시 망설이던 심연이 속삭이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 부친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참 안됐구나. 보아하니 네 나이 아직 어린데 말이다.”

    “그렇습니다. 모친을 오래전 여의었는지라 소녀 이제 천애 고아입니다. 형제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부친이 세상을 뜨기 전 제게 유언을 하나 남겼습니다.”

    아비의 유언

    평생 망건을 만들어 재산을 꽤 모은 심연의 아비는 일찍 아내를 잃고도 새 부인을 얻지 않았다. 그는 외동딸 키우는 재미로 세상을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어린 딸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들이 아니라 다행이다. 곱게 태어났으니 온통 곱게만 살다 가려무나. 알았지?”

    심연은 그 말의 뜻을 일곱 살 무렵 어렴풋이 깨달았다. 자신이 양반 신분이 아니란 건 벌써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양인은 되는 줄로만 여겼던 그녀는 주위로부터 ‘노비 년’이란 욕을 먹고 나서야 현실과 마주했다. 아비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때 노비였던 건 맞다. 하지만 오래전 면천돼 어엿한 양인이다. 아비가 열심히 돈을 벌 테니 두고 보려무나. 내 그 돈으로 널 번듯한 집에 시집보내고야 말 거야. 알았지?”

    심연의 아비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딸을 번듯한 가문에 시집보낼 때까지 살 운명은 아니었다. 병들어 자리에 누운 그는 죽기 직전 절망한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다 겨우 입을 뗐다.

    “널 살뜰히 챙겨줄 낭군을 만나 평범하게 살 수만 있다면, 꼭 그리 살아라! 알았지? 하지만 내가 먼저 죽으면 그리될 리 없겠구나. 이를 어쩌지? 심연아!”

    심연이 아비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말했다.

    “난 구차하게 낭군 따위에 빌붙지 않을 거야. 난 힘도 세고, 또 손도 누구보다 빠르니까 잘 살 거야. 씩씩하게 살 테니 걱정하지 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아비가 겨우 힘을 내 속삭였다.

    “이 아비가 사라지면 숙부를 꼭 찾아보려무나. 유우춘이라고 한다.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거야.”

    “사라진 숙부를 어디 가서 찾아?”

    “유득공이란 선비를 찾아가려무나. 그분께 자초지종을 말하면 도움을 주실 거야. 네가 숙부처럼 살 운명이라면, 그럼 제대로 살아야 해! 숙부처럼 포기하지 말고. 알았지?”

    고개를 갸웃하는 딸의 손을 움켜쥐고 아비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평범하게 사는 게 좋아. 너무 큰 재주는 결국 화가 돼. 알았지?”

    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알아듣는 말에만 대꾸했고 한번 약속한 말은 반드시 지켰다. 죽어가는 아비 앞에서도 달라질 건 없었다. 절명하는 순간 아비가 간신히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딸이라서 다행이야.”

    용호영의 해금재비

    묵묵히 심연의 말을 듣고 있던 득공이 물었다.

    “네 나이 올해 몇이더냐?”

    죽은 아비 얼굴을 헤아리던 심연이 물기 밴 음성으로 대답했다.

    “열다섯 살입니다. 숙부인 유우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길게 한숨을 내쉰 득공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다락에서 해금 하나를 꺼내 가져왔다. 그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해금 배워본 적 있더냐?”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심연이 해금을 쥐며 대답했다.

    “아주 어렸을 때, 우연히 어떤 악사에게 잠시 배운 적은 있습니다.”

    “어떤 악사인진 모르고?”

    “모릅니다. 그분이 숙부였는지, 아니면 망건 사러 온 다른 손님이었는지. 어디 한번 연주해 볼까요?”

    득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심연이 서툴게 활을 집어 들고는 현에 갖다 댔다. 둔탁한 잡음이 새 나왔다. 당황한 심연이 활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다시 켜자 울림이 훨씬 간결해졌다. 그녀에게 다가간 득공이 활을 쥐는 법과 음을 높이고 내리는 기본 기술을 자세히 알려줬다.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 보아라.”

