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호

日 인류학자의 한국 생활문화 추적, 그 반생(半生)의 기록

[한일 수교 60주년] 아사쿠라 도시오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명예교수

  • 오사카=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5-11-17 09: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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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유산, 국립민족학박물관

    • 한국의 섬 도초도를 향하여…한국인의 일상 연구

    • “왜 일본인이 해외 한인 연구를 하느냐” 물음에…

    • 한일 음식 문화 비교에서 찾은 닮은 점, 다른 점

    • 18번은 노사연의 ‘만남’…“만남은 우연 아닌 바람”

    오사카 국립민족학박물관 명예교수 아사쿠라 도시오 교수는 한국의 문화적 속살을 깊이 연구한 인류학자이다. 한국인에게도 낯선 전남 목포 인근 도초도 현장조사를 16년간이나 했다. 오사카=허문명 기자

    오사카 국립민족학박물관 명예교수 아사쿠라 도시오 교수는 한국의 문화적 속살을 깊이 연구한 인류학자이다. 한국인에게도 낯선 전남 목포 인근 도초도 현장조사를 16년간이나 했다. 오사카=허문명 기자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아 동북아역사재단과 함께하는 기획 시리즈 마지막 세 번째 주인공은 아사쿠라 도시오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명예교수다. 인류학자이며 오사카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 일해 온 그는 삶의 대부분을 한국의 풍속에 대한 연구 및 조사로 보냈고, 각종 기획 전시를 통해 일본 사회에 한국의 문화를 소개해 왔다. 16년간 전남 목포 도초도 현장연구를 해오기도 한 그는 전 세계 해외 한인 조사, 최근에는 음식을 주제로 한일 문화 비교에 매진하고 있다 <편집자 주>

    모노레일은 지상에 높이 세운 철제 레일 하나에 의지해 달리는 열차다. ‘하늘에 그어진 선’을 따라 흐르는 열차라는 표현도 있는데 실제로 타 보니 실감이 났다. 오사카에서 ‘만박기념공원역(万博記念公園駅)’에 가려면 오사카 모노레일을 타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노선(28km)이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하늘과 도시 사이를 미끄러지듯 달린다는 느낌이 든다. 이 모노레일은 1970년 열렸던 오사카 엑스포 행사 장소였던 북쪽 스이타시(吹田市) 일대를 도심과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40여 분을 타고 역에 내리니 숲 냄새가 섞인 바람부터가 달랐다.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거대한 공원으로 들어선다. 올해 엑스포가 열렸던 인공섬 유메시마와는 20km가량 떨어져 있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는 일본의 부활을 세계에 알린 일종의 선언이었다. 패전 후 기적 같은 성장을 이루며 도요타, 소니, 파나소닉 같은 기업이 세계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고, 오사카는 관련 산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총 방문객이 6400만 명에 달했는데 세계 엑스포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참고로 올해는 2600만 명이었다).

    오사카 만박기념공원  오사카=허문명 기자

    오사카 만박기념공원 오사카=허문명 기자

    1970년 오사카엑스포정신을 잇는 오사카만박기념공원은 일본인들의 영광의 기억을 놀이공원이라는 현재에 재현하고 있다. 오사카=허문명 기자

    1970년 오사카엑스포정신을 잇는 오사카만박기념공원은 일본인들의 영광의 기억을 놀이공원이라는 현재에 재현하고 있다. 오사카=허문명 기자

    ‘만박기념공원’은 일본인들이 얼마나 1970년 엑스포에 의미를부여를 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개최 장소를 아예 공원으로 만들어 영원히 기억의 장소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날은 평일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단위 관람객들로 붐볐다. 엑스포 때 세워졌던 거대했던 파빌리온들은 모두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아 있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그때의 영광을 추억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오사카만박기념 공원 안 국립민족학박물관 건물.  문화인류학 연구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오사카=허문명 기자

    오사카만박기념 공원 안 국립민족학박물관 건물. 문화인류학 연구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오사카=허문명 기자

    뒤 편 숲속에 있는 ‘국립민족학박물관(国立民族学博物館)’은 ‘진보와 화합’이라는 1970년 오사카 엑스포 정신을 잇는 건물이다. 1977년 일본 문부과학성이 세운 최대 규모 연구·전시 기관인 이곳은 ‘문화 인류학 기초연구소’라고 할 수 있다. 연구원들은 모두 ‘교수’라고 불린다.



