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호

[영상] 싸우면서 협상한 ‘황제국’ 고려, 실리 외교 끝판왕

이익주 교수와 함께한 역사의 재발견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

    입력2024-03-1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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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고려·거란 전쟁과 불굴의 영웅 양규

    • 거란을 설득하고 인질이 된 외교관

    • 전투에 지지 않고 협상으로 평화를 얻다

    • 500년 동안 공신을 잊지 않은 나라

    • 황제국의 다원적 천하관과 실리 외교

    • 단일민족과 조선 건국이라는 고려의 유산



    “고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고려 역사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주로 연구해 온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KBS2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매회 10% 안팎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를 뿌리는 것에 반가움을 표했다. 덩달아 ‘한국 역사,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를 내걸고 2022년 시작한 ‘이익주는 역사’(유튜브)에서 드디어 고려시대 콘텐츠의 조회수가 조선시대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고려의 영웅 현종’ 47만 회, ‘거란족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수 있다고?’ 43만 회 외에 강감찬·양규·하공진·지채문·김은부 등 인물 시리즈도 드라마의 전개에 따라 조회수가 급등하고 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고려·원 관계의 구조와 고려 후기 정치체제’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 연구 대상은 고려시대 국제관계사와 고려 후기 정치사다. ‘한국 역사,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를 내걸고 ‘이익주는 역사’(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조영철 기자]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고려·원 관계의 구조와 고려 후기 정치체제’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 연구 대상은 고려시대 국제관계사와 고려 후기 정치사다. ‘한국 역사,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를 내걸고 ‘이익주는 역사’(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조영철 기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규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텐데 드라마를 통해 불리한 전황에도 도망가거나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불굴의 상징이 됐잖아요. 반갑죠. 연구 대상이 될 만큼 충분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인물들을 알릴 방법이 없는데 드라마니까 가능했어요.”

    고려는 918년에 건국해 1392년까지 무려 474년간 존속했지만 학문적으로는 공백이 많은 나라다. 일단 연구할 수 있는 사료가 부족하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불탈 때 초기(태조~목종) 실록이 소실됐고, 현종이 이를 복원한 뒤 30대 ‘충정왕실록’까지 편찬됐으나 몽골·홍건적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이리저리 옮겨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됐다. 그나마 정사로는 조선 전기 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고려사’가 남아 있다. 역사의 주무대가 북한에 있다는 것도 고려사 연구가 부진한 이유 중 하나다. 1차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유적이나 유물은 대부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 있으니 직접 가볼 수 없는 연구자로서는 답답할 뿐이다.

    “역사학이란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것인데, 사료가 부족하면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논문을 쓸 수가 없어요. 고려시대 연구자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벽이죠. 연구가 부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잘할 수 있는 이유는 없는 게 바로 고려시대 연구죠.”



    이 교수가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공부하던 1980년대는 한국 고대사와 조선시대 연구가 주류였다. 이는 근대 역사학의 시작이 일본인에 의한 ‘식민사학’이었다는 데서 비롯한다. 식민 사학의 1차 목표는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증명하느냐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고대사와 조선시대 연구에 집중했다. 반면 광복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이를 반박하기 위한 연구에 매달리다 보니 역시 고대사와 조선시대에 집중하게 됐다. 고려가 우리의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진 세 번째 이유다.

    “조선도 500년 고려도 500년인데 매년 발표되는 논문 편수만 비교해도 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려시대를 전공하면서 조선시대처럼 하나의 주제로 깊이 들어가는 연구를 하기는 어렵지만 큰 주제로 새로운 틀을 만들어가는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거란의 2차 침입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활약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1000년 전 고려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제 이익주 교수의 해설을 들으며 우리가 몰랐던 ‘황제국 고려’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거란은 993년(고려 성종 12)부터 1019년(고려 현종 10)까지 26년 동안 세 차례 고려를 침략했고, 고려는 세 차례 모두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1차(993~994) 때에는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여 강동 6주(흥화·용주·통주·철주·귀주·곽주: 압록강 이남과 청천강 이북 사이 지역으로 현재 평안북도에 해당)를 획득했다. 2차(1010~1011) 때에는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옹립된 것을 명분 삼아 쳐들어왔으나 현종의 친조(거란에 직접 가서 황제를 만남)를 약속받고 철수하다 양규와 김숙흥의 결사대로부터 큰 피해를 보고 패퇴했다. 3차(1018~1019) 때에는 상원수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물리치면서 26년에 걸친 고려·거란 전쟁이 막을 내린다.

