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날 설득해봐라” 아버지의 민주주의 훈련 : 손봉숙

  • 글: 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

    입력2003-10-28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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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설득해봐라” 아버지의 민주주의 훈련 : 손봉숙

    필자가 이화여대 대학원을 졸업하던 1968년 봄, 교정에서 찍은 사진. 뒷줄 왼쪽이 아버지 손병오. 오른쪽이 어머니 황봉한씨.

    우리 가족은 경북 영주의 한 소읍에서 살았다. 지금은 시(市)로 승격해 상업도시로 번창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던 1950년대만 해도 영주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를 서로 다 알 정도로 조그마한 읍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향집을 생각하면 온 식구가 발만 아랫목으로 모으고 부챗살 모양을 하고 자던 커다란 안방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잠자리에 누워 바라보던,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던 여닫이 문짝 속의 국화문양도 기억의 한 편을 차지하고 있다. 해마다 가을이면 우리 가족이 겨우살이 준비로 창호지를 새로 바르며 예쁘게 수놓은 국화꽃잎이다. 그리고 작은 바람결에도 떨리던 문풍지의 울음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창호지문 수놓았던 국화꽃잎

    청명하게 맑은 가을날이면 우리집은 이른 아침부터 떠들썩해진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큼지막한 양은솥에 밀가루 풀을 넉넉하게 쑤신다. 우리 형제들은 집안의 가구를 모두 들어내고 문짝들을 떼어내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겨울철을 앞두고 방마다 도배를 하고 문살에 창호지를 다시 바르는 날인 것이다.

    이렇게 도배를 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몽당연필을 오른쪽 귀 뒤에 꽂고 목에 수건을 건 채 진두지휘를 하신다. 우선 양지바른 툇마루에 떼어낸 문짝을 가로로 세우고 물로 불린다. 묵은 창호지를 다 떼어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젖은 수건으로 문살을 깨끗하게 닦아낸다. 그러고 나면 문살에 고루고루 풀칠을 하고 그 위에 새하얀 문종이를 바른다. 입안 가득 물을 품었다가 새로 얹은 창호지 위로 확 뿜어낸다. 문종이가 젖으면서 골고루 쫙 펴지고 문살에 달라붙는다. 그러면 빗자루로 한번 쓸어주고 마른 수건으로 살살 눌러주면 된다. 물론 손잡이가 달린 쪽은 많이 쓰기 때문에 두 겹으로 발라야 한다.



    이때 우리 형제들은 앞마당을 온통 다 차지하고 있는 화단으로 달려간다. 노란 국화꽃과 잎사귀, 그리고 코스모스 꽃잎과 잎사귀를 따서 손잡이 쪽에 예쁘게 펴놓고 문종이를 오려서 그 위에 한 겹 더 바른다. 그리고 그늘진 곳으로 옮겨서 종일 시원한 바람에 말린다.

    평소 자질구레한집안일은 손도 안 대는 아버지셨지만 도배장판이나 창호지를 바르는 일은 전적으로 아버지 몫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되풀이되는 제법 큰 집안행사 중의 하나였다. 아버지는 그만큼 집 단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1950년대는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도배를 한번 하면 누렇게 찌들도록 그냥 쓰는 것이 보통이요, 대개 창호지는 구멍이 숭숭 뚫릴 때까지 썼다. 친구집에 놀러가 봐도 예쁘게 꾸미고 사는 집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건 아껴 써도 집만큼은 깨끗하고 반짝반짝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게 어디 가겠는가. 1973년. 우리 내외는 하와이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막 둘째를 해산하고 났을 때인데, 갑자기 침실이 두 개 딸린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남편이 뉴욕으로 현장실습을 나가고 없는 사이 빈집이 나온 것이다. 별수없이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찬장 가득 채웠던 예쁜 그릇들

    낮에 사람들이 이삿짐을 실어다 주기만 했지 가구들을 제자리에 놓는 일은 내 차지였다. 혼자서 무거운 가구와 침대 등을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가장 맘에 드는 위치를 찾을 때까지 옮기고 또 옮기고…. 책장정리까지 하고 나니 날이 훤히 밝아오는 게 아닌가. 그때나 지금이나 가구를 한자리에 놓고 쓰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꾸어놓는 것이나, 한밤중에 그 서랍을 열면 거기엔 꼭 가위가 있어야 하는 것도 나는 아버지를 빼닮았다.

