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나무는 앙상하다. 아직까지 가지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 하나가 바람이 불자 툭 떨어진다. 나뭇잎 한 장을 주워 들고 물어본다. 넌 어디에서 왔느냐? 누가 너를 떨어뜨렸니? 지난 가을 나무는 가지와 잎자루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 나뭇잎으로 흘러가는 영양분을 차단했다. 잎을 떨어뜨리는 떨켜. 겨울을 나기 위해 나뭇잎은 나무를 떠난다. 대신 나무가 잘 산다. 이젠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을 도와주는 떨켜, 우리 인간 유형 중에 이 떨켜형이 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사기열전’에 나오는 자객열전의 영웅들을 나는 ‘떨켜 인간’이라고 부른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들
내 책상 위에는 안중근 장군의 휘호가 새겨진 작은 병풍이 있다.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과 같은 휘호 옆에는 단지(斷指)한 손도장이 찍혀 있다. 어진 이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몸이 묶이는 치욕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사마계주(사기의 ‘일자열전’에 나오는 인물)는 말했다. 안중근 장군은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테러리스트이지만, 우리 혹은 나는 안 장군을 어진 사람으로 본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장군처럼 세상을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절절하게 온 힘을 다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깨진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듯, 온몸을 던져 자신의 목숨을 거부하고 세상의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세상을 움직이겠다는 말이 공허하게, 혹은 코미디처럼 들리는 세상이다. 사나이 대장부라는 말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세상. 사내란 그저 월급 타고, 가족 부양하고, 착한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세상이다(그것 역시 보람찬 일이긴 하지만, 왠지 성에 차지 않지 않은가). 이제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와 같은 사내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일산에 사는 늙은 선배는 한때 말했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말은 마구간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늙은 선배도 언제부터인가 술을 먹다가 밤 11시가 되면 마구간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마구간의 말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세상과 사내들의 삶이 자잘하게 쪼개지고 무너지고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개념 자체가 바뀌어버려서인지, 우리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대의를 향해 길을 떠나는 삶 자체를 잊어버린 지 오래다. ‘자객열전’에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와 같은 사내들이 있다. 책장을 넘기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나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다.
‘자객열전’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자객들이 있다. 모두 다섯 명의 자객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거사에 성공한 이도 있고, 실패한 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성공과 실패 이상의 울림을 전한다. 그게 뭘까 싶었다.
열전에 처음 등장하는 자객은 노나라 장수 조말이다. 그가 날카로운 비수 하나로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은 기묘한 사건이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조말은 노나라 장공을 섬겼는데, 제나라와 세 번 전투를 치러 모두 패했다. 노나라 장공은 수읍 땅을 제나라에 바치고 화친을 청했다. 당신이 강하니 우리 땅 좀 가져가고 전쟁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제나라의 환공은 이를 허락하고, 승리자답게 기분 좋은 술자리를 열었다. 그때 조말이 비수를 들고 뛰어올라, 환공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하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범하는 건 가혹한 일이다.’ 비수로 일단 상대를 제압하고 약한 나라의 어려움을 겸손하게 이야기한 다음 간곡하게 부탁했다.
“군주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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