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3사단의 대담한 우회접근이 종심작전 성공 불러
- 편조 개념에 의한 ‘현란한’ 중부사의 편성과정
- 입체고속기동전은 없었다. 그러나…
- 전쟁 초기에 이미 이라크군 장비의 95% 파괴
- 1차 공격은 해군, 2차는 공군, 3차는 육군이 주도
- 하루 1900회까지 출격한 항공전
- Air Day 공격만으로 상황 끝, S-Day와 G-Day 선포 무산
- 알사무드 미사일 해체하다 공격당한 이라크
- 사전 침투한 동맹군 특수부대의 대활약
- 빈 헬기를 이용한 미군의 陽動작전도 성공
- 미국의 계획 ‘이라크를 민주혁명기지로 만든다’
- 공병과 의무대를 파견한 한국이 기대할 파이는?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라크군은 종이호랑이였던 것일까. 아니면 미국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던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한국 언론은 이라크전을 전쟁 그 자체로 분석하지 못했다. 전쟁에는 전쟁에서만 통용되는 고유한 원칙이 있는데 이에 대한 분석에 소홀했던 것이다. 미국군(동맹군)이 이라크전에서 보여준 작전과 전술에는 우리가 참고할 것이 많다. 이라크전이 끝나가는 마당에 이러한 것을 챙기고 분석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라크전을 살펴보려면 먼저 ‘종심(縱深)’이라는 단어부터 이해해야 한다. 종심은 ‘깊이’ ‘심도’ 등의 뜻을 가진 영어단어 ‘depth’를 옮긴 것이다. 군사용어인 종심은 이 말에서 파생된 ‘종심작전(Depth Operation)’이라는 단어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심작전은 한 마디로 적국의 영토 안으로 치고 들어가 싸우는 것이라 자국 영토는 거의 피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종심작전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적국으로 들어가면 지리·기후·언어·적국 주민들의 저항 등 전투와 관련된 모든 조건이 불리해진다. 적진 깊숙이 들어간 전투부대에게 탄약·유류 등을 보급하는 것과 이 병참로를 지키는 것도 힘들어진다. 적국의 국민들이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병참로를 끊어버리면 깊숙이 들어간 전투부대는 고립무원이 돼 몰살할 수도 있다.
종심작전 對 종심방어
종심작전에 반대되는 것이 종심방어(Defense in Depth)다. 종심방어란 적군을 자국 영토로 깊숙이 유인해 들인 다음 병참로를 끊고 지형을 비롯한 모든 유리한 조건을 동원해 무찌르는 것. 종심방어가 성공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국경선에서 적군을 맞는 부대는 적군에게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살수대첩’이다.
서기 612년 1월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113만38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요하(遼河) 동쪽에 있는 고구려군 최대의 전략 거점인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결사항전으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수 양제는 30만 4000명의 병력을 뽑아 별동대를 만들고 우중문(于仲文)으로 하여금 이끌고 들어가 평양성을 공격케 했다.
요동성이라고 하는 중요 거점을 함락하지 못한 상태에서 별동대를 만들어 깊은 곳에 있는 목표물을 향해 전진시키는 것을 ‘우회접근’이라고 한다. 우회접근은 개구리가 뛰듯이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시시한 곳은 그냥 지나치는 공격술인데, 종심 깊숙한 곳에 있는 목표물을 최단시간 내에 잡으려 할 때 펼친다.
군사작전에서는 ‘집중’이 중요하다. 그런데 첫 번째 거점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별동대를 우회접근시키는 것은 집중이 아니라 분산을 선택한 것이 된다. 별동대가 떠난 후 본대가 거점을 장악하고, 별동대 역시 목표물을 장악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본대는 거점 확보에 실패하고 별동대는 종심방어에 말려 패퇴한다면, 이 군대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을지문덕은 우중문 군이 평양성에 도달할 때까지 우회접근을 계속하도록 유인했다. 그리고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주는 시)’를 보내 우중문이 종심방어작전에 말려들었음을 암시했다. 우중문은 이 시를 받아본 다음에야 속았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부대를 돌려 퇴각했다.
그러자 살수(청천강)에 군사를 매복시켜놓았던 을지문덕은 살수 상류에 보(洑)를 설치해 강물을 가둔 다음 우중문군이 얕아진 살수를 건널 때 보를 터뜨렸다. 우중문군이 갑작스런 수공(水攻)을 당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숨어 있던 고구려의 복병들이 뛰쳐나와 대대적으로 공격해 30만이 넘는 우중문군 중에서 불과 수 천명만이 살아 돌아갔다.
미국은 후세인을 잡거나 제거하고 생화학무기로 대표되는 대량살상무기(WMD)를 압수하는 것이 전쟁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우회접근을 거듭하는 종심작전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한반도의 두 배 정도인 43만7521㎢의 면적을 가진 큰 나라이다. 쿠웨이트-이라크 국경선에서 바그다드까지의 거리는 대략 600㎞나 돼 우회접근작전이 성공할지 미지수였다.
