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이스라엘 전 총리 골다 메이어

개인史가 곧 건국史가 된 여자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입력2009-03-06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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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전 총리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 골다 메이어.

    연이은 테러와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지만 정작 이스라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 가자사태와 관련해 반전(反戰)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사태는 ‘반전’이라는 잣대로만 보기에는 다소 복잡한 국제정세가 깔려 있다.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오랜 영토분쟁과 종교분쟁의 결과이며 이스라엘의 건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체성의 문제까지 얽혀 있다.

    패망과 방랑, 학살 등 오랜 세월에 걸친 비극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인이 깨달은 진리는 하나,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스라엘을 경멸하거나 우습게 보는 이는 없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국민과 국가가 우습게 보이면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절감했으며, 그런 생각을 생활화, 습관화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 골다 메이어의 삶이 놓여 있다.

    골다 메이어는 1898년 5월3일 러시아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수였다. 전세계로 흩어져 살던 유대인에게 어느 나라라고 힘들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녀가 살았던 당시 러시아는 너무 비참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던 러시아 농민 폭도가 유대인들에게 분노를 폭발하면서 조직적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다. 키예프는 러시아 내에서도 반유대주의 정서가 가장 팽배한 곳이었다.

    골다는 네 살 때 폭도가 “유대인을 죽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유리창을 조각내고 쇠망치로 현관문을 부수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유대인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의 살인자’라고 소리 지르고 칼과 기다란 막대기를 휘저으며 달려들던 무리였다. 다행히 가족의 목숨은 건졌지만 어린 골다는 자기가 남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효과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신념이 살과 피에 박혔다.

    결국 못 견딘 아버지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미국으로 갔다. 골다도 8세이던 1906년 자유와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출발한다. 골다 가족이 정착한 곳은 밀워키였다. 아버지는 목수 일을 했고 어머니는 반찬가게를 운영했다. 가난하긴 했지만 생활은 자유로웠고 유대인이나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도 없어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골다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저녁 늦게까지 가게를 보느라 매일 지각했지만, 골다는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다. 총명하고 성실해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졸업식장에서는 학생대표로 고별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자유와 기회의 나라 미국

    골다는 상급학교 진학을 원했지만 부모는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학교 가지 말고 가게 일이나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언니 쉐이나가 골다보다 더 거칠게 반발했다. 일찍부터 사회의식이 깨어 있던 언니 쉐이나는 미국 생활 자체가 싫었다. 그러다 보니 영어 배우는 것도 친구 사귀는 것도 힘들어했다. 더구나 부모는 공부를 하지 말라고 했으니 탈출구가 없었다. 마침내 언니는 시카고에 큰 의류공장이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 작은 여성의류공장에 재봉사로 취직했다. 그러다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덴버에 있는 폐결핵 환자를 위한 유대인 병원으로 떠난다.

    그 사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골다는 부모님께 학비를 의존할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토요일마다 백화점에서 일하며 학비를 모았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 ‘노스 사이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비를 벌기 위해 밤마다 온갖 일을 마다않은 고등학교 생활은 한 학기 만에 끝났다.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똑똑하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남자들은 현대적인 여성을 싫어한다’는 게 이유였다. 공부하고 싶다고, 결혼하기 싫다고 울며 매달렸지만 부모는 고등학교가 학비만 비싸지 졸업 후 아무런 보장도 없으니 사치일 뿐이라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언니가 골다를 덴버로 불렀다. 중간 형제가 모두 죽는 바람에 맏언니와 무려 아홉 살이나 차이 나는 쉐이나는 어릴 적 골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쉐이나는 사회주의 유대주의 운동의 열렬하고 헌신적인 회원이었다. 10대에 이미 나중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칙에 따라 살겠다고 결심한 언니 쉐이나는 골다에게 엄격한 선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골다는 결국 언니의 부름을 받고 가출을 감행한다. 열다섯 나이였다.

    사회운동에 눈뜨다

    덴버고등학교에 입학한 골다는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데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건 학교교육이 아니라 언니 집에 밤마다 모인 혁명가들이었다. 언니는 수시로 집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유대인 결핵 환자들로 구성된 지식인 모임을 열었다. 모임이 열릴 때마다 마르크스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시온주의자 등 잡다한 부류 지식인들이 열띤 정치토론을 벌였다. 열다섯 살의 골다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경청했다. 그녀가 최초로 정치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부터였다. 골다는 여기서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팔레스타인에 속해 있으며, 그곳에 이미 동포들이 50여 개의 농촌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래언덕 위에 세워진 텔아비브에서 유대인들이 자치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여기서 들었다.

