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어려운 농촌 현실을 딛고 경쟁력 있는 기업을 일군 이들을 만났다. 무항생제 돼지 사육에 성공하면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나안농장’ 이연원 대표, ‘5℃ 이온 쌀’로 연매출 250억원을 기록하고 있는 쌀 생산 유통업체 ‘PN라이스’의 나준순 대표, 12년 전 귀농해 유기농작물로 간장, 고추장, 된장을 만들어 호평을 받고 있는 ‘가을향기’의 김영환·박애경 대표 등이 그들. 쉼 없이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농업은 희망 그 자체다.
그래선지 부자 농민, 성공한 농민의 이야기를 들으면 뜻밖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번에는 이런 선입관을 깨는 농민, 부자 농민을 만나보고 싶었다.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한 자유인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농민을 만나기 위해 수소문 끝에 알게 된 사람이 민승규 박사다.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경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던 그는 2001년 ‘한국벤처농업대학’을 설립했다. 농민들에게 농사를 짓는 일보다 마케팅, 즉 소비자의 마음에 들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벌써 8기에 걸쳐 500명의 졸업생을 길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중 상당수는 이미 부자가 됐고, 나머지 사람들도 부자가 되어 가는 중이다. 부자의 유전자를 이식받았으니 부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는가.
지금은 청와대 농업비서관이 된 민승규 박사로부터 당당한 농민 네 분을 소개받았다. 1996년 충남 예산에서 가나안농장이라는 이름으로 돼지 사육을 시작한 이연원(43) 대표. 그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무항생제 돼지 사육에 성공하면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축산 분뇨의 퇴비화에 전념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은 쌀의 생산 및 가공, 유통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체제를 이룩한 (주)PN라이스 나준순(53) 대표. 1986년 부산에서 3평(9.91m2)짜리 쌀가게로 출발해서, 지금은 쌀의 위탁 재배까지 사업 범위를 확대했다. ‘5℃ 이온쌀’의 성공에 힘입어 연매출 250억원의, 그야말로 본격적인 농업기업이 되었다. 한국의 카길(다국적 농업·식품 기업)이 되겠다고 기염을 토하는 그는 일과 도전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다.
다른 두 사람은 경기도 양평에 있는 가을향기 농장의 김영환(51)·박애경(50) 공동대표다. 12년 전 귀농해서 농사를 시작한 이들 부부는 유기농작물로 간장, 고추장, 된장을 만들어 소비자의 호평을 받고 있다. 김영환 대표는 손수 시(詩)를 지을 정도로 감성적이며, 박애경 대표 역시 고객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농업 기업가다.
금산의 한국벤처농업대학 강의실을 찾던 날, 1박2일간 계속된 주제는 ‘농산품에 스토리를 입혀라’였다. 거기에 참석한 네 분을 만나서 그들의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농산품에 스토리를 입혀라’
▼ 김정호 신동아 독자 여러분께 작가의 사업에 대해서 설명 겸 자랑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연원 저는 가나안농장이라는 돼지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00% ‘무(無)항생제’유기돼지를 키우고 있지요.
▼ 김정호 돼지가 병에 걸려도 항생제를 쓰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 이연원 그렇습니다. 항생제를 쓰는 대신 병 걸린 돼지를 격리시켜 치료합니다. 사료에 항생제를 넣지 않는 건 물론이고요.
▼ 김정호 돼지가 돌림병에라도 걸리면 큰일일 텐데요. 어떻게 그런 과감한 결정을 하신 거죠?
▼ 이연원 사실 항생제로 돼지를 키우면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어 편합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한 생산량보다는 질과 맛을 높여, 소비자를 행복하게 만들어드리고 싶었습니다. 또 축산은 냄새나는 혐오 산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벤처농업대학을 알게 됐고, 거기서 농업도 그저 생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를 감동시켜야 한다는 원리를 배우게 되었지요. 그래서 무항생제 돼지를 기르게 된 겁니다. 소비자를 위해야 축산에도 미래가 있거든요.