    1층 안내소에서 “아사쿠라 도시오 교수님을 뵈러 왔다”고 하니 10여 분 뒤 직접 마중을 나왔다. 그는 기자를 박물관 안으로 안내했다. 박물관은 그야말로 전 세계 생활문화유산의 집합소였다. 오세아니아, 동남아시아, 인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각 지역 전통 의복, 가옥 모형, 악기, 생활도구, 종교 유물 34만 여점이 배치돼 있었다.

    한국관은 기대 이상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근 현대 초까지의 한국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데 초가집 한옥을 그대로 재현한 것에서부터 반닫이·농·장롱과 놋쇠 식기, 도자기류, 밥상과 숟가락, 저고리·치마·두루마기까지 한국인들의 의식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복, 김장, 농악 등을 소개하는 디지털 영상관도 있었다. 한국관의 규모와 내용은 오랜 시간의 결과물인데 지금 이렇게 내실을 꾸민 주인공이 바로 아사쿠라 교수다.

    한국 민속학계에서는 이미 알려진 인사인 그는 ‘일본 내에서 한국 문화의 속살에 대해 가장 연구가 깊은 학자(이시게 나오미치 3대 박물관장)’로 통한다. 30여년 간 다양한 기획 전시를 통해 한국의 문화와 풍습을 알렸는데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가 있었던 2002년 ‘서울 스타일-이씨 일가의 있는 그대로의 삶’이라는 주제의 특별 전시가 대표적이다. 당시 전시는 서울의 한 평범한 가정이 사는 아파트 내부를 박물관에 그대로 옮겨놓아 화제가 됐다.

    또 ‘한국인의 통과 의례’ 전을 통해 혼례, 상례, 제사 의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던 2015년에는 한국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으로 ‘한일 식박전(食博展)’을 열었다. 201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옥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문화인류학자인 그는 메이지대 박사과정 재학 시절인 1980년 해외 현장 조사지로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전남 목포 도초도와 인연을 맺는다. 이후 16년간 매년 방문해 한국인들도 잊고 있는 섬 사회의 변화를 추적했다. 기자는 그의 반세기에 걸친 한국 현장연구를 주제로 장시간 인터뷰를 했다. 논문과 책 등에 담긴 내용을 더해 그의 한국 현장여구 반생의 기록을 그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우선 소개하는 도초도 현장조사에 대한 기억은 우리네 지나간 삶에 대한 기억이 외국인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한국의 섬 도초도를 향하여

    내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메이지대 박사과정에 들어간 것이 1977년이다. “일본 뿐 아니라 해외 연구를 해야 앞으로 일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지도 교수님 말에 자극을 받아 해외 조사지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연구하고 있던 일본의 가족제도 ‘은거제(가장이 은퇴하고 자식 부부와 별채에서 따로 사는 제도)’가 제주도에 있다는 한국 학자의 논문을 읽고 한국의 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제주도의 경우 이미 다른 학자들의 선행 연구들이 있어서 나는 다른 섬을 알아보고 있었다. 마침 대학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국 유학생 친구가 전남 목포에서 가까운 도초도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꺼라며 소개해주었다.

    1980년 한국 문교부 장학생으로 선정됐지만 직전 해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어머니는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그럼에도 나는 도초도로 떠났다.

    아사쿠라 교수가 1970년 대 찍은 도초도 신교리 전경(사진 위). 아래는 주민들과 함께 하는 모습(아사쿠라 교수 제공)

    아사쿠라 교수가 1970년 대 찍은 도초도 신교리 전경(사진 위). 아래는 주민들과 함께 하는 모습(아사쿠라 교수 제공)

