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국방부, 한국에 ‘스파이사건’ 규명 요청
- 김양, 롤리스 미 국방장관 특보 만나 입장 청취
- 롤리스 “이 사건은 완전 억지였다”
- 김양 “증거 없는 反美공세, 美 억울함 풀려야”
- 盧정권 때 수사 ‘스파이 증거물’ 논란
- 당시 검찰 간부 “윗선에 보고하고 증거 채택”
- 당시 검찰 윗선 “보고 받은 기억 없다”
“백 회장이 만약에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이것은 간첩행위다.”(정청래 열린우리당 의원)
“만약에 사실이라면 이것은 국기(國基)를 흔드는 중대한 간첩죄이고, 우리 국가와 국민으로서 좌시할 수 없는 범죄”(조배숙 당시 국회 문광위원장·열린우리당)
“실로 충격적이다. 참으로 매국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김재윤 열린우리당 의원)
“이것은 국가정보를 빼내 가지고 밖으로 나가는 간첩행위를 한 사람이고.”(김학원 한나라당 의원)
“백성학·배영준→롤리스→부시”
언론은 이 증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당시 여권과 일부 언론은 신현덕 전 대표의 폭로를 ‘미국 스파이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후 “백 회장이 운영한다는 정보팀 소속 인사는 배영준 당시 ‘US아시아 한국지사’ 사장이고 ‘US아시아’는 리처드 P. 롤리스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가 대표로 있는 회사”라는 내용도 알려졌다. “백 회장과 배영준 사장이 한국의 국가정보를 유출하여 롤리스 미국 국방부 부차관보에게 보고한다”는 좀 더 구체화된 스파이 혐의가 여권 및 일부 언론을 통해 제기된 것이다. “신현덕씨가 주장하는 의혹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백성학 회장이 모은 한국정부 동향 첩보가 배 사장에 의해 번역돼 리처드 롤리스에게 보고된다.”(2006년 11월21일자 모 언론 보도) 이어 그 ‘최종 배후’에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다.
국회가 백성학 회장과 신현덕 전 대표를 위증 혐의로 고발하면서 미국 스파이 사건은 검찰 손으로 넘어갔다. 검찰은 2007년 4월6일 국회에 통보한 수사 결과에서 “백성학이 정보팀을 운영한 점을 인정할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백성학이 국내외 정세분석 문건을 해외에 보낸 점을 인정할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검찰은 “백성학이 신현덕에게 문건 작성을 지시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백성학이 신현덕에게 ‘정세분석 자료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으로 보낸다’는 말을 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검찰은 백 회장에 대해선 신 전 대표에게 “국내외 정세분석 문건을 작성하라” “국내외 정세분석 자료를 영문으로 번역해 미국으로 보낸다”는 말을 하고도 국회에서 위증한 혐의로, 신 전 대표에 대해선 국회에서 “백 회장 측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다”고 위증한 혐의로 2007년 4월 각각 기소했으며, 지난 8월 11일 서울남부지법 결심공판에서 백 회장에 대해선 징역 1년6개월, 신 전 대표에 대해선 징역 1년을 각각 구형했다.
盧정권, ‘파상 공세’와 ‘애매한 결론’
노무현 정권 당시 여권의 파상 공세와 검찰 수사로 촉발된 미국 스파이 사건은 2년이 다 되어가는 2008년 8월에도 한·미 양국 정부의 갈등요인으로 잠복해 있다.
당시 열린우리당 측 주장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동맹국인 한국에 스파이단을 조직해 스파이 활동을 교사한 국제범죄 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검찰 수사결과 미국 정부가 그런 정보팀을 운영했거나 한국의 국가정보를 빼냈다는 증거는 없는 것으로 판명 났다.
