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댄스홀·장의·요정 사업자가 시작한 부산MBC가 뿌리
- “박정희, 부산MBC 라디오 프로그램 들으며 ‘혁명아’ 꿈꿔”
- 박정희 군부가 ‘강탈’ 뒤 대기업에 지분 70% 강제 배분
- 신군부, 대기업 지분 환수 KBS에 넘겨
- 여야 타협으로 새 운영주체 ‘방문진’ 이사 구성 한계
- ‘해바라기 성향, 운영 효율 떨어져’
6월20일 보수 단체 회원들이 서울 MBC 본사 앞에서 편파방송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때 MBC는 외형상 KBS의 자회사였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통폐합을 단행하면서 쌍용화재, 현대 등 대기업 7개가 갖고 있던 MBC 주식 70%를 환수했다. 그 내막은 이렇다.
MBC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1969년 텔레비전 개국을 앞두고 자본금을 3억원으로 증액했다. 그러나 TV 개국 후 악화된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자본금 3억원을 다시 10억원으로 늘렸다.
이렇게 증자한 본사 주식의 70%를 7명의 민간 기업인에게 강제로 떠맡긴다. 이때만 해도 방송사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대기업들은 주식 인수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정순일(鄭淳日) 전 국제방송교류재단 이사장의 표현에 따르면, 살까말까 망설이던 기업들은 “억지로 떠맡는 기분으로” 인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대기업이던 해태(박병규), 현대(정주영), 금성(구자경), 동아건설(최준문), 교보(신용호)는 각기 1억원씩, 쌍용(김성곤)이 1억5000만원, 미원(임재홍)이 5000만원씩 출자했다.
한때 KBS 자회사
1969년 8월8일 텔레비전이 개국할 때 MBC의 경영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무일푼으로 은행차입과 외자에만 의존해 텔레비전 방송국을 세우고 나니까, 광고수입은 많지 않았고(TV 세트가 200만대를 돌파한 1972년에 와서야 손익 분기점을 넘어섰다) 이자와 원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MBC는 경영합리화를 위해, 또 야당의 정치공세를 피하기 위해 주식의 70%를 대기업이 인수토록 했다. 이렇게 해서 MBC 경영은 정상화의 궤도에 들어섰다. 물론 대기업들은 떠안은 MBC주식의 배당도 받지 못하고 의결권도 없었다. 주식을 팔 수도 없었다.
그렇게 대기업들이 보유하던 주식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환수됐고, 신군부는 이 70%의 주식을 KBS에 맡기는 방안을 내놓았다. 졸지에 KBS는 ‘정부투자기관’, MBC는 ‘정부재투자기관’으로 전락했다. 1980년대 전반기의 ‘전화번호부’를 보면 공기업 일람에 그런 표현이 나온다.
원래 신군부의 의도는 KBS로 하여금 MBC 주식을 보관만 하도록 했는데, KBS는 ‘지배’의 욕심을 드러냈다. 그 구체적 사례가 있다. KBS 고위 간부 한 명은 MBC 감사로 내려가 앉고, 다른 고위 인사는 MBC 지방사 임원으로 취임했다. 이는 MBC의 반발을 샀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이후 KBS는 더 이상 MBC의 경영에 간섭하지 않았다.
박정희, 부산 MBC에 각별한 관심
이후 1987년 이른바 민주화 바람을 타고 언론노조가 출범했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일’의 하나로 MBC 위상 문제가 구성원과 정치권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됐다. 이렇게 MBC 위상 정립을 둘러싸고 노조, 학계, 사측, 시민단체가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을 즈음, 정치권이 내놓은 해법이 바로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였다. 1988년 12월14일 문공위원회는 방송문화진흥회법안을 상정·심의했고, 이어 12월26일 이 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MBC의 새로운 운영주체로서 ‘방문진’이 탄생했다.
