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호

발칸의 유서

  •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입력2014-07-18 17: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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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래 차지하고 있던 학교 연구실을 비웠다. 반년도 더 걸렸다. 줄 것은 주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갈무리할 것을 갈무리하는 마무리 과정이. 물경 27년 동안 누적된 학방(學房)의 진애(塵埃)를 털어내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 책은 공공재니까 나누어주면 그만인데 서류와 편지는 다르다. 사형 아니면 무기간수, 재판관의 고민이다.

    작은 영어 책자를 두고 한참 고심했다. 20년 전 한 여인이 남긴 선물이다. ‘절교’를 선언하는 서신과 함께 우편으로 부쳐온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난다. 사귄 적도 없는 여인에게서 받은 절교 편지. 뜬금없었기에 더욱 민망했다.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게 전부다. 정중한 독자의 독후감에서 비롯되었다. 몇몇 영미 문학작품에 대한 가볍지 않은 평도 담겨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단미(사랑스러운 여자)’니 ‘그린비(그리운 남자)’니 ‘예그리나(사랑하는 우리 사이)’니 하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썼다. 행간을 읽지 못한 나의 아둔함도 있었다. 언제 한 날 함께 산책하자는 제의를 받고 머뭇거리던 터였다. 이내 거절의 뜻으로 알겠노라, 그러면서 이별의 징표를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곁에 두었고, 이사 때마다 챙겨 다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책이라고 했다. 유고의 내전이 심화되는 소식에 ‘왠지 떠나보내고 싶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내게 맡긴다고 했다. 사춘기가 긴 여인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청춘 유언장을 맡아줄 변호사 정도로 생각했을까? 나 또한 사춘기가 긴 사내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지 모른다. 손수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에 ‘하느님은 선생님을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썼다. 무엇보다 그 말이 불편했다.

    # 2 ‘이것이 유고슬라비아다(This Is Yugoslavia)’. 통틀어 100면도 안 되는 포켓판 사진첩이다. 1950년대 초반, 뉴욕에서 발행한 소책자로 ‘세계의 사진기행’ 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앞 표지가 서늘한 감동을 선사한다. 바다와 언덕과 해변의 마을, 그리고 마을 전체를 굽어 내려보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휘어진 소나무, 언뜻 보아 내 나라 풍광과 흡사하다. 뒤 표지는 이국적이다. 검은 털모자를 쓰고 가죽 배낭을 차고 백마를 탄 산악촌 노인의 모습이다. 책 속에 수십 장의 사진이 해설과 함께 담겨 있다. 흑백사진이지만 다인종 사회의 모습이 역력하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그야말로 연방국가, 유고슬라비아가 균형 있게 분해돼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나같이 갑옷처럼 육중한 민속의상에 눌려 있다. 해변 풍경도 경직 일변도, 기껏해야 낚싯대를 드리운 사내들뿐이다. 호숫가에서 아이를 지켜보는 구식 수영복 차림의 젊은 어머니 모습이 그나마 가장 풀린 자세다. 청년 법학도 시절 내 영혼을 앗았던 외국인 판사가 있었다. 그의 여행기 ‘이상한 나라, 친절한 사람들(Strange Lands · Friendly People)’을 읽을 때 느꼈던 진한 감동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선한 사람의 질박한 삶의 무게, 바로 그것이다.

    #3 도무지 오리무중인 게 발칸의 역사다. 되풀이해 읽어도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는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청년이 쏜 ‘사라예보의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다. 중학 시절 이래 반세기를 그 수준에서 맴돈다. 보스니아 산속에서 유고슬라비아가 탄생했다고 한다. 2차 대전 중 히틀러를 상대로 한 유고 빨치산의 투쟁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들이 즐겨 부르던 애국 독전가의 일부 가락은 6·25전쟁 후에 지리산 남부군에게도 전승되었다고 한다. 유고 사람들은 “가슴으로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머리로 생각한다.” 우리도 그 시절에는 그랬다.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였으니.



    발칸의 유서

    발칸반도에 자리한 크로아티아의 성채도시 두브로브니크.



