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통섭 시각으로 밝혀낸 한국인의 뿌리

  • 고승철│저널리스트 koyou33@empas.com│

    입력2010-12-06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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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섭 시각으로 밝혀낸 한국인의 뿌리

    ‘한국인의 기원’<br>이홍규 지음, 우리역사연구재단, 271쪽, 1만8000원

    걸프전쟁을 취재하러 갔을 때다. 요르단-이라크 국경 부근의 황량한 들판에서 유목민 무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베두인’이라 불린다. 양떼를 몰고 풀이 자라는 곳을 찾아 평생 떠돌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요르단인 택시기사가 통역을 맡았다. 30명가량의 유목민 가운데 족장 격인 40대 남자가 주로 대답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우리는 국적이 없다. 어느 나라든 가고 싶은 대로 간다.”

    -국경을 넘을 때 제재를 받지 않나?

    “이 넓은 사막에 국경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이웃 국가끼리 전쟁을 하는데….

    “인간이 땅에 금을 긋고 이 나라, 저 나라 구분하니 분쟁이 생긴다. 어리석은 짓이다.”

    현자(賢者)의 잠언(箴言) 같아서 묘한 여운을 남겼다. 이란-이라크 전쟁, 이라크-쿠웨이트 전쟁, 이스라엘-이집트 전쟁 등이 그들의 눈에는 부질없는 욕망의 충돌로 비칠 것이다. 베두인은 신분증이니 여권이니 하는 증명서도 갖지 않았다.

    21세기의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로 해외여행에 필요한 ‘여권’이 꼽힐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이 증서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국제공항에서 강대국 여권을 가진 이들은 우쭐한다. 미국 국적을 얻으려 사생결단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 수두룩하다. 똑같은 제품이라도 제조국가에 따라 값 차이가 엄청나다. ‘국가 브랜드’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국에서는 국가 브랜드위원회까지 만들었다.

    한국인…. 한반도에 옹기종기 모여 살다가 100여 년 전부터 지구촌 곳곳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까지 생겼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대학에 유학을 가는 한국인 청년도 보았으니 한국인의 진취성이 얼마나 드높은가.

    한국인의 핏속에는 혹시 강렬한 유목민족 기질이 흐르지 않을까. 한국인 조상은 어디에서 와서 한반도에 정착했을까.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역저(力著) ‘한국인의 기원’이 나왔다. 의학자인 이홍규(66) 서울대 명예교수가 유전학, 고고학, 언어학, 신화학 등 여러 학문을 통섭(統攝)하는 시각으로 정리했다.

    당뇨병 연구하다 한국인 뿌리 탐구

    저자의 프로필을 살펴보자.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내과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의대 교수로 오래 봉직하며 당뇨병 연구에 혁혁한 성과를 이루었다. 저자는 한국인에게 당뇨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탐구하다 다른 나라의 민족과 다른 양상임을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유전학에 발을 디디면서 한국인의 뿌리를 캐는 작업에 몰입했다. 저자는 미토콘드리아 DNA가 당뇨병의 ‘원인 유전자’이며 이 DNA가 인류의 이동을 알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자는 서문에서 “인류의 이동과정에서 생긴 여러 인종의 서로 다른 체질이 당뇨병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란 의문이 생겨 주위의 여러분께 여쭈어보았으나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해 스스로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면서 “이것이 필자가 당뇨병을 연구하며 한국인의 형성과 기원을 추적하고 그 과정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병행해온 연유”라고 밝혔다.

    저자는 2001년 여러 전문가와 함께 ‘한국 바이칼 포럼’이란 학술 모임을 만들어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등을 답사했다. 이 포럼에 동참하는 전문가들의 면면을 보면 여러 학문이 융합해 새로운 지성이 탄생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고고사학자인 최몽룡 서울대 교수, 주채혁 전 강원대 사학과 교수, 배재대 한국-시베리아센터의 이길주 교수, 봉우사상연구소의 정재승 소장, 단국대 유전학과 김욱 교수, 순천향대학의 언어학자 시미즈 기요시 교수, 언어학자인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다.

    유전자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류 이동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오늘날 구체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베링해를 건너갔음이 유전자 분석으로 규명됐다. 분석 대상이 되는 것은 주로 Y염색체인데 몽골,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이 가운데 O형이 흔하다. 유럽인들은 주로 R형이다.

    저자는 약 3만 년 전에 Y염색체 O형을 가진 동아시아 주류 세력이 북방에서 형성됐다고 본다. 구체적인 장소는 바이칼 호수 주변이라는 것. 바이칼 호수 부근의 말타 마을에는 2만3000년 전의 사람 주거지 유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소나무, 자작나무, 전나무 등 땔감이 많아 빙하기에 인류가 추위를 견디며 살아남기에 적합했다. 빙하기에 이들은 강풍과 추위에 적응하면서 체열 손실을 줄이기 위해 다부지고 뭉툭한 체형을 발달시켰다. 찬바람에 대처하려 눈은 작고 가늘게 찢어지고, 추위로부터 안구를 보호하기 위해 눈꺼풀에 지방이 두툼한 눈으로 진화했다. 한국인과 바이칼 호 주변에 사는 부리야트인이 혈연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사실은 모스크바유전학연구소의 자카로브 박사에 의해 규명되기도 했다.