    말을 마친 득공이 눈을 감았다. 심연이 조심스레 활을 움직이며 즉흥곡을 연주했다. 느닷없는 연주였지만 곡에는 미묘한 율려가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연주하는 도중 심연의 실력이 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연주를 마칠 때쯤 그녀는 마치 전문 악사인 양 음을 갖고 놀고 있었다.

    “타고났구나!”

    득공이 탄식처럼 속삭였다. 활을 내려놓은 심연이 손가락을 풀며 말했다.

    “제가 이렇게 잘할 줄 몰랐습니다. 이상해요. 저절로 몸이 움직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득공이 활을 쥐고 허공에다 켜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용호영 해금재비 유우춘도 그랬다. 배워서 닿을 경지가 아니었지. 보통은 배워야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지만, 그는 그냥 멀리 날아가 버리는 새 같았거든.”

    “새요?”

    “그래. 자기 실력을 끝까지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자기 기량의 반만 써도 사람들은 열광했다. 난 알고 있었어. 그가 일부러 제 실력을 낮추어 대중에 영합하고 있다는 것을.”

    “일부러요?”

    “그래. 그 정도 수준에서 멈춰야 사람들은 좋아하거든. 그걸 넘어서면 음률을 좀 안다는 자들도 화를 내거나 졸기 일쑤였다. 하긴 그게 세상 이치니까.”

    “어째서 그게 세상 이치예요?”

    “네가 어려서 모를 거다. 그래야 돈도 벌고 인기를 끌 수 있거든. 물론 결국 그게 싫어 용호영을 떠났을 거야. 네 숙부가 용호영 소속 군대 악사였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건 압니다.”

    잠시 뜸을 들인 득공이 슬픈 눈빛으로 입을 뗐다.

    “용호영 군악대에 있는 한 사대부가의 부름을 거절할 순 없었을 거다. 관직에 있으면 주변 눈치 볼 일이 아주 많거든. 한데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 한들 뭐 하겠느냐? 깽깽이 켜는 광대 취급에 밤낮없이 불려 다니며 건강만 상하는 꼴이었겠지. 삶의 전성기에 새처럼 훌쩍 떠날 수 있었던 그가 부럽고 또 그립구나.”

    득공이 심연을 지긋이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가끔 찾아와 연주해 주면 좋겠구나. 그리고 유우춘에 대해서라면 나보다는 금대거사를 찾아가 보는 게 좋겠다. 우춘의 이복형이자 그를 용호영에 넣어줬던 은인이거든.”

    금대거사

    훈련원에서 한강진으로 이어지는 긴 고개를 사람들은 버티고개라고 불렀다. ‘배 타러 가는 고개’라는 뜻이었다. 금대거사의 집은 고개 초입에 있었다. 심연을 잔뜩 경계하던 거사는 유해춘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안색이 바뀌더니 침울하게 물었다.

    “해춘이가 죽었다고? 아직 정정할 나이건만! 많이 힘들어했느냐?”

    고개를 가로저은 심연이 조용히 대답했다.

    “제 아비는 비록 망건이나 만드는 자였지만 필부는 아니었습니다. 제게 꽤 넉넉한 재산도 물려줬습니다. 무얼 부탁드리러 찾아온 건 절대 아닙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거사가 심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강건하다! 해춘이가 딸을 참 잘 키웠구나! 해춘이와 난 이복형제이니 넌 내 조카딸인 셈이다.”

    살며시 머리를 조아린 뒤 심연이 입을 열었다.

    “제 아비가 노비였다 들었습니다.”

    몸을 움찔한 거사가 서안에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맞다. 아주 오래된 얘기다. 내 아버님께서, 그러니까 네겐 할아버님이 되겠구나! 현감까지 하신 유운경이란 분이시다. 그 어른께서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 일을 하셨다. 이인좌의 난은 아느냐?”

    “잘 모릅니다.”

    “영조 임금을 노리고 남인과 소인들이 일으킨 역모 사건이었다. 이인좌가 그 우두머리였지. 아버님께서 그 역도들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우시고 이인좌의 몸종 하나를 취하셨다고 한다. 그 첩과 금실이 좋으셨는지 아들 둘을 두셨다.”

