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유

먼지처럼 가벼운 디지털 세상에‘똥침’ 날리고 싶어!

  • 김갑수 시인,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입력2008-08-01 1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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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만장의 음반을 갖춘 개인 음악실 줄라이홀은 ‘버라이어티, 익사이팅, 로맨틱, 에로틱, 미스틱 시츄에이션’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질투’를 받기도 한다. 새벽 1시에 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서른 살 소녀가 찾아오고 브람스, 브루흐, 슈베르트의 음악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축 늘어진 눈자위에, 고생대 지각 같은 뱃가죽의 중년 주인은
    • 담담하기만 한데….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유

    미니스커트 입은 여성이줄라이홀에 떴다.

    “선생님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시간 좀 내주시면 안 돼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였다. 보낸 이는 몇 해 전 잠시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서른 살 무렵의 미혼여성 방송작가. ‘웬일이니’, 아니 솔직히 ‘웬 떡이야’, 하자니 속 보이고 하여튼 사실대로 답신을 했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밤 12시에 끝나기 때문에 “밤 12시 이후밖에는 시간이 없는데…”라고 답신을 날렸더니 곧장 답 문자가 날아온다.

    “그럼 12시 지나서 찾아뵐게요.”

    소싯적에야 밤 12시가 아니라 밤새 통화를 하다가 새벽 5시에 데이트 약속을 하는 일도 흔했다. 평상시 하지 않는 짓만 골라서 하는 것이 연애질의 본령으로 알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나는 그 누구의 연애 대상도 되지 못한다는 걸 깨우쳐야 했다. 나이 들어 꼬부라진 아저씨의 비애다. 여성성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개의 여성은 내게 점잖은 어르신의 처신을 기대한다. 한창 때는 그런 기대를 배반하는 것을 매력(?)의 원천으로 삼았건만 지금 그랬다가는 망신살만 뻗친다. 하, 그러나 어쨌든 밤 12시가 넘은 시각 소녀의 방문이라니….

    그날의 에피소드를 길게 말하려다 짧게 줄인다. 망신 ‘어게인’이었으니까. 정확히 표현하면 망신이 아니라 분통이 치솟았다. 서른 살의 어여쁜 소녀는 정말로 새벽 1시쯤 엄청나게 짧은 치마를 입고 나타나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말들을 재잘거렸다. 나는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서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브람스 또는 리하르트 시트라우스의 가곡집류 등등 촛불 아래 분위기 잡을 곡들로만 열심히 ‘판돌이’를 했다. 시바스 리갈도 스트레이트로 제법 마셨다. 잠시 화장실에서 몸을 풀고 왔더니 소녀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



    “선생니임, 분위기가 너어무 너어무 좋아서요, 남자친구 오라고 전화했어요. 지금 당장 달려온대요.”

    “….”

    그 다음부터의 상황은 그냥 이 한마디 사자후면 족하지 않을까.

    “끙!”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유

    줄라이홀의 기념 사진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와 찍은 기념 사진(맨 아래)도 있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개인 음악공간에서 ‘별딱’스럽고 흥미진진한 일이 무시로 벌어질 거라고 추측하는 중생이 많다. 내 또래 눈자위가 축 늘어지고 뱃가죽이 고생대 지각으로 겹쳐진 중늙은이 친구들의 상상이래야 뻔하다. 여자! 여자! 여자에 대한 망상과 몽상. 하지만 그런 기대를 충족시킬 ‘버라이어티, 익사이팅, 로맨틱, 에로틱, 미스틱 시츄에이션’은 벌어지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에만 전념하기 시작한 이후의 현상이 아닐까.

    은폐된 공간의 별일

    온갖 별일이 벌어지는 내 ‘쥐라기’ 청춘의 작업실에서는 장르 불문으로 희한한 사운드의 난바다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상한 음악과 조명 아래서 멀쩡한 사람이 다중인격장애로 빠져드는 일이 무시로 생겨나고는 했다. 다중인격은 ‘해리성 정체장애’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어쨌든 해리, 그러니까 자기로부터 ‘떠나는 것’이 그 증상의 특성이다. 변형된 다른 자아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율의 음악은 많다. 소닝유스나 존 존(John Zorn)의 음악 같은 변태적 록이 그렇고, 장르 규정도 어려운 메레디트 멍크나 안젤리크 요나토스의 기나긴 음악들이 그런 ‘별일’의 배경음악 노릇을 한다.

