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과 장미의 나날’이든, ‘눈물과 콧물의 나날’이든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저 나름의 멋과 향취가 있다. 그들은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끼며 산다. 줄라이홀 주인장이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한 터키커피를 만들며 ‘진정한’ 낭만주의자가 무엇인지 풀어놓았다.
신문사 문화부장 자리에서 놓여나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친구의 전화다. 작업실 근처 여의도를 지나고 있다며 놀러 오고 싶은 눈치다.
“어, 나야 늘 잘 안 서고 있지 뭐.”
“우헷헷헷헷”
뒤집힐 듯이 웃어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휴대전화를 때린다. 그게 아니구 말요 어쩌구저쩌구, 녀석이 왁자하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조오시’란 ‘일이 되어가는 형세’를 뜻하는 왜(倭)말이지 짧게 발음되는, 남자의 중심을 말한 게 아니라는.
의도된 오해가 박자를 맞추지 못한 경우다. ‘조오시’의 뜻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는 걸 전제로 한 겹 꽈서 언제나 빌빌한 내 ‘중심의 형세’를 설명해준 것인데 농담도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도리가 없다.
“오, 조오시가 그런 뜻이었나? 그럼 조오시도 안 서고 조시도 안 선다네.”
‘조오시’같은 의사불통의 말놀이를 밥 먹듯이 재미로 즐길뿐더러 아예 직업적으로 끌고 가는 족속도 있다. 작품 속에 ‘조오시’ 갖고 잘 노는 작가로 은희경, 성석제를 들 수 있고, 일상에서의 왕 조오시는 소설가 김영현이다(인생이 권태로운 사람은 김영현과 1박2일 놀아봐야 한다). 도대체 어떤 얼굴이 표면인지 이면인지,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애매모‘흐’하고 ‘아리까리한’ 그들에게 생은 장난감이다. 서유석은 조오시를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오, 아름다운 사람아!’ 이 노랫말의 오리지널이 헤르만 헤세의 시인데 원조에서 핵심은 이 대목인 듯하다.
줄라이홀 내부의 LP 판꽂이.
철없는 조오시. 저 잘난 맛에 독립감으로 빛나는 조오시. 장난하는 조오시들을 향해 진지하고 성실한 규범의 생(生)은 눈을 부라리며 외친다.
“지금 장난하냐?”
문제적 인간, 에니어그램 4번 유형
인간을 감히 네 종류로 나누는 분류법이 있다.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나누는 사상의학, B형 남자친구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혈액형 성격 분류 따위. 그나마 조금 더 미분해서 아홉 종류씩이나 카테고리를 나누는 에니어그램도 있다. 내게는 그것들이 미아리 점집의 사주관상 운명철학과 다를 바 없이 여겨지건만 정교한 말로 치장하면 제법 그럴싸해진다. 에니어그램에서 규정하는 아홉 종류의 인간유형 가운데 타입 4를 보자.
에니어그램의 4번 유형;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감동을 중시하고 평범함을 싫어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슬픔이나 고독 등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한 자신을 연기자처럼 느끼고 살아가고 행동에서 패션에 이르기까지 세련된 느낌과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인상을 준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나는 독특한 존재다’ ‘나는 감수성이 풍부하다’라는 자기 모습에 가장 큰 만족을 느낀다.
유형 4에 대한 근사한 규정은 계속 이어진다. 신비로운 면을 갖고 있으며 심미안이 있고 아주 개성적인 창조성을 가진 사람이다. 추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유형 4는 이른바 낭만주의자를 뜻한단다. 이들은 시기심이 많다는 특징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일순 헷갈리는데, 스스로가 유형 4에 해당되는지 자가 진단해보는 체크 리스트가 있다. 재미 삼아 점검해보시라.