    우리 집에서 좀 값이 나갈 만한 귀한 살림살이는 모두 아버지가 사들이신 것들이었다. 널찍한 대청마루 오른쪽에는 쌀뒤주가 붕어자물쇠를 물고 있고 왼쪽에는 유리문이 달린 삼층 찬장이 있었다. 그 찬장에 가득 들어 있던 예쁜 유리그릇들은 하나같이 아버지가 출장길에 사오신 것들이었다. 보기만 해도 즐거워지던 그 예쁜 그릇들. 우리 집에만 그런 그릇이 있는 것 같아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우리가 매일 덮고 자던 십자수 놓인 이불잇, 베갯모, 방석 등도 모두 아버지가 사다 나른 물건들이다. 6년간의 하와이 유학시절, 나도 아이들을 앞세우고 쇼핑센터에 가면 항상 침구류와 그릇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었다. 지금도 나는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멋부리기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커피를 드실 때도 커피잔에 딱 7부나 8부 정도의 양을 담아 드시기를 즐겼다. 그런데 아버지를 하늘같이 섬겨온 어머니의 철학은 좀 달랐다. 당신이 사랑하는 남편에게 뭐든지 많이 드시게 하고 싶은 속셈이 있었다. 그것이 비록 몸에 안 좋은 커피라고 해도 말이다. 아버지가 “여보! 커피나 한잔 합시다” 하시면 어머니는 득달같이 부엌으로 달려나가 커피를 준비해 오신다. 어머니는 언제나 커피를 잔에 찰랑찰랑 넘치게 담기 때문에 쏟을까 조심조심 걸어 들어와야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늘 “여보! 커피를 멋으로 마시지 배 부르라고 먹소?” 하며 핀잔을 주셨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끄떡도 안 하시고 열 번이면 열 번 모두 그렇게 넘치는 커피잔을 내놓으셨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두 분이 그렇게 성격차가 컸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정도로 금실이 좋았다는 점이다.

    “커피를 멋으로 마시지 배 부르라고 먹소?”

    우리가 사는 읍에서 아버지는 꽤 멋쟁이에 속했다. 우선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는 매일 펜대를 놀리는 직장으로 출근을 하시니 늘 양복차림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그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지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바지주름을 칼같이 세워서 입으셨고 넥타이도 색을 맞추어 매셨다. 흰색에 가까운 밝은 베이지색 양복을 차려입으신 채 모자를 쓰고 백구두까지 신으면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아버지는 여간 멋쟁이가 아니었다.

    당시 아버지는 연식정구를 치셨는데 그때도 반드시 흰 운동복에 흰 모자를 쓰고 흰 운동화를 갖추어 신고 나가셨다. 이런 아버지를 닮은 것일까. 나도 옷색깔을 맞춰 입는 편이다.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매일 색상을 맞춰 옷을 바꾸어 입는다. 오늘은 빨간색, 내일은 하늘색, 그 다음날은 노란색…. 나는 비교적 원색의 옷을 많이 입는 편이다. 일하는 여성으로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강한 색상의 옷을 즐겨 입는다. 이런 나의 색감이나 동생이 연극을 하는 것, 언니와 여동생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이래저래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닌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도호국단장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교장선생님께 학생들의 뜻을 전달할 일이 있어 교장실을 방문했었다. 아주 오래 전 일이라 그때 무슨 이유로 교장실을 찾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장선생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따르지 않고 다른 입장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교장선생님, 그게 아니라 저희들이 바라는 것은…”

    이렇게 내 주장에 대해 전후 사정을 설명하려는데 갑자기 교장선생님께서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아니!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을 보았나. 교장한테 말대꾸를 하다니. 너는 아버지도 없냐?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나는 기가 막혔다. 아무리 교장선생님이라고 해도 학생의 얘기를 다 들어보시려고도 하지 않다니.

    “제 말씀을 다 듣고 나신 후에 말씀을 하셔야지요.”

    “아니! 이놈이 그래도 계속 말대꾸를…”

    우리에게 설득당하던 아버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니 말 잘하기로 소문난(?) 손봉숙이도 별수없었다. 무조건 권위로 내리누르려는 교장선생님께 내 의견을 꺼내볼 수조차 없는 것이 너무도 억울했고 더구나 아버지까지 들먹이는 것이 너무 분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결국 나는 교장실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학교 전체로 퍼졌다. 내가 교장선생님과 싸웠다는 식으로.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처럼 권위로 자식들을 누르는 법이 없었다. 우리들이 뭔가를 해달라고 조르면 아버지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그래? 왜 그게 필요한지 나를 한번 설득해봐라.”

    나는 머리를 짜내고 짜내서 아버지를 설득했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설득을 당해주셨다. 내가 왜 친구 집에서 늦을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왜 이 달에는 용돈이 더 필요한지, 그리고 왜 새로운 참고서가 필요한지 등등. 이유가 뭐든 상관없었다. 다만 내가 논리적으로 아버지를 설득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내가 말을 논리적으로 잘하니까 누구든지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설득을 당해주시는 거라고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자신만만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아버지의 이런 훈련은 지금까지도 내 스스로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표현력으로 연결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말로 싸우는 데는 누구보다 자신있어하니 말이다.