그러나 검찰은 스파이 활동에 대해선 무혐의인 백 회장을 위증 혐의로 기소해 최근 징역형을 구형함으로써 “증거는 못 찾았지만 실제로는 미국 스파이 활동이 있었다”는 의심을 여전히 갖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스파이 혐의에는 무혐의 판결을 내리면서 동시에 그 스파이 혐의자가 ‘스파이 활동을 안했다’는 취지로 말한 증언에 대해서는 위증 처벌을 엄격히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정치·외교적 함의를 담고 있는데, 미국 정부 측으로선 다소 답답하고 불편한 상황이라고 한다. 미국 정부의 스파이단 운용 의혹, 미국 정부 고위 관리의 개입 의혹은 열린우리당의 공세와 언론 보도로 광범위하게 알려졌지만 그 이후 이 사건의 실체, 즉 미국 정부가 한국에서 실제로 스파이단을 운영해 정보를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선 노무현 정권의 애매한 검찰 수사결과 및 그에 바탕한 사법적 처리 등으로 인해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 내 어떤 책임 있는 당국자도 “미국은 잘못이 없다”라고 선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미국 측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국 정부를 ‘스파이 범죄를 자행하는 정부’로 몰아간 이 사건의 진상을 반드시 규명하고 넘어가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갖게 됐다고 한다.
실제로 노무현 정권 시절, 검찰에 의해 미국의 스파이단 운용 의혹이 증폭되는 일도 있었다. 2006년 4월 검찰이 별도로 작성해 소송당사자에게 보낸 장문의 ‘불기소 통지서’가 언론에 공개됐다. 검찰은 이 문서에서 “배영준의 US아시아 한국지사 사무실에서 국내 정세분석 문건(D▼ 47)의 영문번역본이 발견됐다. 백 회장 비서실 컴퓨터에서도 회사사업과는 직접 관련 없는 국내외 정세와 관련한 문건이 발견됐다”는 의심스러운 정황을 적으면서 “직접적 자료가 없어 정보유출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백성학 회장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스파이 혐의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으면 그뿐이지, 왜 스파이 증거물로 채택되지도 못한 불충분한 정황들을 장황하게 적어 소송당사자에게 보내는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검찰이 증거도, 실체도 없는 미국 스파이 사건의 불씨를 살리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신현덕 전 대표를 지지하는 측에선 “검찰 스스로 여러 의문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왜 더 철저히 수사하지 않는가”라며 축소수사 의혹을 제기했다.
“롤리스, 독도 해결 막후 역할”
리처드 P. 롤리스 미국 국방장관 특별 보좌관.
“7월29일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열린 자유무역협정 관련 행사장에서 이태식 주미 한국대사를 우연히 만나, 이 대사가 미국 지명위원회의 독도 표기를 ‘주권미지정’에서 ‘한국령(領)’으로 원상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수락한 일이 있다. 이에 따라 독도 문제가 해결됐다. 이번 독도 표기 변경과 관련해 한국 측에 ‘부시 대통령을 직접 만나 해결하라’고 제안해 실무적으로 성사시켜준 사람이 롤리스 특보였다. 이 대사와 롤리스 특보는 오랜 친분이 있다. 이 대사가 롤리스 특보의 국방부 부차관보 퇴임 1주년 모임을 열었는데, 그 무렵 롤리스 특보가 이런 제안을 한 것으로 안다. 한국 대사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 자리에서 영토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외교 현안을 해결했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그렇게 발표되도록 한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시나리오에 대한 사전 협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통령과 대사가 우연히 만나 즉석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설정 자체를 롤리스 특보가 기획하여 한국 측에 아이디어를 내 성사시킨 것이다.”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롤리스 특보는 미국 스파이 사건의 당사자이므로 이 사건과 관련한 그의 움직임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미국 스파이 사건의 진상규명(미국이 한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수행했는지 여부)을 한국 정부 측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워싱턴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했을 때 자신이 미국 스파이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매우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기사(2007년 8월호)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그의 발언을 간략하게 처리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롤리스 특보 등 미국 정부 측이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저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단, 제가 아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볼 경우 이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완전하게 미쳤습니다.’ 