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유진 씨는 1987년 미숙아로 태어났다. 인큐베이터에 산소가 너무 많이 주입되는 바람에 실명 위기를 맞았다. 서울대병원에서 받은 큰 수술도, 미국 테네시 주 안과 전문병원에서 받은 수술도 성공하지 못했다. 젊은 부부에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숙제가 안겨졌다.
“유진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보면서 따라 배울 수가 없잖아요. 걸음마도 남편이 유진이를 자기 발등에 올려놓고 수없이 걸어 다니며 가르쳤어요.”
유진이는 공부를 잘했다. 서울맹학교 시절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배우며 음악의 세계도 접했다. 열세 살 때 로스앤젤레스로 조기유학을 떠난 건 시각장애인 딸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아빠, 엄마의 결단이었다.
“한국에선 시각장애인이 주로 안마사 같은 직업을 갖게 되잖아요. 유진이는 계속 공부해서 박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유진이는 열네 살 되던 어느 겨울날 교회 예배시간에 피아노 반주를 듣다가 문득 “엄마, 나 피아노 배워야 할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피아노는 그의 ‘모든 것’이 됐다. 미국 동부의 명문 예술대 뉴잉글랜드 컨서버토리 오브 아트(NEC)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사(4년)와 석사(2년), 전문연주가 예비과정(2년)을 마쳤다. 사우스웨스턴 유스 뮤직 페스티벌에서 2년 연속 우승했고, 2005년 뉴욕에서 열린 US 피아노와 현악 콩쿠르 대상을 차지했다. 2008년 VSA 영 솔로이스트 상도 받았다. 탄탄한 경력을 쌓고 있는 노씨에게 가장 힘든 일은 악보 외우기다.
“유진이는 악보 외우기를 비빔밥 만들기에 비유해요. 비장애인은 눈대중으로 요리할 수 있지만, 자신은 시금치 콩나물 고사리 계란 등 재료 하나하나의 크기, 모양, 색깔, 위치를 다 암기해야 한다며.”
그만큼 상상하기 힘든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미국 현지 교포 언론이 노씨를 ‘절대음감의 소유자’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엄마의 생각은 다르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은 들은 음악을 그대로 연주할 수 있지만 재해석이나 응용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해요. 유진이는 절대음감이 아니라 ‘나름의 소리’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노력의 천재’인 셈이죠.”
노씨는 화내거나 짜증 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서 별명이 ‘천사’. “넌 화나는 일이 정말 없니?”라고 엄마가 물으면 씩 웃으며 “왜 없겠어요?”라고만 한단다.
이 집엔 천사가 또 있다. 노씨의 언니(30)는 “동생이 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며 안과 의사의 길로 나섰다. 여동생(24·회사원)도 엄마가 둘째 언니와 늘 함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해줬다.
노씨는 종종 “앞으로 의학이 발달해서 시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더라도 수술받지 않고 그저 지금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의 나와 내 삶에 만족”하기 때문이라고. 어머니 양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어려움을 잘 이겨낸 딸이 대견하면서도, 그 어려움이 일생이 돼버리는 게 안타깝다.
“유진이는 ‘시각장애인이 저 정도 연주하다니 대단하다’는 동정심으로 평가받고 싶어 하지 않아요. 연주 테크닉은 비장애인을 따라잡기 어렵겠지만, ‘깊은 마음속 울림의 소리’로 세상의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도전 의지, 꿈과 소망을 주고 싶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