고구려와 수나라가 싸울 때는 수나라의 병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이라크전에 투입된 동맹군은 55만의 이라크군보다 적은 30만명이었다. 이라크 병력은 대부분이 지상군이지만, 동맹군의 병력 중에는 공군과 해군 비율이 적지 않았다. 상황은 오히려 이라크가 종심방어를 하기 좋았던 것이다.
개전 직후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은 바스라였다. 바스라는 이라크의 ‘요동성’이 돼 주어야 하는데, 바스라 방어를 책임진 이라크군 51사단장 칼레드 알-하셰미 준장은 개전 이틀째인 3월21일 사단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동맹군에 투항했다. 이라크는 종심방어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을 상실했다.
바스라를 공격한 것은 미국 해병대 제1원정군과 영국군 해병대 그리고 영국군 1기갑사단이었다. 세 부대가 바스라를 공략하는 사이 주공(主攻)을 맡은 3사단은 우회접근에 들어갔다. 3사단은 미국 육군 전력사령부(FORSCOM)에 소속된 부대이다. 여기서 잠시 3사단을 중심으로 이라크전에 투입된 미군 육군의 편제를 살펴본다.
이라크전을 지휘한 것은 미국의 중부사령부(CENTCOM, 약칭 중부사)다. 중부사 사령부는 미국 플로리다주 탐파의 맥딜 공군기지 안에 있다. 이러한 중부사는 이라크전쟁을 치르기 위해 카타르 다하에 전투지휘소를 만들어 옮겨왔다. 중동지역을 담당하는 중부사가 미국에서 옮겨왔으니 중부사 예하 사령부도 옮겨올 수밖에 없다.
미국 육군에는 여섯 개 전투사령부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것이 전력사령부이다. 전력사령부는 해외에서 작전이 벌어지면 각종 부대를 선발해 파견하는 ‘육군 전력(戰力)의 저수지’ 역할을 한다.
전력사령부에는 1군·3군·5군사령부와 1군단·3군단·18공정군단이 배속돼 있다. 1군·3군·5군과 1군단은 예하에 군단이나 사단이 없기 때문에 유사시 해외로 이동해 그곳의 지상작전을 지휘하는 사령부 역할을 한다. 3군단은 1기병사단과 4사단을 거느리고 있고, 18공정군단은 3사단과 10산악사단·82공정사단·101공중강습사단을 지휘하고 있다.
에서처럼 이라크전을 지휘한 미국 중부사는 다섯 개의 구성군 사령부로 편성돼 있다. 중부사 자체가 미국에서 이동해온 것이니 중부육군사도 어디에선가 옮겨와야 한다. 중부육군사는 미국 육군 전력사령부 예하에 있던 3군이 옮겨와 맡았다. 그리고 전력사령부에서 3사단과 4사단·82공정사단·101공중강습사단을 뽑아내 중부육군사 예하 부대로 배속시켰다.
이중에서 3사단은 바그다드 함락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기에 3사단만을 지원하는 별도의 상급 지원부대를 붙여주었다. 이 지원부대로는 유럽육군사 소속으로 독일 하이델베르그에 있는 5군단이 차출되었다. 3사단은 18공정군단 소속이므로 18공정군단으로 하여금 지원케 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독일에 있는 5군단을 불러들인 것.
5군단은 2002년 10월 쿠웨이트로 이동해왔고 3사단은 2003년 1월 쿠웨이트에 도착해 호흡을 맞추었다. 이렇게 작전의 규모와 부대의 형편 등을 봐서 가장 적합한 부대를 이곳저곳에서 뽑아 쓰는 것을 ‘편조(編造)’라고 한다. 1996년 미국 육군은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단행해 여단급 이상 부대는 어느 부대와 붙여놓아도 편조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4사단과 82공정사단·101공중강습사단은 바로 중부육군사의 통제를 받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한국 육군은 편조 능력이 취약하다. 편조 능력을 갖추려면 여단급 이상 부대는 육군의 모든 병과를 지휘하는 협동작전은 물론이고 해·공군 부대와 함께하는 합동작전, 다른 나라 군대와 함께하는 연합작전 능력도 갖춰야 한다. 이라크전을 통해 한국 육군이 배워야 할 것은 미국 육군처럼 편조 능력을 갖는 것이다.
이라크전에서 상륙작전이 펼쳐졌다면 중부해병대사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의 해안선은 약 58㎞에 불과한 데다, 쿠웨이트를 통한 지상 침투가 가능해 상륙작전을 펼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제1 해병대사단과 제3해병대 항공단·제3해병대 군수지원단으로 편성된 제1해병대원정군은 중부해병대사가 아닌 중부육군사에 배속돼 지상전투에 투입되었다.
