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무장지대로 가는 길은 온통 자연이다. 새가 날고 고라니가 뛰놀고 산버들이 춤을 춘다.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맞는 아침은 아이러니다. 한국전쟁 중부전선 최대의 격전지. 열흘 사이 주인이 무려 스물네 번이나 바뀌었던 곳. 고작 395m짜리 동산에 포탄 27만4954발을 쏟아부었고 국군 3400명, 중공군 1만4300여 명이 죽거나 다친 고지. 거기서 들리는 건 놀랍게도 한가로운 새소리뿐이다.
백마고지의 아이러니
전쟁 전 이름조차 없던 고지는 빗발친 포탄세례로 산 전체가 깊이 1m 가량의 모래밭으로 변했단다. 참혹한 모습이 마치 백마가 널브러진 것 같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린 그곳은 그러나 지금 외양으론 여느 고지와 크게 다름없어 보인다. 언덕 위 GP와 독전 구호판만 아니라면 아무데서나 마주칠 수 있는 민둥산 같다.
1952년 10월6일.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8군은 훗날 백마고지로 불릴 철원 ‘산명리 뒷산’에서 숙명적으로 마주쳤다. 그로부터 10월15일까지 열흘간 양측은 끝없이 밀고 밀리며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늘은 벌겋게 물이 들었다. 밤에는 야간폭격으로 일대가 달아올랐다. 포격과 폭격의 소음, 그리고 찢어지는 비명이 산을 울렸다.
초연에 가려 피아(彼我)조차 제대로 구분 못하는 상황에서 백병전도 벌였다. 중공군 병사들은 아편이나 독주를 마신 채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왔다. 잠시 총성이 그친 짬에 쏟아지는 잠에 떨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뜨면 참호엔 어느새 시체가 가득했다. 포탄이 떨어진 웅덩이엔 피가 고였다. 비가 오면 빗물과 눈물, 피와 땀 그리고 포연과 흙먼지가 함께 흘러내렸다.
중공군은 병사들의 손목을 쇠사슬로 기관총에 묶어 탈주를 막고 전투를 독려했다. 10차 공방전 때 강승우 소위 등 9사단 육탄 3용사는 수류탄만 뽑아들고 중공군의 기관총 진지로 뛰어들어 적과 함께 산화했다. 장병들의 이런 장렬한 투혼으로 국군은 끝내 백마고지를 지켜내 철원-김화-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백마고지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푹 파고 들어가 철원평야를 수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이 전투를 기리고자, 군은 민통선 바깥쪽 묘장초등학교 뒤 언덕에 위령비, 전적비와 기념관을 세웠다. 두손 모아 통일을 기원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전적비는 높이가 22.5m. 아라비아 숫자를 다 합치면 9가 돼 백마고지를 사수해낸 9사단을 기리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