    아, 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별일! 유폐된 느낌, 벗어난 기분을 느끼기에 나의 음악실 ‘줄라이홀’만한 곳도 드물 것이다. 외부의 빛과 소음이 전혀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이곳에는 시계도 달력도 없다. 실제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물품은 일절 배제하는 것이 이 작업실의 원칙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꽤 오래전부터 클래식 음악만 듣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생에 걸쳐 별별 장르를 다 섭렵해온 편이건만 이제는 오매불망 중세 교회음악에서 현대음악까지 클래식 족보에만 매달린다. 암만해도 아무런 별일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 듣고 있는 음악 장르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은, 생각건대, ‘나를’ 돌아오게 만든다. 내가 오랫동안 동일시하고 싶어했던 페르소나, 그것이 나라고 확신하고 싶었던 어떤 면모, 클래식 음악은 그것 자체의 음악학적 본령과는 상관없이 한 인간의 다면 다층성을 하나의 단일한 층위로 정립시키는 데 기여한다. 삶은 괴롭고 존재는 늘 고달프다는 원점의 감회, 그것 말이다.

    ‘외롭고 춥고 배가 고프면 쾌적한 느낌이 안 든다. 사람에 시달리고 공해에 시달리고 돈에 시달리고 명예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리고 심지어 사랑에 시달리는 사람은 절대로 쾌적한 느낌을 맛볼 수가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음악이다. 단호하게 말하건대 미술과 음악은 우리의 쾌적하고 윤택한 삶을 위해 존재한다.’

    ‘굿바이 클래식’

    가수 조영남이 쓴 예술 에세이의 한 구절이다. 그럴까? 그랬나? 삶의 쾌적함이나 윤택함에 대해 생래적인 저항감을 지니고 살아온 나에게는 적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의견이다. 하지만 그는 뮤지션이고 아티스트다.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 데 토를 달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토를 달아야 할 일이 생겼다.

    ‘TV, 책을 말하다’라는 서평 프로그램에서 조영남과 마주쳤다. 그는 조우석 기자가 쓴 책의 추천자로, 나는 그 책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출판동네에서 조우석이라면 ‘껌뻑’ 알아주는 그 분야 전문기자다. 하지만 사적으로 조우석을 안다면 그의 빛나는 서평들은 차라리 부업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는 클래식 광팬, 오랜 세월 미칠 듯이 열광해온 클래식 ‘귀명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놀라운 배신을 때렸다. 그의 신간 제목이 ‘굿바이 클래식’인 것이다.

    책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그토록 좋아하던 클래식 음악하고 영영 ‘굿바이’하게 된 내력을 담았다. 저자의 주장인즉, 어째서 저 지구 반대편 쪽 서구의 몇 백년 전 음악에 우리가 주눅 들어야 하는가. 그쪽 본토박이 전문가들에게서조차 이미 낡은 유산으로 버림받은 장르가 클래식인데 한국, 일본 같은 주변국에서 신주단지처럼 떠받드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가. 클래식의 안으로 들어가봐라. 생각보다 별것 아니다. J. S. 바흐는 19세기쯤에 재창조된 서양음악사에서 일종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는 것뿐이고, 모차르트는 업자들이 만든 천재 마케팅의 산물일 뿐이다. 슈베르트 음악이란 유치한 센티멘털리즘의 발로이며….

