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 구인회 작고로 시작한 장자 승계 원칙
구자경 실속 경영, 매출 1150배, 임직원 5배 ↑
“포기하지 말고 길게” 글로벌 기업 낳은 ‘뚝심’ 구본무
‘선택과 집중’으로 발전적 계승, 구광모
구광모 체제 완성, 변해선 안 될 것 지키면서 변해야 산다
지난해 11월 13일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LG트윈스 선수들과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다. [뉴스1]
LG의 승리는 긴 시간 ‘뚝심과 끈기’로 인고한 LG의 주요 사업인 배터리·전장 사업의 성과와 오버랩 됐다. 또한 연암 구인회 회장의 ‘인화’에서 상남 구자경 회장의 ‘고객중심 경영’으로 글로벌 기틀을 마련한 후 화담 구본무 회장의 정도 경영과 1등주의와도 오버랩됐다.
트로피를 들어 올린 구광모 회장은 지금까지의 LG를 넘어서야 하는 과제 ‘Beyond LG’도 함께 안게 됐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 기업은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변해선 안 될 것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공정거래위원장과 대통령 정책실장을 역임한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2015년 한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LG그룹에 대해 “총수 일가나 지배구조가 논란이 되지 않을 정도로 국내 재벌 가운데 모범적이었고, 노사관계에서도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왔다”면서도 “경영 성과 측면에서는 삼성과 비교해 격차가 더 많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화를 강조하는 기업문화가 지배구조, 노사관계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반면, 경영 성과 측면에서는 부정적이었던 셈”이라며 “향후에는 적극적 기업가정신으로 어려움을 돌파하고 새로운 상품과 시장을 창출해 내는 도전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의 LG는 이러한 지적에 대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69년, 분수령 그해
LG그룹에서 44년 동안 몸담으며 계열사의 혁신을 이끌었던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이 지난해 11월 22일 용퇴했다. 권 전 부회장은 1979년 금성사에 입사해 오너 일가 3대에 걸쳐 함께한 유일한 경영진이다. 1970년에 취임해 1995년까지 LG그룹을 이끈 2대 회장인 고(故) 구자경 명예회장과는 16년을, 1995년부터 2018년 타계할 때까지 3대 회장을 지낸 고 구본무 회장과는 23년을, 그리고 4대 회장인 구광모 회장과 5년을 보냈다.권 전 부회장은 “2018년 세상을 떠난 고(故) 구본무 회장이 뚝심과 끈기의 리더십을 가르쳐줬다”며 “오랫동안 주요 사업에 뜻을 같이하며 많은 성과를 이룰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신 구광모 대표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이어 “LG그룹의 미래에 많은 응원을 보내겠다”는 말을 남기고 LG를 떠났다. 구광모 회장의 친정 체제 완성이자 구광모 회장이 기존의 LG를 넘어설 수 있는지에 대한 분수령의 시작이다.
구본무 회장 체제 때 부회장은 구본준 부회장을 포함해 모두 7명이었고, 그 가운데 지난해까지 남은 유일한 인사가 권 전 부회장이었다. ‘2024 정기인사’에서 권 전 부회장이 용퇴하면서 구본무 회장의 부회장단 인사는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부회장단 자체도 신학철과 권봉석 2인 체제로 개편돼서 규모가 줄었다.
LG그룹은 4대에 걸쳐 장자 승계 원칙을 지켜왔다. 구자경 회장은 갑작스럽게 그룹을 이끌게 됐다. 1969년 8월 초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갑작스럽게 쓰러져서다. 구인회 회장은 ‘뇌관종양’이라는 진단을 받은 지 4개월 만인 12월 31일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69년은 삼성과 LG 기업사에서 분수령과도 같은 해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은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전자산업 진출을 전격 선언했다. 금성사를 앞세워 전자산업을 선도하던 LG에 대한 도발이었으며 사돈이자 사업 동지였던 구인회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다.
1969년 말 창업회장 타계 후 1주일 만인 1970년 1월 6일 서울 관철동 대왕빌딩 회의실에선 차기 회장 선포가 있었다. 당시 후계자 선정의 키(key)는 연암의 첫째 동생 구철회 락희화학 사장이 쥐고 있었다. 창업에 기여한 공로로 보자면 그가 그룹 회장을 맡는다고 해도 말릴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철회 사장은 “나는 이제 경영에서 물러나겠다”며 열여섯살 아래의 장조카, 당시 45세의 구자경 금성사 부사장을 회장 자리에 앉게 했다. LG의 장자 승계 원칙이 자리 잡은 순간이다.