    이 모임을 통해 골다는 자신의 운명에서 중요한 또 한 사람을 만나는데 다름 아닌 장래의 남편 모리스다. 두 사람의 성격은 상반됐다. 골다는 활달하고 적극적이며 공동체생활을 좋아하고 집념이 강했던 반면, 모리스는 예민하고 수줍음을 타면서도 예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은 낭만적 청년이었다. 골다는 백과사전적 지식뿐 아니라 의젓하고 신사적인 태도, 멋진 유머 감각을 가진 모리스를 좋아했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2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가 있는 밀워키 정규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시절 소망했던 교사의 꿈을 실현할 날이 멀지 않아 보였다. 그러는 가운데 방과 후 참석하는 노동자 서클의 문학그룹 대변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발을 내디딘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광풍처럼 몰아친 반유대주의적 대학살이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서 발생하자 밀워키 중심가에서 항의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활동을 통해 유대인들과 함께 있을 때 편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서는 안 되며, 동포들과 함께 일하고 살면서 나라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골다는 모리스와 결혼하고 유대 나라 건설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조국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골다의 제안을 모리스는 처음엔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1917년 11월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조국을 세우는 것을 지지하며, 이 목적의 성취를 촉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발표한 벨푸어 선언 이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18년 가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유대인 회의 목적은 유럽에 있는 유대인의 시민권 보존을 위한 사업계획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밀워키 최연소 대표로 뽑히면서 골다의 실질적 정치이력이 시작됐다. 그녀는 곧 팔레스타인 행을 결행한다.

    텔아비브에서의 생활

    당시에도 팔레스타인은 유대인 공격이 한창이어서 위험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벌판에서도 들을 수 있는 유성기 하나만 들고 떠났다. 그녀 인생에서 미국 생활은 이렇게 끝났다. 나중에 일 때문에 몇 달씩 머문 적은 있지만, 조국으로서의 미국 생활을 그렇게 청산했다. 자유의 의미 이해, 발달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에게 주어지는 기회에 대한 인식, 아메리카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들에 대한 영원한 향수도 이제 가슴에 묻어야 했다. 그녀는 미국을 사랑했지만 이후 미국에 대한 향수에 젖어 괴로워하거나 팔레스타인으로 떠난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하고 힘든 고생길을 거쳐 마침내 텔아비브에 도착했다. 이곳은 이미 세계 각지에서 온 피난민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쓰러질 듯한 초가집이나 천막에서 살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고생이 시작됐건만 골다는 실망하지 않았다. 아이스박스가 있건 없건, 정육점 주인이 마룻바닥에 떨어진 신문지를 집어서 고기를 싸주건 말건, 이런 작은 고난에는 온갖 종류의 보상이 있으리라 믿었다.

    모두의 과거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공동목표인 땅, ‘이 세상에서 유일한 유대인만의 도시’에 산다는 것 이상의 기쁨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각기 다른 나라와 문화권에서 살다 왔고 언어조차 다를 때도 있지만, 여기에서만은 유대인이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운명의 지배자가 될 수 있으며, ‘너그러운 이해’ 덕분에 근근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정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신념을 느끼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아랍인들로부터 땅을 도둑질한 게 아니라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전세계 유대인들이 기부한 유대인국가기금으로 땅을 샀다. 다음 작업은 땅을 경작에 알맞도록 개간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키부츠에 가입해 새 조국 건설에 동참하고 싶었다. 그러나 골다의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키부츠에서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기 때문에 결혼한 사람은 받지 않으며, 골다처럼 ‘잘사는 나라’에서 온 여자는 고생을 견딜 수 없으리라는 이유에서다. 키부츠 가입 신청을 하기 전에 텔아비브에서 영어 개인교사를 한 것도 단점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편한 일을 했던 사람이니 길이 잘못 들었다는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골다는 ‘사람을 겪어보기도 전에 편견을 갖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설득했고 마침내 가입이 허용됐다. 1921년 가을이었다. 몇 채의 집과 몇 그루 나무가 전부인 그곳에서 그녀는 혹독한 노동을 견뎌낸다. 당시의 키부츠 생활은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식은 시어터진 곡물과 정제되지 않은 기름이 전부였다. 골다는 성공적으로 키부츠에 적응했다. 정치적 사회적 견해를 함께하며 무엇이든 그토록 열심히 토론하고, 사회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닭장에서 일하든 밀가루를 반죽하든 경비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소년들과 밤참을 나누며 부엌에서 몇 시간씩 이야기를 들어주든 키부츠의 모든 것이 즐거웠다. 햇볕에 생긴 주름살도 개의치 않았다.