    세간에서는 귀주대첩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함께 우리 역사에서 3대 대첩으로 꼽지만, 상대적으로 양규 등이 활약한 2차 전쟁은 주목받지 못했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뜨기 전까지 양규의 이름도, 김숙흥의 존재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양규 역을 맡은 배우조차 이 작품을 통해 처음 그 이름을 접했다고 한다. 이익주 교수는 “실제로 1010년 11월부터 1011년 1월까지 두 달 남짓한 전투 기록만 남아 있어서 양규의 본관조차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자리에 올랐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았다

    “임인일 양규와 김숙흥이 거란군과 싸우다 죽었다(壬寅 楊規·金叔興與契丹戰死).”

    1011년(현종 2) 1월 28일(이하 음력) 두 사람의 죽음을 전하는 ‘고려사 세가’는 단 12자다. 다행히 ‘고려사 열전’과 ‘고려사절요’에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서북면도순검사 양규의 전공과 이에 대한 공로로 추증(追贈·사후 품계를 높여주는 일)하고 대대로 후손에게도 관직을 내렸다는 내용 등이다.

    “얼마 뒤에 거란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 오자 양규와 김숙흥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 (중략)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가 되었던 3만여 구(口)를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고려사 열전)

    2차 전쟁 당시 두 사람의 전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사후 35년이 지난 1046년 문종이 양규와 김숙흥의 초상을 공신각(功臣閣)에 걸어 후대 사람들에게 권장케 하라는 제서(制書·임금의 명령서)를 내린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종의 제서에 위모(蝟毛·고슴도치 털)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거란이 침략했을 때 서북면도순검사 양규, 부지휘 김숙흥 등은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전쟁 중에 전사했다.”(고려사 열전)

    이 짧은 기록을 근거로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활을 들고 거란 황제(성종)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다 선 채로 온몸에 화살이 박혀 죽은 양규와 김숙흥의 장렬한 최후를 연출했다(16회). 역대급 명장면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고려판 이순신’ 양규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익주 교수는 드라마가 아닌 역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하공진이라고 말한다.

    거란과 치른 일곱 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양규와 김숙흥. [KBS2TV ‘고려 거란 전쟁’ 화면 캡처]

    거란과 치른 일곱 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양규와 김숙흥. [KBS2TV ‘고려 거란 전쟁’ 화면 캡처]

    명분 찾고 화친 제안한 하공진

    하공진은 누구인가. 1011년(현종 2) 12월 ‘이달에 거란이 하공진을 죽였다(是月, 契丹殺河拱辰)’(고려사 세가). 양규와 마찬가지로 하공진도 ‘향년’을 남기지 않아 출생연도를 가늠할 수 없다. 하공진은 흔히 고려의 무신으로 소개되지만 목종 때 문신 관직인 상서좌사낭중이 돼 무반에서 문반으로 ‘개반(改班)’을 했다.

    거란의 2차 침략 시 하공진은 유배된 상태였다. 당시 거란과 책봉 관계에 있던 고려는 거란에 침략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목종 시해 사실을 숨기고 시간 끌기에 들어갔지만 여진이 재빨리 고려의 내부 상황을 거란에 알리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거란 성종은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니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며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거란 성종은 최전방 흥화진(평안북도 의주)을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으나 양규 등이 끝끝내 버티자 흥화진 공략을 포기하고 병력을 둘로 나눠 절반을 무로대(의주 남쪽)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절반을 이끌고 행영도통사(최고 사령관) 강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주둔한 통주(평안북도 선천)로 갔다. 통주성 앞 삼수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고 강조마저 적에게 사로잡혀 죽는다.

