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은 ‘빅 브라더’가 감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전자정보기술의 발전으로 감시 카메라가 도처에 넘쳐난다. 서울 시민은 하루 평균 39차례 카메라에 잡힌다는 통계도 있다.
- 이런 감시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인터넷의 발달로 대중도 권력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상호 감시의 시대가 온 것이다.
(닫힌 창유리 너머로 보아도 바깥은 추워 보였다. 거리 저편에 회오리바람이 먼지와 찢어진 종잇조각을 잠시 소용돌이치게 하고 있었다. 태양은 빛나고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지만, 여기저기에 온통 붙여 놓은 포스터 외에는 색깔이 없어 보였다.)
The black-mustachio′d face gazed down from every commanding corner. There was one on the house-front immediately opposite. BIG BROTHER IS WATCHING YOU, the caption said, while the dark eyes looked deep into Winston′s own. Down at street level another poster, torn at one corner, flapped fitfully in the wind, alternately covering and uncovering the single word INGSOC.
[관망하기 좋은 구석구석마다 검은 수염의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스터는 바로 맞은편 집 앞에도 붙어 있었다. 포스터의 검은 눈이 윈스턴의 눈을 노려보았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설명문이 쓰여 있었다. 저쪽 거리 1층에 한쪽 모서리가 찢어진 또 하나의 포스터가 바람에 간간이 펄럭이며 “영사(英社)”(INGSOC)란 낱말을 가렸다 내보였다 했다.]
※ moustachio′d: moustachioed = Moustached (검은 수염이 난) ※street-level: (1)거리 (2)1층(ground-floor level)/ at street level(=on the ground-floor): 거리에, 1층에/ If you raise your eyes above street level, you′ll see a different Naples.(거리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나폴리가 색다르게 보일 것이다.) ※INGSOC(잉속·영사 英社): England Socialism(영국 사회주의)의 신어(newspeak)적 약어
‘문제는 사상 경찰’
In the far distance a helicopter skimmed down between the roofs, hovered for an instant like a bluebottle, and darted away again with a curving flight. It was the police patrol, snooping into people′s windows. The patrols did not matter, however. Only the Thought Police mattered.
(멀리서 헬리콥터가 지붕 사이로 스치며 금파리처럼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회 비행하여 휙 날아가버렸다. 창문 너머로 사람들을 감시하는 경찰순찰기였다. 그러나 이런 순찰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상경찰(思想警察)이었다.) ※ bluebottle(금(金)파리): 광택이 나는 녹색 외양을 하고 있어 청파리라고도 불리며, 앞·옆머리가 금빛 가루로 덮여 있다.
Behind Winston′s back the voice from the telescreen was still babbling away about pig-iron and the overfulfilment of the Ninth Three-Year Plan. The telescreen received and transmitted simultaneously. Any sound that Winston made, above the level of a very low whisper, would be picked up by it, moreover, so long as he remained within the field of vision which the metal plaque commanded, he could be seen as well as heard.
(윈스턴의 등 뒤에서 대형 TV스크린이 제1차 금속산업과 제9차 3개년 계획의 초과 달성에 대해 여전히 지껄이고 있었다. 이 스크린은 저쪽에서 오는 걸 방송하는 동시에 이쪽 것을 전송하는 송신·수신 겸용이었다. 윈스턴이 내는 소리는 아무리 작게 속삭이는 소리라도 모두 걸려들었다. 그뿐 아니라 이 금속판의 시계(視界)안에 들어 있는 한, 윈스턴이 하는 행동은 다 보이고 다 들렸다.) ※ pig iron: 선철(銑鐵·용광로에서 직접 얻어 주물의 원료로 쓰는 철), 제 1차 금속산업.
There was of course no way of knowing whether you were being watched at any given moment. How often, or on what system, the Thought Police plugged in on any individual wire was guesswork.
(물론 언제 감시를 받는지 알 길이 없었다. 사상경찰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개인에게 감시 플러그를 끼우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 plug in(on): 플러그를 끼우다/ plug in a toaster(토스터에 플러그를 끼우다) ※ ‘the Thought Police plugged in on any individual wire was guesswork’의 맨 앞에 명사절을 인도하는 접속사 that이 생략되어 있다.
It was even conceivable that they watched everybody all the time. But at any rate they could plug in your wire whenever they wanted to. You had to live - did live, from habit that became instinct - in the assumption that every sound you made was overheard, and, except in darkness, every movement scrutinized.
