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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균질의 매력’ 하재영

“‘바보들의 행진’으로 시대의 아픔 대변한 건 큰 행운”

‘무균질의 매력’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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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왜 안 하시죠?

“말주변도 없고 옛날 생각도 나고….”

-옛날 생각하는 게 싫은가요?

“돌이켜 생각하면 방황만 했던 것 같아요. 즐거운 날이 많지 않았죠. 요즘 젊은이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죠.”

갑갑하던 옛 시절을 이야기하기 싫었던 것일까. 그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요즘 가장 잘 되는 영화가 ‘실미도’냐”고 묻는다. ‘친구’가 갖고 있던 신기록 800만 관객을 넘어 1000만 관객 고지를 향해 순항중”이라고 답했더니, 대뜸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나는 강우석이 감독으로 대성할 줄 몰랐어요. 옛날에 그 친구가 정인엽 감독 연출부 막내였거든요. 그런데 일을 미련할 정도로 못하더라고.

바닷가 카페에서 영화를 찍는데 해일을 만드느라 물이 필요했죠. 감독이 좀 멀리 떨어진 바다에 가서 물을 받아오라고 했어요. 강우석 그 친구가 나보고 같이 가재요. 그때 내가 지프를 몰고 다니는 역할을 맡아서 차 열쇠가 있었거든요. 강우석이 드럼통을 껴 안고 옆에 앉고 내가 운전했는데, 커브 길을 돌 때마다 ‘어어어’ 하면서 드럼통을 떨어뜨렸어요. 드럼통이 양철로 된 거였는데, 바닥이 많이 닳아서 굉장히 날카롭더라고요. 이 바보가 그것도 모르고 껴안고 있었죠. 나중에 보니까 손이 피반, 물 반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때 ‘너는 감독 안 된다’고 그랬거든요. 우스갯소리지.”

-미련한 게 아니라 열정적인 거네요.

“너는 감독 안 돼, 임마. 야, 물을 카메라 보이는 데만 살짝 뿌리지 뭣 하러 안 보이는 데까지 다 뿌려…. 그러면서 우스갯소리로 감독 못 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강우석, 그 사람 하나뿐이에요.”

-그러니까 오기가 있는 거죠. 이제는 한국영화 파워 1인자인데.

“내게는 1인자라고 느껴지지 않고 그저 옛날 생각만 나죠.”

연극에서 영화로

-본론으로 돌아와서 몇 개 질문을 드립니다. 하재영씨는 1960년대 배우들처럼 신화적 인물은 아니죠. 그렇지만 독특한 캐릭터와 향취를 가진 배우인 것 같습니다. 굉장히 내향적이고 수동적이면서 상처받기 쉽고. 실제로도 그렇게 내향적인가요?

“실제 성격도 그래요.”

-무대에 오르는 게 겁나지 않았나요?

“처음 연극무대에 섰을 때 다리가 후들거렸죠. 내가 내 다리를 잡을 정도였으니까. 그때 오태석씨가 연출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티볼트가(家)의 똘마니 역할을 맡았어요. 그런데 첫날만 떨렸지, 그 다음부터는 재미있더라고요. 그러다 영화도 하게 됐죠. 하길종 감독이 극단 사무실로 전화해 ‘청계천에서 제일 높은 건물로 오라’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바보들의 행진’ 대본을 주었어요. 영화도 그렇게 어영부영 하게 됐어요. 영화에 대한 사명감, 이런 건 나와 거리가 멀었죠.”

-하길종 감독은 어떻게 하재영씨를 마음에 두게 됐습니까?

“왜 나를 캐스팅했냐고 물으니까 ‘네 얼굴이 탁 들어오더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별 말씀 없었습니다. 나도 굉장히 궁금했어요.”

-영철이란 인물에 대한 감독의 구상과 하재영씨 이미지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본인에게 ‘바보들의 행진’은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요.

“그럼요. 데뷔작이니까 더 그렇죠.”

충무로의 기린아, 분열과 순수와 반항으로 1970년대를 일갈했던 하길종은 1979년 서른여덟의 나이로 요절한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다. ‘바보들의 행진’은 하길종이 미국에서 돌아와 만든 세 번째 장편 영화였다. 청와대를 연상시키는 푸른 집을 배경으로 동성애와 치정으로 얽힌 한 집안의 몰락을 그린 ‘화분’(1972)과 한사군 시대의 비극적 부부를 통해 폭군의 압제를 드러낸 ‘수절’(1974)은 흥행에서 실패했고 누구도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가 어느 정도 자신을 추스르고 대중에게 다가가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세 번째 영화가 바로 ‘바보들의 행진’이다. 대학생들의 경쾌한 풍속도에 청춘의 상실감과 비애를 효과적으로 녹여 넣은 이 영화 역시 30분 분량이나 잘려나가는 참변을 겪었지만 서울에서만 20만 관객을 모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비평계에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원작자 최인호와 하길종은 단숨에 1970년대 청년문화의 대변자가 됐다.

‘바보들의 행진’은 핸드 헬드와 경사 앵글 등을 사용해 젊은이들의 불안감과 질식할 듯한 시대적 현실을 경쾌하게 잡아냈다. 장발을 단속하는 경관이 더 장발이고, 교정에서 담배를 피운 학생의 뺨을 때리는 교수가 당연시되는 사회. 누가 더 바보인지 모르는 ‘바보’ 테마는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과 함께 1970~80년대 영화를 이끌어가는 아이콘이 됐고, 영화 속 청춘들의 에피소드는 바로 1970년대 초반 젊은이들의 자화상이었다.

영철과 병태가 도망갈 때 흐르는 곡은 그 뜻도 의미심장한 송창식의 ‘왜 불러’이며, 또 다른 노래 ‘고래사냥’은 한동안 금지곡이 됐다. 감독은 영화 내내 그들을 서울 거리에서 ‘질주’시킨다. 뛰는 것, 뛰어나가는 것! 오직 질주만이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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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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