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에서 서양의학을 배워 온 이는 지석영(池錫永·1855~1935)이고, 최초의 미국 의사는 1892년 조지워싱턴 의대를 졸업한 서재필(1864~1951)이다. 두 번째 의사는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대를 졸업한 김점동(미국식 이름 박에스터·1879~1910)으로 그는 최초의 여의사이기도 하다. 세 번째가 1907년 루이빌 의대를 나온 오긍선(吳兢善·1878~1963)인데 그는 조선인 최초의 피부과 의사이며 최초의 세브란스의전 교장이었다. 근대 의학의 선구자인 지석영과, 조선 의학계의 대부로 불린 오긍선이 망우리공원에 함께 묻혀 있다.
망우리공원 지석영 선생 묘(왼쪽).
수년 전까지만 해도 비디오 영화를 보면 항상 이런 문구가 앞부분에 나왔다. 불법비디오의 패악을 드러내기 위한 선전문구이지만, 여기서 천연두(마마)가 조선시대에 얼마나 무서운 병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마마는 조선시대 치사율이 30%를 넘나드는 불치병이었으며 용케 살아남은 사람도 그 자국이 얼굴에 남아 평생을 곰보로 살아야 했다. 바로 그 천연두를 사라지게 한 주인공이 송촌(松村) 지석영이다. 지금도 왼팔에 불주사 흔적이 없는 국민이 없으니 송촌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밀접하고 광범위한 은혜를 베푼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동락천 방향으로 1km 정도 걸어가면 오른편에 지석영 묘 입구가 보인다. 올라가는 길이 좀 애매한데, 잘 둘러보면 나무에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내판을 지침 삼아 오른쪽 2시 방향으로 올라가면 너른 터에 묘 두 기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생전의 지석영 선생.
지석영 묘 비의 앞뒤.
곰보의 은인
1931년 1월25일 매일신보는 “조선의 제너, 송촌 지석영선생, 곰보를 퇴치하던 고심의 자취. 신미(辛未)의 광명을 찾아”라는 제목으로 지석영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자료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읽기 어려운 부분은 일부 생략하며 현대문으로 고쳐 옮기면 이렇다.
“음력으로 섣달 스무닷새 날이었는데 좋은 재주를 배우고 또 약간의 약까지 얻기는 하였지만 도무지 그것을 시험할 데가 없구려. 비록 장가는 들어서 아내는 있으나 나에게 소생이 없으니 시험할 수 없고, 남의 자식에게 시험을 하자니 아직 우두(牛痘)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 부모가 허락할 리가 없고 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일 즈음에 마침 나이 어린 처남 아이가 생각납디다 그려.
그래서 한번 시험을 해보고자 하였더니 우두라는 것은 외국 사람이 조선 사람을 죽이려고 만든 것인데 이 아들에게 놓는다니 될 말이냐고 장인이 펄펄 뛰며 나를 미친 사람으로 돌리는구려. 그러니 어디 해볼 수가 있소? 그러다가 내가 한 계교를 생각하여 사위를 믿지 않는 처갓집에는 있을 수가 없다고 그대로 상경을 하려고 하였더니 나의 정성에 감동이 되었음인지 그때서야 장인 되는 사람이 그러면 어디해보라고 어린 아들을내밉디다그려.
그래서 물실호기(勿失好機)라고 즉시 우두를 하였더니 사나흘 만에 팔뚝에 완연한 우두자국이 나지 않겠소? 그 나흘 동안 내가 가슴을 졸인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거니와 팔뚝에 똑똑하게 우두자국이 나타나던 그때 나의 기쁨이라고는 무엇에 비할 수가 없는 것이었소. 나의 평생으로만 보더라도 과거에 급제한 때와 유배에서 돌아온 때와 같은 크나큰 기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까 말한 그때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소. 그때 나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던가?…”
우두법은 이미 오래전에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1749~1823)가 소젖 짜는 여인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 것을 보고 천연두에 걸린 소에서 고름을 빼내서 1796년 접종에 성공한 것이 시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지석영이 처남에게 접종을 한 1879년 12월6일을 효시로 본다. 총독부는 1928년 12월6일 종두 50주년 기념식에서 지석영을 표창했고, 그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지석영을 대서특필했다. 비록 지석영이 일본으로부터 우두법을 도입하고, 일제가 이를 선전의 도구로 이용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석영의 업적이 평가절하될 순 없다.