    아내로, 어머니로 산다는 것

    키부츠도 그녀를 좋아했다. 얼마 안 되어 부락의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위원회는 전반적인 정책을 결정하는 책임을 가졌는데, 신참자로서는 영예로운 자리였다. 1922년에는 키부츠 운동 연차총회에 참석할 키부츠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는데 이는 작위를 받은 것처럼 영광된 자리였다

    그러나 모리스는 갈수록 힘들어했다. 필요 이상의 엄격한 규칙 때문에 사생활이 침해되는 것을 못 견뎌 했고, 관심 있는 책이나 음악 미술 분야에 대해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괴로워했다. 결국 병까지 생겼다. 불순한 기후와 잦은 말라리아, 구미에 맞지 않는 음식, 뼈가 부러질 듯한 들판노동, 이 모든 것이 그에겐 고통이었다. 키부츠 생활 2년 반 동안 주기적으로 병에 시달렸지만 골다는 모리스를 잊은 적이 많았다. 경비의무를 끝내고 돌아오는 소년들에게 밤참을 만들어주며 부엌에 앉아 있거나 가축 일을 돌보면서 혹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모리스에게서 어떤 것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모리스가 병에 시달리자 골다도 결국 키부츠를 나왔다.

    골다는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건축사무실의 경리로 취직했다. 그러나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키부츠에 대한 그리움이 생각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골다가 미래에 대해 이처럼 불안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6개월 뒤 혼자 키부츠로 돌아갔지만 모리스 없이는 정착할 수가 없음을 절감했다. 그녀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아내로 남아 있고 싶었고 남편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마침 아들도 태어났다. 좋은 어머니가 될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모든 희망과 의도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가정생활은 쉽지 않았다. 혹독한 가난으로 아이들이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불안도 컸지만 무엇보다 외로웠다. 익숙지 않은 소외감과 조국을 다시 찾아온 목적을 빼앗겨버린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골다는 아들에 이어 딸이 태어날 때까지 방 2칸에 가스도 전기도 없는 곳에서 쥐꼬리만한 돈을 만드느라 방 하나를 세놓기까지 했다. 학교의 빨래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다시 일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정주부로 실패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정을 위해 충분한 봉사를 하지 못할 바에야 일자리를 가짐으로써 삶의 보람을 찾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남편이나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유대노동자총연맹 히스타드루트에서 여성노동위원회 서기로 일했다. 히스타드루트는 단순한 노동조합이 아니었다. 아직 자치령 단계에 있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국가를 건설하기 전에 구성원들의 기본적인 생활조건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다루는 노동공동체였다. 그녀가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은 곧 팔레스타인 나라 건설에 참여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은 남편과의 별거를 가져왔다.

    그녀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해외에 파견되는 일이 잦았고, 자연히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녀의 이름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런던에서 열린 대영제국 노동회의에서 참석자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골다가 훗날 이스라엘 건국의 핵심 지도자가 된 벤 구리온의 눈에 띈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벤 구리온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대표로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열렬히 호소하던 그녀의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32년부터 2년간 미국에 파견되기도 했던 골다는 여성노동위원회에서 히스타드루트 집행위원회로 자리를 옮겼다. 팔레스타인 자치령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모리스와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일과 육아와 살림을 병행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일하러 나가고 모임에 나가고 아들을 음악교습소에 데리고 가고 딸을 병원에 데리고 가고 상점으로 식료품을 사러 가고 밤중까지 옷을 고치고 요리를 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물론 조국 건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어머니를 자식들이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엄마의 부재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벨푸어 선언’ 폐기