    “말로 당신을 어떻게 당하겠소?”

    지금도 남편은 나와 논쟁 끝에 세가 불리하다 싶으면 이 한마디로 물러서주곤 한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의 민주적 훈련이 비단 말을 논리적으로 하고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게 무서운 사람(?)이 없게 만드는 힘도 함께 길러준 것 같다. 집에서 가장 권위 있고 높은 사람은 물론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항상 우리들의 말동무가 돼주셨고 또 우리에게 설득을 당해주셨다. 어떻게 보면 교장선생님 말씀대로 버릇없는(?) 녀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보면 어떤 자리 때문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만 권위를 인정하는 내 버릇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습관을 만들어준 것 같다.

    말 잘하는 딸도 결국 아버지 탓

    여태까지 나는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그가 가진 권력 때문에 주눅들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권력자의 앞이라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한 적은 더더욱 없다. 물론 그 말이라는 것이 대부분 쓴소리요, 바른소리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출세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러한 가르침 덕분에 인간답게, 그리고 가장 나답게 산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는 6남매 중 막내아드님이셨다. 우리 할머니에게는 늦둥이인 셈이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기 위해 할머니 몰래 준비를 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신 할머니가 ‘내가 죽기 전에는 못 간다’며 아버지를 잡으셨다. 결국 심지가 굳지 못한 아버지는 그대로 눌러앉아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마치고 지금의 농협 전신인 농업은행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이 일을 업(業)으로 삼으셨다. 아버지는 철필 글씨가 아주 좋으셨던 데다 특히 주산 실력은 수준급이었던 모양이다. 자기관리에 철저하신 분이라 일도 꼼꼼하게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셨다. 어머니가 나서서 부업 삼아 몇 가지 사업에 손을 대기도 하셨지만 두 분 다 사업가 기질은 없었던 것 같다.

    한문공부를 열심히 하셨던 아버지는 명심보감을 가정교육의 본보기로 삼으셨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는 글귀는 ‘인이식이지위대(人而識而之偉大)’였다. 사람은 아는 것이 위대하다는 뜻이다. 특히 아버지는 “사람이 ‘알 식(識)자’ 대신에 ‘밥 식(食)자’, 즉 먹는 것을 중히 여기면 위가 큰, 즉 배만 큰 무식한 사람이 된다”고 강조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저녁마다 아버지의 이 한문풀이를 들으면서 각자 자기 책상으로 갔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배만 큰 사람이 된다고 하시니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識’자 대신 ‘食’자만 밝히면

    공부라고 하면 어머니는 아버지보다도 한술 더 뜨셨다. 한학자이셨던 외할아버지는 동네 서당의 훈장을 지내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매일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르치시면서 어머니만큼은 여자라는 이유로 못 배우게 하셨던 모양이다. 여자가 유식하면 팔자가 세다는 것이 외할아버지의 지론이었다고 한다. 못배운 것이 한(恨)이 되었던 어머니는 처녀 때부터 ‘딸을 낳으면 끝까지 공부시키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는 8남매 중 다섯이나 되는 딸들을 모두 대학교까지 공부시키는 데 성공하셨다. 어머니는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놓고 우리 형제들을 편애하셨다. 공부만 잘하면 노골적으로 잘해주셨다. 어느 날인가는 우등상장을 받아온 나와 내 동생, 달랑 둘만을 빵집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다른 자식들에게는 너희들도 이런 대접 받고 싶으면 열심히 하라는 식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우리 어머니는 일찌감치 치맛바람을 일으키셨던 것 같다.