‘남들은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자신의 과거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항상 자연스럽고 있는 그대로 행동하고 싶지만 잘 안 된다, 상징적인 것에 마음이 끌린다,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사물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항상 예의 바르고 품위를 유지하고 싶다, 주위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인생은 연극 무대이고, 나는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좋은 매너와 고상한 취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맞다 맞아. 남한테 들키지 않고 혼자 속으로 응답하는 거라면 그저 예예 하고 싶다. 다 나 잘났다는 얘기 아닌가. 체크 리스트가 한참 더 남았다.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상실 죽음 고통 등을 생각하면 그만 깊은 사색에 잠겨버리곤 한다, 일반적이고 진부한 표현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나타낼 수 없다, 너무나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감정이 증폭되면 어디까지가 자신의 진짜 감정인지를 모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인간관계가 잘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해 남보다 고민을 더 하는 것 같다,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딘지 모르게 도도하게 구는 구석이 있다고 남한테 비난받을 때가 있다, 감정이 고양되다가도 갑자기 침울해지는 등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만 오히려 이런 것이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자의식의 과잉
원래 운명철학의 예언이란 고객이 알아서 답을 맞히고 스스로 감탄하고 하는 거다. ‘자신의 과거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거나 감정기복이 심하다’에서 다시 한 번 무릎. 그러다 결정적인 항목을 만난다. ‘인생은 연극 무대이고, 나는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언뜻 의문이 든다. 이거 누구나 다 똑같이 느끼는 거 아냐?
그런데 그게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올해 초 중학교 교장이 된 선배가 찾아온 적이 있다. 결국 시인이 되지 못했지만 전형적인 문약 문골의 사나이. 그도 에니어그램 테스트를 했단다. 각급 학교 보직을 앞둔 50명의 교원과 함께 했는데, 선배는 당연지사처럼 4번 유형으로 결과가 나왔다. 결과대로 줄을 서려는데 어라, 4번 낭만주의자 대열에 단 한 명도 줄 서는 사람이 없더란다.
“어떻게 했어요, 선배?”
“벌쭘해서 잽싸게 5번 줄에 섰지, 히히힛.”
왜 그래야 했을까. 낭만가객들은 학교 간부가 되기에 부적합하다는 뜻인가. 자기 진단 체크리스트를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보니 답이 나온다. 거기 예예 하는 인간형에 딱 알맞은 규정이 떠오른 것이다. 자의식 과잉. 바로 그거다. 지금도 ‘아름다운 밤이에요’가 트레이드마크처럼 떠오르는 어여쁜 장미희가, 헤어진 여자들과의 큼큼한 고린내를 방향처럼 풍기는 조영남이, 제 맘대로 한국과 인류를 들었다 놓았다 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도올 김용옥이, 색정의 불같은 에너지를 차라리 불쌍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마광수가 힐난과 비아냥거림에 파묻히는 이유가 바로 광장에다 자의식 과잉을 꺼내놓았기 때문이다.
요즘 줄라이홀 주인장의 시간은 커피의 세월이다.
말의 무게를 위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려와본다. 아놀드 베닛이라고 100년 전에 활동한 영국의 작가이자 문예이론가가 있다. 엄청 박식하고 내용 있는 사람이다. 그가 목메어 외친 것이 ‘열정적인 소수’의 가치다. 다수로부터 독립해 있는 존재의 가치다. 그가 말한 문학에 대한 열정적 소수를 인생으로 치환시켜 옮기자면, ‘열정적 소수는 생(문학)에서 예민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발견한다. 그들은 영원히 새로운 탐구를 하고 영원히 자신을 훈련시킨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들은 내일이면 따분해질 것을 오늘 즐기지 않는다.’
아놀드 베닛은 열정적 소수와 대비되는, 요즘 말로 규범의 생을 사는 존재를 ‘길거리 군중’이라고 표현한다. 길거리 군중 앞에서 열정적 소수자는 애처롭다. 저 혼자 느끼고 발견한 생의 의미와 가치 혹은 즐거움을 다수에게 전달하고 싶어 안달하는 충동이 온갖 치기와 소동을 낳는데 길거리 다수는 힐난과 비아냥거림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다수는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어내지도 않고 거기에 일말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열정적 소수는 모른다는 것이다.
열정적 소수자
에니어그램 제4번형 인간으로 태어난 팔자라면 열정적 소수의 자부심으로, 이른바 저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베닛의 주장이 건방졌건 어쨌건 감정기복이 심하고 평범 대열에서 이탈하느라 사는 일이 고달픈 자의식 과잉 인간들에게도 살맛은 주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름하여 저 잘난 맛!