    일하러 나가는 어머니의 내적 갈등과 절망은 그 어떤 어려움보다 크다. 남편이 아프거나 실직했을 때 가족이 정상적인 생활궤도에서 벗어났을 때 어쩔 수 없이 일하러 나가는 어머니도 있지만,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생활에서 자신을 분리시킬 수가 없다. 그래도 영원한 내적 갈림길, 이중의 고삐, 오늘은 가족에 대해, 내일은 일에 대해 마음껏 다하지 못한 듯한 느낌. 골다도 마찬가지였다. 언니와 어머니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항상 아침에 일하러 나갔다가 오후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데 대해 설명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아픈 딸을 두고 자주 출장을 다닌다고 타박하는 언니에게 골다가 보낸 편지 일부다.

    ‘나의 사회생활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야. 절대적으로 필요한 거야. 의사가 사라(딸)의 상태를 보고 내가 떠나도 좋을 정도라고 말해서 내가 떠난 거야. 매나햄(아들)에게도 적절한 조치를 해놓았어. 지금으로선 주변에서 내게 요구하는 것을 거절할 수가 없어. 내가 하는 일이 구세주를 오게 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나라)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설명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녀는 언제나 시간에 쪼들렸고 가정과 일의 상충하는 요구로 바빴다.

    유럽 전역에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군 재무장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청천벽력이 날아드는데, 바로 1939년 5월 영국 외상 베빈이 발표한 백서였다. 팔레스타인 자치령의 위임통치를 맡고 있는 영국 정부가 이 지역 유대인 이주를 제한하고 유대인 국가를 창설하는 기존 정책을 포기할 것임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는 1917년 유대민족국가를 세워주겠다고 한 약속이나 다름없는 ‘벨푸어 선언’을 스스로 폐기하는 것이었다.

    아랍에서는 여전히 유대인에 대한 살해와 폭동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정부의 선언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끊임없는 테러와 압력으로 골치 아픈 유대인 문제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순수 혈통 국가를 꿈꾸는 히틀러에게는 살인 면허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영국을 지원하고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 이주를 제한하는 영국 정책에 저항하는 줄타기를 했다. 골다는 전쟁경제자문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팔레스타인 지역 전쟁 경제와 관련된 제반 문제에 관해 영국과 접촉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한편으로는 유대인 지원병 모집운동에도 열심이었다.

    골다는 유대인의 처지를 설명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갔다.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을 데려오기 위한 투쟁, 영국에 대한 굴욕적인 투쟁, 국내적으로는 향후 이민자들을 흡수할 수 있도록 강하고 탄탄한 경제가 되도록 하는 경제투쟁이었다. 그 힘겨운 투쟁 속에서 그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너무 혹사한다’는 염려를 들었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고민에 쫓겨서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다. 시간이 1분 1초 흐를수록 민족의 생명을 앗아가는 마당에 힘든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미국 유대인의 힘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 각지의 유대인 집단수용소 실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아우슈비츠와 부켄벨트, 닷 하우처럼 악명 높은 수용소의 처참한 광경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가스실이라던가 유대인의 몸으로 비누를 만들었다는 소식 등은 처음엔 믿기 어려웠다. 쌓인 시체가 산을 이루고 역겨운 피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는 그곳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도살장이었다. 골다는 통곡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에라도 국가 흉내라도 냈더라면 수십만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유대인이 나치의 오븐이나 가스실에서 구출됐을지 모른다고 울부짖었다.

    1947년 11월29일 유엔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를 각각 창설하고 예루살렘을 국제도시화한다는 분할 결정을 내린다. 유대인들은 환호했다. 마침내 2000년 동안 세계 각지를 유랑하며 겪었던 박해와 수모가 끝나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쟁은 끝이 아니었다. 분노한 아랍인들이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서 테러를 일으켜 유대인을 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경지대에까지 군대를 배치해 유대인들의 숨통을 조였다. 테러는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퍼졌다. 전쟁밖에는 달리 맞설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무기였다. 돈이 없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수백만달러가 필요했다. 당시 이 달러를 줄 수 있는 건 미국 유대인밖에 없었다.

    골다는 옷을 챙길 새도 없이 서둘러 미국 뉴욕으로 날아갔다. 1947년 1월이었다. 예정에도 없이 유대인 복지기금연맹총회에 참석해 연설을 시작했다. 원고도 없이 연단에 섰다. 긴 연설은 아니었으나 비장한 각오로 가슴에 있는 모든 것을 토로했다.