    통주 전투에서 승리하고 곽주를 함락시킨 거란군은 이어 서경을 공격하지만 지채문 등의 저항에 부딪히자 현종을 잡기 위해 곧장 개경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듣고 나주로 피난을 떠나기 직전 현종은 지휘관 한 명도 아쉬운 터라 하공진과 유종의 복직을 명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하공진은 창화현(경기도 양주) 부근에서 현종을 알현하고 이렇게 아뢴다.

    몽진하는 현종에게 “거란군영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고 제안하는 하공진(왼쪽). 거란의 2차 침략으로 개경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현종과 신하들. [KBS2TV ‘고려 거란 전쟁’ 화면 캡처]

    몽진하는 현종에게 “거란군영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고 제안하는 하공진(왼쪽). 거란의 2차 침략으로 개경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현종과 신하들. [KBS2TV ‘고려 거란 전쟁’ 화면 캡처]

    “거란은 본래 강조를 처벌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미 강조를 체포했으니 이제 더 싸울 명분이 없습니다. 지금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군대를 철수할 것입니다.”

    이익주 교수는 이 대목이 “하공진의 외교적 판단이었다”고 해석한다. 현종은 화친의 기회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하공진 편에 거란 황제에게 표문(외교문서)을 보낸다. 다음 날 하공진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먼저 부하들을 시켜 거란 군영에 가서 이렇게 전하게 한다.

    “국왕께서 직접 와서 뵙기를 원하셨으나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셨고, 또 국내의 여러 어려운 사정 때문에 강남으로 피난 가셨으므로 배신(陪臣) 하공진 등을 보내 사유를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공진도 역시 두려워서 감히 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속히 군사를 거두어주소서.”

    여기서 ‘배신’이란 고려 국왕의 신하가 국왕을 책봉한 황제에 대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굴하리만치 자신을 낮추는 대신 현종이 피난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거란의 선봉군이 빨랐다. 하공진의 부하들이 거란 군영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봉군이 창화현에 도착했다. 경기도 광주에 머물고 있던 현종의 코앞(약 4㎞)까지 추격한 셈이었다. 다급해진 하공진이 직접 거란 군영을 찾아갔다. 거란 측이 “너희 국왕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하공진은 “강남으로 가고 계신데 계신 곳은 알지 못합니다”라며 잡아뗀다. 다시 거란 측이 “강남이 먼가, 가까운가”라고 묻자, 하공진은 “너무 멀어서 몇만 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 말을 듣고 현종을 추격하던 거란군이 돌아갔다고 ‘고려사 열전’은 전한다.

    “하공진은 창화현에서 거란의 선봉군을 만나 이들을 따라 본진까지 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거란 성종을 만났을 가능성이 크죠. 그리고 현종의 친조를 약속하며 거란 황제를 설득해 거란군의 남하를 막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대신 자신이 인질로 끌려가 결국 거란 땅에서 죽습니다. 외교관이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외국에 파견되어 거짓말을 하는 가장 정직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요. 어쨌든 하공진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해서 설득하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강대국을 상대하는 약소국 외교의 자세죠.”

    침략에 맞서는 고려의 자세

    이 교수는 거란과 벌인 세 차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꼽으면 1차전은 서희, 2차전은 하공진, 3차전은 강감찬이라고 말한다.

    “극적인 전투 장면은 고려가 침략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우리가 이겼다는 것을 부각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침략에 맞서는 고려의 자세가 무엇이냐에 있어요. 하공진의 역할에 주목하는 이유는 전쟁과 외교를 동시에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려다운 대응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려다운 대응이란 무엇일까.