3사단은 ‘보병사단(3rd Infantry Division)’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완전한 기계화보병사단이다. 3사단의 주력 전투부대에는 아홉 개 대대가 속해 있는데, 각각 58대의 장갑차로 편성된 다섯 개의 장갑차대대와 역시 58대의 전차로 편성된 전차대대 네 개로 짜여져 있다.
[표1] 미국 중부군 편제도
[표 2] 이라크군 편제도
이러한 전투대대 외에 3사단은 사단 직속으로 항공여단과 포병여단을 갖고 있다. 항공여단은 3개 대대로 편성돼 있는데, 1대대는 AH-64 아파치 공격헬기 24대로 편성된 공격헬기대대이다. 아파치 공격헬기는 탑재하는 미사일의 성격에 따라 여러 목적으로 활용된다.
헬파이어 미사일을 달면 전차를 공격하는 데 쓰이고,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을 달면 적 항공기를 격파하며, 사이드암 미사일을 달면 적의 레이더 시설을 파괴할 수 있다. 아파치 헬기는 각종 전자장비로 무장하고 있어 한 개의 목표물에 대해 여러 대의 아파치 헬기가 중복 사격하는 법이 없다.
아파치 공격헬기는 6대가 모여 1개 중대를 이룬다. 그런데 한 개 목표물에는 한 발의 미사일을 발사해 격파하기 때문에 아파치 헬기 1개 중대는 100여 대의 전차와 장갑차로 편성된 기계화연대를 괴멸시킬 수 있다. 공격헬기중대 4개가 모여 공격헬기대대를 이루었으므로, 공격헬기대대는 기갑사단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다.
제2대대는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데 쓰이는 UH-60 블랙호크 기동헬기 44대로 편성된 기동헬기대대이다. 제3대대는 27대의 M1A1 애브럼즈 전차와 39대의 M2 브래들리 장갑차 그리고 16대의 OH-58D 정찰헬기로 구성된 기병(cavalry)대대이다(미국 육군에서는 전통적으로 기병부대란 명칭을 사용하는 곳이 많은데, 기병부대는 대개 기계화부대를 뜻한다).
항공여단은 가장 최신의 지상 작전술인 입체고속기동전을 펼칠 수 있다. 입체고속기동전은 지상(평면)에서 뿐만 아니라 공중(입체)에서 빠르게 기동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입체고속 기동전은 AH-64 아파치 공격헬기로 구성된 제1대대가 이륙해 적 전차와 장갑차를 파괴하는 사이, UH-60 블랙호크 기동헬기를 운용하는 제2대대는 보병대원을 태워 적 후방으로 날아가 낙하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와 동시에 전차와 장갑차로 편성된 제3대대가 OH-58D 정찰헬기의 인도를 받아 적진으로 돌진해, 공격헬기의 사전 공격으로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기동헬기에서 낙하한 보병대원들에게 퇴로를 차단당해 우왕좌왕하는 적군을 괴멸시키는 전투이다.
그러나 이라크전에서는 제대로 된 입체고속기동전이 펼쳐지지 못했다. 이라크 전차와 장갑차는 3사단과 조우하기 전에 중부공군이 이륙시킨 A-10 공격기와 B-1 폭격기 등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이 괴멸되었기 때문이다. 3사단이 빠르게 진격해 들어간 데는 중부공군과의 합동작전이 큰 역할을 했다.
한국 육군에서는 항공작전사령부(항작사)가 헬기부대를 통합 운영하는데, 항작사는 군단에 항공여단을 파견해준다. 그러나 헬기와 지휘통신 체계의 수준 차이 때문에 한국 육군의 입체고속기동전은 3사단의 그것에 못미친다.
‘무시무시한 것’으로 따진다면 3사단의 포병여단도 빠질 수 없다. 포병여단은 자력(自力)으로 기동하는 5개 대대로 구성돼 있다. 이중 3개 대대는 ‘팔라딘(paladin : 武俠家라는 뜻)’이라는 별명을 가진 M-109 155㎜ 자주포 18문으로 편성된 자주포대대이다. 팔라딘 자주포는 전차포보다 훨씬 더 먼 18∼22㎞까지 포탄을 쏘아붙인다.
1개 대대는 팔라딘 자주포보다 훨씬 더 먼 최고 120㎞ 떨어진 곳을 가격하는 육군전술용미사일인 ATACMS 등을 쏠 수 있는 다연발로켓(MLRS) 18문으로 구성된 MLRS대대이다. 나머지 1개 대대는 24대의 장갑차와 12대의 험비(Humvee : 지프 모양의 다목적 차량)에 대공미사일을 탑재한 방공포대대이다.