1980년 이전 MBC 주식의 70%를 대기업이 나눠 갖고 있을 때 MBC의 지배주주는 5·16장학회였다. 5·16장학회는 대기업에 매각하고 남은 30%의 지분을 갖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MBC 경영 주체였다. 5·16장학회는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한 육영재단이었다. 이곳이 조선견직의 사주 김지태가 헌납(헌납이냐 강탈이냐는 뒤에서 다시 논의함)한 부일장학회 소유자산(부산 서면 땅 10만평)과 개인 소유자산인 부산일보,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주식 각 100%를 인수해서 오늘날과 같은 MBC의 기틀이 마련됐다. 5·16 장학회는 뒤에 박정희의 ‘정’과 육영수의 ‘수’자를 따서 정수장학회로 개칭, 오늘에 이른다.
5·16장학회와 MBC의 관계는 우연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부산MBC 개국 당시 보도과장이었던 전응덕(全應德)의 회고에 의하면, 박정희 장군은 부산MBC의 인기 보도프로그램인 ‘라디오 브리지’의 열렬한 청취자였다. 그는 부산관구사령관 재임 당시 “검은 안경 끼고 책상 위에 군홧발 올려놓고”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부산MBC 라디오를 들으면서 ‘혁명아’의 꿈을 키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KBS는 관영방송으로서 정부의 대변자였고, 운영이 어렵던 부산MBC는 돈 많이 드는 쇼나 드라마 대신 돈이 별로 들지 않는 보도에 주력했다.
5·16 후 박정희 소장은 기자회견장에서 “독재와 불의를 물리치는 대단한 언론 사명을 다한 부산MBC 같은 이런 방송국을 앞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MBC의 경영권이 무슨 연유로 5·16장학회의 재원이 되었는지 분명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부산MBC에 대한 박정희의 각별한 관심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주식회사’가 공영방송 모순
‘헌납이냐 강탈이냐’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계속된 논란은, 2005년 7월22일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약칭 진실위)의 발표로 일단락됐다. “1962년 부일장학회 등의 헌납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가 주도적으로 개입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MBC는 정수장학회(30%)와 방문진(70%) 양대 주주로 구성돼 있다. 현행 방송법상 개인이나 법인은 공중파 방송의 주식을 최대 30%까지만 소유할 수 있지만, 방문진은 방송법 개정 이전부터 30%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서 예외로 인정됐다. 역대 MBC 경영주체의 변화를 정리하면 ‘김상용-(안성수)-김지태-5·16장학회-KBS-방문진’ 순서로 정리된다.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MBC가 요즘 그 위상이 흔들리는 이유는 뭘까.
첫째, MBC의 현 체제와 운영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정 방송을 실현하지 못하고 정치 풍향에 따라 ‘해바라기’성향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높다.
둘째, 운영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 인적 구성이나 관리체계, 경영 비전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다.
셋째, 정체성이 뚜렷하지 못하다. 1997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후에 공직선거법으로 다시 고쳐짐)에 의해 방문진이 대주주로 있는 방송을 공영방송으로 규정함으로써 공영방송의 법적 지위를 얻기는 했으나 참으로 애매하다. ‘주식회사’가 공영방송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다. 왜냐하면 주식회사는 주주 이익을 위해 배당을 많이 하고 주가를 높이는 데 힘써야 하는데, 어떻게 공영(public corporation)이 될 수 있는가. 공영방송은 원칙적으로 수신료를 주 재원으로 운영돼야 하는데, 100% 광고 수입에 의존하는 MBC가 공영일 수 있는가.
