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이미 1차 감군조치 실행
- 군대 기피현상 심해지자 지원제에서 의무제로 전환
- 감축인력은 해외 보내 외화획득
- 120만 대군으로 추정되는 북한 인민군에 대한 감군조치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 북한이 인민군을 감축하는 속셈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앞서 10월7일 일본 교토(共同)통신은 모스크바발(發)로 “북한이 군사분계선 일대에 집중시켰던 군사력의 전투태세를 완화하고 2만∼5만명의 병력 감축을 검토중”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북핵 문제가 불거지기 전인 당시만 해도 신의주 개발, 북일 수교 등 북한의 개방무드가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 맞물려 국내에서는 ‘한반도 군축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 어린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보도에 대해 국가정보원과 국방부 등은 “북한군 근무연한이나 편제에 큰 변화가 있다는 정보는 없으며, 대규모 병력감축설도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부인했다. 이후 “이탈리아 에너지회의에 참석한 북한 관리는 대부분 실무급 하위관리여서 북한의 군사문제를 얘기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정부 관계자의 분석이 이어지면서 일련의 보도는 ‘해프닝’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이튿날 “제임스 켈리 미 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10월초 방북했을 때 북한이 비밀 핵개발 계획을 시인했다”는 한·미 양국의 메가톤급 발표가 이어지면서 북한군 감군(減軍)에 대한 논란은 세인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감군안은 대미 협상카드
단 이틀 동안 유효했던 감군 관련 보도는 정말 근거 없는 해프닝이었을까. ‘신동아’는 올해 초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소식통으로부터 ‘북한군 감군설’이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소식통은 지난해 10월의 보도는 대부분 사실에 가깝다고 밝혔다. 단지 전달과정에서 출처가 잘못 알려져 보도의 신뢰성에 흠집이 가게 되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의 고위관계자가 이 소식통에게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감군안이 검토된 것은 2001년부터였다. 지난해 1월1일 공식채택된 감군안의 핵심은 인민군 사병 복무기간의 변화에 있다. 10대 후반 입대해 31세까지 평균 13년 가량 복무하던 사병들의 근무기간을 3~5년으로 줄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120만 가량인 인민군 규모는 3분의 1로 줄어들게 되지만, 복무기간 변화와 더불어 현재의 지원병제도 의무병제를 전환하기로 했기 때문에 실제로 줄어드는 인원은 50만명 가량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70만명까지 인민군을 줄이겠다는 것은 남한의 군병력과 주한미군의 숫자를 합한 것과 균형을 맞추겠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줄어든 병력 중 상당수는 노동인력으로 전환해 러시아, 중동 등 외국에 송출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해당국들과 협의를 거쳤고, 일부 송출은 이미 시작됐다.
지난해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푸틴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에서 이 노동인력을 시베리아 개발, 벌목, 건설토목 사업 등에 활용하는 방안이 경제협력의 일환으로 심도 깊게 논의됐다. 교토통신이 러시아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2만~5만명 감군계획’은 그 논의과정에서 일부가 와전돼 흘러나간 것이다.”
이와 함께 이 고위관계자는 “지난해 10월 보도는 출처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에너지체계 관련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이 감군 관련 계획을 언급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고, 실제로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논란이 불거진 후 북한 당국에서 해당 인사들을 불러 조사를 벌였고, 일부 문책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책임이 없는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는 것이다.
한편 이 소식통은 북한의 감군 방안이 미국에 대한 협상카드의 일환으로 검토됐다고 전했다. 이미 지난해 여름 북한은 여러 경로를 통해 미 국무부에 감군계획을 전달했고 긍정적인 사인도 받았다는 것. 지난해 10월 켈리 특사의 방북 때도 감군계획을 포함한 군축방안을 제의했다는 설명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핵개발 계획에 대한 켈리의 강공 드라이브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고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져나가면서 협상 자체가 유야무야됐다는 해설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감군계획 자체는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미 인민군은 100만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는 감군계획 자체가 대미 협상카드로서뿐 아니라 북한 내부 사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뤄진 조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 복무기간의 변화는 주민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만큼 완벽한 비밀로 유지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위와 같은 전언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신동아’는 최근 북한을 탈출한 인사들이나 북한 주민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접촉했다. 이들은 복무기간 변화, 징병제 전환 등은 이미 시행되고 있다고 확인해주었다.
