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드럽가드 미술관(Ordrupgaard Museum of Art)에 가는 날은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기차를 탔는데 20여 분 만에 조그마한 시골 도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역무원도 없고 영어 안내판도 없었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야 하는데 물어볼 데도 없었다. 비를 맞고 이리저리 허둥대는 우리 모습이 측은했던지 지켜보고 있던 인근 잡화 가게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었다.
빗속을 뚫고 길을 건너 버스 정류소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388번 버스가 왔다. 덴마크는 시골버스도 참 세련되고 예술적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기사 아저씨도 친절했다. 시골길을 달려 푸른 숲 이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 정류소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조그맣게 쓰인 미술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화살표를 따라 걸어가니 미술관 입구가 나타났다. 건물은 보이지 않고 입구 안쪽도 온통 아름드리나무만 가득했다. 그 속을 뚫고 한참 걸어들어가면 대저택이 눈앞에 우뚝 서 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고성 같은 집이다.
이 저택이 바로 오드럽가드 미술관이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직 문을 열지 않아 먼저 저택 주위 정원을 둘러보았다. 규모로 보나 그 아름다움으로 보나 대부호의 집이 틀림없었다. 작은 왕궁 규모의 저택과 정원이었다. 정원에는 다양한 조각이 배치돼 있었다.
컬렉터의 꿈, 저택 미술관

한센은 부인(Henny Hansen)과 함께 코펜하겐에서 북쪽으로 20여km 떨어진 이곳에 부지를 마련하고 건축가 트베데(Gotfred Tvede·1863~1947)에게 의뢰해 1916년부터 2년에 걸쳐 저택을 완공했다. 그리고 그 지역 명칭을 따서 오드럽가드라고 명명했다.
또 한센은 전문 정원사(Valdemar Fabricius Hansen·1866~1953)를 고용해 집 주위에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조성했다. 1918년 개관 연설에서 한센은 자기가 수집한 예술품은 모두 국가에 기증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드럽가드는 한센 부부가 함께 만들고 다듬어온 개인 미술관이지만 지금은 국가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덴마크 작품과 프랑스 작품을 주요 소장품으로 하고 있다.
전쟁 중 프랑스 작품 집중적으로 수집
어느 나라나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면 큰 재벌이 생겨난다. 미국은 석유가 나오면서 록펠러 재벌이, 자동차가 나오면서 포드 재벌이 만들어졌다. 한센은 덴마크에 보험업이 들어오면서 재벌이 됐다. 보험회사 두 개를 일구어 덴마크의 대표적 보험회사로 키워낸 한센의 족적은 매우 두드러진다.보험업은 현금 유동성이 가장 높은 사업이다. 보험료는 계속 들어오는데 보험금은 미래에 지불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이 계속 쌓인다. 그래서인지 보험업으로 성공하면 재벌로 등극하고, 다른 사업으로 재벌이 돼도 보험업을 시작한다. 우리나라도 삼성 재벌은 ‘삼성생명보험’과 ‘삼성화재보험’을 가지고 있다.
한센은 매우 부지런하고 독립적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업가였다. 이런 성격은 사업뿐만 아니라 미술품 수집에도 안성맞춤이다. 그는 사업가로도 성공했고 컬렉터로도 성공해 훌륭한 컬렉션을 후세에 남기고 있다.
나중에 화가가 된 어릴 적 친구로 인해 한센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소개로 많은 화가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처음에는 덴마크 작품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나중에는 프랑스 작품에도 매료됐다. 덴마크 작품은 1892~1916년 사이에 주로 사 모았는데 19세기 초 덴마크 예술의 황금기(Golden Age of Denmark) 작품과 한센 시대 컨템퍼러리 작품들이 주 대상이었다. 부부가 함께 평생 그림을 수집했다.
한센은 파리 출장을 계기로 인상파 그림을 접하고 매료됐다. 프랑스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서 18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덴마크인들에게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거기에다 전쟁 와중에 좋은 그림들이 헐값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먼저 시슬리,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사 모았다. 북유럽에서는 프랑스 미술의 첫 컬렉션이었고 최고의 컬렉션이었다.