우직하면서도 기민, LG 1150배 키운 상남 구자경
1970년 회장 취임 당시 구자경 회장. [LG그룹]
구자경 회장의 기민함은 가장 먼저 당시 기술의 선봉에 있던 일본 기업들과의 합작사 설립을 통한 대대적 방어선 구축으로 드러났다. 1970년 일본 알프스전자와 합작해 금성알프스전자 설립을 시작으로 1971년 일본 포스타전기와 함께 금성포스타를 설립했다. 이어 일본 후지전기와 손잡고 금성통신(독일 지맨스와 3사 합작)을 세웠고, 1974년엔 NEC(일본전기)와 합작해 금성전기를 설립했다.
구자경 회장은 기민하면서도 LG그룹의 실속 경영과 내실을 쌓는 데 주력했다. 기업 이미지를 말할 때 ‘현대’는 호방하고 박진감 넘치고, ‘삼성’은 치밀하고 세련됐다고들 한다. ‘LG’는 견고하고 내실 있는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구자경 회장의 견실한 인품이 LG의 기업 DNA로 승화된 셈이다.
절제된 유교적 가풍 속에서 자라며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허투루 쓰지 않는 검박함을 체득했고, 이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면서도 외형보다 실질을 더 중시하는 기업 정신을 일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95년 그룹 경영권을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물려주기까지 25년간의 LG는 내실을 다졌다. 구자경 회장이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 원에서 30조 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다. 임직원 수도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늘었다.
“회장(구본무)이 나름대로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사실은 회장한테 절대로 1등하지 말라고 했는데….” (한국경제신문 인터뷰, 2003년)
급격한 성장을 이끈 구자경 회장의 실속 경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는 이러한 실속 경영을 하면서도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가올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 체질을 갖추기 위한 사전 준비를 차근차근 했다. 미래를 위한 연구개발 투자와 기업의 지속 발전을 위한 투명하고 안정적 자금 조달을 꾀했다. 즉 기업공개(IPO)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상장했다. 이어 전자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IPO를 단행했다.
이 기간 구자경 회장은 고객 중심 가치 창조, 인간 존중 경영을 경영이념으로 추구했다. LG그룹의 초기 경영이념이 창업 가문 및 창업자들의 철학을 반영했다면 이후의 경영이념은 초기 경영이념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맞춰 새롭게 요구되는 철학을 더하면서 발전한 것이 특징이다. 구자경 회장은 선친의 ‘인화단결’에 기초를 둔 ‘인간존중 경영’과 당시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시절 개념조차 생소한 ‘고객가치 경영’을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선포하며 변화를 이끌어갔다.
구자경 회장은 1995년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을 넘겨준 뒤에는 철저하게 평범한 자연인으로 살았다. 대기업 최초 ‘무고(無故·아무런 사고나 이유가 없음) 승계’로 기록되며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는 구인회 회장의 말에 따라 은퇴한 후엔 후진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줬다.
구자경 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을 비롯해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당시 창업 세대 원로 회장단도 ‘동반 퇴진’을 단행해 큰 귀감이 됐다.
세계 1위 배터리 낳은 ‘글로벌 창업주’ 화담 구본무
1995년 2월 22일 구본무 회장이 취임식에서 LG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흔들고 있다. [LG그룹]
창업주는 구인회지만 ‘글로벌 창업주’는 구본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구본무 회장 임기 중 LG그룹의 매출은 30조 원대(1994년 말 기준)에서 2017년 말 160조 원대로 5배 이상, 특히 해외 매출은 약 10조원에서 약 110조 원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해외 매출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에서 약 70%로 늘어났다. 이는 1999년 LG반도체 매각, 같은 해 LIG그룹 계열분리, 2003년 LS그룹 계열분리, 2005년 GS그룹 분리, 2007년 LF그룹 계열분리 등 등 굵직한 계열분리를 거치면서도 꾸준히 성장한 것이다.
구인회 회장의 가훈 ‘인화단결’로 뿌리내린 경영이념을 구자경 회장이 고객 중심 가치 창조, 인간 존중 경영으로 발전시켰다면 구본무 회장은 정직과 공정을 바탕으로 한 ‘정도 경영’으로 가치창조형 일등주의 경영이념을 추구했다.
1999년 시작된 LG그룹의 계열분리는 자연스럽게 구본무 회장으로 하여금 핵심 사업을 제외한 사업들은 정리하고, 핵심 사업의 글로벌 경쟁력은 제고하게끔 했다. 그는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 3대 핵심 사업군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당시엔 세계화라는 파고가 밀려들고 있었다. 우리 산업은 싸게, 잘 만들어서 선진국에 팔던 환경인 ‘Fast Follower’에서 더 높은 기술로, 새로운 가치를 제공해야 하는 ‘First Mover’가 돼야 살아남는 환경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해외자본에 대한 문호가 개방되면서 자본시장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의 투명성도 요구하기 시작했다. 구본무 회장은 2003년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한발 앞선 선진 경영시스템을 구축했다. LG는 대기업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된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고, 회사가 오로지 본연의 자기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SK-소버린 사태’의 교훈이 이러한 지배구조 개편을 앞당기는 데 한몫했다. 2003년 소버린자산운용은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의 지분을 8.64% 확보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한 뒤 계속 주식을 매입했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급기야 SK㈜ 주식 1902만여 주를 사들여(총 1689억 원) 자산 규모 17조원 기업의 1대 주주(14.99%)로 등극했다. 당시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총수 일가의 직접 지분은 1.39%에 그쳤다.
