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문화중심지, 카타르가 시작한 축구 육성
사우디, UAE도 오일머니 쏟아가며 경쟁 돌입
카타르 이어 사우디도 월드컵 개최 가능성 ↑
스포츠로 중동의 그림자 가리려 한다는 지적도
2월 11일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카타르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있다. 카타르는 지난대회에 이어 2회 연속 아시안컵을 제패했다. [카타르 국제 미디어 사무국]
카타르는 오랜 기간 지역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국토는 작고, 지정학적으로도 불리한 위치지만 세계 정세에 미치는 영향력은 작지 않다. 카타르는 러시아와 이란에 이어 세계 3위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자랑하는 자원 부국이다. 석유 매장량도 세계 14위다. 액화천연가스(LNG) 수출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국제 천연가스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다. 천연가스 수출국의 모임으로 ‘천연가스업계의 오펙(OPEC·석유수출국기구)’으로도 종종 묘사되는 가스수출국포럼(GECF)도 카타르 수도 도하에 자리 잡고 있다. 카타르는 아라비아반도 수니파 왕정 산유국들의 지역협력기구인 걸프협력회의(GCC)의 일원이기도 하다.
카타르는 1990년대부터 중동의 미디어와 외교 중심지를 지향했다. 1996년 ‘중동의 CNN’으로 불리는 알자지라방송을 설립했다.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는 무장정파 탈레반, 현재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펼치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정치사무소(대외협상 창구) 설치를 허가하기도 했다. 지금도 탈레반과 하마스와 관련된 중재 및 협상은 도하에서 주로 진행된다. 작은 나라지만 천연가스와 중동 외교를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중동서 축구에 가장 진심인 나라
2월 6일(현지 시간) 카타르 알라이얀 아흐메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요르단이 2: 0으로 승리해 대한민국의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손흥민이 경기 종료 후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동아DB]
최근에는 사우디도 자극받아 축구 인프라 육성에 나섰다. 특히 사우디는 국내 리그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사우디는 지난해 여름 2023~2024년 시즌을 앞두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 네이마르(브라질), 카림 벤제마(프랑스), 은골로 캉테(프랑스), 사디오 마네(세네갈) 같은 월드 스타를 대거 영입했다.
세계적인 슈퍼스타를 영입해 국내 리그의 수준 향상을 꾀하는 전략에도 원조가 있다. 그 주인공은 카타르. 현재 FC바르셀로나 감독을 맡고 있는 사비 에르난데스가 대표적 예다. 선수 시절에도 유명했던 사비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카타르에서 뛰었다. 스페인 출신으로 각각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뛰었던 가비 페르난데스와 라울 곤잘레스도 카타르 리그에서 뛰었다.
카타르는 이강인이 뛰고 있는 프랑스 리그앙(리그1)의 명문 구단 파리생제르맹도 소유하고 있다. 리오넬 메시의 아르헨티나와 킬리안 음바페의 프랑스가 맞붙은 2022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을 놓고 카타르가 ‘최대 승자’란 말이 나왔다. 당시 메시와 음바페는 모두 파리생제르맹 소속 선수였기 때문이다.
카타르 사람들은 2022 카타르 월드컵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결승전에서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국왕이 메시와 음바페와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꼽는다. 그만큼 축구가 카타르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의미다.
카타르 목적은 ‘중동의 문화산업 중심지’
카타르가 축구에 유독 관심을 두는 이유는 국가 발전 전략과 맞물려 있다. 카타르는 1990년대 중반 본격적인 개혁·개방에 나서면서부터 문화산업에 유독 관심을 가졌다. 알자지라방송과 ‘아랍권의 ESPN’으로 불리는 스포츠 전문 채널 비인(beIN) 설립, 미국과 유럽 명문대의 캠퍼스를 유치한 교육연구특구인 ‘에듀케이션 시티’ 조성, 아랍현대미술관과 이슬람예술박물관 설립 등이 모두 ‘중동의 문화 허브’를 지향하는 전략에서 비롯됐다.카타르가 중동의 문화 허브를 지향한 큰 이유는 라이벌 UAE에 있다. 카타르보다 먼저 개혁·개방에 나서며 ‘중동의 허브’ 전략을 구사한 이웃 나라 UAE가 중동의 금융, 물류, 교통, 관광 등의 중심지를 지향한 것과는 차별화된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상대적으로 UAE가 먼저 허브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국제적인 주목을 많이 받았다”며 “후발 주자인 카타르가 주목을 받으려면 집중 육성 분야를 UAE와 달리할 필요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축구를 국가 브랜드 제고 전략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카타르의 ‘축구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다른 중동 산유국도 ‘축구를 이용한 국가브랜드 높이기’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GCC 축구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형국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인수한 EPL 구단 뉴캐슬 유나이티드. [뉴캐슬 유나이티드 X 캡처]
사우디는 ‘2034 월드컵’ 유치도 눈앞에 두고 있다. 강력한 경쟁자이던 호주가 유치 경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사우디는 사실상 중동에서 두 번째로 월드컵을 개최하는 나라가 될 전망이다.
UAE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UAE를 구성하는 양대 산맥인 아부다비와 두바이 모두 축구에 진심이다. 특히 아부다비는 왕실 구성원인 만수르 빈 자이드 알 나흐얀이 EPL의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해 큰 주목을 받아왔다.