프랑스 미술에 재미를 붙인 한센은 인상파 이전과 이후의 작품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는 오드럽가드에서 낭만주의의 들라크루아, 바비종파의 테오도르 루소, 사실주의의 쿠르베, 모더니즘의 마네, 상징주의의 고갱 등을 고르게 감상할 수 있다. 한센은 코로에서 세잔까지 작가별로 12점씩 구입하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프랑스 작품을 구입할 때는 당시 프랑스 최고 비평가였던 두레(Theodore Duret· 1838~1927)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 두레는 인상파 화가의 친구이면서 그들의 후원자였다. 한센의 컬렉션은 당시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조견할 수 있는 구성이 됐다. 처음에는 집 안을 장식하는 그림이었지만 지금은 미술관의 훌륭한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한센은 개인적으로도 미술품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스칸디나비아 국가에도 미술품 애호가가 많이 늘어나야 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시기획자라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1930년에는 대규모 로댕 조각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오드럽가드 미술관은 특별히 빌헬름 하머소이(Vilhelm Hammershoi·1864~1916)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그는 덴마크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가로, 마치 햇살을 손에 잡힐 듯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피아노와 여자(Interior with Piano and Woman in Black·1901)’는 이런 하머소이의 화풍과 스타일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미술관에는 이런 그림이 많이 걸려 있다.
덴마크 출신 화가 하머소이 재조명

그림은 여인에게도 그 옆의 가구에도 어떤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 관람자 마음대로 해석하라는 것이다. 피아노, 액자, 책장은 각기 음악, 미술, 문학을 나타낸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 서 있는 여인이 사랑을 의미한다면 이 그림은 사랑과 예술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은 보는 사람이 그렇게 해석하면 그만이다. 관람자에게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시에 대해 공부할 때 나는 의문과 불만이 많았다. 시 한 구절 한 구절에 선생님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실제로 그렇게 의도한 것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시험에 그렇게 출제하니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가 지금은 전혀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모든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 자유의 몸이 된다. 보는 사람이 마음대로 느끼고 해석하면 그만이다. 작가에게 확인할 필요도 없다. 하머소이 작품도 보이는 대로 느끼고 해석하면 된다. 싫으면 그냥 외면해버리면 되고.
하머소이는 재능이 탁월한 화가였다. 여덟 살 때부터 체계적인 그림 교육을 받았고 열다섯 살에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덴마크 황금기의 미술 전통 속에서 교육받았지만 결코 어느 하나의 화풍에 얽매이지 않았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하머소이는 자기가 직접 디자인한 자택 인테리어를 많이 그렸는데 그때 아내의 뒷모습을 자주 등장시켰다. 그의 아내는 화가인 오빠의 그림에도 곧잘 모델이 됐다. 오빠는 하머소이의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이고 동료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2001년 두 사람의 작품을 함께 전시한 회고전을 개최했다.
하머소이는 한때 스칸디나비아에서만 알려진 작가였으나 이제 세계적인 작가가 됐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과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영국 왕립미술학교에서는 2008년 하머소이 개인전을 열었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2005년에는 영국 BBC에서 그의 생애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로 방영했고, 2012년 런던 소더비에서 그의 작품 한 점이 30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덴마크 작가의 작품으로는 최고 기록이었다.