    저자가 씹어 발기는 클래식 음악의 맹점 가운데 두드러지게 기억나는 언급이 두 가지 있다. 인용해보자면 먼저 ‘클래식은 맹물 음악이다. 그것도 산간 약수가 아니라서 맛도 없고 영양소도 죽어 있는 맹탕 증류수…. 나는 살균된 음악 클래식을 들을 때면 마치 내가 머리통만 덜렁 달린 목석 같은 사람으로 느껴진다.’ 또 하나 언급은 서구 근대의 지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진단한 것으로 클래식 음악은 속성 자체가 독선과 사디즘이라는 병리현상을 발톱으로 감추고 있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와우!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유

    현대인에게 클래식 음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클래식 음악의 바다를 만든 모차르트, 브람스, 바흐(왼쪽부터).

    음대 성악과 출신인 조영남은 저자와 무지하게 친한 사이라는 걸 먼저 고백했다. 역시 조영남표 솔직성이다. 그러면서 추천의 변인즉, 조우석의 막말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무지막지한 애정의 역설적 표현이라고 했다. 친분과 변호 사이에 흐르는 눈물겨운 불일치. 나는 뭐라고 맞섰던가….

    이러구러 대담을 마치고 밤늦게 줄라이홀로 되돌아왔다. 다음날 아침까지, 아니다, 거의 오전이 다 지나가도록 열몇 시간 연속으로 문제의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음악에 파묻히면 쾌적하거나 윤택하기는커녕 언제나 몸이 쑤신다. 장시간 듣다 보면 당연히 귀가 앞장서서 쑤시고 위장도 쑤시고 허리도 뒤질세라 쑤시고 무엇보다 존재의 허탈감에 영혼이 쑤시고 또 쑤신다. 조영남, 조우석, 두 조가(家)가 음악 듣는 내내 안팎으로 쑤시고 들어왔다. 두 조씨의 자유함에 비한다면 나는 얼마나 묶여 있고 사로잡혀 있는 수렁 속의 삶이런가. 영혼이라는 자가 몸 밖으로 빠져나와 나를 들여다보더니(빠져나온 영혼은 언제나 2m 50cm 높이에서 자기 육체를 들여다본다는 컬럼비아 대학 올리버 색스 교수의 기이한 분석이 생각난다), 가끔씩 이리저리 쿡쿡 찌르면서 같은 질문을 해댔다. 반복 질문. 고문기술자들의 수법이다. 반복되는 질문의 내용은 딱 하나, ‘왜 클래식인가?’, 그거였다.

    주위에서 신기하게 생각하는 내 밥벌이에 대해 말해야겠다. 물론 기본은 방송 출연료에 각종 원고료가 더해진 걸로 충당한다. 하지만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금도끼 자루가 하나 더 있다. 각급 기업체나 대학에서 들어오는 이른바 ‘강연’이라는 것. 끊어질 만하면 어디선가 또 의뢰가 들어오는 그 달콤한 ‘알바질’의 레퍼토리가 셋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왜 클래식인가?’이다. 통상 두 시간 정도 소요되는 그 강연의 정식 제목을 나는 ‘두 개의 문’이라고 이름 지었다. 꽤나 장광설이 펼쳐지는 내용의 요지는 이렇다.

    ‘왜 클래식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상식과 일상의 공간이다. 그것은 존재의 첫 번째 문이다. 누구나 똑같이 경험하며 살아가는 세상이다. 하지만 삶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비밀스럽고 난해하며 고통스럽기까지 한 영역이 있다. 자신의 정체감을 이루는 모든 외적 연결고리가 끊어져 막막절벽으로 대면해야 하는 그곳. 편의상 그곳을 실존의 영역이라 부르자. 그 실존의 캄캄한 공간으로 끌어당기는 억제하기 힘든 손아귀를 잘도 피해 다니며 편안히 사는 사람도 많건만, 실상은 그 반대인 수가 많다. 막막하고 캄캄한 그곳으로 뛰어들고 싶어하는 충동은 누구에게나 감추어져 있다. 그곳은 심연이다. 이른바 생의 두 번째 문. 하지만 그 문은 잘 보이지도 않고 잘 열리지도 않는다. 특정한 통로를 통과해야만 열리는 문이다.

