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의 전기요금 통제, 선의는 좋지만 부작용만 초래”
- “발전 연료 값 올랐는데 전기요금 묶는 것은 정책적 포퓰리즘”
- 전기요금 올려 전기 사용량 줄여야 저탄소 녹색성장 가능
- 82년이래 소비자물가 207% 상승, 전기요금은 고작 5.5% 인상
- 어정쩡한 한전 선진화 방안, 전력산업 구조 개편 의지 없어
9월8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이 출석한 가운데 열린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나온 지적이다. 정부의 추가경정 예산안을 심의하던 중이었다. 내용으로만 본다면 야당 의원이 국무위원을 상대로 ‘호통’을 치고 있다고 생각할 법하다. 그러나 이 발언의 주인공은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이다.
유 의원은 한전과 가스공사의 상반기 요금 동결에 따른 손실분의 50%를 보조금으로 지원하겠다는 정부 정책을 물고 늘어졌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에 대해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옳지 않지만 올해처럼 유가가 배 이상 뛴 상황에선 단기적으로 불가피한 정책”이라고 빠져 나갔다.
유 의원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유 의원은 “그게 옳은 정책이면 (두 회사의 손실분) 100%를 다 주지 왜 50%만 보조해주느냐”면서 “보조금을 50%만 준다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받아쳤다. 강 장관은 이에 대해 “50%는 두 회사의 경영 효율화를 통해 흡수하고 나머지 50%만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타협한 결과”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유 의원은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잘못된 정책이 포함된 추경안을 통과시키는것은 옳지 않다면서 9월12일 예결특위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날 예결특위는 의결 정족수 충족 논란이 일었고, 이날 추경안을 통과시키려던 한나라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추경안은 결국 9월18일 두 회사에 대한 보조금이 삭감된 채 통과됐다.
정부는 당초 상반기 전기요금을 동결하면서 한전에 연료비 상승분 1조6699억원의 절반인 8350억원을 재정으로 지원한다는 방침이었다. 가스공사에도 상반기 손실분 8400억원의 50%를 지원할 계획이었다. 도시가스 도매요금의 90%를 차지하는 천연가스(LNG) 도입 비용이 상반기에만 24% 상승했지만 요금 인상을 틀어막으면서 가스공사 손실이 늘었기 때문.
그러나 추경안이 삭감되면서 두 회사에 대한 보조금 지급 비율은 손실의 40%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두 회사에 대한 손실 보조금은 각각 6680억원과 3380억원으로 확정됐다. 나머지 60%는 두 회사가 자구노력을 통해 해소할 수밖에 없게 됐다. ‘공룡’ 공기업을 세금으로 지원하는 데 대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과 야당의 반대를 의식한 한나라당이 한발 물러선 결과였다.
두 회사에 대한 보조금 지원은 정부가 6월8일 고유가 극복을 위한 민생대책회의에서 약속한 데 따른 것. 그러나 두 회사에 대한 보조금은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스공사 관계자는 “외환위기 당시 3300억원의 당기순손실이 났을 때도 보조금 지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정부 보조금에 대한 법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9월8일 예결특위에서 “보조금의 예산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나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법상 가능하다고 봤지만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있어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법 시행령을 개정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런 해명은 오히려 정부의 ‘과오’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됐다. 정부가 4조9000억원 규모의 추경안을 의결한 것은 6월 중순 국무회의에서였다. 반면 에너지 및 자원사업 특별회계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것은 8월6일이었다. 두 회사에 대한 정부 보조금의 법적 근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뒤늦게 법석을 떨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으론 두 회사의 자구 노력과 경영 혁신이 선행돼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용섭 민주당 의원은 9월8일 예결특위에서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한전이 퇴직금, 수당, 이익금 등 모두 2488억원이나 부당·과다하게 지급했고, 다른 조사에서는 한전이 접대비를 가장 많이 사용한 공기업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이날 예결특위에선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일부 의원이 “한전의 재무제표상 이익잉여금이 25조9983억원이나 되는데 왜 보조금을 지급해야 하느냐”고 따진 것. 그러나 이는 기업 회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발언이었다. 한전 관계자는 “이익잉여금으로 매년 발전소 및 송·배전망을 건설하는 데 6조~7조원씩 썼기 때문에 현금이 그만큼 남아 있는 게 아니다”고 설명했다.
보조금을 지원받는 한전이나 가스공사 쪽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발전 연료비가 오른 만큼 전기요금을 적절히 올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를 보조금 지급이란 1회성 땜질 처방으로 넘어가려 하기 때문이다. 한전 관계자는 “유연탄 가격이 지난해 평균 t당 68달러에서 올해 130~150달러 수준으로 올랐다”면서 “내년에 도입 가격에 반영되면 10% 정도의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생기는데, 내년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되물었다.