중국에 머물고 있는 한 북한 주민은 “지난해 가을 하달된 국방위원회 명령을 통해 복무기간 변화가 공식화되었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입대시점에 상관없이 일정한 나이까지 복무하던 체제였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복무기간이 달랐지만, 이 명령을 통해 모든 병사들이 같은 기간을 복무하는 방식으로 변경됐다는 것이다. 다만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일반인의 경우 5년, 대학을 다니며 군사교육을 받은 이들은 3년을 복무하는 점은 예외규정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또한 명목상이기는 했지만 지원제였던 모집방식이 의무복무로 바뀌어 주민들 사이에 상당한 혼란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전에는 출신성분 등 다양한 인적사항을 검토해 입대 허가를 내주었으나 최근에는 중대한 신체결함이 아니면 모두 입대하는 바람에 예상치 않게 군 복무를 하게 된 주민들 사이에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이다.
신규 입대하는 병사들의 복무기간이 줄어드는 것과 병행해 이미 복무하고 있는 병사들의 조기전역이 이뤄지고 있다는 증언도 있다. 지난해 여름 경계근무 도중 휴전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온 한 인민군 병사 출신 탈북자는 “이미 2001년 9월 31세까지였던 복무기간이 28세로 줄어드는 1차 감군 조치가 시행됐으며 고참급 병사 상당수가 조기 전역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미 지난해에 인민군 전체 규모는 90만명 정도로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이 탈북자는 추산한다.
또한 이 탈북자는 “1차 감군 당시에도 인민군 내부에서는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고 덧붙였다. 전체 병력규모가 급속히 줄어드는 복무연한 축소방침이 전달되자 군관(장교)들이 “도대체 어떻게 전쟁을 하란 말이냐”며 불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감군안에 대해 북한군 내부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탈북자들은 이러한 변화가 이뤄진 배경으로 북한의 경제체제 변화를 꼽았다. 비록 형식상이었지만 지원제였던 ‘초모제(招募制)’ 하에서도 120만 대군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군복무 자체를 ‘신성한 의무’로 여기는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이들은 말한다. 제대하면 노동당 입당이 가능해 취직할 때도 우대받곤 했다는 것.
군 기피현상 심화
그러나 지난해 북한의 경제개혁이 가속화하고 시장경제 시스템 도입이 본격적으로 검토됨에 따라 이같은 분위기에 변화가 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1990년대 이후 이루어진 인민군 복무기간의 변화는 모두 경제사정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통상 5~8년이었던 인민군 복무기간은 1995년 10년으로 확대되었다가, 1996년에 이르러 복무기간이 아닌 나이로 제대시기를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제대 연령이 남자 31세, 여자 27세로 규정됨에 따라 고교 졸업 직후인 17세에 입대한 일반인 남성은 대개 13년 이상을 군에서 보내야 했다. 대학 진학자의 경우에는 학교를 졸업한 22~23세(북한의 대학은 5년제)에 군에 입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장기복무는 이 시기 몰아닥친 극심한 식량위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전언이다. 최소한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군입대를 희망하거나 잔류를 원하는 분위기가 강했다는 것. 북한 당국 입장에서도 젊은이들이 체제불만세력이 되는 것보다는 군에 남겨두고 건설인력 등으로 활용하는 게 나았기 때문에 복무기간 연장을 택했으리라는 추측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식량사정이 다소 개선되면서 군 기피 풍조가 거세졌다. 복무기간 중에는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는 점도 문제였고, 무엇보다 군 시설이 매우 열악했다는 것. 공식적으로는 군 복무 중이지만 실제로는 밖에 나가 있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탈영을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한다.