지석영은 1855년 서울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4남으로 출생해 한의사 박영선에게 한문과 의학을 배웠다. 중인 출신 한의사의 가르침이 그의 사상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위창 오세창도 중인 역관 집안이었듯, 조선말의 중인은 개화된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계층이었기에 당시 부패한 양반 정치에 대한 개혁 의지가 강했다. 지석영은 스승 박영선이 일본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입수한 ‘종두귀감’을 접하고 서양의학에 눈을 떴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연두로 인해 많은 어린이가 생명을 잃었는데 마땅한 치료책이 없어 그저 무당굿으로 치료를 대신할 뿐이었다. 지석영은 종두법을 배우려고 해도 가르침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마침 부산에 일본 해군 소속의 서양식 병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에서 걸어서 20여 일 만인 1879년 10월에 부산에 도착했다. 병원을 찾아가 필담으로 뜻을 전하자 일본군의(軍醫)는 지석영의 열의에 감동해 종두법을 가르쳐줬다. 지석영은 이때 서양의학의 필요성을 절감함과 동시에, 배움의 대가로 조일(朝日)사전 편찬 작업을 도와주면서 국문법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됐다. 2개월 후 병원을 떠나면서 3병의 두묘(痘苗)와 종묘침 2개, 접종기구, 서양의학 서적 몇 권을 받고 귀경길에 충주군 덕산면의 처가에 들러 접종을 실시해 성공한 것이었다.
종두법의 위기
지석영 선생의 사망 이틀 후 동아일보. (1935년 2월3일자)
‘“…흉악한 지석영은 우두를 놓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구실로 도당을 유인해 모았으니 또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형 지운영은 외국에서 사진 기구를 사 온다고 핑계대기도 하고, 김옥균의 무리를 생포해 오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바다 건너에 출몰하며 도리어 역적의 부류와 내통해서 은근히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일삼았습니다. 신기선, 지석영, 지운영 등을 다 같이 의금부로 하여금 나국(拿鞠 ·잡아다 심문함)하여 진상을 밝혀내도록 하여 속히 국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고종이 대답하길, “정말로 여론이 그러한가? 끝에 첨부한 문제에 대해서는 유념하겠다”고 하였다.’(1887년. 왕조실록 고종 24년 4월26일)
종두법은 그가 펼친 개화운동중 대표적인 것이지만, 그 외에도 서양의학의 도입과 이용후생에 유익한 서적 및 기계의 도입 등을 나라에 상소했고, 농서 ‘중맥설(重麥說)’, 의학서 ‘신학신설(新學新說)’ 등을 저술했다.
또 1883년 그는 자신의 꿈을 펼칠 날개를 얻기 위해 과거에 급제, 관직에 나아갔다. 수구파에 의해 유배를 가는 고난도 있었지만 1894년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지석영은 형조참의, 승지, 한성부윤, 동래부사 등에 중용돼 개화정책에 참여했고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접종을 받도록 하는 종두법을 1895년에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관립 의학교장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수구파 정권이 들어서자 개화파 지석영은 한직으로 물러나고 곧 다시 유배를 가게 됐다. 하지만 이때는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나서서 나라의 처사를 성토하는 운동을 벌여 정부는 지석영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7월15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 정부에 서양의학을 교육하는 학교 설립을 요구했고 지석영도 11월에 상소를 올리자,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1899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의학교가 설립됐고 지석영이 그 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됐다. 관립 의학교는 후에 대한의원, 경성의전을 거쳐 지금의 서울의대로 바뀌었다.
한편 지석영은 상소를 올려 “세종대왕 창제 국문이 표시하지 못하는 음이 없고 매우 배우기 쉬운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그저 민간에 방임한 결과 형식이 정립되지 못했으니 국문을 새로 개정해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했다. 정부는 지석영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1905년 7월19일 ‘신정국문(新訂國文)’을 공표했다.