    도초도는 전라남도 목포항에서 57km 떨어진 섬이다. 1979년부터 홍도와 흑산도가 관광지가 되면서 1시간 반이면 가는 고속선이 다니고 있었지만 고속선을 놓쳐 하루 두번 다니는 정기선을 탔다. 갑판 선실에 들어가자 갓 없는 전구가 켜져 있었고 승객들은 볕에 그을린 검은 얼굴때문인지 하얀 이빨만이 도드라졌다는 기억이 있다. 한국 말이 서툴렀던 나는 낯선 조사지로 가는 허전함도 더해져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섬에 도착해 친구가 소개한 교장 선생님께 전화하니 학교 앞 다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선생님과 섬 유지들, 경찰관도 와 있었다. “왜 왔느냐”고 하길래 “민속 조사를 위해 왔으며 숙소를 찾고 있다”라고 하자 농협조합장을 하는 S씨(1939년생)의 부친 집을 소개해 주었다.

    일본말도 할 수 있는 분이고 식민지 시대 때 일본인 교사를 하숙시켜 본 적이 있어 의사소통이 될 꺼라는 거였다. S씨는 목포에 가족이 있어 주말에는 없기 때문에 그 방을 쓰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도초도와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나는 16년간 거의 매년 방문해 한국 농촌생활의 변화를 추적하게 된다.

    7명 사는 집에서 한국인의 일상 관찰하다

    집에는 S씨 양친과 동생 부부 가족 등 모두 7명이 살고 있었다. 부친은 1919년생으로 젊었을 때 목포세관에서 일하다 1963년 도초도로 돌아와 3년간 면장으로 일했다고 했다. 모친은 1916년생으로 1934년에 결혼해 아들 다섯을 낳았다고 한다.

    모친의 가장 큰 걱정은 식사가 내 입에 맞는지였다. 밥, 국, 김치가 기본이었고 가끔 이웃 마을에서 키우는 닭에서 나온 달걀을 쪄주셨는데 늘 맛있게 먹었다. 다만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하셔서 애를 먹었다.

    전날 저녁 막걸리를 많이 받아 먹은 어느 날, 밤새 설사를 했다. 다음 날 “아침 밥을 먹지 못하겠습니다” 했더니 모친께서 한 되 병의 소주를 가져오시더니 “약이니까 단숨에 마시라”고 하셨다. 말씀대로 했더니 위도 놀랐는지 트림도 없어지고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부엌의 부뚜막에는 가마솥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밥을 하고 다른 하나는 물을 끓이거나 된장국을 끓였다. 반찬은 김치를 비롯해 매일 거의 같은 것이 나왔다. 1986년부터 가스레인지가 들어와 양파나 달걀을 기름에 볶거나, 튀김으로 내오는 등 다양해졌다. 집 뒤뜰에 있는 채마 밭에서 나는 배추, 오이, 호박, 고추도 먹었다. 생선의 경우 생선 장수가 오면 쌀과 물물교환을 했는데 얼마 동안 처마에 매달라 말렸다가 요리했다. 두부와 간장, 된장은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두부를 만들 때 맷돌로 콩을 가는데 내가 거들다 어깨가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돼버린 적도 있었다.

    냉장고가 들어온 건 1984년이었다. 주로 김치나 달걀을 보관했는데 무엇보다 제사가 있을 때 삶은 돼지를 냉동 보존하며 먹을 수 있게 된 게 큰 변화였다. 간식으로 생고구마나 말린 명태를 먹었는데 인스턴트 라면이 보급되기 시작할 때는 어린 아이들이 수프 가루를 그대로 핥아먹기도 했다. 전화는 1987년에 19가구, 89년에 41가구였다가 90년대에 들어서 모든 집에 들어왔다.

    내 방은 아궁이가 있는 온돌방이었다. 청소는 자루가 짧은 빗자루를 썼다. 식사 후나 어린아이들이 오줌을 쌌을 때에는 걸레로 한 번 닦아내면 그만이었다. 변소는 방문을 나와 오른쪽에 있었다. 시멘트로 굳힌 바닥에 구멍을 만들어 배설물이 밑에 쌓이게 돼 있었다. 옆에는 짐을 태운 재가 쌓여있어 비료로 사용됐다. 난방은 한동안 땔감을 썼고, 나도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1992년 중유 보일러가 들어왔고, 1995년 토방이었던 부엌에 마루가 깔렸다. 이후 목욕탕을 만드는 등 서서히 도시주택과 비교해도 큰 손색이 없게 개량돼 갔다.

