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잃어버린 이후 다신 안 키워
버티는 것이 인생이더라
김수현 작가는 은인, 지울 수 없는 인연
윤여정은 “같은 캐릭터를 재탕하지 않는 걸 철칙으로 여긴다”고 했다. [CJ ENM]
2월 7일 개봉한 영화 ‘도그데이즈’로 스크린에 복귀한 배우 윤여정은 애써 형식적인 답변은 하지 않았다. “영화를 어떻게 봤느냐”고 물으면 으레 “잘 봤다”고 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의 뜻밖의 반응이 조금도 거북하지 않다. 잠시 잊고 있었다. 윤여정은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바와 다르게, 포장하거나 미화해서 말하지 않는, 격하게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
고희를 훌쩍 넘은 나이지만 윤여정은 지금이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미나리’(2021)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드라마 ‘파친코’(2022)로 전 세계에서 관심을 모았다. ‘파친코’는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많은 작가와 감독이 작품을 함께하고 싶어 하는 ‘섭외 1순위’ 배우가 선택한 차기작이기에 ‘도그데이즈’는 개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영화는 개라면 질색을 하는 속물근성이 다분한 건물주(유해진 분)와 이 건물의 세입자인 수의사(김서형 분), 반려견 한 마리와 단둘이 사는 세계적 건축가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윤여정은 건축업계를 쥐락펴락할 정도의 실력과 명성을 지닌 건축가이자 가족 없이 반려견에 의지해 사는 독거노인의 이중적 삶을 보여준다.
배우 김윤진이 공동 제작한 이 영화는 2월 22일 현재 누적 관객수 35만 명을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순위 7위에 랭크돼 있다. 제작 규모에 비해 좋은 성적이라는 평이다.
김덕민 감독과의 전우애로 출연 결심
영화 ‘도그데이즈’에서 성공한 건축가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윤여정. [CJ ENM]
“영화적인 매력은 없었다. 감독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다. 김덕민 감독과 19년 전 조감독과 배우로 처음 만났고 전우애가 쌓였다. 나중에 보니 조 감독을 너무 오래 하고 있었다. 세상 살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싶었다. (김)덕민이가 입봉하는 작품에 내가 할 역할이 있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그때의 결심을 지키려고 출연한 것이다.”
작품을 많이 하는 다작 배우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뭔가.
“그때그때 다르다. 배우생활을 오래 하고 나이를 많이 먹어서 선택지가 많지 않다. 시나리오도 좋고 역할도 좋고 돈도 많이 주고 감독도 명망 있는 작품은 만나기 힘들다. 이번에는 감독과의 인연만 봤다.”
‘배우로서 이것만은 꼭 지키자’ 하는 나름의 철칙이 있나.
“한때 드라마를 많이 했다. 그때는 다른 작품에서 한 역할은 재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 나이에도 그러면 얼마나 고역인가. 요즘은 누구를 돕기 위해 혹은 사람이 좋아서 한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서 출연하기도 한다. 이제 기운이 없고 내 인생을 정리할 나이인데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70대에도 꾸준히 출연 제의를 받는 배우는 극히 드물다. 그만큼 그에겐 다른 배우와 차별화된 매력이 있다는 방증이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반문한다. “난 정말 모르겠는데, 그게 뭔가요?” “설득력 있는 목소리”라고 답하자 이번엔 웃음이 빵 터진다.
“한때 목소리 때문에 거부감 1위 배우로 뽑혔었고, ‘저 여자 목소리 너무 듣기 싫으니까 나오지 말라고 그러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 목소리가 매력 있다는 사람이 생긴 것이 정말 신기하다.”
영화 ‘도그데이즈’의 한 장면. [CJ ENM]
미련할 정도로 대본 보고 또 보는 게 비결
스크린 밖 모습도 궁금하다. 극 중 건축가 민서처럼 집 꾸밈에 관심이 많나.“집 꾸미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집에 대한 애착이 있긴 하다. 내가 46살부터 30년 넘게 한 집에 살았다. 수리할 때가 돼서 전문업체에 다 맡겼더니 내 집이 아닌 느낌이다. 집에는 그 사람 고유의 향기가 있는데 그게 없다. 그래서 2층엔 안 올라간다.”
반려견을 키운 경험이 있나.
“있는데 그 아이를 잃어버린 다음 더는 못 키우겠더라. 그 아이를 잃어버리고 너무 온 식구가 힘들었다. 길에서 우연히 비슷하게 생긴 아이를 보면 막 따라가고 그랬다. 다시는 그런 짓은 안 하기로 했다. 그게 자식을 하나 키우는 거랑 똑같다. 친구들은 반려견 하나를 입양하라는데 내가 지금은 키울 자신이 없다. 그냥 외롭게 살다 가려고 한다.”
수많은 작품을 했지만 캐릭터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비결이 뭔가.
“대본을 굉장히 많이 보는 편이다. 미련할 정도로 보고 또 본다. 완벽하게 그 인물이 되려고 노력해서 작품마다 달라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암기 노하우를 알려줄 수 있나.
“비법 없다. 마르고 닳도록 외운다. 대사를 끊임없이 외우다 보면 그 인물이 된다.”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나.
“많다. 요즘은 너무 절실하게 느낀다. ‘파친고’ 촬영을 해외에서 할 때 진이 빠져 정말 힘들었다. 책(대본)을 읽는데 아무 생각이 안 나서 건강검진 받고 뇌검사 받고 난리가 났었다.”
그는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에 입문했다. 1971년에는 영화 ‘화녀’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1972년 김수현 작가가 집필한 ‘새엄마’라는 드라마로 최고 인기를 구가했다. 1974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로 살다가 1987년 이혼했다. 이후 김수현 작가의 히트작으로 꼽히는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에 잇따라 출연하며 안방극장에 안착한다. 이후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오가며 30년 넘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고비 때마다 김수현 작가가 도와준 것으로 안다. 윤여정 배우에게 김수현 작가는 어떤 존재인지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나한테는 은인이다. 20대에 만나서 동무 돼주고 선배 돼주고 그래서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인연이다.”
다시 태어나면 배우는 NO
배우로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인가.“만날 힘들었다. 출세한지 얼마 안 됐다. 근데 삶 자체가 원래 고행 아닌가. 힘들었다고 해서 불평도 별로 없다.”
인생을 관통하는 좌우명이 있나.
“좌우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버티자’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면 된다. 인생이 버티는 거더라.”
배우를 천직이라고 생각하나.
“예전엔 아니라고 생각했다. 타고난 연기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빼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은 이렇게 오래 연기를 해왔는데 천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실례 아닌가 싶다. 천직 맞다. 할 줄 아는 게 연기밖에 없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로 살고 싶나.
“지금 인생에서 경험한 건 안 하고 싶다. 안 했던 거 해보고 싶고, 잘못한 걸 바로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