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볼펜 화가’ 이일

서양의 액션페인팅에 더한 동양의 기와 힘

  • 정준모 미술비평가,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curatorjj@naver.com

    입력2008-09-02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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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일의 그림은 조용하고 그윽한 한 폭의 수묵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카오스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이는 미국의 역동적인 액션페인팅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동양적인 호흡과 명상을 통해 그것을 순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일 그림의 매력이 있다.
    ‘볼펜 화가’ 이일

    1952년 서울 출생 <BR>홍익대 회화과, 미국 프랫인스티튜트 회화 석사 <BR>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미술관 개인전, 미국뉴욕 퀸스미술관 특별전

    이일(李逸·56)의 작품은 바다처럼 단순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은 넉넉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다의 다양한 얼굴처럼 정말 많은 표정을 담고 있다. 때로는 폭풍우 몰아치는 격정적인 바다였다가 때로는 찬연히 빛나는 태양을 받아내는 거울처럼 조용하고 그윽하다.

    그의 바다는 언제나 새롭고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지만, 듬직하게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일견 검은 또는 푸른 단색화처럼 보이지만 그 색을, 면을 채우는 선(線)들의 짜임을 보면 그 선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른 표정과 사연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다를 만들고, 그 바다에 빠지고, 다시 바다에서 나와 바다를 관조한다. 이렇게 그는 작품과 일체를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접하고 범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면서 화면은 그려지는 동시에 그려지지 않은 면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긴장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의 작품은 음과 양의 대비이자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의 조화다. 동시에 행하는 사람과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행위의 무한함과 무상함을 보여준다.

    선과 여백의 정반합

    그의 회화는 자신과의 싸움, 시간과의 싸움이다. 대결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는 예리한 금속으로 마무리된 볼펜으로 화면을 범한다. 0.5~0.7mm에 지나지 않는 볼펜촉으로 계속해서 그어 넓고 큰 화면을 가득 채운다는 게 보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최근엔 스케일이 더욱 커져서 2×3.3m에 달하는 작품이 대종을 이룬다.



    단순하게 시각적인 면에서 보면 밤새 일 삼아 무수히 선 긋는 행위를 반복한 결과 이외의 어떤 변화도, 의미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화면은 때로는 바다에 이는 포말처럼 빛의 재잘거림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이름 모를 꽃으로 피어오르기도 한다.

    과정에 비해 결과가 간단하고 명료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그 넓은 화면을 단순하게 볼펜 하나에 의지해 수없이 반복되는 선 긋기로 채워 넣는 행위(아니 비워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를 묘사한다면 인고(忍苦)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일의 단순한 형태와 색채의 회화는 드로잉에 가깝다. 아니 드로잉이다. 드로잉이란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는 단순한 밑그림으로, 색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선을 사용하는 그림을 말한다. 완성작을 위한 습작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이일의 드로잉은 드로잉인 동시에 바로 작품이다. 즉 그에게 ‘그린다’는 의미의 드로잉은 곧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 즉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 그린다는 본질적 행동, 그림의 전제인 ‘그리다’라는 동사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볼펜 화가’ 이일

    볼펜으로 선을 그어 그린 그림으로 미국 화단의 주목을 받은 이일.

    무수히 그어대는 선과 선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여백과의 관계는 서로 공존하고 상생하는 정반합의 단계를 거치면서 진화한다. 흰 종이나 하얀 캔버스가 ‘정’이라면 그 위에 가느다란 볼펜으로 그어대는 행위와 그 결과 얻어지는 선들은 ‘반’에 해당한다. 그 ‘정’과 ‘반’의 대립과 조화를 통해 ‘합’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의 회화에 대해 서양 비평가들이나 미술사학자들은 여백을 중시한 한국을 비롯한 동양회화의 전통을 들어 수묵화의 새로운 형태로 해석하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그의 회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

    물론 볼펜으로 그려진 면과 대비를 이루면서 여백이 한층 강조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여백이 없다면 행위의 결과이면서 선의 집적물인 면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여백만 남는다. 그 여백은 부재를 의미하지만 부재 뒤에는 언제나 떠오르는 새로운 존재로 인해 그 여백이 사라진다. 따라서 여백은 쓸쓸함 공허함을 상기시키지만, 한편으로는 그 여백을 메워줄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는 반어법적 의미를 갖는다.

