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진정한 의미의 ‘연산군을 위한 변명’

  • 신동준 21세기정치연구소 소장 xindj@hanmail.net

    입력2008-08-31 0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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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 : 변원림 지음, 일지사, 288쪽, 1만7000원

    일찍이 캉유웨이(康有爲)는 1891년에 펴낸 ‘신학위경고’에서 유가경전 모두 전한 말기의 유흠(劉歆)이 위조한 위경(僞經)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는 종래의 성리학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창견(創見)이었다. 그는 뒤이어 나온 ‘공자개제고’에서 공자가 경전을 저술한 목적은 당시의 정치체제를 개혁하려는 데 있다며 공자를 봉건정을 혁파코자 한 야심만만한 개혁가로 규정해 더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궈모뤄(郭沫若)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지난 20세기 중반에 펴낸 ‘10비판서’에서 유가사상은 인민해방의 대세를 좇은 진보사상이고, 공자는 당대의 혁명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공자를 당대 최악의 반동사상가로 낙인찍은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이내 묻히고 말았다. 지난 세기말 일본의 기무라 에이이치(木村英一) 등은 정밀한 고증을 통해 ‘논어’를 상세히 분석한 뒤 공자를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개혁가로 규정하며 캉유웨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필자가 지난 2003년에 ‘연산군을 위한 변명’(지식산업사)을 통해 연산군은 결코 황음무도한 미치광이 폭군이 아니었고, 중종반정은 반역에 불과했다는 창견을 제시한 배경도 사실 캉유웨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0년대에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광해군을 백성의 이익을 앞세운 조선조 최고의 외교수완가로 평가한 마당에 일각에서 전직 대통령을 연산군에 비유하며 지나친 이상론을 펼친 것이 필자의 기필(起筆)을 자극했다.

    사료 비판 소홀한 학계에 일침

    연산군을 폭군으로 매도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근인을 왕권(王權)에 대한 신권(臣權)의 도전에서 찾은 필자의 주장은 ‘훈구 대 사림’의 갈등구도로 파악한 기존의 통설에 대한 강력한 반론에 해당했다.



    이에 대해 김범은 지난해에 펴낸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에서 양대 사화를 삼사의 월권과 능상(凌上)을 교정코자 한 연산군의 ‘폭력적 정치숙청’으로 규정하며 필자의 주장을 간접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연산군의 권력을 ‘절대왕권’으로 전제한 뒤 갑자사화의 배경을 연산군의 ‘패행(悖行)과 사치’, 폐위의 원인을 ‘광기 어린 폭정’에서 찾았다. 이는 중종반정을 ‘반역’이 아닌 ‘반정’으로 평가한 과거의 성리학적 견해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지난 1997년에 나온 김돈의 ‘조선전기 군신권력관계 연구’ 등과 마찬가지로 사료선택에 신중치 못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나온 변원림씨의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일지사)은 사료비판을 소홀히 하는 국내 학계의 잘못된 관행에 정문일침(頂門一鍼)을 가한 일대 쾌거에 해당한다. 그는 국내 학계의 통폐를 이같이 지적했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이 말도 되지 않는 ‘연산군일기’의 내용을 모두 사실로 믿고 있으니 이들의 무비판적인 학문 연구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국내 학계가 연산군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리고 있는 단서를 1962년에 출간된 이상백의 ‘한국사’에서 찾고 있다. 후대의 야사를 모아놓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안정복의 ‘열조통기’ 등을 근거로 면밀한 고증도 없이 반정공신들이 귀양 간 세력과 연결해 연산군을 몰아낸 것으로 기술한 것이 왜곡의 시작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는 반세기가 다 되도록 이상백의 결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국내 학계의 행태와 관련해 필자를 이같이 두둔하고 나섰다.

    “지난 2003년에 이르러서야 신동준이 처음으로 반정공신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아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연산군을 지나치게 변명하고 있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 변씨가 정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역저를 펴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싶다. 필자는 저자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독일의 에를랑겐 대학에서 ‘사상사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튀빙겐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한 재독 사학자다. 그는 이번 역저에서 고금동서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연산군일기’의 내용이 얼마나 두서없이 날조된 것인지를 정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연산군의 패륜행보에 대한 기술이 ‘고려사’에 나오는 충혜왕 및 우왕 등과 꼭 닮아 있고, 심지어 연산군보다 한 살 많은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정적(政敵)들의 악의적인 기술과 흡사한 점 등을 밝혀낸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다. 필자가 경기도 일대에 널리 분포했던 금표(禁標)와 관련해 갑자사화에 연루된 권신들의 소유지였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과 관련해 변씨가 구체적인 사료를 들어 이를 뒷받침한 것은 탁월한 학술적 성과에 해당한다. 독일에서 연마한 탄탄한 ‘사상사학’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독살’보다 ‘병사’ 가능성에 무게