(사상경찰이 항상 모든 사람을 언제나 감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떻든 그들은 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감시의 플러그를 꽂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내는 소리는 모두 감청되고 캄캄할 때 외에는 자신의 모든 동작이 철저히 감시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살아가야 했다 - 아니 그 습관이 본능이 되어 살아갔다.)
현대는 상호 감시의 시대
이상은 ‘1984’의 제1장(Chapter One)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팬옵티콘(panopticon)과 관련해 생각해보자. panopticon의 어원은 ‘pan(모두)+ optic(보다)’이다. 팬옵티콘(Panop-ticon)이란 개념은 근대사회의 감시체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영국의 법학자이자 철학자인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1748~1832)이 착안한 죄수 교화시설인 원형감옥을 말한다. 중앙에 감시공간이 있고 바깥쪽으로 빙 둘러 죄수의 방이 있어 모든 죄수를 하나같이 감시할 수 있다.
간수는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다. 따라서 죄수는 자신의 행동을 간수가 늘 보고 있다는 전제하에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게 된다. 죄수의 방은 항상 밝게, 중앙의 감시소는 항상 어둡게 시설되어 있다.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 때문에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못한다.
오늘날의 사회를 보자. 감옥과 같은 특수한 공간뿐 아니라 직장이나 백화점 등 모든 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림잡아 250만대의 폐쇄회로 감시카메라가 국민의 일상을 비춘다. 서울 시민은 보통 하루 39번씩 카메라에 잡힌다는 통계도 있다. ID카드는 일거수일투족을 회사에 보고한다. 휴대전화는 소지자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위치 오차가 몇 m 안쪽일 정도로 정확해졌다.
결국 현대인은 팬옵티콘에 갇힌 죄수와 다름없게 되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는 말이 60년 만에 전자정보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이 됐다. 현대인은 고도의 전자정보기술에 의한 ‘전자 감옥’에 살고 있다. 각자에 대한 모든 것이 각자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록되고 촬영되어 저장된다. 이런 감시를 빠져나갈 수 있는 영역은 거의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미셸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1975)이란 저서에서 팬옵티콘이란 개념을 이용해 근대체제를 ‘한 권력자가 만인을 감시하는 체제’라고 설명했다. 각자의 정보가 모두 드러나 있고, 자신은 권력자를 또는 감시자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보를 쥔 자에게 스스로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인터넷이라는 발언대를 통해 권력을 감시할 수 있게 됐다.
감시자만 대중을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피(被)감시자도 감시자를 볼 수 있다. 즉 감시하는 자가 감시당하는 ‘상호 감시’시대가 온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관찰하는 세상’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권력자와 대중이 동시에 상호 감시하는 메커니즘이다. 다수의 대중이 소수의 권력을 감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시놉티콘은 ‘다수 시민에 의한 권력 감시체제’라는 정치적 해석이 가능하다.
인터넷이란 발언대를 확보한 대중이 도리어 권력 자체를 감시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등의 사례는 정보화의 총아라고 할 인터넷이 권력자의 의도를 무너뜨리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것은 대중이 자신을 권력자에게 종속시키지 않고 주체적으로 정보를 다룰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음을 의미한다. ‘시민이 통치대상이기를 거부하는 시대’ ‘전자민주주의의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전자민주주의가 국민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피로감을 씻어주기도 하지만 ‘민주과잉시대’ ‘디지털 포퓰리즘’이란 역기능을 낳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Ignorance is strength
어떤 신앙을 강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신앙에 대한 모든 의심을 없애는 것이다. 어떤 신앙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면 그 신앙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무한히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신앙은 역시 무한하다. 인민을 무지 속으로 빠뜨리면 의심하지 않게 되고 그 사상 속에서 강력한 힘이 창조된다. 빅 브라더는 역사를 통제함으로써 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이게 했다. 윈스턴 스스로도 결국에는 “God is power(신은 권력이다)”라고 인정한다. 역사를 바꾸는 힘과 모든 것을 예언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힘은 스스로 신이라고 선언하는 힘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자신을 거리낌 없이 신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지는 국력이다(Ignorance is strength)’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중이 생각하는 것을 막는다. 체제의 모순에 대한 당원들의 무지함은 당의 통치를 일사불란하게 한다. 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이게 하기 위해 역사까지 조작한다. 윈스턴은 기록국에서 역사를 조작하는 일을 한다.
