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의연하고도 현명한 외교적 수완이 전적으로 박정양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박정양은 공사로 임명된 후 병을 핑계 삼아 공사직을 사절할 만큼 겁 많고 소심한 인물이었다. 박정양의 유일무이한 미덕은 자기보다 똑똑한 참모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점이었다. 국서 봉정식을 둘러싸고 급박하게 돌아간 조선, 청국, 미국 사이의 외교전에서 이하영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백의사절 일행은 수륙만리 머나먼 길을 무사히 마치고 워싱턴에 당도했다. 부임 즉시 국서 봉정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미국정부는 예상 밖으로 냉정한 태도로 국서를 즉시 받지 않고 10여 일 후로 미루었다. 배짱 좋은 나는 외무차관 저택으로 방문해 직접 만나 담판을 벌여 진상을 알아냈다. 신임 조선공사의 국서 봉정을 연기하게 된 이유는 조선은 청국의 속령(식민지)인 줄 알았는데 새삼스럽게 공사가 왔다니 내막을 잘 알아보지 않고 섣불리 처리했다간 국제분쟁을 야기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조선의 입장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해 겨우 이해를 얻어냈다. 득의양양하게 일행이 기다리는 임시공관으로 돌아오니 박정양 공사는 의관을 갖추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다. 알고 보니 중국 공관으로부터 위문 사자(使者)가 왔다 갔다는 것이었다. 박정양 공사는 이런 황공한 일이 있느냐며 답례를 가겠다고 우겼다. 이에 일행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결과 박정양 공사가 섣불리 청국 공사관에 갔다가 만일 청국공사가 국서 봉정식에 동행하기를 직접 요구라도 하면 피할 도리가 없다는 이유에서 통역관 이채연을 대신 보내 사례하기로 결정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

전권대신 민영익 일행이 체스터 아더 대통령을 공식접견하는 장면을 담은 ‘뉴스페이퍼’ 1883년 9월29일자 보도그림. 민영익 일행은 아더 대통령에게 큰절로 인사했지만, 4년 후 박정양 일행은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악수로 인사를 나눴다.
1888년 1월17일,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하영, 이상재, 통역관 이채연 등은 상기된 표정으로 백악관을 향했다. 41개국 공사가 주재하는 미국측으로서는 의례적인 신임장 제정행사였을 뿐이지만, 조선으로서는 독립국임을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역사적인 국서 봉정식이었다. 영약삼단을 무시한 채 독자적으로 국서를 봉정하고 난 후 청나라가 어떻게 나올지는 그 누구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공사 일행 전원의 목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잘못하다간 1886년 그랬던 것처럼 자칫 고종을 폐위시키려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험이 따른다고 언제까지나 속국으로 지낼 수만은 없었다.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사 일행은 이상재를 제외하고 차례로 매국노로 변절했지만, 국서 봉정식이 거행된 그날만큼은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선 투사들이었다. 백악관 정문을 통과해 봉정식이 거행될 방에 들어설 때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국무장관 베이아드와 국무차관 브라운을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번쩍번쩍 빛나는 관을 쓰고 화려한 복장을 한 국왕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던 공사 일행은 방금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뒤늦게 보통사람이 입는 양복을 입고 행사장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클리블랜드 대통령임을 알게 된 박정양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와 충성의 표시로 세 번 배례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대통령 수행원들이 박정양의 돌출행동을 제지하고 일으켜 세우자 박정양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서를 넣어온 상자의 열쇠를 찾지 못해 며칠 동안 준비한 취임사를 횡설수설 망쳐버렸다.
봉정식이 진행되는 동안 알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흘렸고, 공사 일행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알지 못해 어안이 벙벙했다.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안을 주지 않으려고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최대한 점잖게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