지석영은 이와 같이 많은 업적을 쌓았으나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대한의원(원장은 일본인) 학감을 사임하고, 두문불출 독서와 저술로 세월을 보내다 1914년에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과 의원을 열어 봉사를 시작했고 1915년에는 전선의생회(全鮮醫生會) 회장을 지냈으며 1935년 2월1일 생을 마쳤다.
그는 출세의 보증수표인 과거 급제자이며 능력 있는 의사였기에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손자 지홍창의 증언을 들어보자.
“할아버지는 평생 돈을 몰랐습니다. 생기는 돈이 있으면 몽땅 우두 시술소 등을 차려 대중 진료에 쏟아 넣었지요. 유산 한 푼 안 남겼고….”(한국의 명가, 김덕형, 일지사,1976).
묘 입구에 서 있는 지석영의 연보비에는 지석영의 삶이 잘 요약돼 있다.
‘송촌 지석영 선생. 의학자, 국어학자. 우두 보급의 선구자이며 의학교육자, 한글 전용을 제창한 사회, 경제, 문화 각 영역에 걸쳐 선각자.’
오긍선 선생의 생전 모습.
‘우리 가족에게 먼저 실험해 보아야 안심하고 쓸 수 있지 않겠느냐.’
조선 의학계의 대부
지석영 묘 입구를 지나 500여 m 올라가면 동락천 약수터가 나온다. 그 약수터에서 10m 쯤 더 가면 해관(海觀) 오긍선의 연보비가 서 있다.
‘해관 오긍선 선생. 교육자, 의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 한국인 교장을 역임하고 현대의학 도입과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일생동안 우리나라 의학발전과 사회사업에 헌신하시다.’
해관(海觀)은 인류를 생각하면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의미라 한다.
뒷면에는 ‘1878 충남 공주군 사공면 운암리에서 출생. 1907 미국 루이빌 의과대학 졸업(의학박사 학위). 1917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한국 최초 피부과 창설. 1919 경성보육원 및 양로원을 설립하여 사회사업 시작. 1934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제2대 교장에 취임. 미국 센추럴 대학에서 명예이학박사. 루이빌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취득. 1949 사회사업 공로표창. 의학교육 공로상. 공익표창 등을 받음. 1963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추증’
망우리공원 해주오씨 묘역에 있는 오긍선의 묘. 무덤의 모양이 특이하다.
해관은 공주 명문 양반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가 폐지되자 1896년 상경해 내부(內部·현 행정안전부) 주사(主事)로 관직에 들어갔다. 그러나 개화에 눈을 뜬 그는 몇 달 후 공직을 사임하고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2년 선배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에서 일하다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정부가 탄압에 나서자 선교사 집에 피신한 것이 계기가 돼 배재학교를 졸업한 후 선교사의 주선으로 1902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가 의사 자격을 얻고 남장로교 선교의사 자격으로 1909년 귀국하자, 순종 황제는 친히 치하하며 황실의 전의(典醫·정3품. 월급 150원)를 제안했으나 사양하고 월급 50원의 군산 야소교(예수교)병원 의사가 됐다. 그 후 목포야소교병원장을 거쳐, 1912년 세브란스의전 교수 및 부속병원 의사로 임용됐으며, 1934년 에비슨에 이어 조선인 최초로 세브란스의전 2대 교장이 됐다.
광복 후에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그에게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장관을 권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부장관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공직은 단 한 번, 부산 피란 시절에 구황실재산관리총국장직을 잠시 맡았다가 이승만과의 불화로 그만둔 바 있다. 그가 잠시나마 공직을 맡은 이유는 비록 주사였지만 한때 황실의 은혜를 입은 인연이 있었고, 구황실에 대한 정부의 처사가 너무 박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오로지 보육원을 비롯한 사회사업 관련 일에만 종사했다.
고아의 아버지
오긍선 선생의 소파상 수상을 알리는 1962년 동아일보.