한 탈북 병사는 “토굴을 파 지은 막사만 해도 좋은 환경이라 할 정도였으니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소속 부대의 중대 정원은 본래 150명이었지만 위탁교육을 핑계로 사회에 나가 있거나 탈영자를 빼고 나면 120명 정도였다”고 말했다. 전방부대 사정이 그렇다면 후방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같은 부작용이 발생하자 북한 군 당국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병사의 계급체계를 바꾸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전사’로 입대해 ‘상등병’을 거쳐 ‘하사’ 혹은 ‘중사’에서 전역하던 하위 계급체계를 ‘병사-초급병사-중급병사-상급병사-하사-중사’로 세분화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특히 하사나 중사 승진에는 자격시험도 도입됐다. 같은 계급을 단 채 몇 년을 보내야 하는 병사들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동기 유발책’인 셈이다.
한 탈북자는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가는 것보다 사회에 남아 ‘부업’을 하는 것이 생활에 유리하다 보니 지원자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자기만 부지런하면 암시장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데 누가 10년이 넘는 시간을 군대에서 보내려 하겠는가. 지원제가 의무제로 바뀌고 그나마 복무기간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주민들의 이러한 인식변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양 근교 건설현장에 동원된 북한 군인들. 북한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건설공사는 주로 군인들이 맡는다.
첫 번째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군대 규모를 줄여 확보한 노동력을 해외에 송출한다는 복안 때문이다. 이를 통해 획득한 외화를 경제개발에 사용한다는 것. 북한은 이미 1990년대부터 러시아나 중국은 물론 중동 각국에도 대규모 인력을 파견해왔다(지난 3월25일자 ‘동아일보’는 3000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쿠웨이트 현지 공장에 채용돼 근무하고 있다는 르포 기사를 전하고 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경제체제 변화로 인해 배급제가 봉급제로 전환함에 따라 막대한 군 인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해 7월 공식화한 이른바 ‘경제관리개선조치’에 따라 군인들에게도 월급이 지급되기 시작하면서 국가재정에 주는 부담이 상당히 커졌다는 것.
특히 일반 노동자·농민의 봉급이 10배 가량 오른 것에 비해 군인의 경우는 15~17배 가량 올랐다고 한다. 이른바 ‘선군정치’ 컨셉트에 따른 군 우대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120만 대군에게 이처럼 많은 봉급을 지급할 여력이 없어져, 북한 당국으로서는 감군을 추진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설명이다.
한편 이 소식통은 최근의 감군조치가 북한 내부의 권력구조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전했다. 경제개방과 자본주의식 체제 도입을 추진한 김용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등의 개혁·개방파와, 이에 반발해온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 등 군부 강경파 사이의 파워게임이 그것이다. 당초 김정일 위원장은 군부 강경파의 입지를 좁히고 개혁파의 손을 들어주는 방법의 일환으로 감군계획을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국방위원회의 감군명령이 하달된 직후 벌어진 일련의 상황이 감군 분위기를 역전시켰다고 한다. 지난해 9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북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납북 일본인과 관련한 ‘말실수’로 북일 수교를 원점으로 돌린데다, 10월 초순 신의주 경제특구 개발계획이 행정장관으로 임명됐던 양빈의 몰락으로 좌초함으로써 김정일 위원장의 리더십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개혁파의 목소리는 상당부분 위축되었다는 것. 더욱이 북핵 위기로 한반도 전체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군부 강경파가 주도권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군계획은 군부의 불만에도 흔들림 없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인사들에 따르면 북한의 시장경제체제 도입은 이미 본궤도에 올랐다 한다. 평양시내 거리에 노점상이 등장하고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상인계층이 형성되는 등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경제개혁조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감군계획은 개혁조치 자체가 폐기되지 않는 한 현 추세대로 추진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앞서의 소식통은 전했다.