저는 이 문제는 매우 불행한 문제이며, 이 사안의 핵심을 백 회장과 관련된 법률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백 회장과 20년 넘게 알고 지냈습니다. 그는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한국인이며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백 회장은 여러 면에서 경제 기적이 만든 한국인 생존자이자 성공담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는 때로 특정한 진술을 하고 자신의 입장을 과장함으로써 보상을 받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무고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때로 이런 지나침으로 인해 오해를 받곤 합니다. 한국말로 표현하자면, ‘지나쳤어요’. 백 회장은 북한 출신으로서 고통을 받았고, 또 그가 많은 것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에 때때로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과장하는 성향이 그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사건이 매우 광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광적입니다. 특히 저와 연관이 있는 US아시아라는 회사가 스파이 스캔들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정말 믿기 어려운, 완전히 미친 말입니다. 저는 그와 관련된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문제는 지나친 억지거나 선을 넘어버린 것 같습니다. 미국이 이 회사를 이용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그러한 활동을 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처구니없어 보이며 개연성도 없어 보입니다. 저는 미국과 한국 사이에 어떤 비밀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MB 측 메신저, 美와 접촉”
이명박 정권의 핵심은 정권 출범 초기에는 이 사건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측이 사실상의 진상규명 요청을 해오자 3월쯤부터 김양 국가보훈처장(장관급)으로 하여금 롤리스 특보 및 그 주변 인사의 입장을 청취하도록 하는, 일종의 ‘의사소통 창구’ 역할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손자인 김 처장은 중국 상하이 총영사를 역임하는 등 외교관 경력이 있는데다 롤리스 특보와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한다.
김양 처장은 “지난 6월 초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이 주한미군사령관 이·취임식 참석차 방한했을 때 게이츠 장관을 수행한 롤리스 특보와 ‘미국 스파이 사건’을 논의했다. 메신저 역은 아니고 우리 정부 관료로서 주로 그쪽 입장을 청취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김양 처장과의 일문일답이다. 김 처장은 롤리스 특보 등과의 접촉은 비공식 차원이었으므로 처음에는 이를 공개하는 데 있어 방어적 태도를 보였지만, 기자가 사전에 정보를 알고 물어오자 하는 수 없이 질문에 대답하는 듯했다.
▼ 롤리스 특보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사태 및 미국 스파이 사건을 논의한 것으로 아는데요.
“그렇게 질문하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미국 스파이 사건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까.”
▼ 그 두 문제를 각각 논의했나요.
“네, 네. 스파이 건은 당사자인 그 분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듣는 차원에서. 쇠고기 건은 그때 한참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을 때여서 화제가 된 거고요.”
▼ 처장께선 보훈처에 계시고 롤리스 특보는 미국 국방부에 소속되어 있는데 두 분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아, 내가 롤리스 특보와 안 지가 한두 해도 아니고, 20여 년 전부터 잘 알고 지냈어요. 우리 두 사람이 기업에 있을 때부터. 그 쪽으로부터 미국 스파이 사건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받기도 했고요.”
▼ 처장께서 미국 스파이 사건의 한국 정부 측 메신저 역이라는 얘기도.
“아, 기사 어떻게 쓰려고 하나요. 옛날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불만 사항 하소연하면 들어드리고, 아이디어 물으면 답 드리고, 조언하는 정도죠. 메신저는 아니고요.”
▼ 롤리스 특보는 미국 스파이 사건의 미국 측 주동자로 몰렸었죠.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처장께 무엇이라고 말하던가요.
“짧게 말하더군요. ‘이 사건이 해결 안 되고 있다. 펜딩(pending) 되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 어떤 뜻으로 이해했나요.
“그는 원래 자기 입장에서 얘기를 잘 안 꺼내요. 우리 정부를 다그치고 그런 건 전혀 없어요. 그러나 완곡한 표현 속에 불만감이 녹아있다고 느껴졌어요.”
