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서 재활용품 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 중고 물품을 돈 주고 구입하는 대신 자신이 가진 물건과 바꾸는 물물교환이 유행하는 것.
- 이 트렌드의 저변에는 불황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21세기 화두가 된 자원 절약과 지구환경오염 방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 온·오프라인에서 확산 중인 물물교환 열풍을 살펴봤다.
서울 노원구 중계1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주최한 물물교환장터 현장.
“집에서 잠자고 있는 레이저 프린터나 업소용 전기밥솥, 버너가 있으신 분 물물교환 가능할까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저희 집에서 농사지은 유기농 고추로 만든 고춧가루입니다. 8년째 농약 없이 고추농사를 짓고 있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직접 만든 캠핑트레일러입니다. 시골 임야나 농지와 교환을 원합니다. 너무 가격차이가 큰 물건은 곤란합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어 ‘물물교환’을 치면 보이는 글들이다. 온라인 세상에는 물물교환 중개 사이트나 카페도 수백 개가 넘는다. ‘네이버’ 검색창에 ‘물물교환’을 치자 관련 사이트 146개가 검색됐다. 관련 카페는 368개였고, 카페 글은 3만5367건에 달했다. ‘다음’에선 403개의 사이트와 864개의 카페가 검색됐다. 카페 글은 8만7000건이었다. 1대 1 물물교환과 중고물품 매매 사이트가 혼재돼 있어 물물교환 사이트만을 가려내는 건 어렵지만, 최근 그 수가 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과거 중고용품 판매 또는 매매 중개 사이트 일색이던 것이 몇 년 전부터 중고용품 판매와 맞교환 방식이 혼합된 사이트, 혹은 중고용품 맞교환 전문 사이트 등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에 사는 직장여성 김민하 씨는 “1년에 몇 번씩 집안 정리, 옷장 정리를 하고 나면 안 쓰는 물건이 꼭 몇 개씩 나온다. 버리자니 아깝고 오프라인 중고 판매 장터에 내놓자니 번거로워 남에게 주거나 좋은 일에 기부하자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뒤지다 물물교환 커뮤니티를 발견하게 됐다”고 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할 때 필요 없는 물건을 내놓고 바로 교환할 수 있는 편리성과 즉시성은 김 씨 같은 젊은이를 온라인 물물교환 장터로 끌어들이는 요인이다.
추억을 나누는 장터
중고용품 물물교환 마니아가 된 김 씨가 지난 1년 동안 맞교환으로 얻은 물건은 필름카메라, 삼각대, MP3 플레이어, 화장품, 지갑 등 9개. 김 씨는 “그중 쓰지 않는 향수와 바꾼, 새것과 다름없는 지갑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냥 샀다면 꽤 비쌌을 제품으로, 지금도 잘 쓰고 있다”고 했다. 그가 자주 드나드는 물물교환 사이트 ‘레드클립(www.red-clip.co.kr)’의 정용호 대리는 “아무리 쓸모없는 물건이라도 내가 갖고 있던 걸 버리는 건 쉽지 않다. 안 쓰는 물건을 서로 교환하면서 추억도 함께 나눠 갖자는 생각에서 사이트를 만들었다”고 했다.
‘레드클립’에는 이처럼 물건에 얽힌 갖가지 추억과 함께 교환할 물건을 올리는 카테고리가 마련돼 있다. “형부한테 선물 받은 구두인데 울 형부가 처제 발 사이즈를 몰라서 한 사이즈 작은 걸 선물했어요” “아빠한테 3개월 동안 졸라서 3개월만 썼지만 그래도 애지중지한 바이올린이에요. 진짜로 소중한 물건이었으니까 잘 써줄 분을 구해요” 등의 사연이 눈에 띄었다.
‘레드클립’이용자 ‘안나’씨는 이 사이트에 자신의 물물교환 경험을 담은 글을 올리며 “이게 웬일! 패브릭을 보내준다더니 맛좋은 차와 수프, 그리고 예쁜 리본에 끈으로 포장까지. 내가 보낼 물건은 빈 쌀 포대로 만든 냄비받침. 소포를 받아보고 도저히 냄비받침만 보낼 수 없어 즐겁게 읽은 책 한 권을 함께 넣었다. 마당에서 딴 로즈메리 한 줄기와 함께 감사 편지도 넣었다”고 했다.
이렇게 온라인 물물교환으로 친구가 되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 사이트 ‘물물교환(www.echange.kr)’을 운영 중인 유기도 씨는 “생계 때문에 자동차를 트럭으로 급하게 맞교환하길 원하는 회원이 있어 직접 나서서 중개해준 적이 있다. 그런저런 인연을 통해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과 많이 연결된다”고 했다.
온라인 물물교환 장터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추억이 담긴 물건을 매개로 서로 소통하면서 정을 쌓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점을 물물교환의 장점으로 꼽는다. 또 돈 대신 물건이 직접 오가기 때문에 사기를 당할 우려가 적다는 점, 사용자들이 교환 물건뿐 아니라 공짜 물건도 수시로 올려놓아 뜻하지 않은 ‘덤’을 얻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점 등을 온라인 물물교환의 매력으로 꼽았다.