MLRS대대와 자주포대대는 원거리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날아오는 적 공군기는 방공포대대가 요격해주므로 항공여단의 지원을 받은 전투대대들은 빠르게 진격할 수 있는 것이다.
는 이라크 지상군 편제를 그린 것이다. 미 3사단이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연변에는 6개 군단(2·3·4군단, 북부군단, 남부군단, 공화국수비대)에 15개 사단(이중 기갑사단이 7개), 3개 여단이 있었다. 그러나 이라크 지상군 부대는 해·공군과 합동작전을 벌이며 진격해온 3사단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 장비와 작전에서의 현격한 차이 때문에 이라크의 종심방어는 처음부터 무너져내렸던 것이다.
이라크전 초기 ‘충격과 공포’를 주며 이라크군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개전 이틀 사이에 1000여 발이 쏟아진 토마호크 미사일이다. 이 미사일은 중부해군사에서 지휘한 순양함·구축함·호위함·잠수함에서 발사되었다. 중부해군사의 실체는 바레인의 마나마(Manama)에 사령부를 둔 5함대이다. 5함대에는 보통 20척 정도의 미 해군 함정이 배치돼 있는데 이는 이라크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에는 너무 작은 전력이다.
편조의 원조는 해군이다. 필요시 미 해군은 다른 함대에 있는 함정을 보내 순식간에 5함대 세력을 불린다. 이라크전을 앞두고 5함대에는 미국 항모 6척과 그 항모를 따르는 수상전투단, 그리고 경항모와 헬기모함을 중심으로 한 영국 해군 전투단이 배속되었다. 순식간에 대형항모 6척, 경항모 1척, 헬기모함 1척, 이지스 순양함(9000t급) 10척, 이지스 구축함(8500t급) 11척, 일반 구축함(8000t급) 8척, 호위함(4500t급) 7척, 핵잠수함 5척, 기타 지원함 4척 이상이 배속된 것.
척수로는 세 배 정도 늘어났지만 대형 함정이 배속되었기 때문에 5함대의 전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이 5함대 세력 중에서 이라크를 향해 토마호크를 쏘아붙인 것은 순양함과 구축함·호위함 그리고 핵잠수함이었다. 토마호크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지구 위치체계) 위성의 유도를 받기 때문에 최고 1600㎞를 비행한 한 다음에도 30㎝∼1m 정도의 오차만 두고 정확히 목표물을 가격한다.
1991년 걸프전 때 다국적군은 73일 동안 공습을 거듭하고 단 3일간 지상전을 치렀다. 73일 동안 계속된 공습작전 때 발사한 토마호크 미사일이 1000여 발이었는데, 이번 이라크전에서는 개전 이틀 만에 1000여 발을, 그것도 훨씬 더 정확하게 발사했다. 이러니 대부분의 이라크군은 부대 밖으로 나서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사단이 보유한 장비의 90% 이상이 파괴거나 병력이 유실되면 그 사단은 괴멸됐다고 하는데 토마호크 공격으로 상당수 이라크군 사단이 괴멸되었다.
3사단을 필두로 한 동맹군의 지상군 부대가 일사천리로 진격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라크전이 진행되는 동안 이라크 공군은 단 한 대의 공군기도 띄우지 못했는데 그 이유도 토마호크의 정밀 폭격에 있었다. ‘충격과 공포’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전쟁에서는 때로는 질보다 양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뛰어난 질을 가진 무기로 한 발 한 발 사격하는 것보다 정확도는 떨어지더라도 많은 물량으로 공격을 퍼부으면 상대는 눈에 띄게 기세가 꺾이기 때문이다. 미·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1950년대 미국은 소련이 공격을 해오면 미국이 보유한 모든 핵무기를 퍼붓는다는 ‘대량보복전략’을 구축한 적이 있었다. 대량보복전략이 현실화된 적은 없었지만, 이 전략 때문에 한국전을 비롯한 소소한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에어 데이, S-데이, G-데이
미국은 냉전시대 때 펼치지 못한 대량보복전략을 이라크를 상대로 펼쳤다. 이번 전쟁에서 ‘물량전(物量戰)’을 펼친 것은 중부해군만이 아니었다. 항공력을 운용한 중부공군과 중부해군의 항공부대(항모)도 대대적인 물량공세를 펼쳤다. 이러한 항공전은 토마호크 공격 다음의 2파(波) 성격으로 진행되었는데 토마호크 공격이 끝날 때쯤인 3월22일 새벽 2시 동맹군은 ‘에어 데이(Air Day : 항공작전의 날)’를 선포하고 대대적인 항공 폭격에 나섰다.
동맹군은 이라크전을 앞두고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세 가지 중요한 전투 계획을 세웠다. 항공전, 특수전, 지상전인데 이 전투를 벌이는 날을 각각 에어 데이, S-데이(Special Warfare Day : 특수전의 날), G-데이(Ground Warfare Day : 지상전의 날)로 명명해놓았다.