    험난한 뉴욕을 이기다

    그의 회화가 주목을 받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1975년 대학 졸업을 한 해 앞두고 미국행을 결행한다.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가족들을 따라나선 것이다. 그림은 그에게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해주는 근거이자 삶의 동인이 되었다.

    그는 그가 살던 답십리에서 가까운 동대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림을 그릴 운명이었던지 여기서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이승조(화가·1941~1990) 선생을 만난다. 이후 미술실에서 숙식을 하며 작업을 하던 선생을 좇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오직 이승조 선생을 사사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같은 울타리에 있는 동대문상고로 진학했을 만큼 선생과 깊고 질긴 인연을 쌓아갔다.

    홍익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4학년이 되던 해 김장섭, 고영훈, 이상남과 함께 ‘종횡전’이란 그룹을 결성해서 신문회관(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전시를 열었다. 당시 미니멀리즘과 단색 회화가 한국 화단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그 교조적인 시스템으로부터 일탈을 시도했던 그들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면서 화단과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형상이 없이 관념적이고 개념적이던 당시 화풍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구상적 회화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일은 자동차 엔진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계의 부속 또는 배관 같은 것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갈색 톤의 작품을 발표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당시의 교조적인 회화에 반(反)하는 작품이었다. 다른 동료들도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무모한 작업을 선보였다. 이렇게 화단에 얼굴을 내민 그들은 이내 청년문화의 기수로 회자되었고 새로운 앙팡테리블로 등장했다.

    이후 그는 가족들이 있는 미국 LA로 떠났다. 그곳에서 발행되던 중앙일보에 자리를 얻어 만화와 삽화 그리고 광고면을 디자인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자 했다. 하지만 말까지 서툰 낯선 이방인인 그에게 미국은 혹한의 땅 그 자체였다.

    청년 이일은 LA보다는 뉴욕에서 화가로서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서울로 돌아와 한 학기 남은 대학을 마치고 졸업장을 얻어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얻어 뉴욕에 도착한 것이 1977년이었다.

    뉴욕에 도착해 허름한 YMCA호텔에 여장을 푼 그가 처음으로 간 곳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었다. 그에게 메트로폴리탄은 미술사(史)의 보고이자 미술의 향연장이었다. 두어 달을 그렇게 지내다 이미 뉴욕에 자리잡고 있던 화가 김차섭 김명희 부부를 만나게 된다.

    부부는 이일이 뉴욕에 적응하고 자리를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가게에서 일을 도우며 이일은 한국에서부터 관심을 가졌던 판화에 몰두한다. 당시 한국은 판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장비와 재료의 부족으로 새로운 판화, 특히 동판화를 하기는 매우 힘든 형편이었다. 그는 뉴욕에서 판화다운 판화를 해볼 요량으로 프랫인스티튜트 판화과정에 등록했다. 1년 동안 판화를 수학한 그는 다시 같은 대학원에 진학해 회화를 공부, 1982년 졸업했다.

    볼펜으로 날을 세우다

    ‘볼펜 화가’ 이일

    ‘BL-084’, 2006, ballpoint pen on canvas.

    이 기간 그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신발·옷·가발·조명가게 점원으로, 이삿짐센터 포터로, 집수리 인부로 일하는 틈틈이 미술 작업도 병행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함께했던 황인기, 전수천, 설원기 등과 고달픔, 외로움을 나누며 이겨냈다.