    “지금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는 최후까지 싸우려 하고 있습니다. 무기가 있으면 무기를 들 것이고 없으면 돌이라도 들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70만명이 살아나면 유대민족이 살아날 것이고 유대인의 독립이 보장됩니다.

    우리 모두는 승리를 믿습니다만 무기 없는 정신은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시간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무엇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민족 중에서 최선의 민족도 아닙니다. 단지 어쩌다 우리는 거기(팔레스타인)에 있게 되었고 당신네들은 여기(미국)에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팔레스타인에 있었고 우리가 미국에 있었다면 당신들이 우리가 그곳에서 하고 있는 일을 할 것이고, 당신들이 이곳에 와서 바로 지금 당신들이 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싸울 것인지 싸우지 않을 것인지는 당신들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결정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공동체는 아랍 폭도에게 백기를 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오직 한 가지만 결정해줄 수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인지 아니면 아랍인이 승리할 것인지 말입니다. 그 결정은 미국의 유대인들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간청하는 것은 너무 늦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청중은 경청했다. 울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지역사회에도 내본 적이 없는 액수를 기부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 보고받은 벤 구리온은 “언젠가 역사에 돈을 모금한 한 유대인 여성이 유대인 국가 수립을 가능하게 했다고 씌어질 것이다”고 극찬했다.

    건국, 입각, 생애 최고의 순간

    1948년 5월14일 텔아비브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반주 없이 국가를 부르고 선언문 전문을 읽기까지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스라엘 국가!’ 드디어 해낸 것이다. 더 이상 유랑은 하지 않아도 좋다. 골다는 울고 또 울었다. 이스라엘은 지구상에 하나의 ‘실존’이 되었다. 5월14일 밤 자정이 넘은 시각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인정했다는 낭보도 전해졌다. 하지만 독립 선포는 기쁨과 환희가 아니라 불안과 공포 속에서의 출범이었다.

    바로 이튿날, 아랍군들이 사방에서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북쪽에서는 레바논과 시리아가, 동쪽에서는 요르단과 이라크가, 남쪽에서는 이집트가 공격해왔다.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결사 항전했다. 병력과 화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선에서 승리하는 기적 같은 전과를 올렸다. 마침내 1948년 7월18일 이집트와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건국을 기정사실화했다. 젊은 이스라엘인 6000명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이 숫자는 당시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스라엘은 1949년 1월 첫 총선에서 내각을 구성하고 초대 총리로 벤 구리온을 임명했다. 건국의 일등 공신 골다는 노동장관에 임명됐다. 그녀가 맡은 일은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 직장을 배정하고 도로를 놓고 주택시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직업훈련도 시켰다. 이주민이 엄청나게 늘어 국가 창설 1년 반 만에 30만의 인구가 불어났다. 골다는 이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1951년 뉴욕에 머물 동안 남편 모리스의 부음을 들었다. 오랜 별거생활을 했지만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다정하고 헌신적인 아빠였다. 남편의 죽음조차 가까이에서 하지 못했으니 골다의 비통함이 컸다. 격무와 잦은 외유로 어깨관절이 탈골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응급처치만 받고 유엔 연설을 위해 소련으로 떠나야 했다. 다 자란 아이들과 손자 손녀 볼 시간도 없이 쉰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그녀는 사생활 없이 오로지 국가에 헌신했다.

    1956년 골다는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외부 정세는 좋지 않았다. 이집트는 최신 무기를 대량구입하면서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파괴를 외쳤고 실제 폭탄테러를 하기도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해 국제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시리아 요르단과 함께 단일 군사체제를 공식선언했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카드는 선제공격뿐이었다. 그해 10월말 이스라엘군은 불과 100여 시간 만에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 수에즈운하에 이르렀고 소련제 무기를 노획했다. 하지만 평화를 깨뜨린 주범으로 몰려 국제여론의 빗발치는 항의를 들어야 했다.