S-데이는 이라크군이 도시 게릴라전을 펼치며 지상군의 진입을 방해할 때 동맹군도 특수전부대(게릴라부대)를 집어넣어 제압하는 작전을 시작하는 날이다. 이 작전은 중부특수전사령부가 지휘하는데 이 작전을 실행할 부대는 미국 육군 특수작전사령부 예하의 1·3·5·7·10특전단(Special Forces Group)과 특수전 부대 중의 특수전 부대로 불리는 ‘델타포스’(정식 명칭은 제1특수작전부대), CIA 예하의 특수한 부대, 영국의 해외첩보기관인 MI-6 산하의 특수한 부대와 영국군 특수전 부대인 SAS, 호주 육군의 특수부대인 SASR 등등이었다.
약 2만명으로 알려진 미국과 영국 호주의 특수전 부대들은 전쟁이 발발한 3월20일 훨씬 이전에 이라크 전역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일부는 군복을 입고 일부는 여행자 복장을 하는 등 다종다양한 형태로 들어간 이들은 상당한 공작금을 써가며 이라크 반체제 인사들과 접촉해 이라크군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후세인과 그 추종자들의 동선(動線)을 추적했다.
S-데이가 선포되기 전까지 이들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는 토마호크와 항공기로 파괴해야 할 목표물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동맹군이 첩보위성과 U-2 고공정찰기·JSTAR 정찰기·AWACS 조기경보기·무인항공기 등 모든 장비를 동원해 목표물을 찾았지만, 그보다는 특수요원들이 찾아낸 인간정보(HUMINT)가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후세인의 동선을 추적하는 데는 인간정보만한 수집 수단이 없었다.
3월20일 미국이 갑작스럽게 토마호크 공격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도 특수요원들이 인간정보를 보내왔기 때문이고 4월8일 후세인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대통령궁 지역에 벙커버스터 폭탄 등을 퍼부은 것도 특수부대원들이 후세인으로 보이는 세력의 움직임을 포착해 통보해주었기 때문이었다.
S-데이가 선포되면 특수부대 요원들은 그때까지 입수한 자료를 근거로 게릴라군으로 변한 이라크군을 제압한다. 그러나 이라크군은 완전히 기가 질려 게릴라전을 펼치지 못했고 이에 따라 동맹군도 S-데이를 선포하지 못했다.
특수부대원들이 알려주는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해 항공작전 소요가 많았는데 이러한 항공작전 소요를 1차적으로 맞춰준 것은 중부공군사였다. 중부공군사는 미국의 9공군으로 구성되었다. 중부육군사가 미국 육군 전력사령부 예하의 3군이 이동해서 맡았듯이, 중부공군사를 담당한 9공군은 미국 공군의 핵심 전투력이 모여 있는 공군 전투사령부(ACC)에 속해 있다가 옮겨왔다.
15개 공군 비행단, 7개 해군 비행단
9공군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쇼(Shaw) 지역에 사령부를 둔 부대인데, 예하에 1·4·20·33전투비행단과 93·116항공통제비행단, 347구조비행단 등이 있다. 9공군은 이들 부대를 미국의 동맹국인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바레인·카타르·아랍에미리트(UAE)·오만에 배치하고 에어 데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 전력으로는 에어 데이 작전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추가 전력을 지원받았다.
9공군은 12공군 예하인 366비행단 등 8개의 비행단을 추가로 증원받았다. 이로써 9공군은 전투기와 전폭기 외에도 폭격기·수송기·공중급유기·공중조기경보기·전자전기·고공정찰기·무인항공기 등 다양한 항공기를 갖추게 되었다. 9공군은 한국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보다 많은 1000여대의 항공기로 에어 데이 작전을 감행했다. 평시 미 공군은 4500여 대 정도의 항공기를 보유하는데 그 4분의 1 정도가 몰려든 것이다. 이 9공군의 구성 과정도 전형적인 편조 체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전력으로도 충격과 공포를 주는 에어 데이 공격을 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부족분을 매워준 것이 5함대가 이끄는 중부해군의 항공력이다. 앞서 설명했듯 5함대에는 6척의 미국 항공모함과 1척씩의 영국 해군 경항모와 헬기모함이 배속되었다.
이중에서 컨스텔레이션(CV-64)·시어도어 루스벨트(CVN-71)·키티호크(CV-63)·에이브라함 링컨(CVN-72)·니미츠(CVN-68) 항공모함의 5척은 걸프해 쪽에 배치되었고, 지중해에는 해리 트루먼(CVN-75) 항모와 영국 해군의 경(輕)항모인 로열 아크함과 헬기모함인 오션함이 배치돼 있었다. 미국 항모에는 75∼85대의 함재기로 편성된 항모 항공단(Carrier Air Wing)이 탑재돼 있고, 영국 경항모와 헬기 모함에는 20대 내외의 함재기가 실려 있다.