    “쇤네의 아비와 숙부입니까?”

    “그렇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조금 궁금해지더구나. 비록 노비지만 내 동생들 아니냐? 그래서 먼 변방에 숨어 산다는 이인좌의 후손들을 찾아갔다. 어린 형제가 노비로 처참하게 살고 있더구나. 참 기구하지 않으냐? 즉시 한양에 전갈을 띄워 전답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

    “어르신께서 면천해 주셨던 거로군요?”

    “그 돈으로 형제를 사서 한양으로 돌아와 양인으로 살게 해주었다. 하지만 함께 살 순 없지 않으냐? 가끔 사는 형편은 살폈지만, 친형제의 연을 맺을 순 없었다. 해춘이는 망건을 판다기에 돈을 조금 줬고, 우춘이는 해금을 잘 켜기에 용호영 세악수로 넣어줬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심연이 물었다.

    “실은 숙부인 유우춘을 찾고 있습니다. 그게 죽은 아비의 유언이었습니다.”

    팔짱을 낀 채 길게 숨을 내쉰 거사가 심연을 그윽이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너도 해금을 켜느냐? 아니면 다른 악기를 다루느냐?”

    심연은 질문의 의도를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녀가 마침내 대답했다.

    “해금을 다룰 줄 압니다.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유득공 어르신께서 제법 잘 다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친구가?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피가 어디 가지 않는구나. 실은 해춘이와 우춘이를 변방에 그냥 두고 올 수 없었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제가 너무 탁월했다. 뭐든 손에 쥐면 다룰 줄 아는 거였어. 이인좌 집안 궂은일을 도맡으면서도 언제 배웠는지 젓대에 북이며 피리까지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 그런 재능을 썩히게 놔둘 순 없었어. 그 재능은 아마 어미로부터 물려받았을 거다. 이인좌의 몸종이었다지만 가야금이며 비파며 모든 악기에 뛰어났다고 들었다. 네 몸에도 필시 그 피가 흐르고 있을 게다.”

    거문고재비 철돌

    금대거사의 소개로 거문고재비 철돌을 만나기 위해 운종가에 이르렀을 때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철돌이 공연한다는 기생집 근처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그녀는 멀리서 다가오는 일군의 무리를 보고 이내 그들이 한양을 뒤흔든 유명한 악사 패거리임을 직감했다. 심연을 알은체도 않고 지나가려던 철돌은 유우춘이라는 이름을 듣자 멈춰 섰다.

    “우춘이 조카딸이라고? 네가?”

    “네. 금대거사 어르신 소개로 이리 찾아뵙게 됐습니다.”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말이 없던 철돌이 거문고를 땅에 부려 장구재비에게 맡기고는 심연의 손을 잡아 골목으로 이끌었다.

    “우춘이는 한양 놀이판 뜬 지 오래여. 소식은 나도 모르지. 근데 왜 찾는 거여?”

    마른침을 꼴깍 삼킨 심연이 대답했다.

    “만나고 싶습니다. 그게 제 죽은 아비 유언입니다.”

    순간 철돌의 입이 야릇하게 뒤틀렸다.

    “해춘이가 죽었어? 쯧쯧. 거봐! 타고난 끼를 감추고 사니깨 일찍 뒈지는 겨! 니 애비도 우춘이 못잖은 해금재비인 건 알어? 모르지? 쌍벽이었어. 근데 쇠심줄처럼 고집이 세! 놀 팔자는 놀고 살아야 하는 법이여.”

    “제 아비가 해금재비였어요?”

    “그럼! 해금뿐이여? 젓대도 잘 다루고 거문고도 나만치나 했어. 아까운 인재였지. 근데 해춘이가 왜 너보고 우춘일 찾으라고 해쓰까?”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던 심연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게도 해금재비 피가 있나 봅니다.”