실질 전력변화 크지 않을 수도
궁금한 것은 이같은 감군계획이 북한의 전력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알려진 대로 정규군 인원의 3분의 1 이상이 감축된다면 인민군의 전투능력이 현저히 약화되지 않을까.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은 “인민군이 맡고 있는 역할과 성격상 꼭 그렇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한다. 전력 약화 현상이 벌어질 것 같으면 감군 자체를 결정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경남대 북한학 대학원 함택영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북한의 군대와 남한의 군대는 그 기능에 차이가 있다. 조선인민군 정규병력 중 30만~40만명 남짓은 일상적으로 ‘국가적 사업’으로 불리는 대규모 토목·건설 공사에 투입돼 일해왔다. 남한 군대처럼 모두가 전투인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건설회사가 할 일을 인민군이 수행하는 셈이다. 50만 감군이 추진된다 해도 대부분 이들 건설인력이 감축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민군은 북한 최초의 해저광산인 ‘12월5일 청년광산’, 우리에게는 금강산댐으로 알려진 안변청년발전소,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대대적인 토지정리사업, 길이 160km의 개천~태성호 물길공사 등 대형 국책사업에 동원된 바 있다. 남한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산하에는 대규모 주택공사를 담당하는 일반건설국, 도로건설을 담당하는 도로국, 금강산발전소건설관리국, 간척지 동원부대 등이 설치돼 운영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북 인사들의 의견도 함교수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휴전선을 넘어온 한 탈북 군인은 “휴전선 방어 등 군 본연의 임무에 임하는 ‘핵심전투인력’은 70만 내외라고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나머지 인원은 말만 군대였을 뿐, 실제로는 건설사업이나 외화벌이, 혹은 국가배급 부족분을 자체 충당하기 위한 농사나 가축 기르기에 투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1차 감군안이 하달된 2001년 가을 무렵에는 3, 15, 6, 9, 8사단과 판문점 인근의 판문군, 항공대 등 총 10만여 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던 서부전선에 8000명 규모의 인민군 64사단을 새로 배치하는 등 대남 압박을 강화하는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고 탈북 인사들은 말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북한의 50만 감군계획은 건설사업 등에 동원되던 병력을 민간화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휴전선 이북의 실질적인 전력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감군에 따른 군 편제개편이 건설사업을 담당하는 부대를 축소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북한 전문가들과 탈북 인사들은 대부분 “휴전선 배치 병력을 줄이려면 남한과의 군축협상을 먼저 시도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와 관련해 앞서 말한 소식통은 “당초 감군계획을 검토하면서 북 고위층이 의식한 것은 남한이 아니라 미국이었다”고 전했다. 오히려 남측이 먼저 알게 될 경우 ‘우습게 보일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알리지 않고, 대신 지난해 여름 미 국무부에 감군 계획을 전달해 의사를 타진했다는 것. 가속화되는 북미, 북일 교섭에 고무돼 있던 개방파는 감군계획을 통해 자신들의 대화 및 평화의지를 과시함으로써 향후 협상에서 주도권을 쥔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는 전언이다.
이후 10월17일 북핵 문제가 불거진 것이 감군계획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을 북한 고위층 일부가 갖고 있다고 이 소식통은 말한다. 10월15일 감군계획이 뜻하지 않게 한국 언론에 노출되어 전세계로 타전되자, 한반도 평화의 장밋빛 분위기가 급속히 번지는 것을 경계한 미국이 켈리 방북 당시 있었던 논란을 뒤늦게 흘리고 나선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후 북핵 문제를 둘러싼 위기상황은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국이 만들어낸 ‘자가 발전 플레이’였다는 음모론인 셈이다.
이같은 북한의 의심은 과연 어디까지 사실일까. 미국 정부가 당시 북핵 문제를 서둘러 공개했던 것은 10월16일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대응방안을 논의하다 참석자를 통해 ‘USA 투데이’에 관련사실이 새나간 때문이라고 알려진 바 있다. 발표 직후 한국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미국은 당초 한국에서 먼저 유출되기를 기대했으나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부러 ‘USA 투데이’를 택해 기사를 흘린 것’이라는 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이 사실인지 여부보다 더욱 주목할 것은 북한 지도부가 의심을 품게 된 배경이다. 당초 북한 내 개방파들은 켈리 특사의 방북이 북미관계 개선의 전기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켈리 특사가 핵 보유 문제에 대해 강하게 밀어붙이자 북한 지도부는 ‘함정에 빠졌다’며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미 부시 행정부의 강경노선과 살벌한 국제정치의 게임 룰을 따라잡지 못했던 개방파의 ‘순진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