이렇게 많은 항공모함이 몰려듦으로써 중부해군은 500대 내외의 항공기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제1해병대 원정군에 속한 제3해병대 항공단의 항공기도 합세해 대략 600여 대의 해군-해병대 항공기가 에어 데이 작전에 참가했다.
이라크전이 벌어진 직후 한국 언론은 동맹군의 항공기가 이라크 주요 도시를 ‘융단폭격’했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오보다. 융단폭격(絨緞爆擊, Carpet Bombing)은 일정한 지역에 막대한 양의 폭탄을 떨궈 탄막(彈幕)으로 그 지역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정밀 타격은 포기하고 막대한 물량 공세로 적군에 충격과 공포를 줘 감히 항전할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융단폭격을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에어 데이 이후 동맹군 항공세력은 융단폭격을 단 한번도 펼치지 않았다. 동맹군은 동시다발적으로 정확한 핀 포인트 사격을 퍼부어 이라크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었는데, 언론은 이를 융단폭격으로 잘못 이해했다.
이라크군은 바그다드 안쪽은 1·2·3·4여단으로 편성된 특수공화국수비대(SRG)로 방어하고, 바그다드 북쪽 외곽은 아드난(기계화)·함무라비(기갑)·네부차네차(보병) 사단으로 지켰다. 남부는 니다(기갑)·메디나(기갑)·바그다드(보병)사단으로 지키는 2중 방어 체계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미국 3사단이 바그다드 외곽까지 진격했을 때 이라크군은 이들 부대를 보내 지상 결전(決戰)을 준비했다. 중부사로서는 G-데이 선포를 검토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라크 육군은 중부공군의 항공기와 해군 항공, 그리고 육군 항공(헬기)의 공격을 받고 맥없이 괴멸되었다(4월3일). 3사단은 잔해만 확인했을 뿐 전투다운 전투도 치러보지 못한 것이다.
[표 3] 동맹군 항공기의 1일 출격 횟수(4월 초)
쿠웨이트-이라크 국경선에서 바그다드까지의 거리가 600㎞(왕복 1200㎞)에 이르다 보니, 작전반경이 1000여㎞ 남짓한 전폭기들은 갔다오기에도 바빴다. 때문에 공중급유기가 떠서 급유를 해줘야 했다. 이렇게 거리가 멀다보니 항공기들은 하루 한 번밖에는 출격하지 못했다. 하루 한번 출격으로 이라크군을 괴멸시키려니 중부사는 1600여 대의 항공기를 차출했던 것이다.
특수부대의 대활약
하루 1900회까지 출격했던 동맹군의 항공기 중에서 절반 정도는 사전에 타격 목표를 할당받았다. 전체 출격의 50% 정도가 목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높은 수치인데, 이렇게 많은 목표를 제공해준 것이 바로 이라크 전역에 사전 침투해 있던 특수부대들이었다.
나머지 50% 정도의 출격은 정해진 목표물 없이 비상 대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4월8일 바그다드로 침투한 특수부대원으로부터 후세인 출현 첩보를 받은 동맹군 항공기들은 지하 30m에 있는 요새를 부술 수 있어 ‘벙커 버스터(요새 파괴자)’로 불리는 GBU-28 폭탄을 이용해 맹폭격했다. 이렇게 신속한 폭격은 바그다드 인근에 사전 목표 없이 비상 대기 형식으로 떠 있던 항공기가 맡았다.
이라크전쟁 초기 동맹군은 이라크군의 모든 전자 장비를 무력화하는 ‘전자폭탄(E-Bomb)’을 쓸 수 있다고 위협했다. 번개가 심하게 치는 날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면 접지(接地)를 해놓았더라도 컴퓨터가 다운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컴퓨터와 연결된 선이 번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와 유사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전자폭탄이다. 전자폭탄은 20억와트의 강력한 전력을 분출, 반경 330m 안에 있는 모든 전자장비를 완전 파괴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초전부터 이라크군이 힘을 쓰지 못하자 언론은 “미국군이 전자폭탄을 터뜨려 이라크군의 지휘통신망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미국군은 전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았다. 공중 폭격으로 지휘 통신체제를 마비시킴으로써 전자폭탄을 사용한 것과 같은 효과를 올린 것이다.
바그다드가 함락되기 전까지 모하메드 사이드 알 사하프 이라크 공보장관은 연일 이라크 국영TV에 나와 “이라크군이 동맹군을 물리치고 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미국이 전자폭탄을 사용했다면 이라크 국영TV의 방송은 이뤄질 수가 없다. 동맹군은 의도적으로 이라크 국영방송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유는 바그다드 접수 이후 이 방송을 이용해 이라크 주민에게 미군 진입을 알리는 선무(宣撫)방송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미국군은 4월10일부터 이 방송국을 접수해 실제로 선무공작에 들어갔다.