“美 정부 억울해할 만하다”
미국 측으로서는 한국 정부가 반미좌파 성향의 노무현 정권에서 친미보수 성향의 이명박 정권으로 교체된 이상 ‘스파이 혐의로부터 미국 정부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는’ 여러 가시적인 조치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는 그런 기대에 걸맞은 어떠한 움직임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 국정에 바쁘실 텐데 롤리스 특보 측의 주장을 일방의 주장으로 보고 안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서로 안 지도 오래됐는데 모른 체하기도 그렇고. 신문, 인터넷에 난 거 관심 있게 봐 왔고요.”
▼ 롤리스 특보는 자신이 지금도 누명을 쓰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가 보죠.
“당연하지 않겠어요. 사건 발생 때와 상황이 달라진 게 별로 없잖아요. 누명 아닌 누명을 벗기를 원하죠. 자료를 검토해 보니까 일부 언론에서는 미국 스파이단의 책임자로 묘사되게끔 롤리스 특보의 사진을 크게 실어놓았고, 그 옆에는 스파이단의 배후로 보이도록 부시 미국 대통령 사진도 실어놓았대요. 정말 이런 사건에다 국가원수를 연결해 놓는 건 외교적으로 안 맞죠. 설령 정확한 물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건의 백그라운드인 양 그렇게 처리하는 건. 외교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될 만한 사안인데요.”
▼ 이 사건과 관련해 롤리스 특보 등을 접촉해온 한국 정부 관료로서, 처장께선 롤리스 특보는 백성학 회장이나 배영준 전 사장을 활용하여 한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교사했다고 판단하나요. 아니면, 그 문제는 조사를 좀 더 해봐야 알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보는 건가요.
“아뇨, 절대로. 롤리스 특보는 결백하다고 봅니다. 솔직히 스파이 활동의 결과물이라면서 제시된 국내외 정세 문건 말인데요, 내가 좀 검토해보니 그 정도 내용이면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알 만한 수준이더군요. 국내외 현안에 대한 논평이나 의견을 담은 글이더군요. 시사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끼리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일상대화 정도로 보였어요. 지난 정권 때 이런 내용을 갖고 국회와 언론에서 ‘스파이 사건’이라고 엄청나게 몰아붙였잖아요. 그런데 스파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게 아니죠. 스파이라고 했을 때는 특별한 뉘앙스를 줍니다. 산업스파이처럼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그런 기밀을 빼냈다든지 하는. 적대국도 아니고 혈맹국, 동맹국에다 그렇게 남용하는 건 말이 안 되죠.”
▼ 이 문제가 한미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보나요.
“거꾸로 말해 한미관계에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네이밍(naming)을 당하는 입장인 미국 정부로선 굉장히 억울해할 만하다고 봅니다. 자기를 스파이 범죄자로 몰아붙이는 상대방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한국 정치인의 발언이나 주요 언론 보도 대부분을 미국에서도 번역해서 보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냐’는 말 나왔겠죠.”
▼ 결국 쟁점의 핵심은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물증이 있느냐는 건데요.
“없다는 거죠. 전(前) 정권 때 정확한 에비던스(evidence·물증)도 없이 동맹국에 스파이 누명을 씌운 건 아닌가 합니다. D▼ 47인지, 48인지 간에 그건 이름 붙이기 나름이고 중요한 건 문건의 출처가 분명하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또 스파이 사건이 되려면 적어도 국가기밀문서가 어떤 외국대사관 사무실을 거쳤다든지 하는 개괄적인 정보 유통 경로라도 입증돼야 해요. 이번 사건은 그런 게 안 보이는데 스파이나 매국노 같은 단어를 쓴 것 같아요.”
김 처장은 “전(前) 정권이 미국과의 관계를 이런 방식으로 몰고 갔는데 새 정권은 미국과 잘해보려고 한다. 그러려면 미국 스파이 사건과 같은 문제는 깔끔하게 정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정부 출범 후 한꺼번에 국내 문제가 나와 스파이 사건까지 처리하지 못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김 처장은 또 “현 정권은 스파이 사건이 무리하게 사건화됐다는 점에 대해 동의하고, 법 제도의 틀에서 문제를 매듭짓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차장검사, 영역본 못들어 봤다
▼ 검찰이 관련자들을 기소해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인데.