    이스라엘 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한 골다는 난처했다. 그녀는 이집트의 공격 계획서를 제시하면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은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녀의 해명은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중심부 국가보다는 아프리카 주변국과의 관계에 힘을 쏟았다. 될 수 있는 한 타국과 친선관계를 유지해 이스라엘 ‘왕따’를 완화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풍전등화의 이스라엘

    1963년 벤 구리온이 임기를 2년 남겨두고 사퇴하자 그녀 역시 공직을 떠났다. 손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긴장으로 누적된 수십년간의 피로를 녹여냈다. 그러나 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알려진 제3차 중동전이 벌어졌다. 군사적으로 포위된 이스라엘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비행기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 것이다. 불과 3일 만에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를 점령했다. 골란고원을 빼앗고 다마스커스 인근까지 진격해 1948년 이래 분할돼 요르단 통치하에 있던 예루살렘 구(舊)도시까지 탈환했다.

    유엔 안보리는 이스라엘에 ‘6일 전쟁’ 이전 상태로 철군하라고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거부했다. 1967년 6월5일은 이스라엘 공군 역사상 최고의 날이었다. 이날 오전 7시10분 이스라엘 공군은 전투기 12대만 지상에 대기시켜놓고 나머지 전투기를 모두 출동시켰다. 지중해 상공으로 날아간 뒤 저공비행으로 이집트를 향해 접근했다. 오전 두 차례 기습으로 이집트 전투기 309대를 파괴했다. 이스라엘 공군기는 19대가 격추됐다. ‘6일 전쟁’은 개전(開戰) 30분 만에 승부가 결정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에쉬콜 총리가 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따라 후임 총리로 71세의 골다가 취임한다.

    감격과 영광도 잠시, 이스라엘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중동 정세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왔다갔다하는 때가 많았다. 1970년 9월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과격파 게릴라들에게 암살당하자 아랍권에서는 강경파가 득세했다. 후임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점령지 반환을 요구하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확장해나갔고 시리아 역시 전열정비에 박차를 가해 제4차 중동전 조짐이 번지고 있었다.

    1973년 10월6일 새벽, 마침내 소련제 탱크와 미그 전투기를 앞세운 이집트와 시리아군이 남과 북 2개 전선에서 물밀 듯 진격해 들어왔다. 전쟁 시작 3일 만에 이스라엘 요새는 대부분 이집트군에게 점령당했고 북부의 골란고원은 시리아군에게 점령당했다.

    이 전쟁은 골다에게 최대 위기를 안겨주었다. 개전 9시간 전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전쟁을 결심했다는 작전 참모회의 보고를 받았지만 선제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가하면 침략자로 몰릴 것이고 미국이 대(對)이스라엘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8일간 벌어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약 2500명의 사망자와 7500명의 부상자 등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인구 300만 남짓하던 이스라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소련의 대(對)아랍권 원조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선제공격의 유혹을 뿌리친 바람에 미국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분노한 민심은 그런 것까지 이해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집무실에는 자식과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찾아와 울부짖었고 참전병사들도 “왜 적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골다는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고 설득했다.

    조국을 지키는 힘

    전쟁이 끝난 이듬해 이스라엘 국민은 그녀를 다시 총리로 선출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존경이 변치 않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승리한 지 불과 몇 개월 후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이 악화되면서 그녀는 결국 은퇴를 결심한다.

    골다 메이어의 삶은 이스라엘 건국 드라마 그 자체다.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국에선 아무런 감흥도 유발하지 못하는 ‘애국심’이라는 단어의 힘이 느껴진다. 이제 우리에겐 국가와 민족이란 말이 정치구호가 된 듯하지만, 이스라엘에선 아직도 많은 사람이 말이 아니라 행동, 자기희생을 통해 오늘날의 가치로 구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심엔 건국의 주인공 골다 메이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골다와 같이 건국에 목숨 바친 조상들의 이야기를 자녀에게, 후배에게 들려주면서 애국심을 전파한다. 물론 이곳 젊은이들도 디스코와 패션을 좋아하고 이기주의에 물들어가고 있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만은 여전하다고 한다. 테러집단 하마스에 대항하는 국민적 단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골다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인류애를 보여주는 한편으로, 1972년 뮌헨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해 10여 명의 선수를 살상하자 특수 수사팀을 만들어 무려 10여 년에 걸쳐 테러단 전원을 죽이는 냉철함도 지녔다. 단지 ‘자리’를 위한 성취가 아니라, 정직과 희생으로 일관한 그녀의 삶은 정치를 한다는 것이 진정 어떤 것인지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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