바그다드가 개전 3주 만에 함락됨으로써 이라크군은 ‘종이 호랑이’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때문에 동맹군의 지상작전이 원활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애초 중부육군사는 쿠웨이트에서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3사단(주공) 외에 미국 육군 4사단으로 하여금 터키에서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또 하나의 공격루트(조공)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터키의회가 미국군 주둔을 거부함으로써 4사단을 이용한 공격이 좌절되었다.
이라크 북부지역은 산악이 많은데 이곳에서는 쿠르드족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족을 제압하기 위해 이라크군은 중부지역사 다음으로 막강한 북부지역사를 설치하고 그 밑에 2개 군단, 8개 사단을 배속해놓고 있었다. 4사단은 이라크 북부지역을 공격함으로써 이들을 붙잡아놓는 역할을 맡기로 했는데 터키의 거부로 이 작전이 무산된 것.
때문에 중부사는 북부지역사 부대를 잡아놓기 위해 고도의 기만전술을 구사했다. 첫 번째는 개전 초기부터 101공중강습사단의 일부가 북부지역에 낙하했다고 허풍을 떤 것. 101공중강습(空中强襲, Air Assault)사단은 주로 헬기를 타고 적진으로 날아가 밧줄을 이용해 낙하하는 부대다. 3사단 항공여단의 2대대가 입체고속기동전을 펼칠 때 보병을 기동헬기에 태우고 가 적 후방에 낙하시키는 것과 같은 작전을 펼치는 부대인 것이다.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북부까지는 직선으로 따져도 800㎞가 넘는데 헬기는 400㎞ 이상을 비행하기 힘들다. 더구나 왕복비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101공중강습사단의 투하는 불가능하다. 터키의회는 이라크전이 시작된 후 뒤늦게 미국군에 공군기지를 개방했으나 지상군(101공중강습사단은 육군)의 주둔은 허용치 않았다. 따라서 101공중강습사단의 투하는 불가능한데, 북부지역사 예하 부대는 101사단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는 3월21일 감행한 ‘양동(陽動)작전’. 이날 중부육군사는 이란-이라크 국경선을 따라 270여 대의 헬기를 침투시켰다. 그러나 이 헬기는 101공중강습 부대원을 태우지 않은 빈 헬기였다. 적을 공격할 의도가 없으면서 공격하는 양 꾸며 주공의 진격을 돕는 것을 ‘양동작전’이라고 한다. 이라크군 북부지역사는 양동작전에 속아 더더욱 꼼짝하지 못했다.
세 번째로는 진짜로 이 지역에 부대를 낙하시킨 것을 꼽을 수 있다. 82공정(空挺, Airborne)사단은 101공중강습사단과 달리 수천㎞ 비행이 가능한 공군 수송기로 날아가 낙하산으로 낙하한다. 중부육군사는 터키로부터 4사단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기에 82공정사단의 투입은 깊이 있게 준비하지 못했다. 때문에 기만과 양동 작전을 하는 사이 황급히 82공정사단을 끌어 모았다.
때마침 코소보전 이후 발칸반도에는 82공정사단 예하의 3개 대대가 주둔해 있었다. 빈 헬기로 양동작전을 펼친 직후 중부육군사는 이 부대를 끌어모아 이라크 북부지역에 투입함으로써 이라크 북부지역사의 ‘의심’을 풀어주었다. 이러한 전술이 성공함으로써 중부육군사는 4사단 진입 실패의 부담을 상쇄할 수 있었다.
이라크는 정치적인 기세(氣勢)싸움에서도 미국에 패배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를 만들어 최대 사거리 300㎞, 탄두중량 500㎏ 이상의 미사일은 수출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량살상무기(WMD)에는 핵과 생화학무기뿐만 아니라 최대 사거리 300㎞, 탄두중량 500㎏이 넘는 미사일도 포함돼 있다.
미사일 해체하던 중 공격받아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 개발 및 보유국가로 의심받으면서 지난 1년간 UN의 사찰을 받았다. 이때 미국은 ‘이라크에 한해서는 사거리 150㎞, 탄두중량 500㎏ 이상의 미사일을 대량살상무기로 규정한다’는 아주 엄격한 조건을 내걸었다. 이라크가 보유한 알 사무드 미사일은 사거리가 180㎞로 이 조건을 초과한다. 때문에 UN 사찰이 실시되는 중 이라크는 황급히 이 미사일을 폐기했다.
이런 와중에 후세인의 동선을 확인한 미국은 최후통첩을 발하고 전격적으로 이라크를 공격했다. 스커드 미사일은 알 사무드보다 훨씬 더 사거리가 길다. 따라서 이라크가 스커드를 발사했다면, 동맹군은 이라크가 대량살상 무기를 사용했다고 떠들 명분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로 폐기했기 때문인지 이라크는 스커드를 단 한 발도 쏘지 못했다.