    그의 연산군에 대한 분석은 기본적으로 연산군의 치세를 크게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재위 8년까지의 전기와 갑자사화 이후 폐위되는 12년까지의 후기가 그것이다. 그는 연산군의 전기 행보를 두고 국방에 힘을 기울이고, 권세가들의 군왕에 대한 능멸을 차단하며 힘없는 백성을 위해 애쓰고, 예술을 사랑하는 명군의 행보로 파악했다. 후기에 들어와 문득 폭군으로 오해될 만한 면모를 보이다가 끝내 폐위된 것과 관련해서는 왕권과 신권의 첨예한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으면서 양전(量田·논밭 측량)과 노비추쇄(奴婢推刷·도망한 노비를 붙잡아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내던 일) 시도 등을 논거로 들었다. ‘연산군일기’의 기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잔치를 너무 적게 열며 검소한 모습을 보인 데서 군신 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고 분석한 것은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연산군의 후기 행보와 관련한 ‘연산군일기’의 악의적인 기록에 대해 이같이 개탄하고 있다.

    “연산군은 도덕군자였음에도 ‘연산군일기’는 재위 9년 이후의 기록에서 그를 색광(色狂)으로 묘사해놓았다. 그가 알면 관 속에서도 돌아누울 일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몇 가지 사소한 점에서 필자와 관점을 달리하고 있다. 연산군이 말년에 궁의 담장을 높이 쌓고 관원들을 자주 부르지 않은 것을 두고 저자는 은둔의 행보로 파악했으나 필자는 이를 왕권강화 차원의 행보로 해석했다. 필자가 처음으로 제기한 연산군의 ‘독살 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월산대군이 35세, 성종이 38세에 죽은 점을 근거로 열악한 유배생활로 인한 ‘병사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인의 평균 수명이 남자의 경우 불과 40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런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진실규명 차원에서 연산군의 유골에 대한 DNA 분석을 제의한 것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데 저자는 연산군이 말년에 병사 5만명을 훈련시킨 것을 두고 5만의 군사는 오히려 너무 적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으나 이는 지나친 감이 있다. 저자는 각주에서 자신이 독일에서 펴낸 ‘1950년대 한반도에서 일어난 미국의 예비전’을 논거로 들었으나 청일전쟁 당시 인구 4000만의 일본이 총력을 기울여 동원한 군사가 10만명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연산군의 詩 위작 가능성

    필자는 ‘연산군일기’에 수록된 130여 수의 자작시 중 일부 시에 대해 변작(變作) 가능성을 제기한 데 반해 변씨는 아예 위작(僞作)의 가능성을 들고 나왔다. 연산군이 재위 11년 4월3일에 지은 시를 두고 “신동준도 연산군이 스스로 잔인함을 인정한 것으로 번역했다”고 지적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필자도 ‘잔박(殘薄)’을 ‘관후(寬厚)’로 바꾸어야만 앞뒤 구절이 모순이 없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반정세력은 연산군을 왜곡하기 위해 군왕이 지은 시마저 멋대로 조작하는 무모함을 서슴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저자가, 연산군의 시에 대한 필자의 ‘변작 가능성’ 제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위작 가능성’까지 제기한 것은 사료선택에서 필자보다 훨씬 앞서 나간 결과로 볼 수 있다. 동일한 논지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연산군을 ‘명군’으로 평가하는 데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 데 반해 저자가 연산군을 과감히 ‘당대의 명군’으로 평가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연산군에 대한 총체적 평가에서 필자가 결과에 보다 무게를 둔 데 반해 저자는 동기를 더 중시한 데 따른 차이로 짐작된다. 저자는 연산군을 ‘당대의 명군’으로 평가하는 이유를 이같이 밝히고 있다.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용렬한 군주를 성군으로 칭송했으니 연산군이 폭군의 이름을 얻은 것은 오히려 대왕다웠음을 알리는 것이다.”

    조선조를 쇠망으로 이끈 성리학의 통폐를 통찰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연산군을 ‘대왕’에 준하는 인물로 호평한 것은 이나바가 ‘택민주의(澤民主義)’를 언급하며 광해군을 칭송한 것에 비유할 만하다. 저서의 이번 역저는 진정한 의미의 ‘연산군을 위한 변명’에 해당한다. 필자는 저자의 출현으로 독수고성(獨守孤城)의 신세를 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만부부당지용(萬夫不當之勇·수많은 장부로도 능히 당할 수 없는 용기)의 원군을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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