    실존의 캄캄한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경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술체험, 그중에서도 클래식 음악이다. 어째서 클래식인가. 그것은 첫째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청각이라는 감각에 호소하는 직관의 영역이다. 셋째 무엇보다 길이가 길다. 넷째 어느 정도의 공부와 훈련을 해야만 한다. 다섯째 대체로 모호한 안개 속 같이 불분명하고 비언어적이다. 그리고 또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유

    뇌와 음악의 관계를 분석한 ‘뮤지코필리아’의 저자 올리버 색스 교수.

    음악이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특별한 체험을 안겨준다. 일상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시간’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 시간에서는 시간의 양적 규모가 물리학의 법칙을 벗어나 무한대가 될 수 있다. 음악이 청각을 동원하는 장르라는 점도 특별한 면이다. 청각으로 자극된 뉴런이 두뇌의 표면 곳곳에서 활성화되면서 전혀 별개의 군집들과 새로운 단위를 자꾸만 만들었다가 사라진다. 쉽게 말해 엉뚱한 생각이 양산되는 장치가 청각자극이다. 이것은 생각의 부피를 키워주는 데 기여한다. 이때 증식된 생각은 혼돈, 프랙탈, 자기조직화를 기반으로 하는 복잡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어쩌구저쩌구….

    에라이, 요따구 난삽한 말로 어떻게 기업체 아저씨들을 객석에 붙들어 매놓을 수 있냐고? 실은 구라 한번 떨어본 것이다. 앞서의 용어들은 별로 사용되지도 않는 편이다. 주로 괴벽스러운 음악가들의 일화로 나름의 개그도 펼치고 감동의 메아리도 도모한다. 하지만 그래도 놀라워라. 청중 대부분이 끝까지 몰입해준다. 왜일까? 나는 그것을 안다. 어떤 갈망 때문이다. 일상이 아닌 어떤 것, 통속이 아닌, 진부함이 아닌, 자신의 이해범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어떤 것. 그 갈망을 자극하는 것이 내가 받는 품삯의 보답인 것이다.

    ‘그래, 부러워해라’

    강연의 뒤끝은 민망하고 기분 꿀꿀해지는 수가 많다. 이윤동기와 정반대 편에 서고자 하는 작업실의 일상을 팔아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의 시간이건 엉뚱한 생각이건 그것은 비일상이고 비현실이다. 하지만 작업실의 일과는 비일상이 일상이고 비현실이 생생한 현실이 된다. 남들이 땀 흘려 일할 때, 회의를 하고 물건을 팔고 공문서를 작성하는 시간에 나는 지하 작업실에서 팬티만 입고 뒹굴거리며 판을 닦거나 LP의 면을 뒤집는다. 속없이 부럽다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서슴지 않고 말해준다. 그래, 부러워해라.

    그런데 과연 뚝 떨어진 지하 작업실 안에서 홀로 음악에 파묻히는 일이 생의 두 번째 문, 존재의 심연에 가닿는 행위일까. 어떤 가치가, 어떤 정당성이나 의미부여가 가능한 일일까. 그것은 즐거운 일일까, 괴로운 일일까, 그 어떤 것도 아닌, 당당한 지상 대열에서의 낙오일 뿐인 것은 아닐까.

    조영남이 그랬다. 외롭고 춥고 배가 고프면 쾌적한 느낌이 안 든다고. 그래서 음악이 필요하다고. 그에게 묻고 싶다. 음악 때문에 외로운 적은 없느냐고. 음악 때문에 더 춥고 더 배고픈 적은 없느냐고. ‘굿바이 클래식’에서 조우석도 말했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우리가 즐기고 편안해지기 위한 도구이자 디딤돌이라고. 역시 같은 반문이 든다. 더 이상 편안해지지 않기 위하여 음악을 찾는 수는 없는 것이냐고.