외손녀 최숙경(이화여대 교수)은 “팔순이 넘었을 때도 일의 분주함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고 피곤하다는 말 한번 없이 묵묵히 ‘타이핑’하던 모습이 두고두고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회상했다(‘해관 오긍선’, 1977).
필자가 2007년 5월27일에 묘를 찾아갔을 때는 비석 앞에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리본에는 ‘창립 89주년에. 할아버지께 감사’ ‘좋은집 가족 일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연보비 바로 오른쪽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입구 기둥에 해주오씨영역(海州吳氏塋域)이라고 쓰여 있다. 그 기둥 바로 왼쪽에 갓머리를 쓴 비석이 보이는데 부친 오인묵(1850~1933)의 적선비다. 앞면에 ‘감찰오인묵적선비(監察吳仁默積善碑)’라고 새겨져 있다. 적선비의 유래에 대해 오긍선의 여동생 오현관은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님은 대원군 시절에 감찰 벼슬을 하셨는데 전라도에 3년 흉년이 들었을 때, 공주에서 금강으로 쌀을 싣고 내려가 기민(飢民)을 먹이신 분으로 생전에 군산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고자 하자 오라버니가 생전에 비석을 세움은 옳지 못하다 하여 논바닥에 묻었다가 돌아가신 후 망우리 가족묘지에 갖다 세우셨다.”(‘해관 오긍선’)
인술 펼친 3대 의학자 집안
적선비 옆면의 한문 내용에 의하면 소작인들이 비를 세운 것은 1926년(병인년) 봄이고, 매장했다가 오긍선이 이곳에 옮겨 세운 것은 소화 14년(1939년)이다.
다시 계단을 올라 묘역에 들어서면 특이한 모양의 무덤이 보인다. 망우리공원에서 이와 같은 개성적인 묘는 보기 힘들다. 원래는 통상의 봉분이었으나 후에 자손이 새로 만든 것이다. 언론인 유광렬은 해관이 운명할 때 “여관에 있다가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 때문일까. 그의 무덤은 생전에 살던 한옥의 지붕을 연상시킨다. 서양식이되 전통을 살린 모양이다. 미국 체험의 개화사상과 전통의 유교 정신이 융합된 해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해관은 매일 조석으로 부모에게 문안을 드리는 것은 물론, 부모 방의 불도 손수 땔 정도로 효자였고, 14세 때 결혼한 다섯 살 연상의 부인과도 해로했다.
맨 오른쪽이 오긍선 부부의 묘이고 왼쪽은 부모의 묘다. 부모 묘 왼쪽 밑에는 오긍선과 사촌간인 듯한 오창선의 묘가 있고, 밑에 있는 묘는 오긍선의 장남 오한영(1898~1952) 부부의 묘다. 오한영은 세브란스의전(1923년 졸)과 미국 에모리대 의학 박사, 교토대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총독부가 규정한 교수 자격 여건 때문이었다. 이후 세브란스 교수와 병원장을 지냈고, 6·25전쟁 당시에는 국립경찰병원장을 역임했다. 이승만 정권의 제2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할 당시 과로로 쓰러져 55세의 나이로 부친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다. 비석 가득히 적힌 글은 친우 주요한이 짓고 원곡 김기승이 썼다.
그리고 가족묘역에 함께 묻히지 못했지만 오한영의 장남 오중근(1923~1987)은 국립마산결핵병원장을 지냈고, 차남 오장근(1927~ )은 국립철도병원장, 국립서울병원장을 거쳐 1981년부터 해관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두 분 다 연세의대 의학박사로, 특기할 것은 오긍선의 직계 자손들은 의사로서 공직에 있었을 뿐 은퇴 후에는 개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관은 “의료가 축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 되며 개업의가 한 사람 늘면 그만큼 조선에 가난한 사람이 더 생긴다”고 했고, 한때 장남 오한영이 개업의 뜻을 비치자, “서양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청년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항차 우리나라 청년교육을 외면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개업을 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이라며 크게 책망한 일도 있다 한다. 이러한 조부의 가르침에 따라 손자 중근과 장근도 공직을 은퇴한 후 개업을 하지 않았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이영준의 묘비.