전쟁과 같은 거대한 사건조차 조작한다. 역사를 조작해 대중을 무지하게 만든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기록들을 수정하여 그 왜곡된 사실을 진리로 만든다. 당이 마음대로 진리를 만들어낸다. ‘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당의 또 다른 슬로건이다.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 sity) 폴 크루그먼(Paul Robin Krug man·1953~, 경제학) 교수는 2004년 10월8일자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 ‘Ignorance Isn′t Strength’에서 ‘Ignorance is strength(모르는 것이 힘이다)’라는 오웰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I first used the word ‘Orwellian’ to describe the Bush team in October 2000. Even then it was obvious that George W. Bush surrounds himself with people who insist that up is down, and ignorance is strength. But the full costs of his denial of reality are only now becoming clear. - omitted -
(나는 2000년 10월 부시팀(the Bush team)을 말하면서 처음으로 오웰식이란 말을 썼다. 그때도 부시는 ‘up is down(성(盛)은 쇠(衰)다)’ ‘ignorance is strength(모르는 것이 힘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현실 부인에 대한 전면적인 대가가 지금 명백해지고 있다.) - 중략(中略) -
The point is that in the real world, as opposed to the political world, ignorance isn′t strength. A leader who has the political power to pretend that he′s infallible, and uses that power to avoid ever admitting mistakes, eventually makes mistakes so large that they can′t be covered up. And that′s what′s happening to Mr. Bush.
(문제는 정치세계와 반대인 현실세계에서 무지는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권력을 갖고 짐짓 자신은 전혀 오류가 없는 체하며 실수를 인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러한 권력을 사용하는 지도자는 실수를 대량생산해 덮어버릴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일이 부시에게 일어나고 있다.)
Ignorance is bliss
18세기 중엽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 그레이(Thomas Gray·1716~1771)는 자연과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고독감과 무상함을 노래한 시 ‘Ode on a Distant Prospect of Eton College(멀리 이튼 학교를 바라보는 노래)’(1742)에서 ‘Ignorance is bliss’(모르는 것이 약)라고 썼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옮기기도 한다. 학식이 있는 것이 오히려 근심을 사게 된다는 의미다.
And happiness too swiftly flies.
Thought would destroy their paradise.
No more; where ignorance is bliss,
it′s folly to be wise.
(그리고 행복은 너무나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네.
생각은 늘 모든 행복을 파괴해버리려고 하네.
이뿐이다; 무지가 축복인 곳에서는
현명해지려는 것은 바보짓.)
※ would: ‘사람이’ 상습적으로 …하다. ‘공교로운 사태 등이’ 늘 …하다. (종종 과거의 때와는 관계없이 씀) He would park his car in front of my house. 그는 늘 내 집 앞에다 주차한단 말이야.
자기가 어떤 것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스스로 깨닫는 지(知), 즉 진정한 지에 이르는 출발점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지(知)를 특징짓는 옛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469 BC~399 BC)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이른바 ‘무지(無知)의 지(知)(Bewusstsein des Nichtwissens)’다.
소피스트(sophist)란 원래 ‘현인(賢人)’ 또는 ‘지자(知者)’를 뜻한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변론술과 입신출세에 필요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르치고, 많은 보수를 받았다. 각자 자부하는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있어 개인이나 국가한테서 돈을 받고 그것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 선(善)이란 지혜가 아니었다. 선(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했다. 이후 ‘소피스트’란 말은 ‘궤변을 일삼는 자(someone who argues with shrewd but intentionally fallacious reasoning)’를 의미하게 되었고, 궤변학파라고도 불렀다.
이후 지식을 파는 소피스트와 차별되는 필로소포스(Philosophos)가 등장했다. 그리스어 Philosophia(애지 愛知)에서 영어의 철학(philosophy)이 나왔고, 그리스어 Philosophos(애지자 愛知者)에서 영어의 Philosopher(철학자)가 나왔다. Philosophia는 Philia(friendship · love)와 Sophia(wisdom)가 합쳐진 말이고, Philosophos는 Philia(friendship · love)와 Sophos(wise man)가 합쳐진 말이다.
필로소포스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피타고라스였다. 피타고라스(580 BC~572 BC), 소크라테스(469 BC~399 BC), 플라톤(428 BC~348 BC),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384 BC~322 BC)의 관점에서 보면 신(神)만이 지자(知者·sophos)이다. 인간은 지자(知者)가 아니기 때문에 지(知·sophia)를 애구(愛求)하는 유한한 존재다. 따라서 ‘philo sophia’는 소위 현자(賢者)나 지혜의 본성이 신에 비교한다면 무(無)와 같다는 것을 명확하게 자각(自覺)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공자(孔子·Confucius)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라. 이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공자에게 참으로 안다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해 양자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Ignorance is knowledge
한편 노자(老子· Lao-tzu)는 안다고 하는 것까지 오히려 알지 못하는 것으로 부정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는 진리 앞에서는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동시에 알지 못하는 것이 되고, 알지 못하는 것이 동시에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고차원적인 지(知), 이른바 부지지지(不知之知)의 의미를 꿰뚫어 보고 있다.
