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가 전태일과 마주한 때는 전태일이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있을 때다. 재단사가 몸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그를 맞은 이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다시 살아온 듯 장기표의 손을 꼭 잡았다. 장기표는 청계천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참담한 현실을 목도한다. 조영래가 ‘전태일 평전’을 쓰게끔 독려하고 자료를 제공한 것도 그다.
장기표를 언급하면서 이광택(63·국민대 교수·법학)을 빼놓을 수 없다. 전태일과 동갑인 그는 장기표와 함께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로서 노동운동에 투신, 노조 교육에 앞장선 인물이다. 이광택도 전태일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전태일 40주기를 앞두고 수업시간에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이 영화의 메이킹 필름 격인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상영했다. 학생들에게 11월13일에 있을 ‘전태일 다리’현판식과 추도식에 대해 소개하면서 뜻있는 자리이니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뜻도 전했다. 1970년대 아니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이런 말을 하기 어려웠다. 1970년대에는 ‘노동자’라는 단어조차 사용하기가 께름칙했다. 학생신분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내란음모죄로 조영래와 함께 강제 입영당했고 복학조차 되지 않아 제대 후 재입학해 학기를 남보다 더 이수하고서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강의를 듣다가 강사로 발탁됐다. 당시 그의 사수가 신영일 선생이고 그때 함께 아카데미를 거친 사람들이 최순영, 박순희 등 노동운동계를 주름잡던 걸출한 인물들이다. 독일 유학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떠났다. 그때 일을 두고 이광택은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마에 ‘빨간 딱지’가 붙은 그에게는 취업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모교인 서울대 조교(당시 국립대 조교는 교육 공무원이었다고 한다)에 지원해 합격했지만 발령이 나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몇년 몇월 며칠 어느 강의실에 뛰어들어와 학생들을 선동하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담을 넘어 도주 어쩌고’ 하는 식의 내역이 깨알같이 적힌 문건을 내밀더란다.
“당시만 해도 조국을 떠나면 반역자라는 인식이 팽배했지요. 시국이 하도 어수선하다보니 어리석은 생각도 많았습니다.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한데 장학금에 가족의 생활비까지 준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내 조국은 나에게 직장조차 못 가지게 하는데 타국이 저에게 손을 내민 셈이죠.”
그는 독일 유학시절 처음으로 ‘사람 사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다고 한다. 70여 평의 집에서 가족들과 지내기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생활비까지 꼬박꼬박 통장으로 입금받으며 하고픈 공부를 마음껏 했다. 그리고 10년 후, 돌아온 조국은 변해 있었다. 10년 전 그를 빨갱이라고 욕하고 잡아다 고문하던 이들이 그에게 강연을 요청해왔다. 한 집 건너 한 집 몽둥이를 들고 서 있던 첨예한 노동현장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적어도 10년 후에는 한국이 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 노동법의 쟁점도 변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전태일이 호소했던 것은 있는 법만이라도 제발 지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1990년대는 산업재해와 산업안전이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2000년대는 고용문제로 핵심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는 같은 생산라인에 서서 같은 노동 강도로, 똑같은 일을 해내면서도 한쪽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정규직의 절반도 되지 않은 임금을 받으며 일해야 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21세기 노동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노동조합운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사회 개혁운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이광택의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