나의 작업실 줄라이홀의 요즘 ‘조오시’는 어떠한가. 여전한 커피의 세월이다. 로스팅의 매캐한 연기를 견딜 수 없고 혹시 오디오 기기에 해라도 끼칠까봐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 난간에 묶어 20m짜리 알루미늄 연통을 설치했다. 주로 새벽 두세 시경에 커피를 볶는데 점검차 내다보면 동물의 왕국에서 본 아나콘다가 몸을 비비 틀며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문득 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쉬이익, 아나콘다 친구.
물론 이 조오시에 새로운 탐구가 없을 수 없다. 새 메뉴 두 가지를 추가하게 됐다. 첫째는 요즘 우리나라 커피동네에도 유행이 시작됐다는 더치커피를 만들게 된 것. 몇백 년 전 네덜란드가 세계를 제패했던 시기가 있다. 수많은 상선과 함대들이 대양을 누비는데 배 안에서 일일이 커피를 끓이는 게 여간한 수고가 아니었다. 커피를 꼭 뜨거운 물로 끓여야만 할까. 더치 뱃사람들이 꾀를 낸 게 이른바 ‘워터드립’, 상온의 물로 오래 우려내는 것이다. 워터드립을 위한 특별한 도구가 필요했다. 상부에 물을 담는 볼이 있고 중간 용기에 에스프레소용처럼 곱게 간 커피가 담기고 다시 아래에 우려진 커피를 받는 볼이 놓인다. 이 3층 더치 툴의 모양새가 꼭 학교 때 과학 실습실에서 보던 플라스크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더치커피의 핵심은 시간이다. 망망대해에서 남아도는 것은 시간뿐이었을 테니까. 2초에 세 방울씩 떨어뜨리라는 레시피도 있고 4~8초마다 한 방울씩 떨구라는 권유도 있다. 어쨌든 대롱대롱 한 방울씩, 그러니까 커피 한 잔 내리는데 최소 4시간, 느리게 내리면 8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다. 빠르면 부드러운 맛이 나오고 느리면 느릴수록 짙고 강해진다. 그래서 뭔 일이 벌어지느냐고? 숙성된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오래오래 숙성된 커피의 와인을. 더치커피의 별칭이 바로 ‘커피의 와인’이다. 간혹 저녁에 세팅해놓고 아침에 일어나면 바라만 보아도 ‘므흣한(네티즌 용어·흡족한)’ 자줏빛 커피의 와인이 넘실거리고 있다.
8시간 공들여 만든 커피 한 잔
모닝을 와인커피로 적신다고? 그런데 아니올시다이다. 빈속에 마셔보면 그 강하고 독한 향미에 속이 뒤집힌다. 더치 뱃사람들은 그걸 그냥 마셨다지만 줄라이홀은 하멜이 탔던 스페르베스호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스무디 설탕시럽을 분사하거나 값비싼 지상 최고의 설탕 알라뻬르쉐 앵무새 설탕을 한 알 넣고 얼음을 채워 아이스커피를 만든다. 기분에 따라 위스키를 넣기도 하고 레몬을 짜 넣기도 한다. 방문객들의 관심은 대개 특이하게 생긴 용기 때문에 일어난다. 내가 구입한 더치 툴은 일본 하리오 사가 만든 ‘포타’라는 슬림 타입이어서 오리지널처럼 괴상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눈길을 끌게 생겼다. 그 신기해하는 표정 앞에서 400여 년 전 네덜란드가 일본의 나가사키항을 개항시켰던 역사 강의를 일장 덧붙이며 한 잔 내놓으면 하나같이 감탄을 한다.
“역쉬 기이픈 맛이군요.”
이런 반응을 누릴 수 없었다면 커피 한 잔 마시자고 8시간씩 공들이는 미친 짓은 차마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마음이 쫓긴다.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고 쩔쩔맨다. 미루어놓은 할 일이 무시 때때로 머리칼을 잡아 뜯는 듯한 강박에 시달린다. 그런데 장장 8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커피라니! 툴의 가운데 부분에 적정량의 커피가루를 담고 먼저 하는 일이 약간의 물을 흘려 넣고 고약 만들듯 스푼으로 잘 섞어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 탬퍼로 적당히 눌러주고 그 위에 전용 종이필터를 한 장 얹는다. 계량컵으로 물을 담고 세팅이 끝나면 최종적으로 조절기를 섬세하게 돌려 물방울 속도를 결정한다. 이제부터 망망대해, 항해의 시작이다.
