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은 미국 어느 유명한 부호 따님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 그 색시로부터 약혼을 간청받았다. 이하영도 갓 서른을 넘긴 청춘이었던 만큼 끌리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국법은 외국인과 결혼을 엄금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했다. 하루는 그 색시의 모친이 이하영에게 청하기를 자기 맏사위가 이태리 현직 육군 장관인데, 그를 시켜 사정을 이태리 황제께 아뢰어 조선 국왕의 칙허(勅許)를 얻도록 주선할 터이니 내 딸과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고 졸랐다. 능란한 화술을 자랑하는 이하영도 한참동안 대답이 궁색해 어쩔 줄 몰랐다. (문일평, ‘한미 50년사’, 1945) |

‘동아일보’ 1922년 9월21일 1면에 실린 대륙고무주식회사 출범 광고. 명실공히 ‘귀족 마케팅’의 효시라 할 만하다.
1889년 이하영은 이완용에게 주미 서리공사 자리를 물려준 뒤 1년 6개월의 짧지만 ‘성공적인’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이후 이하영은 웅천 현감, 흥덕 현감을 거쳐 5년 만에 정3품 외아문 참의(외교부 차관보)로 승차했다. 한성부 관찰사(서울시장)와 일본 주재 공사를 거쳐 1904년 마흔일곱의 나이에 외부대신(외교부 장관)에 올랐다.
영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외국인과 사교능력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기에, 이하영은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했던 그 시절에도 미천한 신분의 한계를 뚫고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아무리 조선이 양반이 지배하는 나라라 해도 공맹(孔孟)의 법도만 갖고 서구 열강을 상대로 외교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우용택의 외부대신 구타 사건
관운이 트이면서 재산도 엄청나게 불었다. 서대문 합동에 있는 그의 99칸짜리 저택은 큰 한옥 외에 양옥이 따로 있었고 사랑채와 행랑채가 딸려 있었다. 행랑채엔 수십 가구의 하인이 살았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이하영 자신이 남의 집 행랑채에 사는 일개 요리사였으니 격세지감이었다. 대지 1500평에 달하는 집안엔 조그마한 인공 동산까지 만들어놓았다. 국록만 받아 가지고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부였지만, 어디서 생겼는지 이하영은 엄청난 부를 누렸다.
이하영은 외부대신으로 부임한 이후 당면한 외교적 현안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하던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의 어로권을 넘겼고, 일본 헌병대에 한성의 치안권을 넘기더니, 급기야 내륙 하천의 항해권마저 일본에 넘겨줬다. 도로 사정이 열악한 시절 원거리 상품운송에는 주로 내륙 하천이 이용됐다. 내륙 하천 항해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은 국가의 기간도로망을 송두리째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905년 8월21일, 아침부터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외부대신 이하영은 찜통더위 속에 관복을 걸치며 입궐 준비를 서둘렀다. 이하영이 입궐 준비를 끝냈을 때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초라한 행색의 경상도 선비가 찾아왔다. 선비는 ‘경상도 의성 땅에 사는 우용택’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곤 대뜸 삿대질을 하며 호통을 쳤다.
“네가 동래 천무(賤巫)로 대신까지 되었으면 나라에 갚음이 있어야지 나라를 팔다 못해 하천까지 팔아먹느냐. 장차 또 무엇을 팔 테냐? 저 역적을 죽여라.”
호통이 끝나기 무섭게 우용택은 이하영의 옆구리를 차고 뺨을 후려갈겼다. 이하영은 황급히 하인들을 불러 겨우 봉변에서 벗어났다. ‘외부대신 이하영 구타 사건’ 덕분에 우용택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한동안 고초를 겪었지만, 친일매국노를 따끔하게 혼내준 강개지사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친미파로 정계에 입문한 이하영은 철두철미한 친일파는 아니었다. 외부대신 시절 일본에 이권을 넘기는 데 앞장섰지만, 법부대신으로 옮겨가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았을 때는 처음엔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보다 한발 늦게 찬성으로 의사를 번복해 천만다행으로 ‘을사오적’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다.
이하영이 처음부터 을사늑약에 찬동했다면 역사는 그의 이름을 ‘을사육적’에 올렸을 것이다. 이하영은 늦게나마 을사늑약을 찬성한 까닭에 강제합방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 자리를 얻었다.
강제합방 이후 이하영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다. 자작 작위와 중추원 고문 자리를 얻었다 하나 실권이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하영은 고무와 가죽을 섞어 만든 일본식 고무신을 개량해 전체를 고무로 만든 조선식 고무신을 개발했다. 조그맣게 시작한 고무신 사업은 날로 번창해 1922년 예순다섯 나이에 자본금 50만원(현재 가치 500억원)의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첫 사업에 실패한 지 40여년 만에 시도하는 두 번째 사업에서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