소버린은 1년 후인 2005년 7월 SK㈜ 주식 전량을 처분했다. 매매 차익과 배당금, 환차익을 합산하면 9437억 원, 불과 2년 4개월 만에 투자금의 4배인 1조 원에 가까운 수익을 가져가며 한국 대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영권에 경종을 울렸다. 이 사건으로 구본무 회장은 지배주주의 지분 15%를 마지노선으로 강조했다. 2018년 구광모 회장에게 상속하면서도 지분 15%를 지킬 것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구본무 회장은 정도 경영을 통한 일등주의를 지속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끊임없는 신성장동력 발굴과 투자라고 믿었다. 그의 ‘뚝심과 끈기’ 경영은 이를 뒷받침했다. 권영수 전 부회장이 은퇴하며 그의 뚝심과 끈기의 리더십에 대한 감사를 표했듯, 구본무 회장의 경영 철학은 ‘2차전지’에서 드러난다.
충북 청주시 오창 LG에너지솔루션 2차전지 공장. [동아DB]
럭키금속에서 시작한 2차전지 연구는 1996년 LG화학으로 이전된다. 리튬전지가 음극재, 양극재, 전해질 등 화학물질로 구성돼 있는 만큼 소재 분야 연구에 강점이 있는 LG화학이 전담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성과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1997년 LG화학 연구진이 처음으로 소형전지 파일럿 생산에 성공하긴 했지만 대량 양산에는 나설 수 없었다. 품질이 따라주질 않았고, 일본 선발 업체들의 기술력을 따라잡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수년간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제기됐으나 구본무 회장은 “포기하지 마라. 길게 보고 투자하자”며 “연구개발에 더욱 집중해라.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라”고 독려했다.
LG화학은 2005년 2차전지 사업에서 무려 2000억 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다. 이때도 구본무 회장은 사업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2차전지 사업은 우리의 미래 성장동력”이라며 “끈질기게 하면 반드시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다시 한번 임직원을 다독였다. 2009년 LG화학이 미국 완성차 기업 GM의 전기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단독 공급업체로 선정되면서 LG그룹은 과거 일본을 추격하던 처지에서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LG화학은 2011년부터 2차전지 사업에서 흑자를 냈다. 2013년에는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네비건트리서치가 발표한 세계 전기차 배터리 기업 평가에서 주요 업체들을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다. 2차전지 사업을 시작한 지 20여 년 만의 성과였다. 수십 년에 걸친 적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뚝심과 끈기로 연구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10년이 지난 현재까지 LG그룹은 중국 CATL의 맹렬한 추격에도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2차전지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친정 체제 구축, B2B·미래 사업 대전환 구광모
구본무 회장의 경영은 2018년 그의 뇌종양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장자승계 원칙을 지켜온 LG그룹은 이사회를 열어 40세의 구광모 LG전자 상무를 대표이사 회장으로 삼았다. 구광모 회장이 경험을 더 쌓을 동안 작은아버지인 구본준 당시 부회장이 LG그룹을 총괄하면서 징검다리 역할을 맡을 것이란 전망도 있었지만 48년 전 구철회 사장이 그랬듯 구본준 부회장은 구광모 회장을 추대하고 3년 후인 2021년 5월 LX그룹으로 분리 독립했다.2006년 LG전자 재경부문 대리로 입사한 구광모 회장은 LG전자 HE사업본부·HA사업본부, ㈜LG 시너지팀 등을 거쳤다. 특히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약 4년 동안 ㈜LG 시너지팀, 경영전략팀 등에서 LG그룹의 미래 사업 발굴에 관여해 왔다. 이 기간의 구광모 회장에 대한 대내외적 평가는 “고객과 시장 등 사업의 본질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선제적으로 시장을 만들고 앞서가기 위한 전략을 고민하는 데 힘을 쏟는다”였다.
조부인 구자경 회장이 40대에 갑작스럽게 회장이 됐을 때 그랬듯 40세의 구광모 회장 역시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먼저 사업구조 개편과 이를 위한 인재 등용과 조직문화 구축에 변화의 시동을 걸었다.