가스공사 관계자도 비슷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세계 에너지 가격은 기본적으로 변동이 심한데 그럼 그때마다 보조금을 지급해줄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에너지 가격은 도입 단가에 연동해서 책정하면 거의 모든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설득력 약한 보조금 명분
정부가 보조금 지급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서민생활 안정과 우리 경제에 대한 부담 완화 등이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9월8일 국회에서 “전기요금은 서민생활과 관련이 있는 데다 산업용 전기요금이 인상되면 원가 부담 요인으로 작용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시 임금 상승과 연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전기요금 동결 대신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9월9일 TV 대담 ‘대통령과의 대화’에 출연해 “전기요금을 서민 부담을 안 주는 범위 내에서 조정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기·가스요금은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면 서민보다는 전기를 많이 쓰거나 LNG를 많이 쓰는, 상대적으로 잘사는 사람이 혜택을 보게 된다. 결국은 국민 세금을 거둬 상대적으로 잘사는 사람을 지원하는 꼴이 돼버린다.”
수도권 지역의 한 도시가스 회사 사장은 “제주도민들은 LPG보다 싼 LNG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데 이들이 낸 세금도 가스공사 보조금 지급에 일부 사용될 수 있다”고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제주도는 LNG 배관망을 해저로 연결하는 데 들어가는 투자비가 너무 많아 현재 LPG와 기름을 연료로 쓰고 있다.
이 점은 국회에서도 논란이 됐다. 9월8일 예결특위에서 류근찬 자유선진당 의원은 “전기·가스를 많이 쓰는 국민에게 보조금을 많이 지원하는 결과가 된다”고 비판한 것. 이에 대해 강만수 장관은 “그런 면은 인정한다”면서도 “수학적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느냐”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경제학자들은 “현 정부가 입만 열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는데 시장경제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설사 전기요금이 오른다고 해도 서민가계 부담은 거의 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기요금이 오르면 전기 사용량을 줄여 가격 신호에 반응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작용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나마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연간 가계수지 동향에 따르면 도시근로자 가구의 전기요금은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의 월 평균 소비지출 금액은 234만8801원. 이 가운데 전기요금은 3만9221원으로, 고작 1.7%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통신비 13만8458원(5.9%), 공공교통비 6만5140원(2.8%)과 비교하면 거의 무시할 만한 수준이다.
일반국민이 산업용 전기요금 보전
우리 경제에 대한 부담 완화라는 명분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주장이다. 정부는 그동안 전기요금을 되도록 억제함으로써 수출산업의 원가 부담을 줄여 우리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정부가 보조금 지급을 통해 전기요금 인상 요인을 일부 흡수하겠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에 대해 지식경제부 산하 전기위원회 한 민간위원은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그런 보조를 하면 오히려 에너지 낭비구조만 고착시킬 뿐 아니라 현 정부의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과도 배치된다”고 비판했다. “‘녹색성장’의 본질은 비싼 청정 에너지를 쓰되 절약하자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기조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산업용 전기요금은 주택용 및 일반용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상태였다. 한전에 따르면 2005년 기준 일반용 전력의 원가 보상률은 127% 수준. 반면 산업용은 102%, 농사용은 46%에 불과하다. 결국 그동안 일반 국민이 산업용 ·농사용 전기요금의 일부를 보전해온 셈이다.
현재 전기요금은 주택용(저압, 고압)과 일반용(갑, 을), 산업용(갑, 을, 병), 교육용, 농사용, 가로등용 등 6개 용도별로 전압에 따라 10개로 구분돼 있다. 2002년 11월 수립한 ‘중장기 전기요금체계 개편방안’에 따라 3차례 체계를 개편, 종별 간 요금 격차가 완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아직도 종별 원가 보상률 격차가 큰 편이다.
전력산업 구조 개편에 참여했던 한 전문가는 “우리나라 산업이 에너지 다소비형 구조로 고착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업 입장에선 굳이 효율이 좋은 생산설비로 교체할 이유가 없다는 것. 전력을 더 많이 쓰더라도 전기요금이 싸기 때문에 생산설비를 교체하지 않는 게 기업 입장에선 더 유리하다.
산업용 전기요금을 낮게 유지해온 것은 지금과 같은 글로벌 경제체제하에서는 ‘국부(國富) 유출’ 논란도 불러올 수 있다. 기업들이 적게 낸 전기요금을 우리 국민이 일부 부담하지만, 정작 그 효과는 해당 제품을 수입하는 나라의 국민이 누리기 때문이다. 국부를 수출국에 제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한전의 계산에 따르면 전기요금이 1% 인상되면 소비자 물가는 0.019% 포인트, 생산자 물가는 0.0275% 포인트 올라간다. 또 제조업의 제조원가 중 전력비 비중은 2006년 기준 1.26%다. 그나마도 1990년대 이후 감소 추세다. 웬만큼 전기요금이 인상된다고 해도 제조업체들이 충분히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있을 만한 비중이다.