요즘은 뭐든지 수분 수초 내에 결과가 나온다. 컴퓨터 파일을 복사하거나 다운로드 하는 시간, 휴대전화 문자로 소식을 주고받는 시간, 인터넷 쇼핑몰에서 카드결제로 물건을 사는 시간, 점심식사로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돌리는 시간. 그런데 ‘이노무’ 네덜란드는 업무를 개시했다 하면 네 시간, 여섯 시간 또는 여덟 시간이다. 커피를 마신다기보다 바다의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느낌이다. 나는 용맹스러운 더치맨, 여기 이곳은 줄라이해(海).
네덜란드 다음으로 터키를 찾게 됐다. 꼭 가볼 예정이지만 진짜 터키 땅을 아직 밟아보지는 못했다. 여행가 한비야씨와 1년 반 동안 SBS에서 ‘세계풍물기행’이라는 라디오 프로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여러 번 얘기 들었다. 본토 발음으로 튀르크 카베시, 터키커피라는 특이한 커피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 여행을 하다보면 허름한 골목길 어디에나 중장년 아저씨들이 웃통을 벗은 차림으로 유리컵에 녹차를 가득 담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참 정겹다). 한씨가 그 비슷한 정경을 터키에서도 보았다는 것이다. 쭈글쭈글한 동네 할아버지들이 모여 앉아 무언가를 마시는데 자세히 보니 진득진득한 젤같이 끈적한 국물을 입에 각설탕을 물고서 마시더라고. 버터를 함께 녹여 먹기도 한다고 했다. 그게 바로 튀르크 카베시였다.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는 유명한 헌사는 바로 이 터키커피를 일컫는 말이었다.
터키커피에 빠지다
새로운 시도를 잘 안 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나는 식당도 가는 곳만 간다), 이건 내 주요 관심사 커피의 새 영토다. 한편 더치커피 내리는 동안이 워낙 유장천리 세월아 네월아인 탓도 있다. 그래 터키 쪽으로도 영토를 넓혔다!
더치커피가 더치 툴이라는 용기에서 출발하듯이 터키커피 역시 전용 도구로 기분을 내야 한다. 라면 냄비로 일차 시도를 해봤지만 궁상스러운 기분만 들고 제대로 되지도 않았다. 이브릭(Ibriq)이나 체즈베(Cezve)라고 부르는 도구를 구해야 했다. 이브릭은 주전자처럼 생긴 뚜껑 달린 전용 포트이고 체즈베는 우리 어린 시절에 탐하던 달고나(설탕과 소다로 만든 과자) 달이는 주걱과 비슷하게 생겼다. 대한민국 만세! 이제 우리나라에서 마음만 먹으면 못 구할 물건이 없다. 아울러 커피에 관한 한 모든 길은 일제 칼리타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구하겠다고 마음먹고 한 시간 만에 입수했다. 숭례문 상가, 속칭 도깨비시장에 전화를 걸자 퀵서비스로 득달같이 물건을 보내왔다. 분명히 칼리타 사의 이브릭을 보내달라고 말하고 값을 치렀는데 박스를 열어보니 체즈베였다. 칼리타의 장난이었다. 물건은 체즈베인데 상품 이름을 일어로 ‘이부리꾸’라고 써놓은 것이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구리주걱이다. 그래도 터키가 눈앞이다. 민요 우스크다라가 흥얼거려지는 터키의 정통 커피를 만드는 거다.
‘우스크다라 머나먼 길 찾아왔더니/ 세상에서 이상하다 전하는 말대로/ 거리를 걸어갈 때 깜짝 놀랐네/ 이렇다면 총각들이 불쌍하겠지.’
자신의 일상을 매혹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면, 그는 ‘장미처럼’ 매혹적인 사람이다.