    1979년 섬의 총인구는 남자 6680명, 여자 6516명 총 1만3196명이었고 가구 수는 2401가구였다. 모든 농촌 사회가 그렇듯 도초도도 인구 수가 빠르게 줄었다. 연도별 인구 추이를 보면 1976년부터 감소로 바뀐다. 1978년 고등학교가 만들어졌고 1979년 10월 목포에서 송전 됐지만 도시로의 인구 유출은 막을 수 없었다.

    농한기에 사람들은 화투 놀이를 했고, 날씨가 좋을 땐 저수지에서 붕어를 잡았다. 놀이는 남자들의 것으로, 여자들은 집안 일은 물론 밭에서 채소를 뜯는 일이 많았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삼삼오오 사람들이 마을의 집집을 방문하는 것을 ‘마을 다니기’라고 불렀는데 친목과 정보교환의 장이었다. 1981년 겨울은 대통령 선거가 화제의 중심이었다. 입시 철이 되면 자식들이 시험을 치르는 대학에 대한 문의가 나에게까지 오곤 했다.

    매년 음력 1월 15일이면 마을총회가 열렸다. 세 번 참관했는데 총회가 끝나고 ‘농악’ 비슷한 놀이를 즐겼다. 장구나 꽹과리도 제대로 없어서 금속 대야나 그릇을 두들겼지만, 사람들은 밤까지 즐겼다.하지만 1992년부터는 총회도 농악도 없어졌다. 조용한 농촌의 한쪽 구석에서 흥이 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딱지나 땅바닥에 판 구멍에 돈을 던지는 ‘돈치기’라는 놀이를 했는데 1982년 봄 프로야구가 시작되면서 초등학생들이 “야구를 하고 싶다”고 부모를 졸랐다. 아이들 숫자도 계속 줄었다. 1960년대만 해도 섬에서 가장 큰 초등학교 재학생이 1200여 명에 달했지만 1995년에는 230여 명까지 줄었다. 1980년에는 분교를 포함해 도초면에 초등학교가 11개 있었는데 1987년에는 8개교로 줄었고, 지금도 통합과 폐교가 진행되고 있다.

    불안정한 한국 경제 상황에서 농촌 사회의 ‘계’는 큰 역할을 했다. 내가 있던 신교리에는 ‘곡물계’처럼 금융적 성격을 갖는 ‘낙찰계’, 마을 운영을 위한 ‘대동계’, 저축을 목적으로 한 부녀회의 ‘저축계’, 장례를 대비한 ‘상포계’, 자식들 혼례에 대비한 ‘금계’, 동년배들끼리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동갑계’, 친한 사람끼리 의형제를 맺는 ‘결의계’ 등이 있었다. 계를 한다는 건 그 사람의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위신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계를 존립시키는 기반에는 신용을 매개로 한 인간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무속의 굿 상차림이 그대로 재현된 한국관 내부. 오사카=허문명 기자

    한국 무속의 굿 상차림이 그대로 재현된 한국관 내부. 오사카=허문명 기자

    연중행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제사였다. 조상의 기일에 하는 ‘기제(祈祭)’, 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 지내는 ‘차례’가 있었고 음력 10월 15일에는 조상 들 묘 앞에서 ‘시제(時祭)’를 지냈다. 나는 여러 기제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는데 유교식 매뉴얼을 따랐고, 형식에 큰 차이가 없었다. 1986년 설이 ‘민속의 날’로 공휴일이 되더니 1991년부터는 추석과 함께 3일 연휴가 됐다.

    도초도 현장 조사 초반애 광주 전남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일본어교육과가 생겨 1기생을 배출했는데 시간 강사를 해달라는 거였다. 주말에는 도초도에서 조사연구를 했고 평일에는 전남대에서 강사 생활을 했다. 학생이 8~9명 하던 시절이었는데, 항상 유리가 깨진 시계를 차고 있는 친구가 있어 이유를 물었더니 “광주 항쟁 때 시위를 하다 깨졌다”고 했다. 일어교육과 학생들은 나중에 교사가 되려는 친구들이 많았다. 마음 속 상처도 있었지만, 노골적으로 광주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내가 일본 사람이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당시 아사쿠라 교수를 기억하는 학생의 기억을 소개해보려 한다. 광주대 김규열 교수가 2016년 그의 정년퇴임 문집에 쓴 글이다. 그는 아사쿠라 교수를 ‘학자 사무라이’라고 했다.