김진우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가스연구실장은 “현재 전기요금이 너무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당연히 올려야 하는데, 정부의 태도가 문제”라고 말했다. 전 국민이 전기를 소비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정부가 단기적으로 전기요금이 오르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 것. 정부가 정책적 포퓰리즘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25년간 고작 5.5% 인상
“1980년대 이후 가격이 가장 안 오른 것은 상품 중에서는 달걀이고, 서비스 요금 중에서는 전기요금이다.”
한전 관계자들이 전기요금을 언급할 때 꺼내는 단골 메뉴다. 한전 관계자는 “1982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기요금은 5.5% 인상된 반면 소비자 물가는 207.0% 상승했다”면서 “소비자 물가를 감안하면 전기요금은 계속 하락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실은 전기요금의 국제 수준 비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는 1㎾h당 전기요금이 77.85원이었다. 반면 2007년 12월31일 기준 환율을 적용하면 일본의 2006년 전기요금은 132.00원 수준이다. 우리나라 전기요금을 100이라고 하면 일본은 170에 해당한다. 미국은 83.03원(107), 프랑스는 115.47원(148)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민영화 괴담’도 터무니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천대 경제학과 손양훈 교수는 “발전회사가 민영화되면 이번처럼 정부가 세금으로 보조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되고, 그 부분만큼 전기요금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면서 “이를 두고 ‘전력산업 민영화 = 전기요금 폭등’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국민 세금으로 전기요금을 계속 보조하라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낮은 전기요금으로 인한 에너지 과소비도 문제지만 소비 왜곡도 심각한 상황이다. 전종택 전력거래소정산팀장은 “같은 에너지라도 유류나 가스 등은 도입 원가에 연동하는데 전기요금은 묶어놓다 보니 난방기구 연료가 유류나 가스에서 전기로 옮아가고 있다”면서 “동절기 피크타임이 낮에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기를 난방용으로 쓸 경우 열효율이 70% 이상 사라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큰 문제는 에너지 과소비가 ‘불필요한’ 발전설비 투자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전력산업 구조 개편에 참여했던 한 전문가는 “그렇지 않아도 한전은 전력설비 규모가 커질수록 조직이 커지고 임직원의 승진 기회가 증가하기 때문에 투자를 확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에너지 과소비는 이를 위한 훌륭한 명분을 제공한다”고 꼬집었다.
물론 지경부 관계자들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윤호 지경부 장관은 10월5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전기요금을 낮게 유지했기 때문에 과소비하는 문제도 있다”면서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해서도 전기요금은 원가를 잘 반영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보조금을 지급한 것은 물가를 국정의 최고 정책과제로 생각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가 작용한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 대통령은 9월9일 TV 대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전기·가스요금 인상 여부에 대해 “인상은 불가피하지만, 서민 부담을 안 주는 범위 내에서 조정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요금은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로 관리하는 공공요금이다. 한전이 이를 인상하려면 이사회에서 의결한 후 지경부 장관에게 인가 신청을 해야 한다. 지경부 장관은 전기요금 및 소비자보호 전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기획재정부 장관과 협의하고 전기위원회 심의를 거친 후에 인가한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청와대 및 당정 협의를 거쳐야 하고 실제로는 청와대의 의중이 더 중요하다.
캘리포니아 전력대란의 교훈
전문가들은 전기요금 인상이 억제되면서 전력산업 구조개편 취지를 무색케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동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는데 그마저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는 것. 한때 한전에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나 발전 자회사를 다시 통합하자는 논의가 나온 것도 이들의 염려를 키우고 있다.
현재 한전은 연료비 상승에 따른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차원에서 한수원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한전의 적자나 다른 발전 자회사의 적자를 한수원에 일부 전가하고 있는 것. 이런 상황에서도 한수원은 올 상반기 무려 5191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한수원의 발전 단가가 발전 자회사 중 가장 낮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에 대해 전력산업 구조 개편에 참가한 한 전문가는 “2001년 4월 한전의 발전 부문을 6개 자회사로 분할한 것은 발전부문 간 경쟁체제를 도입하기 위한 차원이었다”면서 “한수원에 다른 발전 자회사의 적자를 전가하는 것은 이런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모 회사의 이해관계 때문에 한수원에 적자를 전가하고 있어 발전 효율성 경쟁이 의미를 잃게 됐다는 것.