넷째, 현재 MBC의 운영 주체는 방문진인데, 방문진이 대주주로서 제 구실을 못한 데서 MBC의 존재양식이 흔들리게 됐다는 지적도 있다. 형식상 방송통신위원회가 방문진 이사 9인을 임명하도록 돼 있지만, 이사진 구성은 여야의 정치적 산물이었다. 방문진이 정치적 외풍을 막는 MBC의 울타리 노릇을 하는 한편 경영을 감독하고 MBC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은 그 반대로 작동해왔다. 게다가 이사진 스스로가 정치적 예속을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다. 역대 방문진 이사장의 면면을 보면 이런 정황을 잘 알 수 있다. 정치권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총장 출신을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래서 방문진은 전문성을 가진 인사가 일하는 곳이 아니라 명망가를 식객으로 모신 곳처럼 보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MBC의 위상이 흔들린 것은 어쩌면 숙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MBC 복도 곳곳에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표어가 붙어 있었다. 문화방송이 경향신문과 합병하여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이 됐을 때의 일이다. 물을 마시는 자는 그 근원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 이 말은 문화방송·경향신문의 실질적인 사주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므로 이를 명심하고 정권에 충성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사원에 대한 독려이자 압력으로 이해됐다.
영광과 오욕의 역사
30여 년 세월이 지난 오늘 MBC 사원들은 ‘음수사원’을 새롭게 되새겨야 할 시기를 맞았다. MBC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회사가 아니다. 지난 50년간 영광과 오욕을 함께 한 역사적, 정치적 산물임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굴절과 파행, 비리로 얼룩진 부끄러운 역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땅에 민영방송의 효시로서 방송문화를 선도해온 자랑스러운 미디어 기업이기도 하다.
‘문화방송’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한 사람 있으니 바로 김상용(金相用)이다. 이분은 1959년 4월5일 ‘부산MBC’를 개국한 창업자다. 한국 민영방송의 개척자 김상용은 우리 방송사에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할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다. 원래 그는 부산 동래에서 요정 백록관(白鹿館), 남포동의 카바레 백화당(白花堂), 그리고 적선(積善)장의사를 운영하던 이였다. 그가 바로 오늘 MBC의 모태가 된 부산MBC를 창업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했던 세 가지 사업이 번창한 시대적 배경이 재미있다. 광복 후 콜레라가 만연해 장의사업이 잘됐다. 1946년 6월25일자 동아일보는 “적신호! 호열자 점차로 맹위 - 한번 침입한 호열자 병마는 남조선 전역을 좀먹는 태세를 보이고 있어 조금도 방치할 수 없는 형편이다”라고 보도했다.
자수성가한 김상용의 백화당은 카바레와 결혼식장을 겸업했는데, 당시 댄스홀은 선남선녀의 고급 사교장이었다. 항도 부산에는 피난민이 들끓었고, 전쟁미망인이 넘쳐났다. 1954년 6월6일 동아일보는 “6·25전쟁 동안 전체 사망자 수는 100만명이 넘었다. 사상자 중에는 청장년 남성이 많았고, 이로 인한 전쟁미망인도 50여 만명에 이르렀다”고 썼다. 또한 이 때 ‘자유부인’ 신드롬이 일었다.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되던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은 여성해방, 댄서바람의 신호탄이었다.
‘요정’과 ‘댄스홀’ 그리고 ‘장의사’에서 번 돈이 방송문화의 밑거름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기도 하지만, 많은 TV 프로그램이 춤과 노래 등 놀이와, 사랑과 죽음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이하게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김상용의 부산MBC는 경영이 어려웠다. 전후 경제가 피폐했고, 아직 산업화 전 단계에서 방송광고에 대한 기업주의 인식이 형편없이 부족했다. 당시만 해도 “민간방송에 돈을 투자하는 것은 하수구에 돈을 퍼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부산MBC는 경영 악화로 개국 7개월 만에 당시 유수한 재벌이던 조선견직의 김지태에게 경영권을 넘긴다. 신문사를 운영하던 김지태는 방송사를 인수해 영화산업과 함께 미디어 복합기업을 꿈꾸던 이였다.
