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여성’과 ‘여신’의 경계를 넘어

프시케 vs 자청비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12-03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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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과 사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여성’과 ‘여신’의 경계를 넘어

    프랑수아 제라르의 ‘프시케와 에로스’.

    어린 시절, 놀고 싶은 마음과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 사이에서 갈등하며 가슴속에 콱 박힌 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아실현’이었다. 자아를 실현한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이지만, 그때는 ‘성공’보다는 ‘자아실현’이 더 멋진 말인 것 같았다.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우선 ‘자아’를 알아야 하고, ‘내가 되고 싶은 자아’와 ‘현재의 자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해야 했다. 장래희망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던 10대 시절에는 ‘자아실현’이 자연스럽게 ‘원하는 직업’을 얻는 일과 동일시됐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보니 단순히 ‘직업’만으로는 ‘내 안의 너무 많은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단지 ‘일’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 수많은 자아가 남아 있었다.

    어른이 되고 나니 ‘자아의 실현’보다는 ‘자아의 분열’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됐다. 인생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자아는 실현되기는커녕 점점 더 많은 수로 걷잡을 수 없이 분열됐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분열(?)은 ‘일’과 ‘사랑’의 분열이었다. 사실 이 분열은 내가 선택한 분열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강요된 분열이었다.

    사회는 ‘일’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한 여성을 우대하고, 여성의 본질적인 고민은 ‘일’과 ‘사랑’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라는 가치관을 심어줬다. ‘직업’은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해야 하는 여성의 인간적 한계를 시험하고, ‘사랑’에만 충실하고자 하는 여성 또한 현대 사회에서는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일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여성에 대한 양가적 시선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강요된 선택의 기로가 여성의 ‘자아실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일과 사랑을 모두 조화롭게 성취한다 해도 완전한 자아실현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일’과 ‘사랑’을 다 합친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삶’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과 사랑말고도 더욱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생의 고민에 부딪힌다. 일이나 사랑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인생의 수많은 통과의례를 경험하며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힌트를 던져주는 것이 프시케나 자청비 같은 신화 속 여성들의 삶이 아닐까. 그녀들은 현대 사회의 여성들처럼 일과 사랑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 앞에 던져진 ‘운명’과 싸웠다. 자신이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자기 앞에 주어진 ‘소명’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인간은 방황할 수밖에 없다. 프시케와 자청비가 평범한 ‘여성’에서 ‘여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단순히 자아실현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바꾸고 나아가 타인의 고통까지 치유할 수 있는 여성적 에너지, 곧 남성에게 결여되기 쉬운 아니마(anima)의 실현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해결해나가야 한다. 이것을 분별(sorting)이라고 말한다. 가정에서 어머니나 아내의 도움 없이 되는 일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양말 한 짝은 어디 있어?’ ‘준비물이 없어’라는 식으로 말이다. 가정에서 분별이 필요할 때 남성은 여성에게 간다. 남성은 흔히 세상사 같은 중요한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질서를 찾는 문제를 여성에게 미룬다. 그러면서도 남성은 여성에게 원래부터 골라내고 분별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동연, 2006, 91쪽

    2 여성의 ‘빛’을 두려워하는 남성들

    남성의 무의식에는 아내가 자기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동의하기를 바라는 부분이 있다. 결혼을 바라보는 남성의 태도는, 자신을 위해 돌아가야 할 집은 필요하나 그 집이 골칫거리는 아니어야 한다는 식이다. 남성은 다른 일에 몰두할 때 집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여성은 남성의 이런 측면을 발견하게 되면 큰 충격을 받는다. 여성에게 결혼은 모든 것에 대한 서약이다. 그러나 남성은 그렇지 않다. 자신에게는 결혼이 삶의 전부였는데, 남편에게는 삶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며칠간 울었다는 여인을 만난 적이 있다.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40쪽

    ‘여성’과 ‘여신’의 경계를 넘어

    류준화씨의 ‘자청비’. 자유롭고 진취적인 여신의 전형을 보여준 자청비의 머리카락을 서예의 획처럼 표현했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 자청비와 문도령의 사랑 이야기에는 여성의 진심 어린 행동이 남성에게 뜻하지 않은 ‘위협’이 되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녀들은 최선을 다해 남성을 사랑하고 그들과 친밀하고도 대등한 관계를 맺으려 한다. 그러나 프시케가 에로스의 진실을 알려고 하는 순간, 자청비가 문도령과 ‘대등한’ 처지에서 소통하려 하는 순간, 남성들은 대경실색하며 줄행랑을 친다.