‘한국의 카길社’ 지향
▼ 나준순 저는 5℃ 이온쌀을 생산하는 (주)PN라이스를 운영합니다. 쌀의 종자 보급, 계약재배, 건조, 저장, 가공, 유통 등 쌀의 생산에서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관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김정호 그야말로 한국의 카길(Cargill)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5℃ 이온쌀이란 정확히 어떤 쌀입니까?
▼ 나준순 5℃에서 보관하는 쌀, 그리고 이온수로 씻은 쌀을 말합니다. 쌀도 오래되면 산화돼서 밥맛이 떨어지잖아요. 그런데 5℃에서 보관하면 오랫동안 햅쌀 같은 맛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 보관해도 청결하도록 이온수로 씻어내지요. 우리 쌀은 일반적인 쌀에 비해서 세균이 87%나 적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지금은 당당한 특허 상품이 됐습니다. 또 농림수산식품부 고품질 쌀 브랜드 정책 중 하나로 채택됐습니다.
▼ 김정호 원래 쌀 농사를 지으셨나요?
▼ 나준순 아닙니다. 저는 원래 수산대를 졸업하고 10년간 마도로스 생활을 했습니다. 달러도 많이 벌고 참 재미가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하시던 정미소를 물려받았는데, 대형유통업체가 등장하면서 사업이 힘들어졌습니다. 대형유통업체는 첨단시설이 갖춰진 대형업체와만 거래를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곱 단계의 마진을 다 흡수하는 대형 RPC(미곡종합처리장)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종자 보급부터 계약재배, 건조, 저장, 가공, 유통까지 쌀 재배 산업 전반에 관여하는 일로 범위가 커졌습니다.
도전정신과 창의력으로 성공한 부자 농민들이 7월19일 충남 금산 한국벤처농업대학에서 저마다의 성공담을 털어놓고 있다. 왼쪽부터 나준순·이연원·김정호(필자)·김영환·박애경씨.
▼ 나준순 그래 보이긴 해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5℃ 이온쌀은 마도로스 때의 경험에서 나온 겁니다. 보통 배가 출항하면 1년을 꼬박 바다에 있기 때문에 출항시 엄청난 양의 식량을 가지고 떠납니다. 그리고 그 식량의 맛을 유지하기 위해 식품마다 적합한 온도에 맞춰 저장을 합니다. 그래서 쌀 보관에도 온도 개념을 적용하게 된 거지요.
첫해 250만원어치 수확
▼ 김정호 김영환 대표는 어떠세요?
▼ 김영환 저는 가을향기 농장을 운영하고 있고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유기농 간장 된장 고추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준순 사장님처럼 사업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비자들이 아껴주고 찾아주십니다.
▼ 김정호 원래 농사를 지으셨나요?
▼ 김영환 12년 전에 인천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양평으로 내려가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첫해 힘들게 농사를 지어 쌀 아홉 가마니와 콩 두 가마 반, 그리고 약간의 고추를 수확했는데 금액으로 환산해보니 250만원 정도가 되더군요. 당시 장사하시는 분이 콩 한 가마니에 16만원 주겠다고 팔라고 하는데 집사람과 초등학교 다니던 아이들까지 달라붙어 농사지은 콩을 그 가격에는 억울해서 도저히 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콩을 팔지도 못하고 그냥 두었는데 얼마 후 마을 분들이 메주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판다고 하면서 메주를 만들더군요. 그래서 우리도 메주를 만들어 팔았는데, 가격을 보니 그냥 콩으로 파는 것보다 메주를 만들어 파는 것이 이익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메주도 다 팔지 못하고 장을 담그고 말았습니다.
▼ 김정호 그걸 집에서 다 드시지는 않았을 텐데요. 어떻게 파셨어요?