    철돌은 미동 없이 심연을 바라만 봤다. 코를 후비며 땅바닥에 침을 캭 뱉은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뭔 소린지 모르겠고! 해춘이가 외동딸을 해금재비 만들려 했을 리가 없어. 돈도 좀 있다며? 너 이쪽 일이 어떤 일인진 알어? 여자는 기생 취급받는다 이거여. 막말로 우덜은 사내니깨 막 산다 해도, 니가 막돼먹은 양반 잡것들 손을 어찌 뿌리치겄냐? 우춘이 얼굴 봐서도 난 그리 못햐!”

    빙그레 미소 지은 심연이 속삭였다.

    “아저씨들이 지켜주시면 되죠? 보시다시피 전 힘도 세고 씩씩합니다. 뭐 정 안되면 남장을 하면 되고요.”

    지는 해를 등지고 우두커니 서 있던 철돌이 심연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쏜살같이 기생집 쪽을 향해 뛰어갔다. 그는 잠시 후 해금재비 마 씨라는 사내를 데리고 나타났다. 마 씨가 바닥에 해금을 내려놓으며 한번 켜보라는 시늉을 했다.

    심연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이내 털썩 주저앉아 해금을 쥐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아비와 숙부의 운명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 음률을 만들었고 구성진 소리는 잔잔한 물결이 돼 운종가 골목 사이로 번져나갔다.

    “합격이여? 아니여?”

    철돌이 마 씨에게 묻자 마 씨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대꾸했다.

    “형편없어! 기본기가 없어! 그래도 조금만 배우면 흉내는 내겠어!”

    “누구 흉내?”

    “누군 누구? 우춘이지!”

    그제야 철돌이 심연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마 씨를 돌려보내고 빠르게 말했다.

    “너는 말여. 잘 들어! 우춘이처럼 할 필요 전혀 없어. 알아들어?”

    “왜 그래야 하죠?”

    “우춘이처럼 하면, 뭐럴까, 재미가 없어! 너무 뛰어나면 불화가 생긴다 이거여! 양반 잡것들이 지들보다 뛰어난 걸 용서하겠냐 이거여! 안 그려? 그러니깨 적당히만 실력을 다듬어서 우덜이랑 놀고지고 하는 거여. 어뗘?”

    “싫습니다. 기왕 할 거라면 숙부처럼 중간에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날쌔 도령

    사람들은 심연을 유우춘의 아들로 알았다. 이름도 날쌔로 바꾼 그녀는 남자 행세하며 해금으로 장안을 주름잡았다. 그녀는 거문고재비 철돌과 장구재비 동 씨 그리고 젓대재비 안 씨와 더불어 향악 풍류의 대가가 됐다. 적어도 해금으로는 그녀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어느 날 철돌이 우울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먼! 이제 우리 날쌔 도령이 결심할 몫이여!”

    철돌을 힐끗 노려본 심연이 퉁명스레 물었다.

    “난 이제 해금하고 혼인했으니 시시껄렁한 사내 만나라는 말은 하지 마쇼! 진즉 경고했습니다?”

    “아이쿠! 내가 미쳤어? 그게 아니라, 도승지 댁에서 이번에 널 좀 보자는 겨! 왜 그 음악 쪽에 조예 깊다는 그 양반이! 널 데려가도 좋지만, 거 싸우지 않으까?”

    “누가요? 제가요?”

    “응! 바로 네가! 그럼 누가 도승지랑 싸워?”

    “제가 왜 도승지랑 싸웁니까?”

    “내가 아나? 꼭 그럴 것 같아서 그려! 우춘이가 딱 그랬거든! 서상수라고, 아무튼 당시엔 시서악에 도가 튼 분이었는데, 그 양반이랑 막 싸웠단 말여. 조금치도 양보란 없었다 이 말이지!”

    “숙부가 왜 그런 분이랑 싸워요?”

    “몰라! 우덜이야 즐겁기만 하면 되잖어? 근데 서상수 그 양반은 뭐가 그리 까다로운지, 막 아는 체를 한다 이거여. 우덜은 꾹 참지! 헌데 우춘인 막 대들더란 말이지. 바득바득 우기더니 막판엔 상을 뒤집지 뭐여? 너도 혹시 그럴껴?”

    피식 웃은 심연이 조용히 대답했다.

