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홍성욱의 과학에세이

‘잡종형’ 과학자의 사회현실 진단

  • 이상욱 한양대 교수·철학 dappled@hanyang.ac.kr

    입력2008-08-31 0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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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욱의 과학에세이

    ‘홍성욱의 과학에세이’ : 홍성욱 지음, 동아시아, 304쪽, 1만3800원

    일찍이 ‘잡종적 지식인’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서울대 홍성욱 교수가 자신의 ‘잡종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동시에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책을 내놓았다. ‘잡종(hybrid)’이라는 개념은 최근 유행하는 통섭(統攝, consilience)보다 좀 더 다양한 지식분야 사이의 상호작용에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게다가 윌슨의 통섭이 강조하는 학문 사이의 위계 질서나 환원주의를 전제하지 않기에, 다양한 분과학문과 지적 관심들 사이의 합종연횡을 강조하면서 훨씬 ‘민주적’인 방식의 학문적 융·복합을 지향한다.

    홍 교수는 벌써 10여 년 가까이 문과와 이과를 구별하는 폐해를 지적하면서 특정 학문의 구속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학문의 소통과 상호이해를 추구하는 잡종적 태도가 복잡한 현대사회에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지나치게 세분화된 학문 연구의 폐해를 지적한 논자는 꽤 있다. 그러나 홍 교수의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그가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학문 대통합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지 않고, 구체적인 과학기술 역사의 사례연구를 통해 ‘잡종적’ 접근이 개별 학문의 발전에도 결정적 구실을 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잡종적’ 태도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학제적 연구를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이나 MIT에서 레이더를 만들어낸 래드랩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주제에서 돌파구를 찾는 데도 큰 도움이 됐음을 지적한 것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사회적 이유 때문에 ‘순종성’에 집착하는 우리의 학문 풍토를 고려할 때 홍 교수의 이러한 노력은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책은 잡종적 지식인으로서 그의 지적 편력을 다양한 주제에 걸쳐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과학과 철학이 만났을 때

    딱딱한 전문학술지에 실은 글이 아니라 주로 대중적인 매체에 실었던 비교적 짧은 길이의 글을 모아서 쉽게 읽히도록 엮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제1장 ‘현대사회와 과학기술’에서 홍 교수는 일단 독자의 ‘상식’이 편향되어 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적한다. 그는 우선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이 얼마나 과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과학을 ‘사랑’했는지 강조하고, 과학과 철학이 만났을 때 두 학문 각각의 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를 소개한다.



    또 과학자의 연구가 시대 흐름과 대중의 지지에 얼마나 의존하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 얼마나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지를 초전도가속기와 같은 생생한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과학과 미술의 관계를 살피거나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와 근대과학의 영웅 뉴턴을 비교한 글도 흥미롭다. 기존의 과학과 사회,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일반인이 갖고 있는 상식을 깨뜨리는 신선한 글들이다.

    과학과 창의성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연구를 여럿 담은 제2장을 지나면 ‘상식 깨기’를 넘어서는, 홍성욱 교수의 생각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제3장 “누구를 위한 과학기술인가?”에는 최근 논란이 된 광우병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관련 논쟁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포함해서 논의의 진중함이 한 단계 올라간 글들이 담겨 있다. 특히 홍 교수는 황우석 연구팀의 논문조작 사건이 터지기 전인 2004년 5월 이미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된 윤리적 고민의 필요성에 대해 글을 썼고, 황우석 교수에 대한 찬반 여론이 비등하던 2005년 12월9일에는 철저한 검증을 촉구하는 ‘용감한’ 글을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의 종횡무진하는 사유를 발견할 수 있는 제4장에는 ‘문화, 사회, 역사에 대한 단상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과학소설 이야기, 과학영화 이야기, 동도서기(東道西器)론에 대한 비판, 국민배심원 제도에 대한 재미있는 분석 등이 맛깔나게 이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개인문집처럼 여러 주제에 대한 글들을 무작정 모아놓은 것은 아니다. 다양한 주제의 글을 관통하는 주제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과학이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편집도 깔끔하고, 내용상 중복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아서 여기저기 다른 시기에 쓰인 글을 편집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갖는 다양한 얼굴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적극 추천할 만한 책이다.

    과학기술 위험사회

    특히 이 책에서 두드러진 테마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위험(risk)이다. 우리에게 위험 개념 자체는 낯설지 않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독일의 사회학자 율리히 벡은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는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자원의 관리와 분배’만이 아니라 ‘위험의 관리와 분배’라는 점을 역설했다. 구소련에서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여파가 인접지역만이 아니라, 방사능 분진이 기류를 타고 실려가면서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처럼 현대사회는 위험을 국소화하거나 통제하는 일이 쉽지 않다.

    게다가 위험을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는 거대한 규모의 사회·산업 시스템은 그 복잡도가 인간의 관리 능력 범위에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일상적 사고(normal accident)’다. 즉, 아무리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하고 사고 발생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도 중간 규모 이하의 사고는 복잡한 거대산업 시스템에서 항상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체르노빌 사고처럼 파국적인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파국적 사고의 확률은 매우 낮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홍 교수는 과학기술 위험사회의 위험관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을 강조한다. 즉, 위험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위험에 붙여진 확률 숫자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확률과 연관된 사건의 심리적 파급효과, 사건의 위험이 알려지거나 관리되는 방식 등에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은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 특별히 끔찍하거나(비행기 사고로 죽을 위험), 자발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위험(수혈을 통해 에이즈를 옮겨받을 위험)을 사고 상황이 일상적이거나(교통사고로 죽을 위험), 충분한 정보에 근거하고 자발적으로 동의한 상황에 대한 위험(어렵고 위험한 수술에 동의하는 위험)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우리 정부는 과학기술 사회의 위기관리 측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낮은 수치의 확률만을 강조하는 지극히 초보적인 오류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홍 교수는 위험관리에서 충분한 정보를 근거로 한 사회적 공감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시민사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미래의 기술개발이 공공복지에 크게 기여하고 파국적 효과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기술영향평가나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과학기술 연구에 대해 시민의 의견을 묻는 합의회의 등 시민참여 제도를 소개하고 있다.

    좀 더 차분한 논의 필요

    그러나 필자는 홍 교수의 결론에 동의하면서도 그가 논의를 조금 더 차근차근 진행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왜냐하면 위험 자체가 아니라 위험에 대한 대중의 ‘무지한(?)’ 공포를 감안해서 정책 대응을 하는 것은 무지몽매한 대중에게 이끌려가는 비과학적인 대응이라고 주장할 사람들도 우리 사회에는 꽤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홍 교수도 책의 다른 곳에서 비판하고 있는 과학주의의 문제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확률이 매우 낮은 위험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위험에 부여된 확률은 미래의 연구에 의해 변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광우병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면 음식물을 통해 전염될 확률은 높아질 수도, 낮아질 수도 있다. 전문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아는 정보를 근거’로 할 때 이러저러한 확률 값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정책은 과학적으로 얻어진 확률 값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비록 낮은 확률이라도 연관된 위험이 가져올 파국적 효과가 너무 끔찍하다면 더 신중한 접근을 선택할 충분한 정치적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구체화된 것이 파국적 위기관리 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방원리(Precautionary Principle)다. 그러므로 대중의 위험 인식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은 우민(愚民)정치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사려 깊게 대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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