▼ 김영환 농사짓는 것도 힘들고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파는 건 더 힘들더라고요. 그때 제 나이가 40이고 집사람이 38세였는데 집사람 데리고 장에 쭈그리고 앉아 메주를 팔려고 생각하니 어찌나 아뜩하던지요. 결국은 생각지도 않게 된장을 만들었지만 장사 수완이 없어서 팔지도 못하고 굶어 죽게 생겼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처음엔 형제들과 친척들이 많이 팔아줬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반응이 아주 좋은 겁니다. 곧 입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어요. ‘다음에도 사 먹고 싶다’ 는 반응이 나와서 어찌나 고맙던지요. 그렇게 작게 시작한 사업이 지금의 가을향기 농장까지 왔습니다.
▼ 김정호 처음에 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박애경 대표는 귀농을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 박애경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요. 농사라는 게 부지런함과 근면함이 몸에 밴 분들이 하셔야 되는 일인데, 우린 그러질 못했거든요. 그래도 흙 냄새, 풀 냄새 맡고 사는 생활이 참 좋습니다. 건강에도 좋고요. 무엇보다 고마운 건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거지요. 언젠가 저희 아이들에게 우리가 부유할까 가난할까 물었더니 그런 것은 잘 모르지만 지금 행복하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농사를 시작하기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도전과 창의 넘치는 삶
▼ 김정호 가을향기 농장이라는 이름이 참 예쁩니다.
▼ 김영환 그게 무려 봄부터 가을까지 고민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제가 생각한 이름들은 모두 이미 상표등록이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변리사에게 등록될 만한 이름을 문의했습니다. 한 20개의 이름 중에 가을의 넉넉함과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가을향기를 선택했습니다.
▼ 김정호 네 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다들 남이 걷지 않은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창의성 넘치는 삶…. 저는 여러분이 인생을 정말 재미있게 사시는 것 같습니다.
▼ 이연원 다른 사람들은 할 게 없다고 하는데 저는 할 게 너무 많아 행복합니다. 요즘은 돼지 분뇨로 비료 만드는 일에 미쳐 있습니다. 제 생각엔 고기보다도 이 분뇨가 더 고부가가치 제품이 될 것 같아요. 두고 보십시오. 조만간 이 돼지 분뇨가 유기 비료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날이 올 겁니다. 제가 얼마나 분뇨에 폭 빠져 있는지 동네에서 정신 나간 사람 취급까지 받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일이 재미있습니다. 하하하.
▼ 나준순 저도 일이 재미있고 신납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정미소를 물려주신 부친을 원망도 했습니다만 생각하기 나름 아닙니까. 이렇게 노력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으니 운이 좋았고, 감사한 일이지요.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제 삶이 참 뿌듯합니다. 또 여러분이 제 경험을 이야기로 만들어주시니 더욱 신이 납니다. 이젠 딸도 아빠는 선각자라면서 치켜세워줍니다. 새로운 일인지라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도전 후의 성취감과 재미에 일에 푹 빠져 삽니다.
▼ 김정호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농업에도 그런 사례가 있나요?
▼ 나준순 물론이지요. 예를 들어 다른 농민들이 군사보호지역, 상수원보호지역, 그린벨트로 이중삼중 꽉 막힌 땅에 대해 한숨을 내쉴 때 저는 여기야말로 청정지역으로 친환경농업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역발상을 했고 그것이 성공했습니다.
▼ 김영환 서울에서 계속 살았다면 제 앞날은 정해져 있었을 겁니다. 제가 벌고 저축할 수 있는 돈, 진급할 수 있는 한계, 삶에서 느끼는 기쁨 등 모든 것에 한계가 있죠. 그런데 지금은 소득은 물론이려니와 무엇보다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참 좋습니다. 그리고 12년간 꾸준히 노력했더니 좋은 일도 많이 생겼습니다. 저희가 담근 장을 받아 보시고 감동했다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때의 행복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 김정호 저는 농업이야말로 첨단산업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데요. 오늘 모신 여러분처럼 하면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할 것 같고요. 그런데 우리 농업 자체는 어떨까요? 우리 농업에 희망이 있습니까?