마니아가 늘면서 최근 물물교환 사이트는 나날이 전문화 세분화되고 있다. 부동산 교환 사이트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런 사이트에는 “몸이 안 좋아 급히 가게를 처분하려고 합니다. 건물에 있는 지하 바인데 빌라와 교환 가능합니다” “도로에 접한 밭과 전원주택을 교환했으면 합니다” 같은 글이 수백 건 올라 있다. ‘교환천국(www.daeho21.co.kr)’에 등록된 부동산은 240여 건으로 주로 토지나 상가, 전원주택 등 환금성이 떨어지는 물건이 맞교환 대상으로 많이 올라오지만, 최근엔 아파트 교환에 대한 제의도 적지 않다. ‘교환뱅크(www.ecb888.com)’에 등록된 부동산을 분석한 결과 아파트가 80건, 상가주택·토지·전원주택 등이 210여 건이었다.
전문화, 세분화
주부들을 중심으로 의류와 신발 등 아동용품 전문 물물교환 사이트도 성행 중이다. ‘키플(www.kiple.net)’ 등이 유명하다. 올 2월 문을 연 중고서적 물물교환 전문 사이트 ‘북체인지닷컴(www.book change.com)’에는 300여 명이 가입해 1600여 권의 책을 올려놓았다. 지난해 10월 말 오픈한 ‘국민도서관책꽂이(www. bookoob.co.kr)’도 인기 있는 사이트다. 회원이 다 읽은 책을 보내면 다른 사람에게 대여해주는 방식으로 공유와 물물교환이 혼재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장웅 관장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가장 큰 고민이 넘쳐나는 책을 둘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책 마니아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본 책을 버리기 싫어하기 때문에 끌어안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책을 무상으로 돌려볼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영한 마케팅MBA㈜ 대표는 국민도서관책꽂이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서가를 갖고 있다.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그동안 읽은 책을 다 가져갈 수 없어 고민하다 페이스북에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사무실을 방문해 책을 가져가라”는 글을 올렸는데, 그걸 본 장 관장이 연락을 취해온 것이다. 회원들은 김 대표의 서가를 비롯한 다른 회원의 서가에 꽂힌 책을 빌려 읽을 수 있다. 이렇게 ‘국민도서관책꽂이’가 현재 보유 중인 중고도서는 1만600여 권이며 그중 340여 권은 신간이다.
물물교환 온라인 사이트.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교환천국, 키플, 국민도서관책꽂이.
온라인 물물교환 장터에 대한 열기는 최근 모바일로도 확산되고 있다. 중고용품 매매와 맞교환을 표방한 앱 ‘스프링타운(springtown)’, 중고용품 매매 또는 맞교환과 렌털 거래, 재능교환 등을 중개하는 ‘니어바이(nearBUY)’ 등이 등장했다.
1대 1 물물교환은 오프라인에서도 인기다. 최근 기업 간 거래를 가능하게 해주는 ‘물물교환 카드’가 등장했다. ㈜TKBCS사가 개발한 ‘EXTRADE Card’는 소상공인이 회원으로 가입하면 금전 거래 없이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물물교환할 수 있도록 포인트를 적립해준다. 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전국적으로 병원, 체육관, 오락실, 노래방, 커피숍, 꽃가게 등 8000여 개사가 가입한 상태다.
제주시가 운영하는 신구간 나눔장터 행사 현장.
각 가정에서 대형 폐기물을 버리려면 지방자치단체가 발급하는 건당 몇 천 원 상당의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 물물교환을 하면 소비자는 적게는 몇 천 원에서 많게는 몇 만 원에 달하는 스티커 비용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돈 안 들이고 공짜로 구할 수 있는 것이 해마다 물물교환 장터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다.
지구를 살리는 길
경기도 광명시는 지난 5월 광명YMCA와 함께 나눔장터를 열었다. 중고물품을 쿠폰으로 교환해 장터에 나온 필요한 물품과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형태로,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정기적으로 장터를 열 예정이다. 지자체나 다양한 시민단체가 연중 또는 월별 행사로 한시적으로 물물교환 장터를 여는 데 비해 상시적인 물물교환의 장도 있다. YMCA, 주민자치센터 등이 힘을 모아 운영하는 ‘녹색가게’다. 전국녹색가게운동협의회에 따르면 1990년대 말 처음 문을 연 녹색가게는 현재 전국적으로 30곳이 됐다. 재활용할 물건을 가져오면 적립금이 든 교환카드를 발급하고 그 카드로 매장 내 다른 물건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데, 단골이 많다. 상설 물물교환 장터의 필요성을 인식한 강원도 원주 밥상공동체 연탄은행도 현재 건립 중인 ‘행복센터’가 완공되면 센터 내에 물물교환 장터를 만들어 상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1대 1 물물교환의 확대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세계도시동향’에 따르면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는 재활용 쓰레기를 농산물로 바꿔주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유리나 종이, 플라스틱, 알루미늄 등의 생활 쓰레기를 모아오면 지역 농장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교환할 수 있는 ‘그린 포인트’를 주는 것. 시당국은 이 정책이 자원재활용을 통한 탄소배출량 감소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의‘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경제가 어려운 러시아에서는 몇 년 전부터 신문이나 온라인에 물물교환 광고가 등장했다. 경기 불황으로 소비가 줄어들자 기업주들이 사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물물교환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타임’지는 ‘2011년 세상을 바꿀 10대 아이디어’ 중 하나로 ‘협력적 소비’를 꼽았다. 대량생산과 과잉소비에서 발생한 잉여재화를 서로 나눔으로써 자원절약과 환경보전에 일조하는 협력적 소비의 대표적 유형이 물품대여, 공유, 물물교환이다.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서울시가 시민의 정책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운영하는 사이트 ‘천만상상 오아시스’에도 “시가 직접 나서서 시청 홈페이지에 물물교환 중개 사이트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물물교환의 장이 계속 넓어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