    또한 홍익대 동문으로 뉴욕대 대학원에서 판화를 공부하던 이수임을 만나 결혼한다. 오늘까지 그의 지난한 세월을 함께하는 반려이자 동료인 이수임과 퀸스에 신접살림을 차린 그는 이내 브루클린으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

    판화를 공부하던 시절 그는 동판화, 특히 메조틴트나 드라이 포인트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이런 경험이 볼펜을 사용해 그림을 제작하는 방법의 모티프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그는 뷰린을 사용해 무수히 반복되는 선으로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세밀한 대상을 묘사하는 기법을 썼다.

    이렇게 그는 초기부터 선(線)에 몰두했다. 그에게 선은 그림을 결정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점(點)보다는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선을 회화의 실질적이며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인식한 때문이다. 사실 선이 없다면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빛이 없다면 그림이 있을 수 없지만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이 존재하는, 상대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판화는 그에게 많은 모티프를 제공했다. 예를 들면 판화에서는 필요한 이미지를 얻으려면 판에 반대로 새겨야 한다. 이처럼 언제나 상대적인 것, 반대의 것을 통해 서로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현실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개념적이기보다는 실질적이다.

    따라서 그의 회화의 기본은 선이며 그 선에 대한 생각은 여전하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의 표현 방법과 그 선을 통해 일구어낸 면과 면의 대비, 선과 선의 사이와 차이에서 나타나는 선의 표정이 다양해졌을 뿐이다.

    1980년대 초기 작업은 주로 판화였다. 캔버스에 테이핑을 하고 바탕을 도려내어 선만 남긴 후 다시 바탕을 블랙 등으로 칠한 다음, 테이핑한 부분을 떼어냄으로써 화면 가득히 리드미컬한 선이 드러나도록 하거나 또는 그 반대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동양적 액션페인팅

    이런 작업의 와중에 그는 볼펜을 발견한다. 사실 그에게 뉴욕에서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그림을 병행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림은 업보와 같은 것이었다.

    일하는 틈틈이 짬을 내 작업하던 그는 1981년 브루클린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드로잉’ 전에 출품할 작품을 구상하면서 문득 볼펜을 떠올렸다. 남이 사용하지 않는 도구인 볼펜은 그에게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되어주었다. 언제 어디서든지 그토록 열망하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간편함과 이동성, 용의성은 그에게는 행운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볼펜을 사용한 드로잉을 출품하였다. 이런 볼펜과의 인연으로 요즘도 하루에 8~10시간씩 캔버스 또는 벽지보다 크고 긴 종이 앞에서 볼펜을 들고 비지땀을 흘리는 것이다.

    그의 초기 작품은 대개 종이 위의 드로잉이 주종을 이룬다. 당시 작품들은 볼펜을 통해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기보다는 ‘바탕’과 ‘그려진 것’ 사이의 긴장과 대비에 중점을 두고 있다. 면을 벗어나는 유기적이고 예리한 선들은 틀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로 읽히기도 하고, 때로는 지지체인 바탕과 대조를 이루면서 시각적인 긴장관계를 조성해 분출하는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볼펜 화가’ 이일

    2007년 미국 퀸스미술관에서 열린 이일 특별전.

    그는 1997년 미국이민 20년이 넘어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차마 국적을 버리지 못하고 영주권을 신청한다. 대신 작가로서의 초심으로 돌아가 치열하게 살기 위해 다시 한번 날을 세운다. 새로운 작업을 시도한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요즘 우리가 보는 것처럼 스케일이 장대하고 화면에 역동적인 힘과 에너지가 넘쳐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비와 화면의 균질한 흐름에 천착하던 예전의 모습에서 변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동안에도 그의 작품세계는 많은 변화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생활고로 인해 끼를 자제하던 그가 50대 중반에 이르면서 그동안 쌓이고 쌓인 열망과 열정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혼돈을 뚫고 화면을 장악해나가려는 의지가 충만한 작품들은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또한 잠시 선을 긋는 행위를 멈춘 듯한 작품은 정적이지만 한편으로 힘으로 일렁이고 의지로 넘쳐난다. 언제 저렇게 화면에 가득 찰 만큼 선을 계속해서 끈기 있게 그어댔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절로 화면을 끊임없이 스쳐지나갔을 그의 수많은 손의 반복되는 움직임이 떠오른다.