‘두들기면 목탁 소리 난다 율브린너 대갈통/ 숲속에서 연애하다 들킨 신성일과 엄앵란/ 장총의 명사수는 쫀웨인이 아니요/ 달라스에 악명 높은 오스트 왈츠다/ 유방 크다 자랑마라 소피아 로렌서/ 유방 작은 아무개 마누라 브라자 벗고 설친다.’
오스트 왈츠(오스왈드)나 소피아 로렌서(소피아 로렌)가 누군지도 모르고 불렀다. 이 정도면 명국환의 컨추리송 ‘아리조나 카우보이’에서 출발한 이 땅의 엑조티시즘도 알아줄만하지 않은가. 심지어 ‘쿠바의 땅콩’이라는 노래도 있었다.
어쨌거나 우스크다라를 흥얼거리며, 토이기 커피가 보글보글 익어가고 내 생의 오후도 함께 보글보글 익어가고… 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무지 잘 되지 않았다. 한 달가량 틈틈이 실험실습 용맹정진 견마지로 진충갈력 구마지심 분골쇄신 뭐 이런 것 중에 하나씩 골라가며 용을 썼지만, 아무리 매뉴얼대로 해도 맛의 핵심이라는 거품이 형성되질 않는다. 에스프레소 커피에 절반 이상의 크레마(거품)가 떠 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듯이 터키커피 역시 마찬가지란다.
국내자료 해외자료 두루 뒤져봐도 만드는 방법은 꽤 간단한 것으로 나와 있다. 1인분일 경우 체즈베 안에 5~8g의 밀가루처럼 곱게 간 커피를 넣고 80ml의 찬물을 붓는다. 취향에 따라 설탕이나 향료 또는 생강을 첨가한다. 약한 불로 시작해 중불로 끓이는데(어떤 커피든 맛을 내는 데는 끓이는 온도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중요하다), 거품이 넘쳐날 때마다 이브릭을 불에서 치웠다가 다시 끓이기를 세 번 반복한다. 잠시 기다렸다 조심해서 따르면 잔 위에 비교적 맑은 물이 뜨고 그걸 마시는 것이다. 물론 커피가루가 따라들어 오지만 개의치 않고 마신다. 가루는 고소한 맛이 도는 게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하긴 커피열매가 이용되던 초기에는 빵에 커피가루를 발라 먹었다고 한다.
‘술과 장미의 나날’
그런데 어떤 자료사진을 보아도 터키커피 전용의 작은 잔에는 짙은 적황색 거품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혼사 때 예비신부가 시부모 될 어른들 앞에서 이 커피를 만들어 올리고 가정교육을 잘 받았는지 평가받는다고 한다. 아예 전통예법에 거품이 없는 커피를 손님에게 내놓을 수 없다고 적혀 있기까지 하다. 그만큼 거품 내기가 중요한 모양인데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거품이 잔에 따르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니 답답한 노릇이다. 어느 날은 열불이 나서 연속 열몇 잔을 방법을 달리해가며 끓여 한 모금씩 마시다가 속이 뒤집힌 적도 있다. 다 마신 잔을 뒤집어 흘러내린 가루모양으로 커피점을 친다는데 그 경지야 감히 넘볼 수 없는 일이겠지.
퇴계로 방면 남대문시장 입구에 케밥집이 있다. 건실하게 생긴 터키 사내 둘이 운영하는 손바닥만한 점포다. 한 줄에 3000원. 한 끼에 한 줄 이상은 못 먹을 정도로 많은 양이다. 정통식인 양고기 대신 닭고기를 사용한 점이 아쉽지만 매콤한 것이 김밥이나 햄버거보다 훨씬 낫다. 근처에 갈 때마다 사 먹으며 얼굴을 익히고 있는데 아직 한 수 가르침 받을 용기는 못 내고 있다. 언젠가 이 터키쉬들에게 배운다면 진짜 튀르크 카베시가 나올 걸로 기대 만방이다. 아, 커피보다 중요한 용건이 따로 있다. 가끔 모습을 보이는 주방장의 어린 아들이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 나오는 신발 잃어버린 알리와 정말 똑같이 생겼다. 아빠 손을 꼭 붙잡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고는 한다. 언젠가 그 예쁜 녀석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골라 갖다 안길 생각이다.