한국 민영방송 개척자 김상용
부산MBC를 인수한 김지태는 1961년 12월2일 서울MBC를 개국하기에 이른다. MBC TV는 100% 교육방송으로 허가됐다. 경영권이 김상용에서 김지태로 넘어가기 전 잠시 안성수가 사장을 맡은 일이 있다. 방송국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부산시 산업국장 출신의 안성수가 2000만환 출자를 조건으로 사장을 맡았다가 물러나고, 곧이어 김지태가 사장이 됐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순수 민영방송으로 경영이 안정되어갈 즈음 김지태는 박정희의 5·16장학회에 부산일보와 MBC의 모든 소유 주식을 강제 헌납했다.
5·16 군사정변 주역들은 비리와 구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부정 축재자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김지태 역시 부정 축재자로 물렸고, 그의 아내가 다이아몬드를 밀수했다는 혐의를 씌워 강제로 부일장학회, MBC, 부산일보를 내놓게 했다. 그야말로 쿠데타적 발상이었다. 인재를 육성하는 장학재단으로서는 가장 반교육적이요, 사회정의를 구현한다는 언론기업으로서는 가장 불법적인 행위였다. 부일장학회가 갖고 있던 부산 시내의 토지는 현 시세로 3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방문진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MBC의 경영주체는 5·16장학회였다.
이어 MBC는 1969년 텔레비전 방송국을 개국했다. TV 개국에는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MBC TV는 개국 초기에는 ‘교육 텔레비전’이었다. ‘대통령의 것’으로 알려진 5·16장학회에 민영 텔레비전을 곧바로 허가하기는 쉽지 않았다. 야당의 정치적 공세에다 국민의 이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MBC 텔레비전은 순수 교육방송으로 허가가 났다. 광고방송은 일절 내보내지 않고 오로지 ‘교육’만 걱정하는 방송을 하겠다고 내세운 것이다.
1961년 12월 서울 인사동에서 개국한 MBC 옛 사옥.
작전상 교육방송으로 출발
1966년 TV방송국 개국 허가를 받을 때의 조건은 광고방송을 일절 하지 않고 학교방송 50%, 어린이 교육방송 25%, 일반 사회 교육방송 25%를 편성하는 순수 교육 텔레비전이었다. 이후 50%만 교육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방향으로 조건이 완화돼 오락과 교육 프로그램을 반반씩 내는 혼합방송이 됐다.
개국 당시 본격적인 교육방송을 위해 교육국을 설치하고 일반교육부, 학교교육부, 교재연구부를 두었다. ‘명교수 명강의’, 학생선도를 위한 교육드라마 ‘사랑의 종’, 그밖에 ‘생활과학’ ‘교육대담’ ‘과학시대’ 등이 편성됐다. 특기할 점으로 ‘교육’ 때문에 1기 PD합격생 중 교사 출신이 4명이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육방송 MBC는 허울뿐 개국 이듬해 1월22일 상업방송으로 완전 탈바꿈했다.
둘째, ‘호텔 속에 방송국’이 있었다는 점이다. MBC TV는 정동 22번지 신사옥에서 개국했다. 그런데 이 건물의 주 용도는 관광호텔이었다. 호텔 안에 방송국이 들어가 있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관광산업진흥’을 명목으로 ‘외자도입’을 수월히 추진하는 한편, 방송국 기자재를 호텔비품 등으로 ‘면세 수입’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지난 50년간 MBC에는 자기 자본을 투입한 사람이 거의 없다. 김상용, 안성수, 김지태 3인이 쌈짓돈을 털었을 뿐 오로지 독점지대에서 얻은 이익이 오늘의 MBC를 이룩했다. TV방송국을 짓는 데 돈 한 푼 출연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특혜와 탈세, 편법으로 사옥을 짓고 기자재를 도입했던 것이다.
‘호텔 속의 TV방송국’,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호텔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데 반해 TV는 ‘공개주의’를 지향한다. 하기야 이런 예가 외국에 없는 것은 아니다. 애틀랜타의 CNN 스튜디오는 옴니호텔과 붙어 있다.