“재규명이 필요하다면 어떤 방식이 효과적인지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국회 위증에 대한 검찰 기소로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요. 법정으로 넘어간 사안이므로 행정부가 나서기보다는 일단 판결에 의해 사건 성격에 대해 매듭이 지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한미관계 관련 부분은) 법원 판결을 통해 완벽하게 손 털고 나올 수 있으면 좋은 것이고.”
한편, 검찰이 ‘미국 스파이활동의 핵심적 정황’으로 지적한 ‘국내정세분석문건(D▼ 47)의 영어번역본’에 대해 최근 논란이 일고 있다. 검찰은 이 문건을 2007년 1월12일 배영준 전 사장의 사무실에서 압수해 재판 증거물로 제출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배 전 사장과 그의 측근인 황장수 사장은 지난 6월2일 중앙일간지에 게재한 광고문에서 “우리는 D▼ 47 영어번역본을 작성한 바 없다. 이 문건은 미국 스파이 사건과 관련된 주요 증거가 조작됐음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물이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검찰이 이 문건을 자신들의 사무실에서 압수한 사실을 공개리에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배영준·황장수씨가 6월2일 일간지에 게재한 광고문.
“신문광고, 직접 공격 아니다”
이 검찰 관계자가 설명을 하기 전 ‘신동아’는 2006년 1~2월 당시 미국 스파이 사건 수사를 지휘한 차장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D▼ 47 영역본에 대해 질의했었다. 당시 차장검사는 “D▼ 47 영역본이 배영준씨 사무실에서 압수됐다는 사실을 수사팀으로부터 보고받은 적 있나”라는 질문에 “기억이 없다”고 했다. “미국 스파이 사건 수사를 지휘하던 중 D▼ 47 영역본의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라는 질문에도 “없다”고 했다. 그는 현재 검찰에서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검사 출신 한 변호사(39)는 “D▼ 47 영역본과 같은 핵심 증거물이 1월17일 압수됐고 그때부터 3월 초순까지 배영준씨와 사무실 직원 등 사건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았는데 검찰은 이들에게 D▼ 47 영역본을 한 번도 추궁하지 않다가 배영준의 마지막 소환조사 때 그에게만 한 차례 짧게 묻고 수사를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이 문서는 D▼ 47 문서를 미국 인사에게 보냈거나 보내려고 하였는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자료다. 따라서 이 문서는 다른 정황증거들을 광범위하게 수사한 다음에 수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배영준씨에게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인 수사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막상 배영준씨에게 이 문건을 제시하며 문건이 발견된 경위를 추궁했으나 배영준씨는 진술을 거부했다. 따라서 추가조사가 의미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D▼ 47 영역본은 문서 좌측 상단에 D▼ 47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눈에 잘 띄고 피의자에게 불리한 핵심 증거물인데 처음 압수수색 물품을 정리할 때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검찰 관계자는 “영문 문서를 포함해 압수물의 분량이 방대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배영준씨 등이 신문광고를 통해 검찰이 배영준씨의 사무실에서 이 문건을 압수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여 검찰의 명예가 훼손되었는데, 이 광고 내용이 허위라면 왜 검찰이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 처벌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신문 광고의 내용은 직접적으로 검찰 또는 수사팀을 공격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배영준씨가 이 문건을 보관하지 않았다고 증언한 점에 대해 위증혐의로 고소장이 접수되어 현재 수사 중”이라고 했다.
“그 고소 사건을 검찰이 직접 수사하지 않고 경찰이 수사하도록 했고 경찰은 수개월째 배영준씨를 조사하지 않고 있다”는 질문에 대해 이 관계자는 “수사 가치에 대한 판단과 업무 부담 등에 따른 것으로 문제될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허위증거 상상도 할 수 없어”
이어 이 관계자는 “검찰이 작성한 배영준씨 사무실 압수목록의 239번 D▼ 47 영문번역본 바로 위 번호인 238번이 누락되어 있다”는 질문에는 “단순 오기(誤記)”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검찰이 허위증거를 작출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건의 당사자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