    우리와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여파로 캠퍼스가 매일같이 최루탄 연기로 자욱한 1989년 가을학기 일본어 회화 수업 때였다. 당시 광주에는 일본인이 전무한 상태여서 우리는 원어민 교수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에 들떠 있었다.

    선생님의 커다란 체구와 시원시원한 외모는, 평소 우리가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의 이미지와 크게 달랐고, 수업은 약간은 평범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의 진면목은 수업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선생님은 술잔을 주고받아도 전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주량도 주량이지만,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보따리는 밤을 지새우며 들어도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장르도 다양하고 내용도 신선했다.

    일본에 관한 질문을 해도 사전적 의미보다는 그 언어가 가지는 사회적 배경을 더 흥미롭게 설명해 주셨다. 정규 수업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방과 후 특별 야간강의였던 셈이다. 사회적 교류 범위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갓 스물을 넘긴 지방 대학 초년생들에게 선생님은 도쿄에서 날아온 살아 있는 최고의 교재였다.

    이 흥미진진한 야간 특별강의의 술값은 언제나 선생님이 내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생님의 경제적 지출 내용은 너무 단순했다. 강의료 같은 수입이 생기면, 절반은 주로 술과 함께 진행되는 우리를 위한 무료 강의로, 나머지는 연구를 위한 서적 구입이나 연구조사 활동비로 지출하는 것이 전부였다.

    몇 년 전, 우리 졸업생들이 광주에서 조촐한 회갑연을 열어 드렸는데 상의 양복을 해 드렸었다. 40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현장조사를 하시던 도초도에도 간 적이 있었는데 함께 살던 가족들은 선생님을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을 ‘학자적 사무라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단순 명쾌하고 군더더기가 없기 때문에다. 선생님은 자신의 연구에 충실하셨고, 그 과정에서 맺어진 인연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는 분이다. 그 외 잡다한 세상사에는 별 관심도 없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운 편이다. 여전히 말도 빠르고 걸음도 빠르고 술도 빨리 드신다. 그리고 변함없이 건강하시다. 우리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진행되는 선생님의 유쾌한 야간 강의를 듣고 싶다.)

    “왜 일본인이 해외 한인 연구를 하느냐”

    나는 메이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도쿄 국제기독교대 조교로 채용됐다. 해외 자녀들이 많고 영어교육이 뛰어난 학교였다. 천황 동생의 딸도 다녔다. 2년 뒤 전임교수 제의가 왔는데 기독교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해 그만두고 시간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인생에서 제일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한국의 가족제도 연구는 일본에서 별로 관심이 없다 보니 학계에 자리를 잡기 쉽지 않았다. 도쿄 부모님 집 마당에 거의 천막 같은 것을 치고 살았다. 그러다 1988년 국립민족학물관 한국담당 교수로 들어가게 된다.

    박물관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도초도 현장조사는 거의 매년 다녔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와 한국인 전반에 관한 연구를 확대해갔다. 1994년부터 3년간 연변, 요령성, 흑룡강성 등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에 관한 공동연구에 참가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3년 일본 문부과학성의 연구 보조금을 받아 차세대 연구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한인 이주 100주년을 맞이한 하와이 호놀룰루에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중국 북경, 오스트레일리아와 시드니, 태국 방콕, 베트남 호찌민 등을 방문했으며 러시아 사할린도 조사했다.