공자의 지(知)는 박학을 전제로 하는 지(知)다. 그러나 노자는 그 박학의 지(知)를 부정한다. 노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설파한 소크라테스와 같이, 노자 또한 참으로 아는 것은 아는 데 있지 않고 알지 못한다고 하는 데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영미권에서도 무지의 깨달음을 설파한 이는 많다. 영국의 정치가·소설가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1804~ 1881)도 부지지지(不知之知)와 같은 개념의 말을 했다. To be conscious that you are ignorant is a great step to knowledge.(자기가 무지하다고 의식하는 것이 앎을 향한 큰 진전이 된다.) To be ignorant of one′s ignorance is the malady of the ignorant(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것이 무식한 사람의 병폐다)는 미국의 교육자 올컷(Amos Bronson Alcott· 1799~1888)이 한 말이다.
Ignorance is preferable to error, and he is less remote from the truth who believes nothing than he who believes what is wrong.(모르는 게 잘못 알고 있는 것보다 낫다. 또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 그릇된 것을 믿는 사람보다 진실에 더 가까이 있다.) 미국 제 3대 대통령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 1826)의 말이다.
Ignorance gives one a large range of probabilities(인간은 무지할 때 많은 가능성을 갖는다)는 영국 여류 소설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1819~1880)이 ‘다니엘 데론다(Daniel Deronda)’(1876)에서 한 말이다. 한편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1819~1891)은 ‘백경(白鯨·Moby Dick)’(1851)에서 Ignorance is the parent of fear(무지는 공포의 근원이다)라고 말했다.
Ignorance is not innocence, but sin(무지는 순수가 아니라 죄악이다)은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의 말이다. Ignorance, the root and the stem of every evil(무지는 모든 악의 근원이요 뿌리다)은 플라톤 (Plato)의 말이다.
A straw shows which way the wind blows.(밀짚 하나가 바람 부는 방향을 보여준다. 한 잎의 낙엽으로 가을이 왔음을 안다. 조그만 일로도 대세를 알 수 있다. 하나의 단서로 어떤 사건의 전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속담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A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제비 한 마리가 여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란 말도 있다. Knowledge is power(지식은 힘이다)는 Ignorance is strength(무지는 국력이다)의 반대 개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Knowledge is power
Knowledge is power(지식은 힘이다)는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이다. Discussion is an exchange of knowledge: argument an exchange of ignorance.(토론은 지식의 교환이요, 논쟁은 무지의 교환이다.)는 미국의 유머작가요 저널리스트인 퀼렌(Robert Quillen·1887~1948)의 말이다. A little learning is a dangerous thing은 우리말의 ‘선무당 사람 잡는다’ ‘반(半)풍수 집안 망친다’에 해당한다. 반면에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란 우리말이 있다. 영국의 시인 포프(Alexander Pope·1688~1744)의 ‘Essay on Criticism(비평론)’의 일부를 보자.
조지 오웰의 ‘1984’에서 현대인은 원형감옥에 갇힌 죄수의 이미지로 나온다.
Drink deep, or taste not the Pierian spring:
There shallow draughts intoxicate the brain,
And drinking largely sobers us again.
(얕은 학식은 위험한 것;
시(詩)의 샘물을 깊이 마셔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맛보지 마라:
거기서 감질나게 몇 모금 마시면 머리를 취하게 하지만,
많이 마시면 우리를 다시 깨어나게 한다.)
The Ministry of Peace
소설 속에서 평화부(平和部·The Ministry of War)는 전쟁을 독려한다. 애정부(愛情部·The Ministry of Love)는 아기를 낳기 위한 목적 외에는 사랑을 금지한다. 진리부(眞理部·The Ministry of Truth)는 정부의 선전에 맞춰 과거를 바꾼다. 풍부부(豊富部·The Ministry of Plenty)는 궁핍을 연장시킨다.
