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적은 동지” 총선 앞둔 이합집산
이인제·김민석·손학규 묘한 공통점
탈당·복당, 의원 꿔주기, 당적 변경
김부겸과 진영은 다소 독특한 사례
북미·유럽에는 없는 한국적 현상
획일화된 정당 문화 고착화가 원인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해 국민의힘에 입당한 이상민 의원(왼쪽)과 국민의힘 탈당 후 민주당 복당을 선언한 이언주 전 의원. [동아DB]
다만 ‘철새 정치인’이라는 꼬리표는 덤이다. 180도 정반대의 당적 변경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정치철학과 신념보다 총선 승리의 유불리가 우선시된다. ‘내가 하면 결단, 남이 하면 철새’라는 내로남불도 횡행한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탈당·복당·정당 이적은 북미나 유럽에서는 사례를 찾기 힘든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멀게는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87년 체제 수립 이후 1990년 3당 합당이나 1997년 DJP(김대중·김종필) 연대 등 메가톤급 정계 개편 사례도 있다. 2000년대 이후 3김정치의 소멸과 더불어 ‘보수 vs 진보’라는 일대일 양당 구도가 성사됐지만 선거 때마다 철새 논란은 반복돼 왔다. 적대적 공생 구조에 기반한 양당 체제의 여파였다. 정치적 고비 때마다 반복돼 온 주요 정치인들의 정당 이적사를 되짚어봤다.
“당적 변경, 굉장한 리스크 감수해야”
“적의 적은 동지다.” 여야 정치권의 유명한 격언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며 독재에 저항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으로, 유신정권의 최대 피해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DJP 연대를 무기로 대권을 거머쥔 게 대표적이다. 정치는 돌고 돈다. 4월 제22대 총선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나타날 조짐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이상민 의원과 이언주 전 의원의 행보다.이재명 대표 체제의 민주당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이상민 의원은 국민의힘을 선택했다. 한때 ‘보수의 여전사’로 불린 이언주 전 의원은 국민의힘을 탈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당 복당설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철새 이미지로 성공한 정치인은 흔치 않다”며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아진 만큼 당적 변경은 굉장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상민 의원은 17대 총선부터 21대 총선까지 대전 유성을에서만 내리 5선을 기록한 중진이다. 18대 총선 당시 자유선진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이 의원은 탈당의 변에서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체제 이후 이재명 사당, 개딸당으로 변질돼 반상식적이고 파렴치하기까지 한 행태가 상습적으로 만연됐다”고 비판했다. 평가는 극단적이다.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옹호론과 철새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나온다. 이 의원으로서는 정치 인생을 건 도박이다. 성공한다면 6선 고지에 오르면서 22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직도 노려볼 수 있다. 실패한다면 정계 은퇴 이외의 선택지를 찾기 힘들다.
변호사 출신의 이언주 전 의원은 19·20대 총선 당시 경기 광명을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재선 고지에 올랐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주도한 영입 인재라는 상징성에 민주당을 대표하는 차세대 여성 리더로 성장했다. 다만 과도한 친문 패권주의 비판 논란 속에 2017년 4월 안철수 후보 공개 지지와 함께 국민의당으로 옮겼다. 이후 바른미래당을 거쳐 21대 총선을 앞두고 미래통합당에 합류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에는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정조준한 맹비난을 쏟아내며 눈길을 모았다. 탈당 이후 제3지대행이 점쳐졌지만 이재명 대표의 제안으로 민주당 복당을 선언했다. 복당이 의결된다면 친정 복귀지만 난제는 적잖다. 공천 여부는 물론 향후 정치 행보도 불투명하다.
최대 관심사는 두 사람의 여의도 입성 여부다. 최근 여야 간 보수·진보의 경계선이 많이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당적 변경은 여전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성공하면 대박, 실패하면 정계 은퇴 수순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당을 옮긴다는 것은 본인의 소신과 가치, 세계관을 모두 바꾸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가”라고 반문하면서 “정치적 가치나 철학의 지향점 없이 단기적 실익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적 변경은 한국 정치의 후진적 현상”이라면서도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여야 내부에서 시스템 공천이 확실하게 보장돼야 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게 경선이 보장되지 않는 전략공천이나 단수공천”이라고 지적했다.