‘농업은 6차산업으로 가야’
▼ 나준순 농업은 1차산업에서 6차산업(1,2,3차산업이 통합된 형태)으로 가야 하고, 또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농민들이 많이 배우고 의식을 깨쳐야 합니다. 제가 거둔 조그만 성공도 공부의 결과입니다. 저는 벤처농업대학 1기 졸업생입니다. 처음에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소리도 듣고 ‘벤처’라는 말이 주는 어감 때문에 허황된 사기꾼 소리도 들었지만, 거기서 배운 것이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지요. 교육이 뒷받침되면 우리 농업도 첨단산업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젊은 친구들이 많이 올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야 해요. 젊고 많이 배운 고급인력들이 기꺼이 농업에 뛰어들어야 농업이 발전합니다.
▼ 김영환 농민들 중에는 희망이 있는 분도 있고 희망 없는 분들도 계시죠. 정말 창의적인 생각으로 어려운 환경을 돌파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계신가 하면 아무런 희망 없이 제자리에만 머무르려는 분들이 계시죠. 그래서 한국 농업 전체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쉼 없이 스스로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농민에게 농업은 희망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박애경 벤처농업대학 학생 중에 대학을 갓 졸업한 22세 아가씨가 있습니다. 허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가씨인데요. 배낭 하나 둘러메고 앞으로 3년 동안 전국을 돌면서 유기농업과 허브, 꽃을 연구한다고 해요. 저희 농장에도 온 적이 있는데 그런 열정과 패기를 가진 분이 많이 나온다면 우리 농업도 걱정 없겠다 싶어요.
▼ 김영환 정말 그렇습니다. 농사를 얼마나 오래 지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제일 중요합니다. 좋은 목표와 비전을 가진 분들은 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 김정호 주변의 농민들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적은 없습니까? 다른 분들이 대표들처럼 스타 농민, 부자 농민이 되려면 무엇을 바꿔야 한다고 보십니까?
▼ 나준순 고정관념 때문에 새로운 것은 시도조차 안 하시려는 분이 많아요. 특히 연세 있으시고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오신 분들 중에는 직접 체험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믿으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처음에 친환경농업을 같이 하자고 말씀드릴 때도 쌀에 무슨 유기농이냐고 반대하신 분이 참 많습니다. 사기꾼이다 아니다 하면서 한 2년 남짓 마을이 시끄러웠습니다. 다행히 선두 농민들이 잘 설득해주셔서 지금은 친환경단지로 함께 잘 가고 있습니다.
▼ 김정호 쌀 농사에도 공단처럼 단지가 필요한가요?
▼ 나준순 그렇습니다. 쌀 농사도 규모가 커지면 일하기도 쉽고, 생산비도 낮아집니다. 그런데 협동해서 단지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아요. 쌀 품질의 균일성을 위해 함께 고민하면서 농민들이 마음을 합칠 수 있는 지역의 선도농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다 같이 1000억원대 매출 농업기업 한번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연원 가장 큰 문제는 고정관념입니다. 축산인들과 함께 스위스에 갔을 때 보니 거기는 소를 50~60마리만 키우되 아주 양질로 키우더라고요. 게다가 축사에다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놓습니다. 그 자체를 관광상품화하는 거죠. 저한테는 참 신선한 충격이어서 저도 그렇게 해봤습니다. 제 농장에 그림을 그려서 관광상품으로 만든 거지요. 안타깝게도 같이 간 분들 중에서 ‘저거 해서 먹고 살겠느냐, 그림 그릴 돈으로 항생제나 사 먹이지’ 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그럴 때 참 답답함을 느낍니다.
농업에도 규제개혁 필요
▼ 김정호 그렇게 새로운 것을 먼저 도입한다는 게 정말 힘들겠군요. 혹시 정부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하신 경우는 없습니까?