그의 기민함은 인재 기용에서 시작됐다. 회장 취임 후 실질적 자신의 인사라고 할 수 있는 2019년 인사 때 ‘세대교체’와 ‘외부 수혈’을 통한 내부 조직의 변화를 이끄는 동시에 친정 체제 구축을 진행했다. 2019년 임원 인사에서 부회장단 6인 가운데 박진수 LG화학 부회장이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고, 2019년 9월에는 한상범 전 부회장이 LG디스플레이 대표이사 자리를 사임했다. 이어 조성진 전 LG전자 부회장, 하현회 전 LG유플러스 부회장 등이 퇴임한 후 2022년 차석용 전 LG생활건강 부회장, 지난해 권영수 부회장까지 용퇴하며 세대교체를 마무리했다.
LG그룹의 핵심인 전자 부문 수장을 조성진 부회장에서 당시 50대 중반인 권봉석 사장(현 LG 부회장 대표이사)으로 교체했고, 화학 부문 수장은 박진수 부회장에서 외부 출신인 신학철 부회장으로 교체했다. 이는 세대교체와 외부 수혈의 상징과도 같았으며 LG그룹은 현재까지 이렇게 ‘2인 부회장’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구광모 회장은 사업 개편도 단행했다. 구본무 회장의 핵심 사업인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 등 3대 핵심 사업군 가운데 스마트폰 사업을 비롯해 연료전지, 조명용 OLED, 전자결제, 편광판 등 부진한 사업을 정리했다. 대신 AI와 배터리, 전장 사업 등 신사업을 중심으로 주요 계열사의 체질 개선을 꾀했다. 이러한 변화로 LG그룹의 공정자산 규모는 2018년 123조1000억 원에서, 지난해 4월 기준 171조2440억 원으로 늘었다. 회장 취임 5년 만에 39.1% 불어난 셈이다.
구광모 회장은 그룹의 사업 구조 역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B2C(기업 대 고객)에서 B2B(기업 대 기업)로 전환을 꾀했다. 회장 취임 이후 B2B 사업을 담당하는 BS사업본부를 부활시켰다. B2B사업은 B2C사업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경기침체에 영향을 덜 받고, 장기 고객사 확보에 성공하면 안정적 사업 전개와 수익 획득이 가능하다. 구광모 회장은 100% B2B 사업인 전장 사업과 배터리에 대대적으로 투자했고, 이 전략은 빛을 보기 시작했다.
LG에너지솔루션 분기별 실적 그래프. [LG에너지솔루션]
지난해 LG전자 생활가전(H&A)사업본부는 연매출 30조 원 시대, 전장(VS)사업본부는 연매출 10조 원 시대를 각각 열며 안정적 성장 기반과 미래 동력을 모두 확보했다. LG전자의 지난해 4분기 매출은 23조1041억 원, 영업이익은 3131억 원이다.
미래 먹거리인 전장 사업의 선전도 두드러졌다. 주목할 점은 전기차 시장 둔화에도 흑자를 냈다는 것이다. VS사업본부는 지난해 매출 10조1476억 원, 영업이익 1334억 원을 기록했다. 올해는 글로벌 경기 불황과 유럽의 TV·가전 수요 침체로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생산사업장 평균 가동률이 100%가 넘었고, 수주 물량이 확대돼 수익성·매출 모두 성장세가 기대된다. 이를 통해 LG전자는 2030년까지 전체 매출 가운데 B2B 관련 매출을 4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독해진 LG, 2024년 ‘Beyond LG’ 원년 삼아야
1월 9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4’에서 LG전자 전시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LG 시그니처 올레드 T’로 구성된 미디어아트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구광모 회장은 2022년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로 영업 환경이 바뀌자 글로벌 배터리 공장을 잇달아 찾았다. IRA는 배터리 원료를 미국이나 동맹국 내에서 구해야 하는 걸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한국 정부조차 당장 실현은 불가능할 것이라 진단할 정도의 난제였지만 LG그룹은 모든 로비력을 쏟아 이에 대응했다. 상대적으로 전기차 진출이 늦은 세계 1위 자동차회사 도요타가 미국시장 진출을 위한 파트너로 LG를 택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올해까지 약 6년간 재임하는 동안 구광모 회장의 공통된 키워드는 ‘고객’이다. 2018년 회장 취임 이후 구광모 회장은 2019년 첫 신년사에서 “LG가 나아갈 방향을 수없이 고민해 봤지만 결국 그 답은 ‘고객’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키워드는 ‘도전’, 그것도 ‘과감한 도전’이다. 구본무 회장이 남겨놓은 LG그룹의 핵심 전략 기지,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를 찾아 임직원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과감하게 도전하지 않는 것이 실패다. LG사이언스파크만의 도전 문화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기업경영을 하는 이들이 공통되게 추구하는 목표는 ‘위대한 성과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급변하는 환경에서 지켜야 할 것을 붙들며, 이를 토대로 환경에 적응해 변화해야 한다. 구광모 회장에게 올해는 LG의 핵심 가치를 지키면서도 이를 뛰어넘는, ‘Beyond LG’ 원년이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