    ‘억압기억(repressed memory)’이라는 것이 있다. 사전적인 정의를 보자면,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잔류해서, 의식적인 사고와 욕망과 행동에 악영향을 미치는 외상적 사건의 기억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다. 불쾌하고 불행한 경험은 잊히지만 소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맞고 자란 어린 시절

    억압기억이 특정한 관심사로 사람을 몰고 간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첫 번째 음악 에세이집을 출간할 때 내가 왜 음악 듣는 사람이 되었는지 설명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때 얻은 답이 ‘맞고 자란 어린 시절’ 때문이 아닐까 하는 거였다. 한국의 1960~70년대에 매 맞지 않고 자란 어린이가 드물겠지만 내가 겪은 체험은 꽤 독특한 편이다. 도끼나 채찍 같은 것으로 생사를 오가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더 이상 그 내용을 글로 옮기고 싶지는 않다.) 어쨌거나 그 같은 환경 속에서 나는 절대로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없으며, 오래 살 지 못하고 일찍 죽을 것이며, 어쩌면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범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자기 암시를 키워갔다.

    데이트를 할 나이가 됐을 때 만나는 상대에게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게 참 창피해’ 따위의 말을 자주했던 생각이 난다. 상대에 따라 미친놈으로 보거나 ‘문학스럽게’ 받아들이거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열등감 덩어리의 하등 인간으로 대하거나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넌 왜 죽지도 않느냐’가 초·중·고 시기까지 반복적으로 주입된 가정교육이었다. 살아 있는 것이 미안하고 창피한 일이라는 자의식이 왜 음악과 화학적으로 결합되었는지를 설명할 길은 없다. 음악에 몰입하는 순간에 마음의 고통이 줄어들기는커녕 증폭되는 고통으로 쩔쩔매는 순간이 더 많았으니까. 그래도 음악을 찾아간 것이 다행인 것은 틀림없다. 억압기억에 의해 외계인 피랍을 망상하거나 사탄숭배에 빠지거나 다식증, 성적 혐오, 불안 과다증에 빠지는 수가 많다는 임상보고를 보면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고통의 기억을 저장한 채 멀쩡한 듯이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수효만큼 고통의 기억이 다양하게 존재할 텐데, 사람들은 어떻게 음악소리에 익사하지 않고서 말짱한 대기를 호흡할 수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왜 클래식인가’에까지 미치지는 못했어도 왜 음악을 듣는지에 어느 정도 근접한 셈이다. 그러니까 쾌적해서 혹은 쾌적해지기 위해서 음악을 듣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유

    클래식 음악에는 원더걸스의 매력 이상도 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공간이 사람이다. 공간의 구성과 외양은 그 사람과 정확히 일치한다. 비실용적 소품이 전혀 없다 싶은 집이 내 아내의 공간이라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싶은 물건들로 득시글거리는 곳이 줄라이홀이다. 사실 작업실의 이상한 소품들이 용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방문객마다 질문하는 푸른색 원형 쇠뭉치 두 덩어리는 라벨 보호기라고 해서 낡은 LP를 며칠씩 물에 담가놓을 때 라벨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는 용품이다. 작은 화분처럼 생긴 몸체에 기다란 쇠막대가 삐죽 솟아 있는 물건이 여러 개 있는데 이것도 VPI라는 기계로 LP를 빨아낸 다음에 그 용액을 말리기 위한 도구다. 이 넓은 공간 곳곳에 늘어서 있는 물건들은 대개 음반, 오디오, 커피와 연관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도 병일까. 간혹 살림하는 집에서 볼 수 있는 도구가 생기면 혐오스럽게 쳐다보게 된다. 어느 날 시인 신현림이 찾아와 구멍이 숭숭 뚫린 바가지를 선물하고 갔는데, 그게 개수대에서 각종 찌꺼기를 거르는 데 적격이었다. 근데 왜 그걸 쓰고는 꼭 싱크대 아래로 깊숙이 숨겨놓는 습성이 생겼을까. 아나운서 유정아가 은근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들려주는 ‘가정희망음악’을 듣기 위해 지하에 작업실을 판 것이 아니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미래는 희망에 가득 차 있다고 노래하기 위해 오디오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한 발 한 발 전진하기 위하여 음반을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고 아니었다. 그럼 뭐냐?