    “한편에서는 싸우고 한편에서는 협상하는 거죠. 고려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했어요. 전투는 고려 영토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피해는 고스란히 고려인에게 돌아갑니다. 농경지가 황폐해지고, 인명이 살상되고, 이런 피해가 전부 고려 사람들 몫이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전투를 중단시켜야죠. 이것은 협상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어요. 일단 전투에서 얼마나 우위를 점하느냐에 따라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전투에서 지지 않고 협상으로 평화를 얻는다. 이게 고려의 전통적인 방법이고 이것을 2차 전쟁에서 가장 잘 한 사람이 하공진입니다.”

    한편 “(현종이 있는) 강남은 너무 멀어서 몇만 리인지 알 수 없다”는 하공진의 거짓말만 믿고 추격을 거둘 만큼 거란이 어수룩했을까. 이 교수의 해석은 다르다.

    “서로 수를 다 보면서 대화한 것이죠. 패를 다 펼쳐놓고 치는 고스톱에 비유할 수 있어요. 고려와 거란은 그런 고스톱을 친 겁니다.”

    전쟁 이기고 사대를 청하는 외교의 백미

    이 교수는 드라마가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외교’를 볼 것을 주문했다. 2차 전쟁 때 약속한 현종의 친조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를 빌미로 거란은 3차 침략을 했지만 귀주에서 대패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은 지 1년 뒤인 1020년 2월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사대관계를 복원하자’고 요청합니다. 전쟁에서 이긴 고려가 거란을 상국으로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먼저 한 거죠. 이것이 고려 외교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고려다운 거죠.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싸워야 하잖아요. 거란도 전쟁을 더 하는 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합니다. 거란-송-고려의 세력 균형 속에 약 100년간 평화가 이어지면서 고려는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대외관계의 안정을 바탕으로 이후 300년을 버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고려는 싸움을 잘한 나라가 아니라 싸운 걸 가지고 외교를 잘하는 나라였어요.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게 아닐까요.”

    거란에 인질로 끌려간 하공진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죽는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거란 성종이 하공진을 죽인 뒤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고 해요. 황제의 배신감과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그러나 ‘요사(遼史)’에는 하공진이라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한편 하공진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려에선 그의 아들 하칙충에게 녹봉과 자급(資給)을 올려줍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공진이 죽은 지 287년이 지난 1298년 충선왕은 거란군의 퇴각을 이끈 서희, 하공진, 노전, 양규 등의 내외손의 현손 중 한 사람에게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허락한다는 교서를 내립니다. 여기서 ‘내외손의 현손’이란 하공진을 할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손자)을 고조할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무려 7대에 걸쳐 챙겼다는 것이죠. 이처럼 고려는 300년이 되도록 두고두고 공신을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보상합니다. 고려가 500년을 유지한 데에는 절대 공신을 잊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할 부분입니다.”

    “해동천자(海東天子)이신 지금 황제에 이르러 부처와 하늘이 도우시니 교화가 널리 퍼져 세상이 다스려지도다. 은혜가 깊이 원근과 고금에 드물어라.”(고려사 악지)

    고려 황제의 성덕을 칭송하는 풍입송(風入松)이라는 가요로 여기에 ‘천자’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고려는 황제의 나라였다. 임금은 천자, 황제라는 위호를 사용했고, 황제에 대한 존칭은 폐하였다. 다음 후계자는 태자라 불렀고 존칭은 전하였다. 황제의 명령은 조서(詔書) 또는 칙서(勅書)라 했고, 천자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圓丘)를 시행했다. 반면 조선은 제후국의 나라였다. 임금을 전하라 불렀고, 태자 대신 세자, 조서는 교서(敎書)로 격하됐다. 또한 천자가 아니기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황제국을 표방했지만,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황제국 의식이 더 높아졌다.

