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한 지 6일 동안 폭풍우가 계속되는 악천후였다. 공사 일행은 모두 배멀미로 고생했다. 그들은 일등석 티켓을 5장만 가지고 있었지만 다같이 일등석 객실에서 머물렀고 객실에서 식사도 같이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일등석 티켓을 두 장 더 구입해야 했다. 싸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강진희와 더러운 사내(dirty man) 이상재는 하인에게 식사를 타오게 해서 박정양 공사와 함께 객실에서 식사했다. 번역관 이채연은 얼간이였고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나마 이하영과 이완용이 일행의 나쁜 인상을 상쇄시켜 주었다. 일행은 항상 선실을 어지럽혔고, 징 달린 신발로 심하게 바닥을 긁고 다녔다. 몸에서는 똥 냄새가 풍겼고 선실에서 줄담배를 피워댔다. 일행의 선실은 씻지 않은 몸 냄새, 똥 냄새, 오줌 냄새, 조선 음식 냄새, 담배 냄새 등이 어우러져 무시무시한 냄새가 났다. 승객들은 매우 친절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공사 일행이 사라져준다면 매우 감사해할 것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박정양 공사의 방을 찾아 인사를 했지만, 악취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알렌의 일기’ 1887년 12월26일자) |

1888년 초 주미공사 일행이 묵었던 샌프란시스코의 팰리스 호텔. 일행은 팰리스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지진이 난 줄 알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12월28일 공사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역시 천연두 승객 때문에 사흘간 배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천연두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하선을 허락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외교 사절을 무작정 배에 가둬둘 수도 없었던 항만당국은 1888년 1월1일 일등실 승객에 한해 하선을 허락했다. 보름 넘게 공사 일행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던 일등실 승객들은 뜻하지 않게 조선공사의 음덕을 입자 만세를 부르며 사과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샌프란시스코 거리 곳곳에는 공사 일행을 환영하는 태극기가 게양됐다. 삼등서기관으로 공사를 수행한 월남 이상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본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상투잡이 공사 일행인 우리가 조선을 떠날 때에 공사관에 게양할 태극기를 미리 준비한 것은 물론 우리가 타고 가는 기선에도 객실에도 태극기를 꽂았다. 눈치 빠른 선주는 미리 태극기를 준비하여 식당이나 우리가 출입하는 문 입구에다 게양했다. 미국에 상륙할 때에도 부두, 정거장, 찻간, 호텔까지 태극기를 게양해 환영의 뜻을 표했다. 도처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볼 때 반갑기도 했거니와 미국인의 외교술이 발달된 것도 감복했다. (이상재,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 공사 갔던 이야기’, ‘별건곤’ 1926년 12월호) |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흘을 머문 공사 일행은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워싱턴으로 출발했다. 4년 전 민영익을 수반으로 하는 보빙사 일행이 갔던 길과 동일한 여정이었다. 공사 일행이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주미 조선공사 일행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할 일정을 협의했다. 국서 전달은 단순한 공사 부임인사가 아니었다. 조선이 미국과 대등한 독립국임을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역사적인 의식이었다.
1888년 1월17일로 국서 봉정식 일정이 잡히자 주미 청국공사는 초조해졌다. 공사 파견 조건으로 위안스카이와 조선 정부가 합의한 ‘영약삼단’에 따르면, 박정양은 국서를 봉정하기 전에 청국공사를 알현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백악관에 가서 국서를 봉정해야 했다. 국서 봉정식이 하루하루 다가와도 조선공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참다못한 청국공사는 조선공사관에 참찬관을 보내 넌지시 영약삼단을 준수할 것을 종용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혹시 조선 정부가 영약삼단에 대해 일러주지 않던가요?”
박정양은 번역관 이채연 편으로 짤막한 글을 보냈다.
“미국으로 떠날 때 위안스카이 공사가 조정에 영약삼단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삼단을 준수하라는 훈령은 받지 못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