재정위기에도 계속된 컬렉션
한센은 그림을 더 효율적으로 구입하기 위해 1918년 컬렉터, 딜러 등과 함께 그림 구매를 위한 컨소시엄을 만들었다. 이 컨소시엄은 프랑스 작품을 구매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컨소시엄을 통해 그림을 대량 구입해 각자 나눠 가졌고, 배정받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팔면 됐다. 이런 방식으로 더 좋은 그림을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한창 컬렉션 재미에 빠진 1922년 한센은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었다. 컨소시엄에 돈을 대던 은행이 파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한센은 대출금을 급히 상환해야 했고 이를 위해 프랑스 작품 82점을 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한센이 수집한 프랑스 작품의 절반이 넘는 것으로 아끼고 있던 세잔, 마네, 고갱 등의 작품이 포함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컬렉터가 애장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한센이 내놓은 작품은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미술관과 일본인 사업가가 샀다. 일본은 이때 벌써 훌륭한 컬렉터가 있었고 덴마크에까지 가서 작품을 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때 일본인 사업가가 구입한 작품이 현재 도쿄 우에노공원 내 국립서양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한센은 비상수단을 총동원해 가까스로 재정위기를 극복하자마자 다시 컬렉션에 몰두했다. 1923년부터 1933년까지 새롭게 프랑스 작품을 사 모았고 이 그림들은 지금도 오드럽가드에서 볼 수 있다.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을 그린 모리조

모리조는 프랑스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림 교육을 받았고 화가로서도 대성했다. 1864년 처음 파리 살롱에 작품이 전시된 후 1874년까지 6번이나 살롱에 작품이 전시됐다. 살롱은 국가가 주관하는 가장 권위 있는 전시회다. 하지만 인상파에 참여하면서부터는 살롱과 멀어졌다.
초상화의 모델은 이사벨라 람버트라는 17세 소녀다. 이 시기에 모리조는 이 소녀를 모델로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다. 모리조는 자신이 여성이기에 남성과는 다른 관점에서 여성을 그린다는 확신이 있었다. 즉 성적 매력을 가진 여성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 즉 여성도 개성이 뚜렷한 인간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이 초상화에서 모리조의 의도는 매우 강렬하게 표현되고 있다. 여자는 새장에 갇힌 새가 아니라 새장 밖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의지의 인간임을 표현하기 위해 새장도 그려 넣었다.
모리조는 마네의 제자 겸 동료였으며 나중에 마네의 동생과 결혼했다.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은 엄마는 물론 르누아르, 마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모델이 됐다. 오늘날 모리조는 인상파 여류화가 가운데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다.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모리조의 작품이 120억 원에 팔렸다. 그때까지 여류 화가로서는 최고의 작품 가격이었다.
아름다운 숲 속 정원과 초현대식 신관

다행히 한센 부인은 그림을 아주 좋아했다. 그 덕분에 오드럽가드가 존재할 수 있었다. 한센은 열아홉 살 때 두 살 아래인 부인 헤니를 극장에서 만나 곧 약혼했다. 두 사람은 4년 후(1891) 결혼해 오드럽가드를 짓고 헤니는 정원 가꾸는 일에 몰두했다. 그 정원이 지금은 울창한 숲이지만 처음에는 장미정원, 채소밭, 과수원, 소풍 장소 등으로 사용됐다. 풀밭과 연못도 조성됐다. 헤니의 손길이 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한센이 죽자 헤니는 오드럽가드에 혼자 남아 오드럽가드를 가꾸는 일에 더욱 더 정성을 쏟았다. 1951년 부인까지 죽자 소장품, 저택, 정원 등은 한센의 유언대로 모두 덴마크 정부에 기증됐다. 1953년부터 오드럽가드는 국가미술관으로 새 출발했다.
2005년 오드럽가드는 저택 옆에 새 건물을 준공했다. 세계적 명성을 가진 이란 출신의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1950~2016)의 작품이다. 한국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바로 그 건축가다. 새 건물은 초현대식 건물로 통유리와 검은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했다. 담쟁이로 둘러싸인 본관 건물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비유하자면 양복에 갓 쓴 격인데, 의외로 두 건물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데서 건축가의 실력이 드러나는 모양이다.
새 건물은 미술관의 공간 문제와 안전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미술관 분위기도 현대식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제 국제 수준의 기획전도 마음 놓고 개최할 수 있게 됐다. 새 건물에는 로비, 전시실, 카페, 기념품 가게 등이 있고 통로로 기존 저택의 전시실과 연결돼 있다.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 재벌사 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