이라크전쟁 초기 언론이 이라크가 스커드 미사일을 쏴 응전했다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개전 초기 이라크가 쏜 것은 스커드가 아니라 폐기중이던 알 사무드였다. 이라크 공보장관도 이라크 국영TV에서 “이라크는 스커드를 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이라크가 쏜 미사일을 요격하지 못했다고 보도한 것도 틀렸다.
이라크가 쏜 알 사무드 미사일 중에서 쿠웨이트의 도시와 군부대로 날아온 것은 6발인데 미군은 패트리어트로 이를 전부 요격했다. 그러나 바다와 사막으로 날아가 요격할 필요가 없는 것은 막지 않았다. 언론은 사막과 바다에 떨어진 것을 찾아내 패트리어트가 완벽하게 방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라크가 진짜로 미국과 싸울 생각이있었다면 UN 사찰을 받지 말고, 알사무드도 폐기하지 말았어야 한다. 이라크는 기세 싸움에서 이미 꺾였음에도 판단을 잘못해 전쟁을 불러들이는 우(愚)를 범했다. 이런 점에서 이라크는 용감하지도 또 영악하지도 못했다.
이라크전은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고 한 전략가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연상시킨다. 이라크전은 미국과 이라크의 정치 대립이 격화되어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전후 처리도 정치논리에 따라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라크전은 UN의 승인 없이 이뤄진 전쟁이다. 따라서 이라크 전후 처리를 둘러싸고 UN과 미국의 갈등이 예상된다. 그러나 양쪽 모두 전후 이라크를 경제적으로 부흥시켜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미국은 이라크를 선거에 의해 정권이 바뀌는 민주국가로 만들고 아울러 제2차대전 이후의 마샬플랜 같은 부흥책을 펼쳐 이라크를 경제적으로 재건시킬 것이다.
이라크는 산유국이기 때문에 미국이 경제봉쇄를 풀고 경제 부흥책을 펼치면 조기에 ‘잘사는’ 민주국가로 일어날 수 있다. 민주 이라크의 부흥은 이란·시리아 등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반미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전후 이라크의 발전 속도가 빠르면 시리아와 이란에서는 반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자는 민중혁명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에서 동맹군이 벌인 이라크전의 작전명이 ‘이라크 자유(Iraqi Freedom)’였다는 것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1년 10월의 아프간전쟁을 ‘불굴의 자유(Enduring Freedom)’로 명명한 데 이어 미국은 연속적으로 ‘자유’라는 돌림자를 넣어 작전명을 만들었다. 이는 반미 독재국가를 민주국가로 바꿔놓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지는 민주국가끼리는 전쟁이나 테러를 하지 않는다는 국제정치학의 ‘민주평화론’에서 나왔다.
한국군 파병의 효과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미국과 싸웠던 일본과 독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두 나라를 부흥시킨 후 대표적인 친미국가로 바꿔놓았다. 이와 유사한 정책을 미국은 이라크에 펼칠 수 있다. 이라크전을 계기로 미국은 플로리다주 탐파의 맥딜 공군기지에 있는 중부사를 이라크로 옮겨 이라크를 민주화하는 방어막으로 삼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정책을 펼치기 전 미국은 이라크전에 참전한 나라의 군대를 ‘국제안보지원군(ISAF : 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t Forces)’로 전환시켜 이라크의 치안을 유지하는 부대로 활용할 것이다.
국제안보지원군에 참여한 나라는 전후 이라크 부흥계획에 참여할 기회가 보장된다. 반면 독일이나 프랑스 등 반전을 주도한 나라들은 이 기회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뒤늦게 서희부대(공병대)와 제마부대(의료부대)를 파병하기로 한 한국에 돌아올 ‘파이’는 얼마나 될 것인가. 전쟁이 끝난 후 파이를 나누는 데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보병·포병·기갑 등 ‘전투부대’를 파견한 나라가 가장 큰 파이를 가져가고, 공병·통신·정보 등 ‘지원부대’를 파견한 나라가 두 번째로 큰 파이를, 그리고 수송·의료·병참·정비 등 ‘근무지원부대’를 파견한 나라가 제일 작은 파이를 가져가는 것이다.
전투부대-지원부대-근무지원부대 순서는 파병 병력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불변하는 서열이다. 병력의 다소에 의한 구실은 전투부대를 파견한 나라끼리, 혹은 지원부대나 근무지원부대를 파견한 나라끼리 서열을 나눌 때만 적용되는 원칙이다. 국방부가 서희부대의 파병을 서두르는 것이나, 일각에서 “우리도 전투부대를 파병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라크전이 너무 쉽게 끝났다’ ‘첨단 전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과 함께 이러한 과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