    “이 날쌔 도령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광통교 공연

    철돌은 도승지 댁으로 가는 대신 도승지를 광통교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큰 재산을 이룬 철돌은 제법 으리으리한 저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곳에서 모든 상황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싶었다. 공연 당일 도승지는 친구들을 줄줄이 데리고 찾아와 대청마루 중앙을 차지하고 앉았다.

    모든 공연은 순조로웠다. 심연이 해금 독주를 하기까지는 그랬다. 연주를 다 감상한 도승지가 손을 들어 심연을 다가오게 했다. 그가 물었다.

    “이름이 날쌔라고? 유우춘의 아들이라고 했나?”

    심연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비실비실 웃음을 머금던 도승지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유우춘이 그리 도도했다지? 깽깽이 켜는 주제에 꽤나 자존심이 있었나 봐?”

    심연은 대답 대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도승지가 뒷짐을 지고 일어서더니 큰소리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해금이 뭐냐? 이게 남북조 시대 저 유명한 중원의 은자였던 혜강(嵇康)이 만든 악기라 이거야. 청담 사상이라고 들어봤어? 해금 속엔 욕심 없는 선비의 맑은 기상이 깃들어 있다는 거지. 이게 죽림칠현의 지조이기도 하고! 어쩌다 이 악기가 천것들의 향악기가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잠자코 있던 심연이 한 걸음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쇤네 알기론 그렇지 않습니다.”

    철돌이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꼬집었지만, 심연은 멈추지 않았다.

    “해금이 혜강의 금이란 말은 이치가 닿지 않습니다. 해금은 요서 지역을 떠돌던 해(奚)라는 부족이 발명한 겁니다. 악기 생긴 걸 보십시오. 활처럼 생긴 모양은 무기로 쓰던 활에서 온 그대로입니다.”

    도승지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철돌이 대청 섬돌 아래로 다가가며 장구재비를 향해 어서 연주하라는 손짓을 했다. 요란한 풍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체면을 구긴 도승지가 엉거주춤 제자리에 앉았다. 도승지가 철돌을 다가오게 해 귀에 대고 말했다.

    “날쌔란 저 녀석, 이따 방 안으로 따로 불러라. 술이나 가르쳐 봐야겠다.”

    놀란 표정의 철돌이 다급히 대답했다.

    “술을 일절 못합니다요! 상것들이 뭘 알겠습니까요? 그저 어린 게 철이 없다 여겨만 주시면, 이 철돌 이름을 걸고 이 밤 즐겁게 해드리겠습니다요!”

    철돌이 도승지를 다루는 사이 누군가 심연 뒤로 다가오더니 팔을 낚아챘다. 뒤돌아볼 사이도 없이 상대는 심연을 몰고 뒤채를 향해 움직였다.

    돌아온 숙부

    “진짜 유우춘 숙부세요?”

    놀란 목소리로 심연이 물으며 상대를 올려다봤다.

    “네가 어찌나 시끄럽게 노는지 삼남에 있던 내 귀에까지 소식이 들리더구나.”

    우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해춘 형님이 널 참 잘 키웠구나! 기억 못 하겠지만 네가 아주 어릴 때 처음 해금을 쥐여준 게 바로 나였다.”

    “그게 숙부였어요? 얼마 전 그걸 기억해 냈거든요.”

    “그때 네 아비가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처럼 천한 신분이 너무 큰 재주를 가지면 엄마처럼 될 거라고.”

    “엄마요? 이인좌의 몸종이었단 할머니요?”

    “그래! 이인좌는 역도의 수괴였고, 네 할머니는 재주가 너무 많은 분이셨지. 큰 재주를 인정받을 곳이 이 세상에 없자 세상을 뒤집을 자 밑으로 들어가셨던 거야. 만약 사내로 태어났더라면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셨을 거다. 그래서 해춘이 형은 널 평범하게 키우고 싶어 했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던 심연이 조용히 말했다.

    “전 절대 평범하지 않아요. 숙부처럼 도망치지 않고 세상과 해금으로 싸울 겁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문인 유득공의 ‘유우춘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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