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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설득해봐라” 아버지의 민주주의 훈련 : 손봉숙

  • 글: 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

“날 설득해봐라” 아버지의 민주주의 훈련 : 손봉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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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바지주름을 칼같이 세워서 입으셨고 넥타이도 색을 맞추어 매셨다. 밝은 베이지색 양복에 백구두까지 신으면 여간 멋쟁이가 아니었다. 이런 아버지를 닮은 것일까. 나도 옷색깔을 맞춰 입는 편이다. 오늘은 빨간색, 내일은 하늘색, 그 다음날은 노란색…. 일하는 여성으로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색상이 강하다.
“날 설득해봐라” 아버지의 민주주의 훈련 : 손봉숙

필자가 이화여대 대학원을 졸업하던 1968년 봄, 교정에서 찍은 사진. 뒷줄 왼쪽이 아버지 손병오. 오른쪽이 어머니 황봉한씨.

우리 가족은 경북 영주의 한 소읍에서 살았다. 지금은 시(市)로 승격해 상업도시로 번창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던 1950년대만 해도 영주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를 서로 다 알 정도로 조그마한 읍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향집을 생각하면 온 식구가 발만 아랫목으로 모으고 부챗살 모양을 하고 자던 커다란 안방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잠자리에 누워 바라보던,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던 여닫이 문짝 속의 국화문양도 기억의 한 편을 차지하고 있다. 해마다 가을이면 우리 가족이 겨우살이 준비로 창호지를 새로 바르며 예쁘게 수놓은 국화꽃잎이다. 그리고 작은 바람결에도 떨리던 문풍지의 울음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창호지문 수놓았던 국화꽃잎

청명하게 맑은 가을날이면 우리집은 이른 아침부터 떠들썩해진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큼지막한 양은솥에 밀가루 풀을 넉넉하게 쑤신다. 우리 형제들은 집안의 가구를 모두 들어내고 문짝들을 떼어내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겨울철을 앞두고 방마다 도배를 하고 문살에 창호지를 다시 바르는 날인 것이다.

이렇게 도배를 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몽당연필을 오른쪽 귀 뒤에 꽂고 목에 수건을 건 채 진두지휘를 하신다. 우선 양지바른 툇마루에 떼어낸 문짝을 가로로 세우고 물로 불린다. 묵은 창호지를 다 떼어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젖은 수건으로 문살을 깨끗하게 닦아낸다. 그러고 나면 문살에 고루고루 풀칠을 하고 그 위에 새하얀 문종이를 바른다. 입안 가득 물을 품었다가 새로 얹은 창호지 위로 확 뿜어낸다. 문종이가 젖으면서 골고루 쫙 펴지고 문살에 달라붙는다. 그러면 빗자루로 한번 쓸어주고 마른 수건으로 살살 눌러주면 된다. 물론 손잡이가 달린 쪽은 많이 쓰기 때문에 두 겹으로 발라야 한다.



이때 우리 형제들은 앞마당을 온통 다 차지하고 있는 화단으로 달려간다. 노란 국화꽃과 잎사귀, 그리고 코스모스 꽃잎과 잎사귀를 따서 손잡이 쪽에 예쁘게 펴놓고 문종이를 오려서 그 위에 한 겹 더 바른다. 그리고 그늘진 곳으로 옮겨서 종일 시원한 바람에 말린다.

평소 자질구레한집안일은 손도 안 대는 아버지셨지만 도배장판이나 창호지를 바르는 일은 전적으로 아버지 몫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되풀이되는 제법 큰 집안행사 중의 하나였다. 아버지는 그만큼 집 단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1950년대는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도배를 한번 하면 누렇게 찌들도록 그냥 쓰는 것이 보통이요, 대개 창호지는 구멍이 숭숭 뚫릴 때까지 썼다. 친구집에 놀러가 봐도 예쁘게 꾸미고 사는 집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건 아껴 써도 집만큼은 깨끗하고 반짝반짝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게 어디 가겠는가. 1973년. 우리 내외는 하와이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막 둘째를 해산하고 났을 때인데, 갑자기 침실이 두 개 딸린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남편이 뉴욕으로 현장실습을 나가고 없는 사이 빈집이 나온 것이다. 별수없이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찬장 가득 채웠던 예쁜 그릇들

낮에 사람들이 이삿짐을 실어다 주기만 했지 가구들을 제자리에 놓는 일은 내 차지였다. 혼자서 무거운 가구와 침대 등을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가장 맘에 드는 위치를 찾을 때까지 옮기고 또 옮기고…. 책장정리까지 하고 나니 날이 훤히 밝아오는 게 아닌가. 그때나 지금이나 가구를 한자리에 놓고 쓰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꾸어놓는 것이나, 한밤중에 그 서랍을 열면 거기엔 꼭 가위가 있어야 하는 것도 나는 아버지를 빼닮았다.

우리 집에서 좀 값이 나갈 만한 귀한 살림살이는 모두 아버지가 사들이신 것들이었다. 널찍한 대청마루 오른쪽에는 쌀뒤주가 붕어자물쇠를 물고 있고 왼쪽에는 유리문이 달린 삼층 찬장이 있었다. 그 찬장에 가득 들어 있던 예쁜 유리그릇들은 하나같이 아버지가 출장길에 사오신 것들이었다. 보기만 해도 즐거워지던 그 예쁜 그릇들. 우리 집에만 그런 그릇이 있는 것 같아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우리가 매일 덮고 자던 십자수 놓인 이불잇, 베갯모, 방석 등도 모두 아버지가 사다 나른 물건들이다. 6년간의 하와이 유학시절, 나도 아이들을 앞세우고 쇼핑센터에 가면 항상 침구류와 그릇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었다. 지금도 나는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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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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