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데기장수로 시작해 열세 번의 ‘직업’을 전전한 끝에 얻은 ‘전업작가’. 그리고 그 속에서 ‘창부가 된 천사들’과 노니는 자유.
그의 초대전을 열어준 니혼 갤러리(Nihon Gallery)는 직원이 100명이 넘고 일본 전역에 체인망을 구축한 대형 화랑이다. 일본의 문화소비자들은 흔하디 흔한 여성누드화일지도 모를 박태성 작품의 어느 면에 그리도 열렬한 지지를 보낸 것인가.
올해 들어서야 첫 개인전을 가진 그는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렵게 시작한 그의 그림은 일반인이 보기에 낯뜨거운 여인 누드 일색이다. 꼼꼼한 필치로 묘사해낸 누드화는 여체가 지닌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머리카락 한 올부터 속눈썹의 엷은 그늘까지 세세히 묘사해내는 그의 누드화는 카메라보다 더 사실적이어서 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박태성은 이런 누드화를 물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누드만 그리는 괴짜화가로 통하게 됐다. 그러다가 우연히 박태성에 대해 전해들은 니혼 갤러리의 이케다 사장이 첫 개인전을 여는 인연을 맺었다. 이케다 사장은 그를 만나기 위해 수시로 서울에 와서는 작업실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박태성의 작업을 눈여겨본 이케다 사장은 일본에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고 초대전을 열기로 결심한다. 이케다 사장은 박태성의 일본 초대전에 앞서 일본의 컬렉터들을 한국으로 초대하여 작품설명회까지 열어줄 정도로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에서 연 첫 개인전은 예상대로 성공적이었다. 작가의 팬 사인회까지 가질 정도로 유례없는 대성황을 이뤘다.
화가는 열네 번째 직업
지천명을 한참이나 넘어선 박태성은 왜 여성 누드화만 고집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그림을 “어린 시절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그림”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 인생에서 여자는 신비스러움 그 자체”이며 “작은 우주와 같은 여자는 내 육체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박태성은 화가가 되기까지 멀고도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어느해 여름. 때마침 쏟아진 소나기를 피해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긴 소년이 있었다. 소나기는 전주에서 상경한 소년을 더욱 쓸쓸하게 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앞으로 서너 명의 남자가 무슨 영문인지 쫓고 쫓기며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중 한 사람이 무언가를 흘리는 게 아닌가. 거금 ‘5만환’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 돈으로 번데기 장사를 시작했다. 이 돈은 한참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 처음으로 자립하는 계기가 된다.
환쟁이 박태성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국내 화단보다 일본에서 먼저 주목받기 시작한 유명 화가지만 그는 ‘괴짜 환쟁이’ 닉네임 하나 얻기 위해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가 마지막 안식처로 삼은 전업작가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헤아려보면 ‘화가’는 그의 인생에서 열네 번째 직업이었다.
그가 22세 무렵, 실내디자인을 배운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서울의 종로5가 일대에서 “뻔∼” 소리를 내지르던 소년 박태성은 어느 날 우연히 명동성당 부근 한 인테리어 회사 앞을 지나게 된다. 명동디자인센터였다. 쇼윈도를 통해 본 건물투시도에 이끌려 무작정 안으로 들어간 그는 디자이너 김재수씨(현 피어리스 디자인 실장)에게 체계적으로 실내디자인을 배우게 된다.
실내디자인을 배운 박태성은 얼마 후 전주로 내려가 그때까지 전북지역에 생소했던 새로운 실내인테리어 붐을 일으켜 한때 사업적인 성공을 맛본다. 이때 소일거리로 ‘댄스’를 배우던 박태성은 돌연 상경한다. 그 후 역마살이 낀 이 풍각쟁이 인생은 또 다른 길로 속속 접어든다. 족발집과 약장수, 사교 댄스학원, 패션업, 다시 한정식과 갈비집에서 중고차 사업, 레스토랑, 호텔업, 골프연습장까지 참으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돌고 도는 인생살이 한가운데서 박태성은 불현듯 인생의 허망함을 절감한다. 이를 달래고자 어릴 적부터 막연히 꿈꿔온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불타올라 붓을 잡는다. 이렇게 해서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 1989년 42세 때의 일이다.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속적인 영화를 버리고 누드화가로 변신한 박태성이 사람들에겐 기인(奇人) 같아 보일 것이다. 성질이나 언행이 별난 사람을 기인이라고 한다면 박태성은 기인이라기 보다는 열정으로 뭉친 진정한 화가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기 작업에 대한 그의 진지함은 젊은 작가들의 열정에 못지않다. 일관되고 분명한 작가의 의지는 이미 그의 작품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다만 희끗한 꽁지머리에 깔끔한 중절모, 그 나이에도 서태지의 열성팬이며 지미 핸드릭스의 블루스 록에 어깨춤을 추는 음악광의 모습이라든지, 크로키 회원(그는 얼마 전까지 한국크로키회 회장을 역임했다)을 위해 누드모델을 자청하는 것이 별스럽다면 기인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와라….”
그의 작업실로 전화를 넣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말일 것이다. 박태성은 그만큼 인간적이다.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이라면 그는 어느 상황이든 항시 반긴다. 그의 넓은 포용력이 변변한 연줄 하나 없는 화단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게 했다는 게 막연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창부가 된 천사들’
박태성의 작품을 두고 화가 이목일은 “풍부한 삶의 경험이 녹아 있어 단순히 형상을 재현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분명한 자기 철학이 발현된 고해성사와도 같다”고 말한다.
박태성은 누드작품을 통해 여인을 단순히 눈요깃거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인을 통해 예술적 메시지를 담아내고자 한다. 그의 여인은 여성으로 상징되는 자연으로의 회귀 같은 동양적인 철학관이 담긴 사유의 결집체다.
그 여인들은 얼핏 닮아 보이지만 독특한 화면구성과 다양한 포즈를 통해 저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그 미묘한 표정을 감상하는 것은 그의 그림을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특히 어린 여인은 생명의 원천이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영혼을 상징한다.
그들에겐 전통 샤머니즘을 현대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승화시킨 끈적한 유혹이 있다. 그는 이런 영감을 중국 여행 중에 얻었다고 한다. 우연히 접한 갑골문자를 보며, ‘만약 수천 년 전에 성을 그 문자형식으로 도식화하면 어떤 형상일까’ 하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품 속의 여인을 둘러싸고 배경을 이루는 문자형상은, 바로 여느 만연한 누드화와 변별하게 해주는 독특한 조형세계를 드러낸다. 또한 그가 구사하는 화법은 테크닉의 최고 경지인 동양적 신비주의가 가미된 하이퍼리얼리즘이다.
“그의 화면에는 여자의 육체가 특정한 포즈로 연출되어 있고 그 배경에는 인도의 탄트라 조각의 성애장면들, 벌어진 꽃잎, 남녀의 키스장면, 묶인 매듭, 상형문자 꼴이 가득하다. 우주만물의 이치가 성의 교합과 음양의 조화, 만남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메시지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성에 대한 관점과 철학을 도해적 선상에서 보여준다.” (미술평론가 박영택)
박태성은 작품 속의 여인들을 ‘창부가 된 천사’라고 부른다. 이는 여인들을 통해 단편적인 여인상의 재현이 아니라 상상속의 이미지를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의 누드는 보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을 그릴 수 있어야 천박하지 않다는 것이다.
박태성은 열네 번째 직업인 환쟁이로 생의 진정한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고 그는 말한다. 환쟁이는 박태성이 그만의 여인들과 동행하는 생의 마지막 여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