    시골 소읍에서 8남매를 교육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위로 두 딸을 먼저 서울로 유학 보내셨다. 등록금에 하숙비에 교통비까지, 두 딸의 유학비용을 대는 것은 시골살림에 턱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두 분은 자식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심하셨다. 8남매가 하숙비라도 안 내면 학교 공부는 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신 모양이다. 그게 1961년의 일이다. 그러나 서울살이는 바로 고생살이의 시작이었다. 시골집에서 보낸 내 유년시절은 넉넉하고 편안하고 아름다운 나날들이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늘 가정적인 아버지와 정이 넘치는 어머니가 계셨다. 그리고 부귀다남(富貴多男)의 상징처럼 8남매가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서울행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민주당의 집권 덕이었다. 어머니는 고향에서 골수 민주당원이었다. 무슨 정치적인 이념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어머니의 일가 중에 서울에서 출세한 유능한 분이 계셨고 그분이 영주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54년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단순한 분이셨다. 한번 돕기로 결심하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발벗고 나섰다. 발이 부르트도록 이 동네 저 동네 다니시며 선거운동을 했지만, 결과는 투개표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던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리고 이분은 4년 후인 1958년 또다시 도전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당시 영주 같은 소읍에서 야당이 이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연스레 아버지, 어머니는 영주 일대에서 민주당원으로 낙인 찍히는 바람에 자유당의 눈밖에 나버렸다. 그 후로 유무형의 압박과 제재가 뒤따랐던 모양이다. 자유당을 지지했던 아버지의 입사 동료는 직장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아버지는 얼토당토않은 좌천만 거듭했다. 그래도 시골에서는 유지에 속하셨던 아버지, 어머니가 자유당을 도왔었더라면 우리 가족에게는 좀더 편안한 길이 보장돼 있었을 것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정치적 보복 같은 것이었지만 당시 중고등학생이었던 나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어머니의 선거운동 덕에 온 가족이 서울로

    1960년. 4·19학생혁명은 하루아침에 세상을 민주당 천지로 뒤바꿔놓았다. 어머니도 덩달아 신이 나셨다. 세 번째 도전한 그 분은 아주 쉽게 당선됐다. 어머니는 그분에게 8남매를 공부시키려면 서울로 갈 수밖에 없으니 서울에서 아버지 자리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신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서울행을 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울 전농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서울집은 고향집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두고 온 고향집에는 서울집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많았다. 빗자루 자국이 선명하던 그 넓은 마당이며 철따라 다퉈가며 갖가지 꽃을 피워내던 꽃밭, 뒤뜰에 울타리 높이만큼 쌓아올렸던 장작더미, 여름에는 큰 대자로 누워 목청껏 노래부르며 놀던 그 널찍한 대청마루. 고향집엔 사랑이 있었고 행복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다.

    민주당의 집권은 김옥균의 삼일천하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아버지는 1961년 봄에 서울로 전근 왔지만 몇 달도 못 다닌 채 5·16혁명이 터지고 말았다. 혁명이 나자 민주당 정권에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모두 내쫓기기 시작했다. 불과 몇 달 만이었다. 평생 배운 것이라곤 주판알 튕기는 것밖에 없던 아버지는 그 후로도 몇 달을 난감하게 지내셔야 했다.

    당시 우리 8남매 중 6명이 줄줄이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들은 매일 아침 학용품을 사야 한다, 버스표를 사야 한다며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당가 우물에서 사시사철 펑펑 쏟아지던 물은 간데없고 이제는 열 식구가 물까지 사먹어야 하다니. 결국 아버지 어머니는 집을 줄여서 우리들의 등록금을 내셨다. 또 대학생이 된 나도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도 이 아르바이트를 중단하지 못했다.

    5·16, 그리고 아버지의 실직

    그 후로 아버지는 개인 회사에 취직하셨지만 서울생활이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멋내면서 갖추고 사시기엔 서울살이가 너무나 옹색했다. 결국 이런 생활의 변화가 아버지에게 고혈압이라는 지병을 안겨준 모양이다. 1969년 이른 봄, 아버지는 회사에 나가신 뒤로 귀가하지 않았다. 평소에 없던 일이었다. 당시는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걱정을 하면서도 출가한 언니네로 손주 보러 가셨겠거니 하면서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새벽녘 황급히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응급실에 계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병원으로 달려간 우리 가족은 수술을 하면 50%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담당 의사의 말을 듣고 수술동의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백여 일간 나는 서울대 신경외과 병실에서 뇌수술을 받으신 아버지의 병간호를 했다. 물론 어머니가 계셨지만 병실에서 자면서 간호하는 일은 내가 맡았다. 아버지는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호스로 음식물을 투여해야 하는 상태였다. 온 가족이 정성껏 매달렸지만 쓰러지신 지 5개월 만에 아버지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시고 말았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첫경험이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옆에 두고 밥을 먹어야 했던 자신을 저주하며 눈물밥을 삼키던 기억을 어찌 잊으랴.



    그러나 정작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8남매 중 이제 겨우 딸 하나 치우시고 나서 7남매를 고스란히 떠안은 것이다. 하루아침에 가장(家長)이 되신 어머니. 그래도 타고난 활달함과 융통성으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바로 등록금’이라면서도 8남매를 다 대학으로 밀어보내신 장한 어머니. 이제는 그 어머니도 사랑하는 아버지 곁에 가 계신다.

    “아버지! 아버지를 빼닮은 이 셋째딸은 오늘도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의 시시비비를 가린다며 시민운동의 한복판에서 목청을 돋우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부디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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