▼ 나준순 여름에는 쌀을 저온 저장하는 데에 전기요금이 어마어마하게 나옵니다. 폐 터널에 쌀을 저장하면 전기요금을 줄일 수 있겠다 싶어 허가를 받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선례가 없다 보니 어디에 가서 얘기를 해야 할지도 막막했고 공무원들 또한 안 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며 말리기에 바쁘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지자체 공무원분과 잘 협력해서 해결했습니다만, 공무원들도 전향적으로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농업도 첨단화하려면 정부 규제가 문제될 수 있습니다.
▼ 김정호 요즘 FTA(자유무역협정)가 첨예한 갈등의 진원지인데요. 다가오는 한미 FTA, 한-EU FTA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농산물 개방에 맞춰 준비하는 특별 무기가 있나요?
▼ 김영환 대기업들이 값싼 외국 콩으로 만든 유기가공품을 싼 가격에 내놓으면 저희 된장 사업에도 영향이 있겠지요. 하지만 소비자에게 행복과 안전, 가치를 팔면 저희도 승산이 있습니다. 저희 가을향기 농장 같은 소규모 농장은 대기업, 외국 상품들과 달리 소비자와 교감이 가능하지요. 저희는 직거래하시는 분들께 계절마다 상추, 감자, 고추 등 저희가 재배한 채소랑 감사의 쪽지를 꼭 넣어드립니다. 우리 제품을 사주신 분들에게 행복을 선사하고 싶거든요. 아무리 FTA를 하더라도 인정과 마음은 수입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 박애경 내가 먹을 것에는 농약 안 치고, 팔 물건에는 농약을 치는 식으로 해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내가 먹는 것과 똑같이, 아니 내가 먹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고객에게 드리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고객들로부터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행복한 말을 듣게 되지요.
▼ 김정호 맞습니다. 아무리 FTA를 해도 두 분이 말씀하시는 이런 정성과 애정은 수입할 수 없지요. 하하.
▼ 나준순 저도 큰 틀에서 국민적 합의하에 농업 대책틀을 만들어놓고 FTA가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농업 부문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농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배정된 119조의 예산을 잘 쓰면 농업도 승산이 있습니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늘어난 농업 예산에 문제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농촌에 수리 전답시설 같은 인프라가 많이 구축됐습니다. 이제부터는 농업 소프트웨어를 발전시키는 쪽으로 예산이 집행됐으면 합니다.
▼ 이연원 한-칠레 FTA로 인해 농가들이 입은 타격이 생각보다 작았습니다. 물론 한미 FTA와 한-EU FTA는 그 피해가 더 클 거라고 다들 예상합니다. 그러나 뉴질랜드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기가 있어야 변할 수 있는 계기가 생깁니다. 저는 FTA를 하나의 기회로 봅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현재 동물성 지방을 덜 먹는 식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럼 상대적으로 불포화지방이 많이 함유된 저희 가나안 농장의 유기농 돼지를 그쪽으로 수출할 수 있습니다. 저는 FTA가 더 큰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보고, 지자체와 함께 수출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해외서도 경쟁력 있는 유기농 된장
▼ 김정호 지방성분이 적은 돼지도 있나요?
▼ 이연원 한국인은 고기 식습관이 안 좋습니다. 돼지는 무조건 삼겹살, 쇠고기는 마블링이 가득해야 고급육으로 칩니다. 하지만 그런 고기에 포화지방이 많다면 성인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비자에게 불포화지방 위주의 돼지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종자, 사육방법, 먹이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기라면 유럽에 수출할 수 있습니다.
▼ 김정호 정말 우리 농산물의 수출이 가능할까요?
▼ 이연원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시장조사차 중국 상하이의 할인점 ‘까르푸’를 들른 적이 있는데 일본산 사과 하나를 1만원에 팔더군요. 우리 사과보다 맛이 덜한데도 그것이 팔리는 거지요. 조금만 노력하면 중국 상류층한테 우리의 좋은 식품을 팔 수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농민들. 왼쪽부터 이연원·나준순·박애경·김영환씨.