    한국의 풍물행사에 쓰이는 전통의상과 북들을 재현한 한국관. 오사카=허문명 기자

    한국의 풍물행사에 쓰이는 전통의상과 북들을 재현한 한국관. 오사카=허문명 기자

    내가 연구를 한창 했을 때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700만 명에 달했다.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는 반응과 함께 “왜 일본인이 해외 한국인 연구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첫째,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일본은 해외 유학을 가는 학생도 감소하고 기업에 들어가서도 해외 주재를 기피한다. 이런 젊은 층의 내향적 성향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둘째, 해외 한인들의 존재가 일본 현대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 조선족,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할린 한인 대다수가 일본 식민지 시절에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일본 말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삶에서 일본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일본인들은 우리 역사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한국인과는 다른 관점에서 해외 한인을 조망할 수 있다. ‘훈수 초단’이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를 직접 하는 사람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멀리 볼 수 있고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다. 또 해외 한국인 당사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자 할 때, 한국인이 아닌 제3자인 일본인 청자(聽者)가 있으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박물관에 있으면서 한국관 리모델링을 포함해 한국의 문화와 풍습을 알리는 특별 전시도 많이 기획했다. 한국의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기획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에서 훈장도 받고 많은 한국인 벗을 알고 사귀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한일 음식 문화 비교에서 찾은 닮은 점, 다른 점

    2016년 박물관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교토에 있는 유서 깊은 사립대인 리쓰메이칸대에서 ‘식(食) 매니지먼트 학부’라는 것을 새로 만드는데 학과장으로 와 달라는 거였다. 식 매니지먼트 학부는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세 개 영역에서 음식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과정이다. 일본 대학 최초로 ‘음식의 종합적 연구’를 위해 설립된 학부였다. 2021년 대학원 과정을 개설해 그동안 조리나 잡학(雜學)에 머물러 왔던 음식문화 연구를 ‘식 과학’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특히 한일 음식문화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종로 청진동 해장국에서부터 중림동 설렁탕, 서초동 족탕은 물론 뒷골목의 삭힌 홍어와 빈대떡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매우 즐거운 연구다.

    한국과 일본은 밥과 국, 절임류, 반찬을 함께 먹는다는 점에서 식사의 기본은 같다. “밥 먹었냐”를 인사말로 쓰는 것도 양쪽 모두 밥을 주식으로 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사 방식은 약간 다르다. 일본인은 밥을 조촐하게 담아 젓가락으로 먹지만 한국은 수북이 담아 수저와 젓가락을 함께 사용한다.

    국거리도 차이가 있다. 한국은 쇠고기‧돼지고기‧닭고기 등으로 국물을 내지만 일본의 전통적 조리법에는 없는 방식이다. 절임류와 건어물도 공통으로 발전했지만 한국에서는 김치가, 일본에서는 다쿠앙(단무지)과 우메보시가 대표 절임 반찬이다. 건어물로는 한국에서 굴비가 고급 요리에 속하지만 일본은 말린 것보다는 날 것인 회를 세련된 요리라 생각한다. 음식만 보아도 한일은 닮은 듯 닮지 않은 문화를 가진 나라다.

    예를 더 들어보자. 한국에서는 지금도 사시미(생선회), 오뎅(어묵), 우동(가락국수) 같은 일본어가 그대로 사용된다. 중국 식당에 가면 다쿠앙이 따라 나온다. 식민지 시기 일본 음식점들이 보급시킨 것들이다. 식민지 시대가 끝나며 일본 음식점들이 다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일조약이 체결된 1965년 서울의 전화번호부에는 59개의 일본 음식점이 게재돼 있다. 최근 한국에는 거의 모든 일본 음식이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군산 이성당은 1945년 창업한 한국 빵집으로 가장 오래된 가게 가운데 하나다. 그 근원을 추적하면 1910년 창업한 ‘이즈모야’라는 과자 가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당이 이즈모야를 이어받은 게 아니라 이즈모야 자리에 우연히 일본에서 귀국한 한국 사람이 빵집을 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오뎅은 언제 건너왔을까. 1936년 간행된 ‘신판 대경성 안내’에는 경성의 외식업체에 대한 소개가 나오는데 ‘근래 2, 3년 동안 경성에 오뎅가게가 넘쳐나고 있다’며 상호들을 나열한다. 1930년대부터 오뎅이 서울에 유행했던 것이다. 1938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에는 조미료 아지노모토 광고(옆 사진)에 오뎅 가게 그림이 그려져 있다. ‘ㄷ자형’ 카운터가 있고 한 남자가 오뎅 상태를 보거나 술을 데우는 장면이다. 당시 오사카 오뎅 가게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꼬치에 어묵을 끼워 양념장에 찍어 먹는 한국식 오뎅은 1989년 조풍연의 ‘한국의 풍속’에 소개되고 있다. 생선 어묵 튀김을 일본에서는 덴푸라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어묵이라 부른다. 우동도 한국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일본의 음식점이나 터미널 등에서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로서의 우동이다. 면이 부드럽고 다양한 향신료 양념 대신 단일 양념이 사용된다. 한국어로 국수라고 바꿔 부르기도 하지만 외형은 일본 우동과 같다. 다른 하나는 중화요리 메뉴로서 껄쭉한 국물의 우동이 있다. 일본의 ‘탄멘’에 가깝다.