MBC 논쟁의 핵심은 간단하다. MBC 민영화 여부가 그 초점이다. 그러면 민영화는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첫째, MBC의 민영화만이 살 길이라고. 결론부터 말하면 MBC 민영화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또한 ‘주식회사’를 어떻게 다시 ‘민영화’한단 말인가. 논리 모순이다. 단지 두 재단의 소유지분을 매각할 수 있을 뿐이다. 민영화가 아니면 다른 무슨 방도가 있는가?
둘째, 공영화를 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순수 공영제를 지향한다면 수신료를 주 재원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수신료의 대폭 인상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수신료 인상은 방송통신위원회를 거쳐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 KBS조차 광고 수입이 세입의 60%를 넘는 마당에 MBC가 수신료를 받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MBC를 향해 “민영화가 싫다면 순수 공영제를 선택하라”는 발언이 나오는데, 이것은 민영화를 압박하는 수단이지 진정성이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셋째, 현행체제를 개선 유지하는 방안이다. MBC 내부에서는 이를 가장 선호한다. “이대로 가자”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생각해보자. 지금 이대로 간다면 정녕 MBC에 미래가 있는가.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MBC의 민영화는 지난 2002년에도 똑같은 주장이 나온 적이 있다. 지난해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MBC 민영화를 촉구하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새해 들어 한국광고주협회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KBS 2TV와 더불어 MBC의 민영화를 건의하는 정책과제집을 제출했다.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듯 ‘기형적’인 공영방송이 왜 있어야 하는지, 또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지 반문해봐야 할 때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현실적으로 MBC의 민영화가 실현 가능한지 의문이 생긴다.
민영화 가능한가
첫째, 정수장학회 지분 30%를 어떻게 해야 할지가 쉽지 않다. 이 법인의 실질적 주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다. 대선후보 경선 때 박 전 대표는 “이미 사회에 환원된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 지분을 처리하는 것이 민영화의 선결조건일 것이다. 1988년 MBC 민영화 논의가 활발할 때 정수장학회의 고위 인사는 장학사업만 보장해준다면 MBC 주식을 매각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민주화 열기 속에 MBC 쪽도 민영화만이 살 길이라고 합창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MBC 식구들의 태도는 정반대가 됐다. 재벌의 손에 방송사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천박한 상업주의가 공영성을 훼손시킨다는 우려도 있다. 일부 학자나 노조, 언론단체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방송을 민영화하면 재벌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주장은 무지의 소치다. 개정된 방송법과 그 시행령은 자산 10조 이상의 대기업과 그 계열사가 지상파 방송을 겸영하거나 그 주식 또는 지분을 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옥경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왼쪽)이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장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또, 법이 허용한다 해도 대기업 혼자서 MBC를 인수할 만한 능력을 가진 곳은 그리 많지 않다. MBC 본사의 자본금은 고작 10억원이지만 외형 자산은 20조쯤으로 추정된다. 노성대(盧成大) 사장 시절 자산재평가를 실시한 일이 있지만 자본금은 여전히 10억으로 남아 있다. 매우 특이한 존재양식이다.
오늘날의 MBC를 누가 이룩해냈는가? 특정인이나 특정그룹 누구도 “내가 했다”고 나서기가 어렵다. MBC는 첫째, 독점지대, 즉 국민의 자산인 전파를 이용해 성장했다. 둘째, 초창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으로 일해온 MBC 경영진과 사원들의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셋째, 광고를 내고 프로그램을 열심히 듣고 본 국민이 있었기에 오늘과 같이 성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MBC의 실질적인 주인은 누구인가. MBC를 사랑하는 국민이다. 그럼에도 MBC 주식을 공개 입찰로 매각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국민 개주(皆株)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인 사람만 청약할 수 있게 하여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도록 하는 제도다. 그래도 걸림돌은 여전히 있다. 국영이나 공사가 아닌 MBC를 국민주 형태로 민영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향후 연구과제다.