    부디 이 내 과대망상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철 지난 니체라고 비웃어도, 얼치기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힐난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오늘의 이 세상을 참을 수가 없다. 경제경영이 학문의 제왕 노릇을 하고, 시장이 권력의 자리를 점령하고, 베스트셀러 대다수는 자기계발 지침서이고, 재테크 요령이 일상적 관심사가 되고, 연예인 사생활이 국민적 화제로 들먹여지고, 서울대학교 축제에는 원더걸스가 초청되어 난장판 사고가 벌어지고, 교회에서는 헌금액이 적은 사람을 비꼬는 천원송이 흐르고,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는 미국 대통령의 규정을 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에 또, 에 또, 쿨럭쿨럭! 감추고 싶고 지우고만 싶은 내 내부의 비속성과 통속함이 환한 세상에 팬티도 입지 않은 채 빨갛게 드러나 있지 않은가. 진지함, 자기세계, 품격 따위는 흘러간 아날로그 연대의 화석일 뿐인가.

    착각일 수 있겠지만 클래식 음악은, 또 그에 걸맞은 공간은, 내게 아날로그를 향한 추구를 의미한다. 당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의 별천지, 화석의 시공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이곳에서 바흐는 대양이고 모차르트는 신의 선물이고 베토벤은 위대한 자아이고 슈베르트는 섬세한 상처가 된다. 모두 고전적이고 정형화된 이미지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브람스는 고독하고 말러는 선병질의 고집쟁이고 슈만은 영롱한 예지로 빛나고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는 자나깨나 자웅을 겨룬다. 그리고 엄청나게 더 많이 있다. 기욤 드 마쇼, 뒤파이, 조스캥 뒤프레, 샤르팡티에, 젤렌카의 고풍이 있고 프랑크 마르탱, 마르티누, 쿠르트 바일, 리게티, 엘리엇 카터, 밀튼 배빗, 로드니 베넷의 현대가 있다. 이 안에 다 있다. 무엇 때문에 원더걸스에 군침 흘리며 옆 사람을 발로 밟겠는가.

    탐구하는 인간

    바흐의 화성과 대위, 베토벤의 무시무시한 사운드, 차이코프스키의 선율 따위는 시대를 초월해 인류가 도달한 어떤 지고의 경지라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그러한 클래식 음악이 야심한 때 작업실을 방문한 서른 살 소녀에게는 ‘너무너무 좋은’ 분위기 조성 이상이 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음악을 통해 교통하는 매개체가 될 수 없었다. 스무 살, 아니 열몇 살 즈음의 디지털 키드들에게 이 구문명의 지루한 가락이 어떻게 들릴지는 보나마나다. 현생인류를 규정하는 용어 가운데 호모 쿠아에렌스(Homo quaerens), 즉 탐구하는 인간이 꽤 보편적으로 쓰이는데, 이제 새로운 인류에게 더 이상의 탐구심은 필요 없게 된 듯하다. 고달픈 탐구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디지털적 재구성을 통해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적응해야 할까. 그래야만 할까.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는 것에 내 윗세대들은 두려움과 생존의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최신 유행가를 배우고 최첨단 개그를 구사했다. 과거에 존중받던 가치를 얼른 내다버렸다. 자, 그런데 문제는 이제 다들 너무 오래 살게 됐다는 사실이다. 오십대 육십대가 더 이상 인생 말년이 아니다. 노장의 무게를 잡으려니 인정해주는 사람도 없고 신세대를 따라잡으려니 볼썽사나운데다 언제나 뒤처질 수밖에 없다. 차라리 세대 간에 딴살림을 차리고 각자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딴살림이어도 생산과 소비인구가 부족하지 않을 만큼 오래들 산다. 지구상에 아날로그의 기억이 영영 사라지는 때가 오기 전까지 재미의 신문명 이전 상태로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것은 사무치게 진지하고 독자적인 자기세계를 추구하고 탈속한 품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재미 여부와는 장르가 다른 항목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유

    고가의 오디오 기기들이 즐비한 줄라이홀.