두바이도 EPL의 명문 아스널을 오랜 기간 후원하는 등 ‘축구 마케팅’에 그 나름대로 공을 들여왔다. 아스널의 경기장을 두바이 국영항공사인 에미레이트항공이 후원했다. 당연히 아스널 경기장의 이름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GCC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의식을 감안하면 UAE도 축구에 대한 투자를 더 늘릴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 중동 법인장(상무)과 KOTRA 리야드 관장을 지낸 윤여봉 전북경제통상진흥원장은 “GCC 국가 간 축구 경쟁은 젊은 리더들의 등장과 성장,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국가 간 자존심 대결 등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사우디·UAE 압박에도 AFC 우승
GCC 국가 간 축구 경쟁이 ‘진짜 전쟁’처럼 진행된 적도 있다. 직전 아시안컵 대회가 열린 2019년이 그랬다. 당시 GCC 국가들은 GCC 설립 이래 최악의 위기 상황을 경험하고 있었다.2017년 6월 카타르가 이란과 튀르키예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이유로 사우디, UAE, 바레인이 단교를 선언했기 때문이다(쿠웨이트와 오만은 중립을 선언했다). ‘카타르 단교 사태’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결속력이 강한 지역협력기구로 꼽히는 GCC의 극심한 분열을 의미했다.
이란과 튀르키예는 GCC의 중심 국가인 사우디와 중동 패권을 다투는 라이벌 국가다. 특히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이며 왕정을 무너뜨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신정공화정 국가’다. 사우디는 이란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반면 카타르는 걸프만의 세계 최대 해상 천연가스전을 이란과 공유하다 보니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이란을 사실상 ‘주적’으로 여기는 사우디와 UAE의 심기를 거슬린 것이다.
2021년 1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직전 단교 사태가 해결되기는 했지만 이전까지 단교 주도국들은 카타르와 외교관계를 끊고, 무역을 전면 중단했다. 일반인들의 방문도 제한됐다. 축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9년 아시안컵이 UAE에서 열렸을 때 카타르 국가대표팀의 방문은 가능했다. 하지만 카타르 국가대표팀은 아무런 응원 없이 경기를 치러야 했다. 단교로 카타르인의 UAE 방문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UAE는 아시안컵이 열리기 직전 카타르축구협회장이자 아시아축구연맹(AFC) 부회장인 사우드 알 모한나디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했다. 당시 알 모한나디 부회장은 AFC 업무차 오만 수도 무스카트를 경유해 UAE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UAE 측에서 방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흘렸다. 어쩔 수 없이 무스카트에서 일정보다 더 머물다 확실히 입국이 가능하다는 게 확인된 뒤 UAE로 떠났다.
재미있는 건 이런 ‘핍박 속에서’ 카타르가 2019 아시안컵에서 우승했다는 것이다. 당시 카타르는 예선전에선 사우디, 4강전에선 UAE를 이겼다. 2월 11일 막을 내린 카타르 AFC에서도 카타르가 우승했다.
당연히 카타르는 들썩였다. 당시 기자는 카타르 도하의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19 아시안컵 대회 기간 중 카타르 경기가 있는 날은 거리에 자동차도 눈에 띄게 줄었다. 친한 카타르인들은 카타르가 경기에서 승리할 때마다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즐거워했다. 대형 TV가 설치돼 있는 식당이나 카페에서 경기를 함께 관람하며 응원하기도 했다.
스포츠 이용해 부정적 이미지 가리기
중동 산유국들의 축구에 대한 투자는 다른 스포츠로도 확대되고 있다. 여기서도 최근 가장 돋보이는 나라는 사우디다. 특히 사우디는 골프에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6월 사우디 PIF가 지원하는 LIV 인비테이셔널 골프(LIV)는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DD월드투어(옛 유러피언투어)와의 ‘통합’을 발표했기 때문이다.사우디는 왕가의 발상 지역으로 꼽히는 리야드 내 디리야에서 자동차 경주대회를 개최하고, 복싱 타이틀전도 열었다. 과거 사우디의 보수적 이미지와 정책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권형 선임연구위원은 “국가 브랜드 개선은 물론이고 중·장기적인 기업과 투자 유치를 위해서도 사우디는 스포츠와 같은 소프트파워 자산을 키워야 한다”며 “특히 비석유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선 이런 정책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동 산유국들의 축구와 스포츠 산업 육성 과정에서 ‘스포츠워싱’ 논란은 계속된다. 여성 차별과 외국인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 등으로 훼손된 국가브랜드를 화려한 스포츠 이벤트와 투자로 덮으려 한다는 것.
정도의 차이만 있지, 중동 산유국들은 자국 내 서비스 부문과 블루칼라와 단순노동 직종의 인력 상당수를 외국인으로 채우고 있다.
특히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대우와 각종 사고는 국제 NGO들이 자주 지적하는 문제다.
이형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스포츠가 단기간에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는 효과가 상당히 큰 건 사실이지만 중동 산유국들의 경우 스포츠워싱에 대한 비판 강도도 동시에 강해지는 분위기”라며 “시간이 흐를수록 ‘외국인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식의 국제 여론도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