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의 율목봉산과 향탄봉산으로 지정된 송광사의 숲.
부처의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 통도사 숲이나 부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사찰 해인사 숲이 풍기는 위용과는 달리, 송광사의 들머리 숲이 한결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송광사가 부처의 교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사부대중이 모인 승보(僧寶)사찰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佛)과 법(法)을 수호하는 공간의 의미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주인공인 스님(僧)들의 수양 공간에서 풍기는 독특한 온기와 소박함이 숲을 통해서도 발현되고 있다면 지나친 아전인수일까.
송광사 제일의 풍경 ‘우화청풍’

들머리 숲길에서 본 극락교와 청량각.
다른 삼보사찰의 들머리 숲에 비해 송광사 들머리 숲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형상이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고자 돌다리 위에 전각을 세운 스님들의 지혜가 놀랍다. 극락과 청량의 세계에 진입하기에 앞서 극락교 주변의 정자에서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져보자. 작은 건축물 하나에도 자연과의 조화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옛 사람들의 지혜를 헤아려보는 것은 절집 숲을 찾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극락교에서 송광사 일주문으로 향하는 들머리 숲길은 계류를 중심으로 왼편에 인도가, 오른편에 차도가 분리되어 있다. 인도와 차도 중 어느 길을 택해도 아름다운 숲길은 절집에까지 이어진다. 오른편으로 난 차도를 따라 조금 오르다보면 느티나무, 단풍나무, 층층나무와 같은 넓은잎나무로 구성된 활엽수림 속에 노송들이 길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절집이 겪은 굴곡의 현장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송광사의 풍광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편백 숲도 뜨문뜨문 나타난다.
송광사 들머리 숲의 나무들이 활엽수는 물론이고 침엽수인 소나무마저 대부분 굽은 형태로 자라는 데 반해, 일본에서 도입한 편백과 삼나무는 쪽쪽 곧은 형태로 자라는 특징 때문에 조화롭지 못한 풍광을 연출하기도 한다. 우리의 전통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편백 숲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스님들의 족적을 나타내는 또 다른 흔적이다.
숲과 물과 함께 바람소리까지 절묘하게 어울리는 송광사 제일의 풍광은 능허교(凌虛橋)와 우화각(羽化閣)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조계문을 들어선 참배객이 경내로 진입하려면 먼저 계류를 건너야 하는데, 그 통로가 바로 능허교와 우화각이다.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신선이 된다’는 뜻을 지닌 우화각은 소동파의 적벽가에 나오는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에서 딴 것으로, 불국토로 들어가기 위해 참배객이 가져야 할 순수한 마음 자세를 담고 있다. 이 일대의 풍광은 송광사의 대표적 상징이 되어 오늘날도 ‘우화청풍(羽化淸風)’이라는 구절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우화청풍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송광사의 또 다른 상징은 고향수(枯香樹)다. 고향수는 우화각과 세월각(洗月閣) 사이에 선, 말라비틀어진 죽은 향나무 그루터기를 말한다. 산내 부속암자인 천자암의 곱향나무(일명 雙香樹·천연기념물 88호)와 함께 이 절집에 전해 내려오는 지팡이 설화의 주인공이다. 두 나무 모두 향나무지만, 고향수는 900년 전에 죽은 고사목이고, 곱향나무는 800년째 생을 이어온 살아 있는 나무라서 더욱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