Even the names of the four Ministries by which we are governed exhibit a sort of impudence in their deliberate reversal of the facts. The Ministry of Peace concerns itself with war, the Ministry of Truth with lies, the Ministry of Love with torture and the Ministry of Plenty with starvation. These contradictions are not accidental, nor do they result from ordinary hypocrisy; they are deliberate exercises in doublethink. For it is only by reconciling contradictions that power can be retained indefinitely. In no other way could the ancient cycle be broken. If human equality is to be for ever averted - if the High, as we have called them, are to keep their places permanently - then the prevailing mental condition must be controlled insanity.
(인민을 다스리는 정부의 네 개 부(部)처의 이름마저 뻔뻔스럽게 사실을 계획적으로 뒤집는다. 평화성은 전쟁을, 진리성은 거짓을, 애정성은 고문을, 풍부성은 궁핍을 담당한다. 이러한 모순은 우연이 아니요, 일상적인 위선으로 인한 것도 아니다. 이중사고의 계획적 실행이다. 왜냐하면 모순을 일치시켜야만 권력을 무한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과거를 재현시킬 뿐이다. 인간의 평등을 영원히 피하려면 - 이른바 고위층이 자신의 자리를 영구히 지키려면 정신상태의 주조(主潮)를 광적인 상태로 통치해야 한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는 다음과 같이 ‘평화(平和)부’에 대한 설명을 달고 있다.
전쟁 담당하는 ‘평화부’
The Ministry of Peace may be the most vital organ of Oceania, seeing as the nation is constantly at war with either Eurasia or Eastasia and requires just the right force to not win the war, but keep it in a state of closeness. As explained in Goldstein′s book, the Ministry of Peace revolves around the principle of perpetual war.
[평화부는 오세아니아(Oceania)에서 가장 주요한 기구다. 평화부는 자기 나라가 유라시아(urasia)나 이스트아시아(Eastasia)와 끊임없이 교전 중이며,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는 것에 가까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데 적절한 힘만을 필요로 한다고 보고 있다. 골드스타인의 책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평화부는 부단한 전쟁(perpetual war)이라는 원칙을 축으로 한다.]
If the citizens of Oceania have a well-defined enemy, Eastasia or Eurasia, then they know whom they hate, and constant homeland propaganda helps to convince them to vent all their unconscious rage for their own country against the opposing one. Since that means the balance of the country rests in the war, the Ministry of Peace is in charge of fighting the war but making sure to never tip the scales, in case the war should become one-sided.
[오세아니아의 분명한 적이 이스트아시아나 유라시아라는 것은 인민이 누구를 증오하고 있는지를 자명케 한다. 끊임없는 조국의 선전으로 인하여 인민은 국가에 대한 모든 무의식적 분노를 적대국가에 배출한다. 이것은 곧 국가의 안정이 전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라 평화성이 전쟁을 관장하지만, 전쟁이 한쪽으로 기울 경우를 대비하여 전세가 한쪽으로 절대 기울지 않도록 하는 절대적 책임을 진다.]
※tip [tilt · turn] the scale(s): (1) 무게가 나가다(at) He tips the scales at 60kg.(그는 체중이 60kg 나간다.) (2) 저울의 한쪽을 무겁게 하다, 국면을 일변시키다, 결정적으로 되게 하다
Oceanic telescreens usually broadcast news reports about how Oceania is continuously winning every battle it fights, though these reports have little to no credibility. As with all the other Nineteen Eighty-Four ministries, the Ministry of Peace is named the exact opposite of what it does, since the Ministry of Peace is in charge of maintaining a state of war.
(항상 오세아니아의 대형 TV는 싸우는 족족 오세아니아가 계속 이기고 있다는 뉴스를 방송해댄다. 그 보도가 거의 신빙성이 없지만. ‘1984’의 다른 부와 마찬가지로 평화성은 - 평화성은 전쟁 상태를 유지하는 책임을 지는 부서이기 때문에 - 그들이 하는 일과는 정반대가 되는 명칭이 붙여졌다.)
The Ministry of Love
당은 당원에게 반(反)섹스(anti-sexualism)를 강요한다. 성적 애착(sexual attachments)은 당에 대한 절대적 충성(exclusive loyalty)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에 대한 충성을 위해서는 성본능과 같은 기본적 본능의 억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당은 성적 충동(sex drive)을 억압(repression)시켜 성적 에너지를 당에 대한 충성 에너지로 바꾼다.
감시사회에선 오르가슴도 거세된다.
When you make love you′re using up energy; and afterwards you feel happy and don′t give a damn for anything. They can′t bear you to feel like that. They want you to be bursting with energy all the time. All this marching up and down and cheering and waving flags is simply sex gone sour. If you′re happy inside yourself, why should you get excited about Big Brother and the Three-Year Plans and the Two Minutes Hate and all the rest of their bloody rot?