어지러운 당적 변경史 백태
한국 정치는 ‘보수·진보’라는 이념과 ‘영·호남’이라는 지역을 근간으로 구축된 거대 양당 구조다. 다만 자세히 뜯어보면 불안정한 체제다. 87년 체제 성립 이후 역대 대선과 총선은 다자 구도의 흔적이 적잖다. 대선만 본다면 △2002년 대선(노무현 vs 이회창) △2012년 대선(박근혜 vs 문재인) △2022년 대선(윤석열 vs 이재명) 정도가 사실상의 양자 대결이었다.총선도 마찬가지였다. 탈당·분당·합당 등 여야의 합종연횡이 어지럽게 반복됐다. 민주당 계열 정당은 2004년 17대 총선(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2016년 20대 총선(새정치민주연합 분당과 국민의당 창당)을 거치며 분열과 통합을 지루하게 반복했다. 국민의힘 계열 정당 역시 2016년 국정농단·탄핵 사태의 여파 속에서 마찬가지 흐름을 지속했다. 정치권의 합종연횡이나 대규모 정계 개편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야 의원들은 뜻하지 않게 당적이 뒤바뀌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민주당은 17대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분당을 경험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 말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레임덕과 불투명한 대선 전망에 수없는 이합집산 끝에 대통합민주신당이 만들어졌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민주당 단일대오로 통합했지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또다시 친문 패권주의 논란과 안철수 의원의 독자세력화로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당 계열 출신의 일부 정치인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 지지라는 180도 다른 선택을 하기도 했다. 친노·친문의 주도권 확인 이후 민주당은 안정적인 당 운영을 이어왔지만 지난 대선 이후 친명 주도로 당이 재편되면서 22대 총선을 앞두고 이낙연 전 국무총리(현 개혁신당 공동대표) 등의 탈당에 이어 비명계의 추가 탈당도 예상된다.
국민의힘은 총선 공천 때마다 대규모 분열을 경험했다. 2008년 18대 총선 당시 친이계의 친박 공천 학살에 따른 친박연대와 친박무소속연대의 돌풍이 대표적이다. 이후 총선에서도 공천 논란에 따른 탈당과 복당이 반복됐다. 20대 총선 당시 진박 공천과 비박계 학살은 총선 패배의 원인이 됐다. 21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4인방(홍준표·권성동·김태호·윤상현)이 당선 이후 복당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국정농단·탄핵사태로 창당 이후 최대 분열을 경험했다.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 vs 바른정당으로 분열됐다가 2018년 자유한국당 vs 바른미래당(바른정당+국민의당)을 거쳐 2020년 21대 총선 직전에야 미래통합당으로 이어졌다. 이번 22대 총선에서는 이준석 전 대표(현 개혁신당 공동대표)의 선도 탈당에 이어 공천 이후 비윤계 낙천자들의 개혁신당 추가 합류도 점쳐진다.
‘6선의 불사조’ ‘철새 꼬리표’ ‘불운의 아이콘’
이인제 전 의원과 김민석 민주당 의원,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왼쪽부터). [동아DB]
이인제 전 의원은 흔히 ‘불사조’로 불린다. 당적 변경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통일민주당을 시작으로 민주당계 정당, 충청권 지역정당, 보수정당을 두루 거쳤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대세론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역전패한 근본 이유로 당적 변경을 꼽기도 한다. 6선 경력 또한 통일민주당(13대), 민주자유당(14대), 새천년민주당(16대), 자유민주연합(17대), 무소속(18대), 자유선진당(19대) 등으로 동일 당명이 아니다.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충남 논산·계룡·금산에, 2018년 제7회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 후보로 충남지사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22대 총선에서도 출마 의지를 다지면서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김민석 의원의 사례는 가장 논쟁적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86(1980년대 학번·1960년대 출생)세대를 대표했던 김 의원은 15대 총선에서 만31세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 이후 16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차세대 리더로 승승장구했지만 그야말로 “한 방에 훅 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2년 대선 국면에서 민주당 탈당과 더불어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를 선택,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정치 인생 내내 ‘철새’라는 꼬리표에 시달렸다.
현역 복귀까지는 20년이 걸렸다. 20여 년의 귀중한 시간을 정치 낭인으로 흘려보냈다. 김 의원은 21대 총선에서 천신만고 끝에 여의도로 복귀했다.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회창 후보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후보단일화가 필요했다”고 강조했지만 일부의 뿌리 깊은 부정적 시선 또한 여전하다.