책과 음반으로 가득한 줄라이홀 내부.
인간 수컷을 배제한 대신 그녀의 집에는 치매 걸린 어머니를 포함해 모두 7명의 포유류가 산다. 유기견 출신의 남자개 겐과 도도하고 건방진 고양이 무리, 도리, 소냐, 타냐 등과 함께 사는 이야기. 요네하라 마리의 따사로운 동물가족 이야기를 읽노라면 당장 온 집안에 개, 고양이, 닭, 햄스터, 열대어, 금붕어, 잉꼬, 문조, 기니피그, 청거북, 카멜레온, 모르모트, 박쥐, 사슴벌레들을 입주시키고 싶다(사실은 열거한 동물들 전부가 내가 길러본 것들이다).
아, 아직 책을 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도 가능성 있는 인물이 있다. 대전 충남대에 강연을 갔을 때 나의 숨겨놓은 ‘플라토닉 러버’ 김혜경 교수가 안내해준 카페 주인이 그랬다. 간판에 IDEE라고 써 있으니 ‘이데’라고 읽어야 하나. 들어가서 나오는 두 시간 동안 오로지 밥 딜런의 노래만 나왔는데 선곡의 흐름에서 대단한 안목이 느껴졌다. 그 주인장이 바로 문학과지성사에서 ‘137개의 미로카드’를 펴낸 소설가 김운하였다. 카페 한 구석에서 주인장 작가는 컴퓨터를 토닥이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곳의 일상이 책에 멋지게 그려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우리나라는 고단한 일이 많으니 술과 장미 대신 ‘눈물과 콧물의 나날’ 쯤이 될 건가.
스가와라의 재즈, 요네하라의 포유류들, 김운하의 밥 딜런을 떠올리다 보니 글을 시작할 때의 끈적거림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다. 상쾌하다. 자의식 과잉과 낭만주의자라는,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을 수밖에 없는 성향을 ‘조오시’에 얼버무렸다. 생을 장난스럽게 대할 수 있는 태도가 갑자기 만든 ‘조오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장난꾸러기들은 죄다 새가슴들이고 불행감에 쩔쩔매는 영혼을 감추고 산다. 그래서 아니, 그러니까 로맨틱이다. 반면에 나는 호탕한 낭만주의자에 대해 다분히 의혹을 품고 있다. “우리 어르신은 정말 낭만적이셔요” “회장님은 참말로 낭만적이셔서 말이죠”라는 말에 뒤따르는 행동은 어처구니없는 무례이거나 지폐 휘날리기, 에로티시즘에 한참 못 미치는 질탕한 색정이기 일쑤다. 호탕한 주색잡기가 어떻게 낭만과 조우할 수 있을까.
낭만은 섬세함에서 나온다
만일 낭만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섬세함에서 온다. 그것은 괴로움에 짓눌려 끙끙거리며 자라나고 좁다란 밀실에서 아른아른 피어난다. 낭만이라는 것이 만일 있다면. 낭만은 바라보는 자의 몫이지 낭만가객 자신의 몫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낭만을 가장 혐오하는 것이 타고난 낭만주의자들이다. 이런 시를 찬찬히 읽어 보시라.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황인숙, ‘강’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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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장미의 나날’이 흐르는 스가와라의 카페에서 숨겨진 우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호탕한 낭만이다. 잡종 유기견 겐에 대한 요네하라 마리의 지극한 사랑과 고양이들의 질투 속에서 고독을 읽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호탕일 뿐이다. 김운하의 나오지 않은 책에는 무엇이 담길까. 표정 속에서 절망감이 읽힌다면 오버센스일까. 낭만인생은 의도와 의욕으로 도모되지 않는다. 저 잘난 맛에 고립을 자초하는 태생적 질환과도 같다. 굿을 해도 바뀌지 않고 에니어그램 4번 대신 5번 줄에 찾아가 서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니 별수 없이 저 잘난 맛에 취하는 수밖에.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을 감수하는 수밖에. 이 세상 도처의 작업실 속에서 홀로 더치맨이 되고 터키쉬가 되어 지독한 커피를 홀짝거리는 인간들아. 우리 절대 눈도 마주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