(사랑의 행위를 하게 되면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그 다음엔 행복감을 느끼게 되고 무엇이든 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 감정을 용납하지 못하는 거지요. 언제나 정력적으로 폭발하기를 원해요. 왔다갔다 행진하고 갈채를 보내고 깃발을 흔드는 게 모두 성의 왜곡(歪曲)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심으로 행복한데 뭣 때문에 ‘대형’이니 ‘3개년 계획’이니 ‘2분간 증오’니 따위의 어처구니없이 썩어빠진 일에 흥분한단 말입니까?)
이 소설의 3장(Chapter Three)에서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sexual repression(성적 억압)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Power is in inflicting pain and humiliation. Power is in tearing human minds to pieces and putting them together again in new shapes of your own choosing. Do you begin to see, then, what kind of world we are creating? It is the exact opposite of the stupid hedonistic Utopias that the old reformers imagined. A world of fear and treachery and torment, a world of trampling and being trampled upon, a world which will grow not less but more merciless as it refines itself. Progress in our world will be progress towards more pain. The old civilizations claimed that they were founded on love or justice. Ours is founded upon hatred. In our world there will be no emotions except fear, rage, triumph, and self-abasement. Everything else we shall destroy everything.
(권력은 고통과 모욕을 주는 데 있는 거야. 권력은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해체하여 원하는 새로운 모양으로 재조립하는 거야. 이러면 자네는 우리가 만들고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알 것 같은가? 이건 옛날의 개혁자들이 상상했던 어리석은 쾌락주의자의 유토피아와는 정반대되는 거지. 공포와 반역과 고통의 세계야.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야. 정련되어감에 따라 덜해지기는커녕 더욱 더 무자비해지는 세계야. 우리 세계에서의 전진이란 더 아픈 고통을 향한 전진이야. 옛 문명은 사랑과 정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옛 문명은 주장했지. 우리의 문명은 증오에 근거한 거야. 우리 세계에는 감정이라면 공포와 분노와 승리감과 열등감밖에 없어, 나머지는 우리가 모두 부숴버린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사회
Already we are breaking down the habits of thought which have survived from before the Revolution. We have cut the links between child and parent, and between man and man, and between man and woman. No one dares trust a wife or a child or a friend any longer. But in the future there will be no wives and no friends. Children will be taken from their mothers at birth, as one takes eggs from a hen. The sex instinct will be eradicated. Procreation will be an annual formality like the renewal of a ration card.
(이미 우리는 혁명 전부터 가져온 사고방식을 부수고 있어. 우린 부모와 자식, 남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 간의 유대를 끊어버렸어. 어느 누구도 이젠 마누라나 자식이나 친구를 믿지 않는 거야. 미래에는 마누라도 친구도 없어져. 암탉둥지에서 달걀을 빼앗아오듯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한테서 빼앗아오는 거야. 성적 본능도 근절돼. 출산은 식량배급카드 갱신하듯 연 1회 행사일 뿐이야.
※ I wonder how he dared (to) say that(어떻게 그가 감히 그런 말을 했을까)에서처럼 dare가 본동사로 사용될 경우, 목적어에 to를 붙여도 되고 안 붙여도 되는 특별한 용법(usage)을 갖고 있다. 본문 No one dares trust a wife or a child or a friend any longer에서는 to를 붙이지 않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We shall abolish the orgasm. Our neurologists are at work upon it now. There will be no loyalty, except loyalty towards the Party. There will be no love, except the love of Big Brother. There will be no laughter, except the laugh of triumph over a defeated enemy. There will be no art, no literature, no science. When we are omnipotent we shall have no more need of science. There will be no distinction between beauty and ugliness. There will be no curiosity, no enjoyment of the process of life. All competing pleasures will be destro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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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르가슴(orgasm·성적 쾌감의 절정)을 없앨 거야. 지금 신경학자들이 이를 연구하고 있어. 충성심도 당에 대한 충성심만 존재할 뿐이야. 사랑도 대형에 대한 사랑만 존재할 뿐이야. 웃음도 적을 쳐부수고 승리감에 도취해 웃을 때에만 존재할 뿐이야. 미술도 문학도 과학도 없어질 거야. 우리가 전능해지면 과학의 필요성도 없어져. 아름다움과 추악함 간의 구별도 없어져. 호기심도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도 없어져. 경쟁하는 즐거움도 모두 없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