교포가 아닌 유럽인들에게 그리고 중국 대륙에까지 당당히 우리 된장을 수출하고 싶습니다.
▼ 김정호 중국 농업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 아닌가요?
▼ 이연원 중국의 농업을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1인당 농경지를 계산해보면 전세계 평균이 480평(1580여m2), 한국이 750평(2480m2)인데 반해 중국은 겨우 290평(958m2) 정도입니다. 중국은 농지가 부족한 나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중국은 식량 수입국이 될 겁니다. 우리가 오히려 중국에 수출할 여지가 큽니다. 저는 FTA에 대비해 좀 더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박애경 물론 저희도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의 농산물과 유럽의 유기가공식품들을 보며 걱정한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 한국 전통식품을 찾아 유럽에서까지 찾아오는 사람을 보고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의 완제품만을 수입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사람들 입맛에 맞는 소스로 가공해 판매할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우리 된장을 가지고 외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 사람들 입맛에 맞게 가공한다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반성도 했습니다. 앞으로 이 훌륭한 된장을 주원료로 하여 세계 각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한다면 우리 된장의 세계화는 꼭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농업에 젊음을 투자하시오’
▼ 김정호 대표 여러분을 뵙고 있으니 우리 농업에 희망도 보이고 열심히 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여전히 젊은이들이 농업을 기피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한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연원 농업이 사양산업 신세가 되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겁니다. 이제는 농업이 바닥을 치고 올라올 때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부가가치 창출의 기회가 무궁무진합니다. 농업에 젊음을 투자하십시오.
▼ 김영환 저는 농업으로 승부를 걸고 싶은 사람만 오라고 하고 싶습니다. 간혹 ‘농사나 짓지’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이런 분들은 도시에 계시는 편이 낫습니다. 농사는 결코 할 일이 없을 때 아무렇게나 짓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이 없으면 일어서기 어려운 것이 농업입니다. 하지만 정말 뜻을 가지고 농업에 종사하고 싶다면 해볼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농업이기도 합니다. 좋은 먹을거리와 좋은 환경을 만드는 보람도 있고요. 많은 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농촌으로 돌아오면 좋겠네요.
▼ 박애경 사람은 누구나 고향에 대한 회귀 본능이 있습니다. 흙과 함께하는 건강한 삶이 농촌에는 있거든요. 맛있는 음식에, 일하다가 힘들면 땅에 누워 하늘도 보고 자연과 벗하고 위로받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이 농촌에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자, 성공한 나를 보라’
사실 대담을 시작하기 전 ‘농업이 낙후된 원인을 정부 정책이나 사회 탓으로 돌리는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필자가 놀랄 정도로 이들은 당당했다. 마치 ‘자 나를 보라, 마음만 먹으면 농업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들의 성공 비결은 농사를 짓는 것보다 소비자의 마음을 잡는 데 있다. 그것만 할 수 있다면 FTA의 파고도 넘어갈 수 있다. 네 분의 농민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것이었다.
돌아올 때는 김영환 대표가 직접 운전을 해서 금산부터 대전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오는 길 내내 나는 유기농업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그는 말문이 열린 사람처럼 즐겁게 설명을 해줬다.
“우렁이 농법은 어떻게 가능한 건가요? 우렁이가 해충을 잡아먹는 모양이지요?”
“그게 아니라, 우렁이는 풀을 먹는데요. 벼 이외의 잡초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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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들로 농업에 대해 조금은 유식해져가는 시간이었다. 농사일로 행복해 하는 그에게서 우리나라 농업의 희망을 보았다. 김영환 대표가 지은 ‘된장 연가’의 몇 구절로 이 글을 마친다.
‘그렇게 아픔 삭여가며/ 그렇게 마음 달래가며/ 그렇게 말없이 살아왔다.// 그렇게 몇 해 살다보니 사람들은 이제 다시/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명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