    나이 든 사람들은 다 같이 각자의 지하실을 파고들어가 끝없이 출시되는 신규 버전에 눈 돌리지 말고 무시간적으로 몇 십 년 살다 가자고 말하고 싶다. 아울러 이 같은 무시간의 영역을 관통하는 공통체험이자 공감대가 있다. 아날로그의 사람들을 묶어주는 공통항. 그것은 바로 인생이란 고통이며 존재는 무겁다는 인식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인간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자아를 무거워하면서 살았다. 마치 클래식 음악의 구조와 선율처럼.

    나는 오늘날의 재미가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 텔레비전의 개그 프로가 하나도 웃기지 않고 하나같이 똑같은 연속극들을 시청할 인내력이 없다. 멀티 샘플링에 불과한 인기가요가 음악으로 들리지 않고, 발랄하고 도발적이라고 인기를 모으는 칙릿(chick lit) 소설이 문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100년 이상된 작가의 작품만 읽는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선택이 전혀 거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과연 뼈아픈 고통과 비장한 존재의 무게감은 모두 실종되어버린 것일까.

    오이로다인 스피커가 서 있는 줄라이홀 저 끝에서 삼단 와인꽂이가 놓여 있는 반대편 끝까지 여러 차례 왔다갔다해본다. 프랑스의 어떤 귀족인가는 몇십년간 유배지에서 유폐생활을 하게 되자 ‘내 방 여행’이라는 책을 썼다. 꽤 두꺼운 책인데 기어 다니는 벌레에 관해 몇 페이지, 사용하던 펜에 관해 몇 페이지 하는 식이다. 천하를 주유하며 온갖 일을 체험한 모험가의 삶이나 방구석에 처박혀 하찮은 사물이나 관찰한 사람의 몇십년이나 대동소이하게 만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무시 때때로 외로웠을 거라는 사실이다.

    유령을 찾아서

    아침에도 외롭고 점심에도 외롭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외로웠던 체험이 누군들 없었을까. 그 같은 외로움의 고통을 극한적으로 줄여놓은 것이 요즘 세상, 디지털 신문명이다. 일주일 넘게 제대로 먹지도 않고 컴퓨터 게임만 하다가 굶어죽은 청년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쩌면 그는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외로워 마땅한 영혼들이 하루 종일 인터넷 서핑을 하고 낯모르는 사람과 채팅을 하고 번개를 하고 동호회를 한다. 그래서 정말 외롭지 않단 말이야?

    ‘왜 클래식인가’에 관해 사적인 이유를 찾고 싶었다. 애당초 음악학의 전문용어는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진짜 관심사도 아니다. 삶은 괴롭고 존재는 늘 고달프다는 감회. 생각해보니 그 같은 고전적인 감흥을 잃어가는 것에서 클래식 음악을 찾는 동기가 주어진 게 아닌가 싶다. 괴롭지 않아서 괴롭다는 심정을 설명할 길이 있을까. 괴롭지 않다는 것은 괴로움에서 놓여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종의 마비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자기 정체감이 멸실된 것이다. 게임에 중독되어 먹지도 않고 버티다가 굶어죽는 것이 살 만한 인생길을 찾았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유
    김갑수

    1959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어국문과 졸업

    시인 및 음악칼럼니스트

    저서 : ‘나의 레종데트르’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시집 ‘세월의 거지’ 등


    마비상태를 각성시켜주는 것이 내게는 외로움이다. 얼마나 외로운지 아침에도 외롭고 점심에도 외롭고 자다가도…. 삶이란 고정된 목표를 갖는 것도 아니고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도 없고…. 그래서 사르트르 선사께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일깨운 바 있지만 한세상 살아보니 외로움은 본질에 선행한다가 내 식의 깨달음이다. 그 점이 생의 고통이고 존재의 무게다. 몇십년 동안 온갖 종류의 음악을 들었지만 클래식 음악처럼 이중 삼중의 외로움을 일깨워주는 음악은 다시 없다. 하다못해 이해가 쉽지 않다는 사실마저 그렇다.

    피아노로 연주한 바흐의 인벤션을 반복해서 듣는 중이다. 클라우스 헬비그라는 독일계 피아니스트의 연주인데, 감흥의 추임새를 싣지 않은 무덤덤하고 교과서적이다. 그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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