    에로스는 프시케에게 두 가지 금기 사항을 제시했다. 첫째,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 것. 둘째, 자신이 어디에 가든 묻지 말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자신을 속속들이 알려고 하지 말라. 어처구니없지만, 이 또한 에로스뿐만 아니라 많은 남성의 본질적인 심리이기도 하다.

    한사코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캄캄한 밤에만 ‘사랑’을 나누려 하는 에로스의 얼굴을 너무도 보고 싶은 나머지, 프시케는 잠든 에로스의 얼굴에 등불을 비춘다. 물론 목소리와 체온만으로도 충분히 에로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지만, 얼굴도 모르고 사랑한 남편의 ‘가면 뒤 맨얼굴’을 보는 순간 프시케는 깜짝 놀라 등불의 기름을 흘리고 만다. 뜨거운 기름에 놀라 벌떡 잠이 깬 에로스는 ‘감히’ 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려 한 프시케를 용서하지 못하고 훌쩍 떠나버린다.

    문도령도 자청비가 자신과 ‘맞먹으려’ 할 때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천상의 왕자였던 문도령은 천신만고 끝에 사랑하는 자청비를 다시 만나게 되지만, ‘문 열어라’고 독촉하는 문도령 앞에서 자청비는 장난기가 발동한다. 겉창 구멍으로 손가락을 내놓아보라고. 그러면 누군지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겠노라고.

    문도령이 겉창 구멍으로 손가락을 내놓자 자청비는 웃으면서 바늘로 손가락을 콕 찔렀다. 말괄량이 자청비의 장난기 어린 애정 행각이었지만 그녀의 진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문도령은 화가 나서 돌아가버린다. 토라진 문도령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청비는 온갖 시련을 겪는다.

    자청비의 시련은 이미 가정에서부터 시작됐다. 정수남이라는 하인이 그녀를 유인해 성폭행하려 하자 그에 대한 정당방위 도중에 정수남을 죽이게 된 자청비. 그녀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정수남을 해쳤지만, 부모가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한다. 아니나 다를까 부모는 ‘여식’보다는 ‘종놈’이 가정경제에 도움이 된다며 자청비를 쫓아내고 만다. 온갖 비방을 동원해 정수남을 살려내니 더욱 노발대발 한다.

    “아니, 계집년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한다니! 이게 무슨 말이냐! 이런 년을 집에 두었다간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어서 나가거라.”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홀대하는 부모, 열심히 살면 살수록 그녀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떠나 자청비는 새로운 모험을 시작한다. 여성의 몸으로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어려움을 깨달은 자청비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나아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남장소녀로 변신하고, 산전수전 공중전을 거쳐 문도령과 사랑을 나누고 옥황상제의 미션까지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님 아버님,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종놈이 아깝습니까? 자식이 아깝습니까?”

    “그것도 말이라고 하느냐? 아무리 종이 아까운들 자식보다 더 아까울 리가 있겠느냐?”

    “그럼 아버님 어머님, 정수남이 하는 행실이 하도 고약하길래 저 산중에서 죽여 두고 왔습니다.”

    죽인 사연을 자세히 설명할 사이도 없이 부모님의 야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년아 저년아, 계집년이 사람을 죽이다니. 네 년은 시집가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종은 살려두면 우리 두 늙은이 걱정 없이 먹여 살려준다.”