오긍선의 후계자 이영준
당시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제는 미국계 학교를 적산(敵産)으로 간주했고 미국인 교수는 모두 추방했다. 미국으로부터 지원이 끊기고, 총독부의 압박에 학교의 존립이 위태로울 때, 이영준은 능력을 발휘해 여러 민족재산가의 기부를 이끌어내고, 총독부와도 교묘한 교섭을 통해 광복 때까지 학교를 지켜낸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한 정치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영준은 광복과 동시에 교장을 물러나 정계로 진출했다. 국회의원(4선), 국회부의장, 동아일보 고문 등을 역임하고 1968년 72세를 일기로 이곳 망우리공원에 묻혔다. 비문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지었고 서예가 정필선이 썼다. 세브란스의 역사를 말하는 많은 사진에서 이영준이 항상 오긍선의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이영준은 고인이 되어서도 오긍선 옆에 잠들었다.
한편, 오긍선과 이영준에 대해 세브란스 교장 시절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특히, 전문성이 부족한 인터넷 위키백과는 오긍선을 적극적 친일파로 묘사한 글과 함께 “오긍선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 최초의 양의사로서 서양의학의 선구자이며 기독교적 양심을 지닌 사회사업가, 또는 기독교와 의술을 출세에 이용한 기회주의적 친일인사라는 이중적인 판단이 상존하고 있다”고 썼다. 이 사전의 집필을 누가 했는지 몰라도, 저술자가 해관의 삶을 개관한 글을 단 한 번이라도 읽어보았다면 친일파 서술에 상투적으로 붙이는 ‘…을 출세에 이용한 기회주의’라는 표현은 할 수 없었을 터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큰 뉴스요, 주요 고등보통학교 졸업생 명단도 해마다 신문에 실리던 시절, 우리에게 청년교육은 총성 없는 독립운동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이룬 원동력이 되었음은 아무도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해관은 개업보다는 교육에 큰 의미를 두었다. 정치적으로 얽매이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개업의가 됐다면 명예도 지키고 큰돈을 모았을 것이다. 당시 교장을 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윤치호는 1940년 연희전문 교장직을 수락하면서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교장직을 수락해서 속을 끓이게 될 게 뻔하다. 만족시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군당국, 경찰당국, 도청 및 총독부 당국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연희전문 내부에도 달래기가 쉽지 않은 파벌들이 도사리고 있다.”(1940. 12.9 윤치호 일기, 김상태, 역사비평사, 2001)
또 그렇게 어려운 교장직에 있는 오긍선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이 학교는 매년 20만원 정도 적자를 냈다. 하지만 그는 학교와 병원의 책임을 맡기가 무섭게 수지를 맞추는 데 성공했다. 그에게 결점이 있다면 교수로 있는 선교사들을 너무 고압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외국인 그룹 전체가 그의 적이 되고 말았다.” (1939년 2월28일 윤치호 일기)
조선인을 위한 일제 협력
당시 통계를 살펴보면 오긍선과 이영준이 일제에 협력한 배경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성의전 등의 관립 학교에는 조선 학생보다 일본 학생이 더 많았다. 윤치호는 1933년 6월30일의 일기에서 “사범학교는 일본인 80%에 조선인 20%였고, 경성의전은 조선인 20%였던 것이 8%가 만주국 학생에게 할당되어 12%로 더 낮아졌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유일한 대학인 경성제대 의학부도 비공식적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7:3의 비율로 뽑았다. 이에 반해 세브란스의전은 조선인 학생이 10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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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고급 인재 교육을 철저히 억제하는 정책하에서 세브란스에 대한 총독부의 접수 시도는 계속됐다. 미국의 지원도 끊긴 상태에서, 두 조선인 교장의 일제에 대한 불가피한 협력이 방패가 돼 조선청년에 대한 의학교육이 계속될 수 있었던 공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사료에 나타난 그들의 친일 흔적을 지적하려면 위와 같은 시대 상황의 인식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