    액션페인팅은 세계미술의 주도권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오직 물질로 그득한 힘의 분출이었지 기(氣)와 끼를 담아내지는 못했다. 힘은 느껴지지만 그 힘의 근거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몸과 손에서 비롯되는 것에 한정되었다. 반면, 이일의 그것은 조용하고 그윽한 한 폭의 수묵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카오스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결국 그의 작업은 미국의 역동적인 액션페인팅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동양적인 호흡과 명상을 통해 그것을 순치시키고 있다.

    싸구려 볼펜 하나로 미국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20대 후반에 미국에 건너가 30여 년의 세월을 바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뉴욕타임스’가 그의 리뷰를 싣고, 서부의 새너제이 미술관 전시에 이어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최근에는 빌첵파운데이션(VILCEK FOUNDATION)에서 전시를 가졌는가 하면 새너제이 미술관과 퀸스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영구 소장되었다.

    만개 또는 대기만성

    가게 점원, 행상 등등 별별 일을 다하면서 삶의 고비를 넘긴 그에게 오늘의 현실은 정말 기대 이상의 것이다. 그는 이제 비로소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이 뉴욕 화단에서 당당하게 자리하고자 하는 무모한 욕심이 아니라 자신에게 구원이자 안식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작업은 1997년 아트프로젝트 인터내셔널(API) 개인전을 계기로 스케일 면에서도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2~3m가 넘는 대작들을 통해 그간 드러내지 못했던 힘과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다. 화면에 짙게 깔린 볼펜자국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조용하고 그윽하게 관객을 몰입의 세계로 이끈다. 빈 구석 하나 없이 치밀하게 화면을 뒤덮은 그의 선은 새로운 물결이자, 시대를 이끄는 동력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탕이 존재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사실과 함께 보는 이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화면을 덮고 있는 그의 의지와 힘이다. 그리고 세심함과 균형감각이다. 열정이 가득한 그의 대형 화폭은 그림이기 전에 노력과 땀의 성과물이며 거기엔 엄숙함이 존재한다.

    그는 2005년부터 캔버스에 드로잉을 시작했다. 너른 들판 같은 흰 캔버스에 미디엄과 화이트를 나이프를 가지고 균일하게 발라 표면을 만든 후 다시 사포로 닦아내어 마치 얼음판처럼 깨끗하게 바탕을 만든다. 그 자체로도 작품이라 할 정도다. 이렇게 만들어진 캔버스에 그의 분신인 볼펜을 들고 화면을 범하기 시작하면서 기(氣)와 힘(力)이 합일을 이룬 화면을 만들어간다.

    ‘볼펜 화가’ 이일
    丁俊模

    1957년 서울 출생

    중앙대 서양화과 졸업, 홍익대 석사 (미술학)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문위원, 국립 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덕수궁 미술관장

    現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중앙대·고려대 강사

    논문 : ‘미술품은 땅인가’ ‘제3의 미학, 새로운 출구’ ‘한국의 모던이즘, 모더니즘’ 등


    최근에는 또 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검푸른색, 즉 인디고 블루(Indigo blue) 빛을 지닌 볼펜을 가지고 작업하면서부터 그의 작품은 묘한 신선함을 던져준다. 맑고 투명한 남태평양의 바다처럼, 심연을 드러내는 검푸른색이 주는 생동감은 그의 새로운 변신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서양의 액션페인팅이라는 방법론에 동양적 사유와 철학의 실천을 더함으로써 회화의 새로운 국면을 시현하고 있다. 그의 무모한 도전과 간단없는 노력이 오늘날 그를 세웠다. 하지만 그의 치열함은 변함이 없다. 초심을 잃지 않고 오늘도 치열하게 볼펜을 꽉 쥔 그의 손은 캔버스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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