    -현용준, ‘제주도 신화’, 서문당, 1996, 164~165쪽

    3 ‘너’와 ‘나’를 넘어 ‘그곳’으로 가는 길

    프시케가 시어머니 아프로디테가 제시하는 혹독한 미션을 수행하고, 자청비가 자신의 부모와 시부모는 물론 옥황상제의 미션까지 수행하는 모습은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여성의 본질적 운명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신분이던 프시케와 자청비가 신의 아들이던 에로스와 문도령을 사랑하고,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여신’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그녀들이 차지한 ‘여신의 지위’ 때문이 아니라 그녀들이 겪었을 인간적 고뇌, 여성적 고통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힘겨운 존재의 문턱을 넘는, 혹은 넘어야 할 모든 여성은 프시케와 자청비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사랑’을 얻기 위해, 단지 ‘아이’를 얻기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여성의 아픔은 최첨단 문명의 이기로도 쉽게 치유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녀들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문턱은 바로 ‘죽음’의 문턱이었다.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요구대로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에게서 ‘아름다움의 묘약’을 얻어 오지만, 지극히 ‘여성스러운’ 유혹을 견디지 못한다. 절대로 ‘아름다움의 묘약’이 들어 있는 상자를 직접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아프로디테의 금기를 깨뜨린 것이다. 이 묘약은 바로 ‘죽음 같은 잠’이었다. 목숨을 걸고 하계를 건너가 간신히 구해 온 비밀 상자 속에는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인, 여신의 금기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정말 ‘죽음 같은 잠’에 빠지자 지금까지 팔짱 끼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던 남편 에로스가 이제야 나선다. 아프로디테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내를 구해낸 것이다. 이로써 프시케는 아프로디테가 숨겨놓은 마지막 미션, ‘죽음’을 이해하게 된다. 죽음 같은 잠을 경험함으로써 마침내 인간과 신의 경계를 뛰어넘은 프시케는 비로소 ‘여신’의 반열에 올라 에로스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녀가 낳은 딸의 이름은 바로 ‘기쁨(Pleasure)’이었다.

    한편 천신만고 끝에 문도령의 부모를 만난 자청비는 ‘며느리 자격’을 제시하는 미래 시부모의 요구사항을 듣고 절망한다.

    “내 며느리 될 사람은 쉰 자 구덩이를 파놓고, 숲 쉰 섬을 묻어 불을 피워놓고 불 위에 작두를 걸어, 칼날 위를 타나가고 타들어와야 며느릿감이 된다.”

    어쩐지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전에 모든 시어머니가 며느릿감을 향해 보내는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닮지 않았는가. 가련한 자청비의 운명 앞에 대성통곡하는 문도령을 뒤로한 채 자청비는 죽기를 각오하고 칼날 위에 몸을 싣는다.

    자청비는 눈물로 세수하며 백릉 버선을 벗고 박씨 같은 발로 작두 위에 올라섰다. 앞으로 한 발짝 뒤로 두 발짝, 아슬아슬하게 칼날 위로 걸어 나갔다. 말할 것 없이 몇 발 못 가 숯불에 타 죽으리라 생각했는데 끝까지 무난히 타나가는 것이었다. 작두 끄트머리에 가서 내리려고 한 발을 땅에 내려디딘 순간이었다. 긴장이 조금 풀려서 그런지 작두를 디디고 있던 발뒤꿈치가 슬쩍 끊어졌다. 음부에서 피가 불끗 났다. 자청비가 속치맛자락으로 얼른 싹 쓸었더니 속치마가 더러워졌다.

    -‘제주도 신화’, 175쪽

    자청비는 그렇게 진정한 여성이 됐고, 제주도 신화는 바로 이 장면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

    “여자아이 열다섯 살이 넘어가면 다달이 몸엣것 오는 법을 마련했다.”

    여성이 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고통, 월경의 유래를 재치 있게 설명한 제주도 신화의 유머가 빛나는 대목이다. 자청비가 겪어야 한 상상초월의 고통은 월경이나 출산의 고통을 겪어본 모든 여성이 공감할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일’과 ‘사랑’만으로는 정돈될 수 없는, ‘여성성’이라는 운명의 미션을, 우리는 이렇게 프시케와 자청비의 간난신고를 통해 반추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고통, 도와준다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의 몫을 빼앗는 것만 같은 고통이 있다. 넘어진 아이가 혼자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아이가 혼자 일어서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으로, 그렇게 고통에 빠진 사람을 내버려둬야 할 때가 있다. 프시케가 에로스를 잃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녀가 그를 다시 찾기 위해 거쳐야 한 모든 통과의례, 자청비가 문도령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을 때 그녀가 견뎌내야 한 수많은 시험. 바로 그런 시험의 순간들이 우리가 반드시 혼자 겪어내야 할 운명의 터닝포인트들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성’이 되고, ‘어른’이 되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신’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 여성이 먼저 “여기 앉아서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한다. 남성은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진화의 매개자가 된다. 여성은 종종 남성에게 새로운 차원으로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빛을 비춘다. 남성은 내심 등불을 가지고 있는 여성에게 감사한다. 남성은 자신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여성의 빛에 의존하고 있다.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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