    바이칼호(湖)가 한민족 출발점

    현재 시베리아 및 중국 동북지구에 살고 있는 에벤키(Evenki)는 ‘오랑캐’의 어원이 된 종족이다.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발원한 이들은 어원커(鄂溫克), 오로첸(鄂倫春)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퉁구스계 민족이다. 나나이(Nanai·중국어로는 赫哲, Herzhen)족은 오로첸과 마찬가지로 퉁구스계이며 러시아 아무르강 유역과 중국 헤이룽장성에 거주한다. 나나이족 자신들은 만주족의 근원인 주르첸(Jurchen·여진女眞)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이곳에 살던 조선(朝鮮) 또는 숙신(肅愼)과 발음이 유사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유전자가 거의 같은 사람들로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 또는 중국인들의 문자 사용 기록이 달랐을 뿐, 다 같은 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어의 뿌리는 요하문명인 것으로 저자는 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주장한 바대로다. 요하 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소하서(小河西)문화, 흥륭와(興隆·#53851;)문화, 사해(査海)문화 등으로 기원전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하문명보다 최소 1000년 앞선다. 뒤이어 이곳에 홍산(紅山)문화, 우하량(牛河梁)문화가 이어진다. 요하 유역은 바이칼 지역에서 남하한 북방계 몽골리안들이 남방계 사람들과 마주치며 처음 문명을 만든 곳이다. 알타이어의 고향이기도 하다.

    저자는 동아시아 최초의 요하문명을 한국문화의 원형으로 추정한다. 이들 몽골리안 가운데 한반도로 남하한 이들이 한국인의 조상이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간 사람들은 일본 문화를 만들었다. 중국 남부로 내려간 몽골리안은 남방계 민족과 함께 중국 문명을 만드는 주류 세력이 되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온화한 현지 기후와 현지인들에 동화하면서 몽골리안 유전자를 후손에게 많이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몽골리안 아기들의 엉덩이에 난 푸른 반점인 몽고반점은 동아시아인뿐만 아니라 터키인, 동아프리카인, 폴리네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에게서도 흔히 나타난다. 몽골리안 유전자가 이 지역으로 흘러갔음을 알 수 있다.

    “바이칼, 요하, 북방으로 가야 한다”

    이 책을 보니 저자의 연구방식은 가히 다학제적(多學際的)이라 할 만하다. 옛 문헌을 뒤적이며 한국인의 기원을 찾는 역사학적 연구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각 민족의 유전자를 분석해 의미 있는 결과치를 찾아내는 데 컴퓨터 처리 기술과 통계학 방법론에 큰 도움을 받은 듯하다. 앞으로 인문학 분야에서도 석학 반열에 올라서려면 자연과학 연구방법론을 익혀야 유리하겠다. 막연한 주장보다는 근거 있는 분석 자료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꼼꼼히 읽으려면 독자 자신도 박식해야 한다. 그러나 전문 용어가 나오면 일일이 이해하려 매달리지 말고 죽죽 읽어가면서 큰 흐름을 살피면 되겠다. 여러장의 컬러 사진과 미려한 그래픽이 소개돼 읽는 재미와 함께 보는 즐거움도 얻는다. 바이칼 호 인근의 부리야트인의 사진을 보니 우리와 많이 닮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국수주의(國粹主義) 냄새를 풍기지 않는 장점을 가졌다. 이 분야의 다른 책들은 대체로 한민족의 우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은가. 한국인이 200여 국가에 퍼진 것과 함께 10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앞으로 종전 관점이 달라질 것이다.

    한국인의 기원에 관한 탐구는 관련 학문이 발전할수록 더욱 활발히 진행될 것이고 뿌리를 캘 가치가 있다 하겠다. 학자의 차가운 ‘머리’뿐만 아니라 민족혼을 찾으려는 뜨거운 ‘가슴’이 동원돼야 할 것이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연구 동향과 함께 자신의 열정을 토로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내몽골을 답사하며 요하문명의 흔적을 찾는 분들이 있다. 요하문명의 흔적은 고조선의 흔적, 고구려의 흔적,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여러 선사시대, 역사시대의 흔적들과 어떤 형태로든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올라가서 시베리아 바이칼 호 주변에서 고고학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시베리아의 이곳저곳에서 고고학 발굴과 고인골(古人骨)을 찾으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몇 년이 지나면 새로운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뉴스를 탈지도 모르겠다. (중략)

    바이칼로 가야 한다. 요하로 가야 한다. 북방으로 가야 한다. 가서 우리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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