    한일의 음식 중에 가장 닮으면서도 다른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밥이다. 나의 경우 도초도에서의 식사 경험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산처럼 쌓인 밥’이 나오며, 식기가 ‘금속제’이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사용했다. 먹는 방식도 일본과 약간 달랐다. 일본에서는 밥그릇을 손으로 들고 먹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국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밥그릇을 식탁에 두고 먹는 것은 개나 고양이처럼 밥그릇을 핥아먹는다 해 ‘개밥 먹기’ 혹은 ‘고양이밥 먹기’라고 불린다. 당연히 좋게 여겨지지 않는다. 산처럼 쌓인 밥은 일본인들에게 찻잔에 소복하게 담아 밥 중앙에 젓가락 한 쌍을 꽂는 ‘이치젠 메시(一膳飯)’를 떠올리게 한다. 장례 때 죽은 사람을 위해 대접하는 밥이다.

    일본의 식생활 역사, 식과 연계된 지역성, 민속학, 문화인류학을 심도 있게 다룬 아사쿠라교수의 책 ' 일본 음식 인문학 연구 노트. 

    일본의 식생활 역사, 식과 연계된 지역성, 민속학, 문화인류학을 심도 있게 다룬 아사쿠라교수의 책 ' 일본 음식 인문학 연구 노트. 

    한국의 국이나 찌개는 일본 된장국과 같이 걸쭉하며 그 자체가 메인 식사에 곁들여 먹는 주요 반찬의 일부다. 일본에서는 국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서는 밥을 국에 넣어 먹는 데 대표적인 게 ‘국밥(gukbap)’이다. 일본은 ‘오차즈케(お茶漬け)’ 즉 녹차 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 이때 밥에 국물을 부어 먹지 않고, 국물을 밥그릇에 붓는다. 남은 밥은 밥그릇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므로, 나중에 다시 먹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먹일 수 있다.

    나는 무엇보다 ‘밥’을 둘러싼 한일문화 차이를 ‘나눔(分かち合い)’과 ‘대접(おもてなし)’으로 본다. 한국의 시인이자 사상가 고(故) 김지하 선생이 말한 ‘나는 밥이다’의 사상이 그것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밥은 곧 하늘’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입니다.”

    일본의 ‘오모테나시’가 타인에 대한 것이라면, 한국의 나눔은 내부적인 것이다. 나눔과 대접 문화는 관계를 맺는 방식도 약간 다르게 만든다. 한국에서는 내부인끼리 나누는 것이 중요하지만, 일본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 즉 오모테나시가 중요하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중요시된다. 나눔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을 영어로는 환대(hospitality)로 나타낼 수 있겠지만 나는 ‘정(情)’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나 같은 문화인류학자가 하는 현장조사의 기본은 현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눠 서로를 신뢰하며,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배경에 있는 문화나 사회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서로를 더 알게 된다. 한국인이 일본 문화의 특징을 섬세하게 발견할 수 있다면, 일본인도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일 양국은 서로 비교함으로써, 비로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즉, ‘유사하지만 다르다’는 문화적 이해가 중요해진다.

    1950년생인 나는 인생의 반을 한국과 교류해 왔다. 그 길은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연구도 아직까지 완결되지 않았다. 나의 노래방 18번은 노사연의 ‘만남’이다.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바램이었다”는 가사가 정말 좋다. 한국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나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배울 것, 만날 사람들에 대한 기대로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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