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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으니…

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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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으니…
1988년 여름 필자는 1주일간 거창에서 농촌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농민들은 저녁때만 되면 거창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막걸리를 따라주곤 했는데, 필자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해 봄 유족들이 궐기대회를 열고 땅 속에서 위령비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알았다(김영삼 정부시절인 1996년 1월5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법률’이 제정됐다).

신원중학교 뒷동산의 사건현장에는 3개의 비석이 있다. 전쟁의 공포는 유족들이 시신을 거두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건발생 3년 뒤인 1954년이 돼서야 주민들이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는데, 이때 뼈의 크기에 따라 남, 여, 어린이 묘로 나누어 안장했다고 한다. ‘남자합동지묘’ ‘여자합동지묘’ ‘소아합동지묘’라고 새겨진 비석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묘소에 소주를 붓고 참배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다녀갔는지 쓰레기통 안에는 술병이 가득했다. 멀리 도로 건너편으로 공사가 한창인 거창사건 희생자 묘역 및 기념공원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세운 모양의 조형물 양옆으로 추모하는 군인과 오열하는 유족의 동상이 보였다. 조형물 뒤편에 새겨진 표성흠 시인의 글이 나그네의 마음을 또 한 번 착잡하게 만들었다.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이들도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두 번 울었던 희생자들. (중략) 길손들은 여기 이곳을 그냥 무심코 지나지 마시라. 무언가 생각들을 좀 해보시라.’

버스를 타려고 시내 쪽으로 걸어 나오다가 구멍가게에 들렀다. 소주와 컵라면을 주문하자 가게 주인이 김치를 안주로 내놓았다. 추위를 이기려 연신 소주를 들으켜면서 53년이라는 세월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반세기가 지나서나마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공원이 들어선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 땅에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제2의 거창사건’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그것은 매우 슬픈 현실이다.



수승대 저녁풍광에 취하다

신원면에서 거창을 경유해 수승대(搜勝臺)로 향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는 수승대를 지나쳐 덕유산 방면으로 달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 내려오는데 오른쪽으로 펼쳐진 계곡이 절경이다. 이곳이 바로 위천이다. 덕유산은 깊은 골짜기만큼이나 멋진 풍광의 계곡을 여럿 품고 있다. 무주의 구천동, 함양의 화리동, 거창의 위천이 손꼽힌다. 수승대는 위천의 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과거 이곳은 거창신씨 문중의 터였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이 수없이 강조했던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나무기둥 하나도 그냥 세우지 않았다. 실제로 수승대를 거닐다 보면 주변의 풍광과 완벽하게 어우러진 정자인 요수정을 만나게 된다. 수승대의 명물이 거북바위인데, 요수정에서 계곡 쪽을 바라보면 거북의 형세가 그대로 드러난다.

수승대는 본래 수송대(愁送臺)로 불렸다 한다. 신라의 국력이 강성하던 무렵까지도 거창은 백제의 영토로 남아 있었는데, 당시 신라로 떠난 백제의 사신은 온갖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백제에서는 수송대에서 사신을 위한 송별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수송대는 ‘근심으로 떠나 보낸다’는 뜻이다.

수승대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황은 이곳을 방문하려다 갑작스런 왕명을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이때 이황이 거창신씨 문중의 신권에게 보낸 시에 ‘수승이라고 새롭게 이름을 바꾼다’라고 썼다. 지금도 수승대에는 이황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호방한 문장에서 새삼 대학자의 풍류를 짐작할 수 있다.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1월24일. 아침 일찍 국밥을 사먹고 택시를 탔다. 무주-거창간 37번 국도의 중간지점인 ‘빼재’가 백두대간 종주 네 번째로 이어지는 산행의 출발점이다. 추운 날씨 탓에 도로에 쌓인 눈이 녹지 않아 택시는 거북걸음으로 비탈을 올랐다. 빼재는 사냥꾼들이 동물을 잡아먹고 뼈를 쌓아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고갯마루에 ‘수령(秀嶺)’이라는 글씨가 있고 이곳이 ‘신풍령(新風嶺)’으로도 불리는 걸 보면, ‘빼어난 고개’라는 데서 빼재라는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택시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방한용품으로 중무장을 했는 데도 벌거벗은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가장 먼저 올라야 할 수정봉을 바라보니 산 전체가 거대한 빙벽처럼 느껴졌다. 택시기사는 우리에게 고개 뒤편으로 오르는 길을 알려줬다. 조금이라도 쉽게 산행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빙벽 대신 뒤편의 넓은 길을 택했다.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였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은 코스였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록 대간 마루금을 만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지도를 꺼내 방향을 살펴보고 나서야 산중턱 갈림길부터 반대로 걸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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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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