    짐을 싸고 길을 나섰다. 스스로 명명했다. 정년 기념여행이라고. 젊은 시절에는 얻기 위해서 여행한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는 버리기 위해 길을 떠난다. 젊지도 늙지도 않던 시절 한동안 내놓고 쓰던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분명히 버리는 여행, 비우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길 떠나기에 앞서 새삼 하찮은 지식 나부랭이를 챙기는 것은 무슨 역설인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를 다시 읽는다.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발칸 반도 400년 역사를 가로지르는 대서사시’라는 문구가 허사가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다리라는 사실이 새삼 뚜렷해진다. 여행길에 마주치는 다리마다 비세그라도의 바로 그 다리라는 기시감마저 든다. 호주 여성 제럴딘 브룩스의 ‘피플 오브 더 북(People of the Book, 2008)’도 챙긴다. 내전이 끝난 1996년이 소설의 시작이나 플롯은 500년 전까지 소급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게오르규, 임레 케르데스, 이스마엘 카다레…. 다른 발칸 문호들의 역작을 내쳐 읽었다.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행여나 해서 연전에 받은 정미경의 소설집도 들척거린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책에 나온 ‘유고슬라비아’는 지도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시절에 살아 있는 전설로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던 티토 대통령도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졌다. 다민족, 다종교 통합 국가의 지도자, 소련에도, 서방세계에도 당당하던 제3세계의 영웅, 그의 죽음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는 와해되었다. 그러고는 참혹한 ‘인종청소’ 전쟁이 따랐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안드리치의 묘소가 있다. 인종과 민족주의의 악령이 되살아나기 전에 이슬람, 정교, 가톨릭, 세 종교가 더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사라예보에는 무신론자의 묘지도 있다. 행여 객사하더라도 묻힐 곳이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처참하게 파괴되었던 모스타르의 다리도 복구되었다.

    #4 그녀의 책을 ‘발칸의 유서’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냥 간직하기로 했다. 때때로 그랬듯이 발신인에게 되돌려줄 방법도 없다. 이제 나는 속절없이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그려진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Dead Letter Office)’의 직원 신세가 되었다. 작품의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때린다.

    “뒤늦게 용서를 구하지만 정작 받을 사람은 낙담하며 죽었고, 희망을 축원하지만 받을 사람은 절망 속에 죽었으며 희소식을 전하는 편지를 받을 사람은 재난에 질식당해 죽어버린 것이다. 삶의 전령으로 나선 그 편지가 죽음을 향해 질주한 것이다. 아, 바틀비! 아, 인간이여!”

    ‘이것이 유고슬라비아다.’ 어쩌면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남길 내 유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 때문은 아니다. 그 시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다. 내 유년의 환각이 살아 있고, 내 장년의 민춤함이 떠나지 않고, 내 정신의 빛줄기가 한 가닥 남아 있는 한, 내 곁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책,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기 전에 달리 배운 내가 아닌가! 열 살도 전에 배운 ‘동몽수지(童蒙須知)’의 구절이다. “남의 책을 빌렸으면 (반드시 기록해두었다) 때가 되면 돌려주라.”(借人文字 及時取還).

    발칸의 유서
    안경환

    1948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법학과

    서울대 교수(1987~2013년 8월), 서울대 법대 학장,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저서 : ‘법과 문학 사이’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조영래 평전’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

    現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이사장




    한때 품었던 소망이다. 내 딸아이는 반드시 일기를 쓰리라.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람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글 속에 담아 간직하리라. 행여 일기를 쓰지 않으면 일기처럼 자신의 삶을 투영할 책을 가지리라. 그리고 자라서는 일기와 책을 되돌아보리라. 아직도 버리지 않은 꿈이 있다. 비록 지금 내 딸은 휴대전화와 카톡에 체포된 일상이지만 언젠가는 아름다운 글, 소중한 책을 간직하는 습관을 가지리라.그녀에게도 딸이 있을까? 그 딸은 어떤 책을 간직할까, 그리고 자라서 그 책을 누구에게 건네줄까? 그 책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갈무리할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는 실없는 상상에 헛웃음이 절로 난다. 준비된 듯이 유행가 가사가 절로 입가에 맴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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