손학규 전 대표의 당적 변경도 큰 충격을 줬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한나라당을 탈당했다가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경선에 전격 참여했다. 이명박·박근혜 양강 구도를 깨지 못하고 단기필마로 당적을 옮긴 것이었다. ‘저평가 우량주’라는 평가에도 이후 정치 인생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특히 중대한 정치적 결단을 내릴 때마다 메가톤급 이슈가 터지는 ‘손학규 징크스’로 애를 먹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 대선 경선에 3차례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독수리 5형제에서 진영 前 장관 사례까지
다소 기괴한 당적 변경 사례도 있다. 이른바 ‘의원 꿔주기’다. 김대중 정부 시절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 유지를 위해 새천년민주당 소속 의원 일부가 자민련으로 당적을 이동한 것이다. 꼼수 정치에 불과한 의원 꿔주기 사례는 20년이 흐른 21대 총선 당시 비례대표 위성정당 논란 속에서 되살아나기도 했다.원조 ‘의원 꿔주기’ 사례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DJP 연대를 재구성해 한나라당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2000년 16대 총선 이후 17석을 얻는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 유지를 위해 새천년민주당 소속인 송석찬·배기선·송영진·장재식 의원이 자민련으로 이적했다. ‘의원 꿔주기’라는 희대의 코미디는 내각제 무산과 대북정책에 대한 시각차로 DJP 연대가 붕괴되면서 막을 내렸다. 자민련으로 이적했던 민주당 의원들은 이후 친정인 민주당으로 복귀했다.
21대 총선에서 ‘의원 꿔주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여야는 총선 불출마 또는 공천 탈락 현역의원들을 비례 위성정당으로 대거 떠넘겼다. 이는 비례대표 투표용지 기호를 상위 순번으로 배치하기 위한 꼼수였다. 문제는 22대 총선에서도 준연동형제의 유지로 비례대표 위성정당이 존치하면서 자칫하면 또다시 의원 꿔주기라는 사례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의원 꿔주기와 정반대인 속칭 ‘의원 빼가기’도 특이 사례다. 과반 확보에 실패한 집권 여당이 시도한 인위적인 정계 개편에 해당한다. 정책연대라는 포장에도 야당 의원이나 무소속 의원을 당근·채찍을 무기로 스카우트해서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만든 것이다. 15·16대 총선에서 각각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신한국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정국 안정을 명분으로 사용한 전략이었다.
정당을 옮긴 인물 중에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는 김부겸 전 국무총리(왼쪽)와 진영 전 행정안전부 장관. [동아DB]
배제 아닌 포용의 정당 민주화 필요
총선 때마다 되풀이되는 철새 논란 등 당적 변경은 후진적인 한국 정치 지형의 산물이다. 이념과 정책이 중심이라는 정당정치의 본질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당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 제왕적 총재 또는 정치적 보스로 불리는 지도자 1인에 의존하는, 다시 말해 명망가 정당의 잔재다.홍형식 소장은 “당적 변경은 정치철학이나 신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발생할 수 있는 대내외적 상황이 전제돼야 한다”며 “만일 그렇다 해도 국민을 납득시켜야 하고 이후 실행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정치적 외부 변수는 크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당 내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한국적 양당 구조가 다양한 유권자 이념 지형을 반영하지 못하는 구조적 요인 탓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反)윤석열’은 ‘친(親)이재명’이라거나 ‘반(反)이재명’은 ‘친(親)윤석열’이라는 흑백논리가 횡행한다는 의미다.
1992년 대선 YS 집권, 1997년 대선 DJ 집권, 2004년 17대 총선 JP 정계 은퇴 이후 3김 정치가 막을 내렸다. 이후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보수 vs 진보’의 이념 대결이 한층 강화했다. 그러면서 여야 의원들의 180도 다른 당적 변경은 ‘철새 정치인’이라는 오명 속에 비판의 표적이 됐다. 금배지만을 노리고 양지를 좇는다는 비판이었다. 구체적 성공 사례를 찾기도 쉽지 않다.
전문가들 역시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비판하면서 정당 민주주의의 실현을 선행 조건으로 제시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제왕도 아닌데 제왕처럼 행동하는 격이다. 당내 주류가 모든 것을 독식하면서 폐쇄적으로 당을 운영하기보다는 비주류를 포용하고 인정해야 한다”며 “과거 YS나 DJ는 정조나 영조처럼 강력한 제왕의 리더십을 가졌지만 인재를 파격적으로 발탁하고 등용하는 탕평을 실시했다”고 강조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말로는 정당 민주화를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획일화된 정당 문화가 고착화됐기 때문”이라면서 “여야 모두 다른 목소리를 포용하고 반영하는 당내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돼야 한다”고 했다.
신동아 3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