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불쌍’이 음악 취향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멘델스존의 실내악곡, 포레의 가곡이나 피아노곡들, 생상스의 협주곡이나 교향곡도 즐겨 듣는다. 카라얀의 화사한 사운드, 번스타인의 재기발랄, 안 되는 곡 없이 무한정한 레퍼토리로 질리게 만드는 유진 오먼디의 지휘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을 싫어했다. 이유는 단 하나, 행복한 생애를 살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행복감은 공허한 사람의 전유물이라고 경멸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웬일이니, 이제 내가 ‘불쌍’을 주장하면 사람들이 웃는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 벗어나야 합니까?’
이유는 너무나 단순한 데 있다.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것. 나를 ‘불쌍’으로 밀어 넣은 하고 많은 사유는 여일하건만 단 한 가지, 세월이 나를 먹고살 만한 부류로 바꾸어버렸다. 돈벌이에 그리 ‘애달캐달한’ 기억이 없건만 세월은 내게 출연료와 원고료와 강의료를 챙겨주었다. 그러다 마침내 거창한 줄라이홀을 만들어 정주케 해주었다. 그래도 변함없이 불쌍하다고 이 연사 소리 높여 외치고 싶건만 불쌍이 경제용어인 것을 미처 몰랐다. 가난하지 않으면 불쌍하지도 못한다니!
몇 주 연속 작업실을 떠나 지방을 다녀야 했다. 전북 김제로 충남 대전으로 전남 장성으로…. 서울의 몇몇 구청에서도 강연 요청이 있었다. 도청 군청 시청 구청의 공무원 교육에 나 같은 사람이 연사로 불려간다. 예술체험의 의미와 가치를 말하란다. 공무원의 삶에서 바흐나 슈베르트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공무원의 삶은 소설에서나 보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단조로운, 반복의 삶. 주인공 주제는 중앙호적 등기소의 사무보조원이다. 한 개인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모든 일이 기록되는 곳이다. 그는 남몰래 유명인의 신상을 뒤지며 세월을 죽인다. 공무원 주제에게는 자신만의 삶과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땅의 수많은 주제, ‘강사님을 뫼시러’ 마중 나오고 배웅하는 공무원들의 삶도 주제와 같을까. 문득 A 도청에서 만난 공무원과 B 군청에서 만난 공무원과 C 시청에서 만난 공무원을 도무지 구별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공무원들’로 묶이는, 구별되지 않는 군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강의의 주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체험은, 그러니까 집단소속에서 벗어나서 자기 고유의 실존에 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방의 강의장까지 장시간 오고가는 차 안에서 문득 공무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원이건 사업가건 학자건 백수건 모두가 한국이라는 촌락의 부족민처럼 소속과 뿌리에 연연하는 태도를 보인다. 근본 없는 자, 소속을 경시하는 자는 불학무식한 무뢰배로 취급된다. 그게 두려워 모두가 대한민국 청사의 ‘공무원들’이 되고자 서로서로를 묶는다. 한 두름의 군상 속이어야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한 소속감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내가 생각하는 예술체험의 목적성이 바로 그것이다.
“왜 벗어나야 합니까?”
어떤 강의장에선가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말문이 탁 막혔다.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왜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면 안 되느냐’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우선 말문이 막힐 것이다. 존재의 자유와 창조적인 삶의 추구란 너무나 지당하고 마땅한 가치로만 여겨왔다. 그런 추구가 거추장스럽거나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예술, 그중에서도 음악 공부를 하자고 빠져나갔다. 왜 그런 공부가 필요하냐고 재차 질문하겠지만 공부하고 나서 답을 생각해보자고 질문자를 달랬다.
음악은 어떻게 생겨났나
음악에 대한 공부는 가만히 머릿속으로 추리해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세상에는 왜 음악이라는 요물이 생겨난 것일까. 각종 음악사마다 첫 장에 저자 나름의 주장이 실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어차피 증거가 있을 수 없는 추정이다. 별다른 연구 없이 머릿속 생각만으로 음악의 기원을 유추해볼 수 있다. 각자 나름대로 새로운 학설을 창안해도 된다. 일단 유명 책에 등장하는 설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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