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사를 상징하는 능허교와 우화각.
송광산사고에는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 및 일제 초기에 이르기까지 송광사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 불교의 흐름뿐 아니라 미술사, 건축사, 사원경제사, 지방사회사, 문학사에 활용할 수 있는 소중한 내용도 담겨 있어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이를 활용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다. 하지만 여기에 기록된 산림부의 중요성을 인식한 산림전문가는 별로 없었다. 송광사 승보박물관장 고경(古鏡)스님의 배려 덕택에 아무나 관람할 수 없는 ‘산림부’를 직접 확인하고, 1830년에 지정된 율목봉산(栗木封山)과 1900년에 지정된 향탄봉산(香炭封山)에 관한 귀중한 목패 유물을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절집 숲을 순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덕분이었다.
송광사의 산림부가 중요한 이유는 크게 3가지 내용 때문이다. 먼저 이 산림부를 통해서 조선시대에 시행된 율목봉산의 지정과 관리 및 이용에 관한 자세한 절차를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둘째, 15년간에 걸쳐 사찰림의 소유권 분쟁에 대한 조선시대의 송사(訟事)가 자세히 수록돼 있어 사찰림의 소유권 확립과정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셋째, 사찰림의 조림과 경영에 관한 일제 강점기의 시업안(施業案)도 수록돼 있어 사찰림에 대한 일제의 산림정책을 엿볼 수 있다.

보조국사의 향나무 지팡이 설화가 녹아 있는 고향수(枯香樹).
송광사보다 85년 앞서 1745년부터 율목봉산을 운영한 연곡사의 경우 율목봉산에 대한 몇몇 기록은 남아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전하는 내용에 따르면 율목봉산의 관리 책임을 위해 연곡사의 주지스님이 도제조(都提調)로 임명됐으며, 그 덕분에 연곡사는 지방 향리들의 경제적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선박 건조 등의 목적으로 밤나무를 남벌해 연곡사 일대가 율목봉산의 기능을 더는 수행할 수 없게 됐고, 그 책임이 두려워 1895년 스님들이 절집을 버려 폐사로 변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조선시대의 기록은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 편찬)의 ‘경상도 하동부 산수조(山水條)’에서 찾을 수 있다. ‘하동부 산수조’에는 “직전동 서북쪽 70리다. 지리산 남쪽에 있는데 율목봉산이 있다(稷田洞 西北七十里 智異之南 有 栗木封山)”고 기술되어 있다. 바로 연곡사의 율목봉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내용은 이미 학계에 알려진 사실이다.
국가가 직접 감독한 栗木封山
조선 조정은 율목봉산을 어떻게 지정했을까. ‘사고’에는 율목봉산의 지정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중창 불사를 위해 왕실의 재정적 지원을 원한 송광사의 절실한 요청도 있었겠지만, 형식상으로는 먼저 전라관찰사가 율목봉산의 지정을 요청하는 절차를 따랐다. 전라관찰사는 국가의 제사와 시호를 관장하던 봉상시(奉常寺)에 연곡사의 율목봉산(栗木封山)만으로는 나라에서 필요한 위패 제작용 밤나무를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형편을 설명하고, 그 해결책으로 송광사 일대를 율목봉산으로 지정하기를 원한다는 장계를 올린다. 전라관찰사가 올린 장계에 따라 봉상시는 왕세자에게 송광사의 율목봉산 지정을 요청하고, 조정에서는 왕세자의 이름으로 경인년(1830년) 3월에 요청대로 허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