말이 좋아 민영화이지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게다가 아무리 강력한 리더십이라고 해도 MBC 구성원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를 받아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MBC는 지방사의 광역화에 주력했다. 19개 지방 방송사를 5개 권역으로 묶어서 단일 법인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광역화의 핵심이다. 1차로 부산, 울산, 마산, 진주를 단일 권역으로 묶어 경영 효율성을 높이겠다고 밀어붙였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없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으로 변한 지금 지역 방송사의 역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 고장의 자랑’인 방송국을 통폐합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다. 자칫하면 사장 자리만 몇 개 줄이면서 갈등과 불협화음이 커질 수 있다. 방송이 글로벌화할수록 상대적으로 로컬리즘(localism)이 더 소중해진다는 측면도 있다.
MBC 민영화는 ‘방문진 체제’를 기본 골격으로 3단계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1990년에 나온 방송제도연구위원회의 보고서 ‘2000년대를 향한 한국방송의 좌표’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언급돼 있다.
첫째, 지역 방송사를 순차적으로 매각하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 지역 방송사의 자생력을 키우고 상부의 구조가 큰(top-heavy) 형태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소유 직할국(owned and operated)을 가맹국(an affiliate) 시스템으로 바꿔 나가는 것이다.
19개 지방계열사 주식의 51%에서 100%를 서울 본사가 갖고 있다. 무슨 이익이 있는가? 본사 간부가 계열사 사장으로 내려가는 일 외에는 실익이 없다. 본사 의존도가 높아 적자 경영만 늘어난다. SBS 지방 가맹사는 모두 흑자를 내는데, 지방 MBC들만 경영이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라는 말처럼, 지역 MBC를 지역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 또한 지방사의 자생력을 높이고, 지금과 같은 여의도 문화의 중개소에서 탈피해 네트워크 편성에 일정부분 기여하는 프로덕션 기지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소유형태는 국민의 것으로
둘째, 정수장학회 지분 30%를 방문진이 인수토록 한다. 장학사업을 충분히 지원토록 하여 방문진이 MBC의 100% 대주주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지방사 매각대금은 정수장학회의 지분 인수에 전용하게 된다. 정밀 평가를 해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지방사 매각으로 얼추 5000억원 정도의 자금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사 매각은 시기를 보아 3, 4단계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정수장학회가 다시 MBC의 지배주주로 등장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대권을 꿈꾸는 박근혜 전 대표 입장에서도 ‘방송’보다는 ‘육영’에 관심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방문진의 100% 지분 가운데 70%를 국민 개주제와 종업원지주제로 전환토록 한다. 주식 규모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우리사주조합이 10%를 인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안의 기본정신은 애사심의 고양과 경영 마인드를 심어주는 데 있다. 이렇게 되면 MBC의 소유구조는 방문진(30%), 국민주(60%), 우리사주조합(10%)으로 바뀌게 된다. 방문진이 지배주주로 남는 공영형태이면서 70%의 주식이 공개된 민영화의 틀을 갖추게 된다.
주식이 공개된 이상 책임경영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구성원이 주주이므로 주인의식이 생겨나게 되고, 현 방문진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민영화의 폐해는 줄이고 기업공개의 장점은 최대한 살리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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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생성의 역사적 과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홍미(崔弘美)씨의 논문에 의하면, “전파의 독과점 지대 안에서 ‘정치적 배려’라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경영의 결과로 오늘의 MBC는 탄생하고 성장해왔다.” 그는 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서는 MBC의 독특한 위상은 태생적인 데서 유래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역사적 문맥으로 보면 MBC는 사회와 국가에 큰 책무를 지고 있다고 하겠다.
MBC는 성장과정에서 빚어진 탈법과 파행 등 과오를 씻기 위해서라도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야 한다. 소유형태는 ‘국민의 것’으로 되돌리고, 운영지표는 ‘좋은 방송’의 실현에 둬야 한다. MBC의 위상 재정립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 글은 7월29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MBC 위상 정립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