    “현종 대에 거란과의 오랜 전쟁을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가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줄 만큼 대승리로 끝냄으로써, 고려의 동아시아에서의 외교적 위치는 크게 상승하게 된다. 그리고 고려의 제천의례인 팔관회는 고려가 영향력을 갖는 독자적 ‘천하’ 내의 여진, 발해 유민 등의 세력들은 물론 송, 거란, 일본의 상인 등도 참여하는 동아시아의 국제적 행사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노명호의 ‘고려전기 천하관과 황제국체제’)

    황제국 고려와 단일민족이라는 유산

    현재는 사극에서도 고려 임금을 ‘폐하’라 호칭할 정도로 상식이 됐지만 1999년 노명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해동천자와 다원적 천하관’에 대한 연구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황제국 고려’는 낯설었다. 조선 초 역사 편찬자들이 고려의 황제 제도를 참람하다고 여겨 천하를 삭제하고 황제, 천자를 왕으로 바꾸는 등 개서(改書)했기 때문이다.

    “고려 황제라면 중국 황제와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고려 사람들은 거기도 하나의 천하가 있고, 여기도 하나의 천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다원적 천하관입니다. 반면 조선 사람들은 하나의 천하가 있고 그 중심에 ‘명’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원적 천하관이죠. 물론 같은 황제라고 해서 완전히 대등한 관계로 본 것은 아닙니다. 우산을 폈을 때 꼭지 같은 나라가 중국이고 고려는 주변의 작은 나라라고 보았죠. 그런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것이 ‘책봉’과 ‘조공’입니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로부터 책봉이라는 국제적 공인을 받고 조공이라는 경제적 보상을 합니다. 이때는 고려 황제가 아닌 고려 국왕으로 책봉을 받았습니다. 나라 바깥에서는 왕이 되고 나라 안에서는 황제가 된다고 해서 이를 외왕내제(外王內帝)라고 합니다.”

    이익주 교수는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두 가지 틀로 ‘외왕내제’와 ‘본관제’를 꼽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본관과 성씨도 고려에서 시작됐다.

    “하공진은 진주 사람이라고 했을 때 진주가 본관입니다. 아마 하공진의 조부나 증조부가 태조 왕건을 도운 공로로 하씨 성을 하사받았을 것입니다. 고려는 기본적으로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지방 사람들이 힘을 합쳐 왕건을 왕으로 추대했다고 볼 수 있죠. 왕건이 고창군(안동)에서 견훤과 싸울 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호족 세 사람에게 성씨를 하사하는데 이들이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됩니다. 왕이 된 뒤 왕건은 ‘본관제’를 통해 각 지방 세력의 위치를 잡아줍니다. 왕이 있는 개경이 있고 그다음 ‘삼경(남경·서경·동경)’이라 해서 격이 높은 지방이 있고, 그다음 도호부와 목, 그다음 주·부·군·현이 있고, 주현 다음 속현이 있고, 향·소·부곡·진·역·장·처 이런 식으로 사는 지역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사람들에게는 성씨를 부여함으로써 종으로는 신분제, 횡으로는 본관제의 위계가 만들어진 것이죠. 고려에서는 본관이 어딘지만 알아도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어요.”

    이 교수는 고려의 본관제가 골품제로 대표되는 신라 지배층의 촘촘한 차별을 없애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한다. 골품제가 경주에 사는 지배층만을 위한 폐쇄적 신분제였다면, 고려에서는 일반인도 본관과 성씨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야말로 신라 1000년의 지배 질서를 흔드는 엄청난 개혁이었다. 1000년 전 존재했던 이 나라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신라의 삼국통일, 고려의 후삼국 통일로 정치적인 통일이 됐지만 여전히 백제의 후손,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점차 그런 의식이 묽어지다가 마침내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고려 후기의 일입니다. 몽골과의 오랜 전쟁이 끝나고 편찬된 ‘삼국유사’(1281)와 ‘제왕운기’(1287)에 나란히 단군이 등장하죠. 고구려·백제·신라는 각자의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건국설화를 갖고 있었고, 단군과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려에서 삼국 앞에 단군이라는 존재를 놓자 하나의 민족이라는 역사의 틀이 만들어진 것이죠. ‘우리 역사의 시작은 단군이 만든 조선’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고려 후기엔 상식이 됐습니다. 고려왕조만 망했을 뿐 나라가 분열되지 않았고 새 국호로 조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도 이 때문이죠. 이것이야말로 고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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