전문가들은 현재 한전 상황이 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전력대란 당시의 전력 판매회사와 비슷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진우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가스연구실장은 “캘리포니아 주는 1998년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하면서 도매가격은 자유화한 반면 소비자 요금을 동결한 결과 시장 왜곡이 일어나 전력부족 사태를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들어서다. 그동안 환경 규제로 발전소를 제때 짓지 못해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 연료비까지 상승하면서 도매가격이 폭등했기 때문. 판매회사는 비싼 값에 전력을 구입했지만 소비자 요금은 올릴 수 없어 파산 지경에 처하게 됐다. 이에 따라 발전회사들이 판매회사에 전력 공급을 기피하면서 전력 대란으로 번진 것.
한전도 올 상반기 구입 전력비는 약 2조1000억원 늘어났다. 연료비 상승으로 인해 전력원가가 지난해 상반기 1㎾h당 77.82원에서 83.92원으로 7.8%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 당시의 캘리포니아 주 판매회사처럼 전기요금을 인상할 수 없어 올해 처음으로 대규모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캘리포니아 주에서와 같은 전력대란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 한전이 발전회사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어 발전회사들이 한전에 전력 공급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한전의 재무구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알맹이 없는 한전 선진화 방안
현재 전력산업은 김대중 정부 시절 추진된 전력산업 구조개편에 따라 발전경쟁이 도입된 상태. 당초 배전과 판매 부문도 여러 회사로 분할해 민영화를 추진하기로 했으나 노무현 정부 들어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노사정위원회 공동연구단 연구 결과를 받아들여 배전 분할을 중단하는 대신 2006년 9월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는 독립사업부제를 도입하는 데 그쳤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발빠르게 움직인 쪽은 한전이었다. 한전은 새 정부 들어 전력산업 구조 개편 논의가 다시 일 것으로 판단해 올 상반기에 이미 3가지 분야에 대한 연구 용역 결과를 발표했다. ▲ 발전산업 분리 이후 효율성 측정 ▲ 민영화 이후 전력 가격 트렌드 ▲ 해외 전력산업의 변화 등이 그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선 ▲ 발전사업을 분리한 2001년부터 효율성 개선 속도가 둔화되고 있고 ▲ 외국에서 보듯 민영화된 발전회사가 마켓 파워를 행사하면 발전 가격을 끌어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 미국이나 영국의 구조개편이 성공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박권식 한전 구조조정처부장은 “김대중 정부 당시 전력산업 구조 개편은 한마디로 1달러라도 아쉬운 외환위기 상황에서 외자를 쉽게 유치할 수 있도록 발전 부문을 쪼개 팔기 위해서 이뤄진 것이었다”면서 “당시 구조개편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이를 정당화해주기 위한 상황 논리였다”고 말했다. 그나마도 이들은 이론만 알았지 현실은 몰랐다는 것.
그러나 한전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과거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발상”이라는 비판이 있다. 전력산업 구조 개편에 참여했던 한 전문가는 “한전이 그런 연구 용역을 의뢰했는데, 연구자들이 발주자의 이해를 떠나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용역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했다. 그런 연구 용역은 좀 더 객관적인 기관에서 발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혼자 달리는 말과 경쟁하는 말 중 누가 더 빨리 달리겠는가. 혼자 달리는 말은 자기가 1등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거꾸로 보면 꼴찌라고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발전 분리 이후 효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주장도 구조개편 설계를 잘못한 탓이 아니다. 운영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설계 당시 발전경쟁 단계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문제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제한적인 발전경쟁 시장에서 열심히 한 회사나 적당히 한 회사나 똑같은 대우를 받는 데다 열심히 해도 100% 지분을 갖고 있는 한전이 그 과실을 다 가져가는데 누가 효율성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겠는가.”
정부는 10월10일 발표한 3차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서 한전 및 화력발전 자회사는 경영을 효율화하기로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한전의 내부 경쟁을 강화하기 위해 배전·판매의 9사업부 7지사를 사내 회사 형태의 10~14개 독립사업부로 개편할 계획이다. 또 발전사는 지원 조직 축소 및 인력 관리 효율화를 통한 경영 효율화를 추진하고 소비자의 소비 패턴과 선호를 반영할 수 있는 요금체계를 도입해 소비자 만족도를 제고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발전산업 민영화나 배전 분할 등 노무현 정부 들어 중단된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재추진하겠다는 언급은 없다”고 실망감을 나타냈다. 여기에 공기업 선진화 계획 발표 하루 전인 10월9일 정부는 하반기 전기·가스요금을 인상하려던 계획도 연기했다. 한 전문가는 “‘비즈니스 프레들리’ 정부라고는 믿기 어려운 반(反)시장적인 행태가 전력산업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 정부는 과연 ‘시장은 반드시 복수를 한다’는 진리를 알고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